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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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지만 매섭고 부드럽지만 또렷하다. 더 단단해진 최은영의 작심과 작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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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새벽에 엄마는 할아버지를 깨웠다. 아빠,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들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냄새가 나. 무슨 냄새가 난단 말이니? 냄새가 나 - P170

할머니들은 측량에 대한 감각이 없다. 할머니들은 무한이다.
열려진 존재다. 사랑이 그렇다. 무한정 퍼고 무한정 무치고 아이에게 설악산만한 고봉밥을 내밀고, 할머니 정말 나, 배가 찢어지겠어! 그런데 요즘은 엄마가 그렇게 음식을 퍼준다. - P172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뒷마루처럼 - P175

아무튼 윤은 시간을 먹고 드러나는 빛, 만질수록 넓게 퍼지는 공평의 빛. 우리의손엔 빛의 입자라도 박혀 있는가. 접촉하면 빛이 난대. 그래서 연인은 계속해서 서로의 얼굴을 쓸게 되는가. 어떤 강아지는 호박보다 반들거리고 어떤 아이들은 보름달보다 이마가 환하고 어떤옹기는 하늘의 별보다 밝게 빛난다. 우리의 눈은 윤기로 반들거린다. - P176

‘아니 씨, 내 인생이 아무리 험해도 여태껏 살면서 엄마 밥 한끼 못 사줘? 어떻게 인생이 이래? 우리 엄마한테도 어쩌다가 밥한끼 못 사주는 인생이 됐어?‘ 약간의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밀려오더라. 그래서 바로 그랬지. 그래 엄마! 오늘 거하게 살게 앞치마 걷고, 가게 문 닫고, 늙은 엄마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차를 몰고 밥 먹으러 갔지. 그런데 가는 길에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더라.
이유 없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더라. - P183

별, 시, 눈, 꽃, 귀, 손, 개, 국, 볼, 종, 빛, 빵.
나는 시 쓰고 동생은 빵을 굽는다. 우리의 직업은 한 글자라서사랑이라네. - P189

갓 구운 빵을 꺼내 슬쩍 쥐어보면아주 뜨거운 사람의 손을 잡은 것 같다. - P193

그렇게 빵과 시는 활기차게 열린 자유다.
눈이 오면 신나게 달리는 강아지처럼.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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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럭저럭 10년 이상이나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면서, 손도 대지 못한 채 헛되이 세월을 보냈다. ‘달리기‘ 라고 한마디로 말해서는 테마가 너무나 막연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 P9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 P19

그래서 미리 일주일에 하루쯤은 ‘쉬는 날‘을 정해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60킬로, 한 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 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있다. - P21

똑같은 경우를 일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소설가라는 직업에 적어도 나의 경우라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지만 이기고지고 하는 일이란 없다. 판매 부수나, 문학상이나, 비평을 잘 받거나 못 받거나 하는 일은 뭔가를 이룩했는가의 하나의 기준이될는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이 쓴작품이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했는가 못했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그것은 변명으로 간단하게 통하는 일이 아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뭐라고 적당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 P26

보스턴 마라톤의 개최지라는 점도 있겠지만, 케임브리지는 바라톤 인구가 많은 곳이다. 찰스 강을 따라서 끝없이 조정은 도가 이어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이 길에서도 몇 시간이고 달릴수 있다. - P32

나는 손때가 묻은 MD 쪽을 좋아한다. 아이팟에 비하면 다소 기계가 크고 정보 용량은 확연히 적지만 내게는 그만하면 충분히 잘 쓸 수 있다. 현재로선 아직 나는 음악과 컴퓨터를 혼동하고 싶지 않다. 우정이나 일과 섹스를 혼동하지 않는 것처럼. - P33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가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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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머리를 뒤로 묶은 오동통한 몸매의 공인중개사는 첫느낌이 매우 부드러웠다. 남편은 이 공인중개사를 택하길다행이라고 했다. 집을 구하러 왔는지 공인중개사를 만나러왔는지 헷갈리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계약서에 도장을찍고 싶어 하는 남편과 달리 계속 망설이는 내가 신경 쓰였을 그녀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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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 P50

언닌 그대로다.
정윤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너도 그래.
그렇게 말하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 P50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 P52

당신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으니까. 포기할 수가 없던부분이 있었으니까. 얼마나에서 귀한 - P54

우리는 시류를 읽어야 해.
그렇게 말한 건 용욱이었다. 용욱은 예비역 복학생으로 사회학과 2학년이었다. 그는 세계가 급변하고 있는데 개인의 윤리 문제를 다룰 지면은 없다고 했다. 타락한 개인의 윤리는 개인의 문제일 뿐, 그것을 정치와 사회의 흐름을 읽어야 하는 지면에서 굳이다룰 필요는 없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 P57

희영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편집실은 고요했다. 낭독이 끝났는데도 편집실을 채운 팽팽한 분위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고 지금의 당신은각한다.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 P59

이번 주제 같이 준비해볼래?
희영은 두번째 교지에서 아내 폭력 문제를 다루고 싶다고 했다.
법이 없어. 남편이 아내를 때려도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없어. - P64

당신의 이야기를 다 듣고 희영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강하다고 생각했네.
희영은 창가에 서서 당신을 바라봤다. - P68

언닌 정말 그렇게 믿어요?
희영이 입을 열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그런 일이 없어질 거라고, 통일 조국이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자들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당하는 일이 없어질 거라고 믿어요, 언니? - P72

글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P75

‘언니, 내가 언니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요. 그렇게사랑하고 싶었으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던 거 미안해. 아주 오래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요.‘
그러나 정윤은 메일을 읽고, 당신에게 답하지 않았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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