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간척지와 커다란 풍력발전기는 언제나 그녀를압도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다 살아 있는 존재들 같았다. 땅도, 발전기도, 바람도 그랬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는 그 소리가 사람 목소리로 들렸고, 퇴근하고서도 환청으로 들리곤 했다.
하얀 발전기는 바람개비를 높이 든, 흰옷을 입은 사람처럼 보였다. - P93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 농협이 나왔고, 다희는 언제나 그 앞에 서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귤을 까서 그녀에게 건넸다.
맑은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다희는 귤을 먹는 게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그 일을 반복했다. - P95

그렇게 매일 두 시간 남짓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에집중하는 동안 그녀와 다희는 선후배도, 친구도, 애인도, 우연히지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둘은 차에서 내려 일터로 가면 동료가되었다가, 다시 차에 올라타면 서로의 이야기에 몰두하는, 알 수없는 사이가 되었다. - P101

왜선배잘못일거라고 단정해요? 다른 사람들이 나빠서일 수도 있지. - P109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 P115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 P120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었다. - P124

오랜만에 펜을 들어 너에게 편지를써.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 P127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데, 일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세로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래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다른 사람들이 내게 설명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정이 되고 싶지 않았어 - P133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 사람은 없었어."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어. 나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걸 이해했어. 나는 언니에게 그렇게 기대고 그렇게 의지했으면서 정작 언니에게 전혀 힘이 되어주지 못했구나, 언니의 허기진 마음을 조금도 채워주지 못했구나. - P139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더 커질 뿐이라고. - P150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내가 네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도 사랑한다고 내게 말해줬지. 우리는작은 공을 주고받듯이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았어. - P151

"이 사람은 약하지 않아. 나이도 많고, 직업도 있고, 집도 있고,
가족도 있어. 걱정할 것 하나 없어. 너에게 뭐라고 거짓말했는지는몰라도 이 사람, 너보다 백배 천배는 더 힘이 있는 사람이야. 착각하지 마. 네가 끝내지 않으면 나는 신고할 수밖에 없어." - P157

나는 건조대에서 그릇을 꺼내 수납장에 넣기 시작했어.
"네가 왜 우리를 괴롭히는지 모르겠어."
나는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뒤돌아서 언니를 바라봤지.
"언니는 더는 나를 믿지 않네." - P164

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 네가 나였다면 그 순간 어떻게 했을 것같니. 그때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는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같은 행동을할 거야. - P179

내 마음 안에서 나는 판관이었으니까,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나는 언니를 내 마음의 피고인석에 자주 앉혔어.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게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 P175

오늘은 5월의 따뜻하고 맑은 날, 너의 생일이야. 너의 스물세번째 생일을 축하해.
너의 이모가 - P179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이모는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만날 수 없게 된 거네.
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지.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아. 어느덧나와 너는 얼굴을 마주보고서 웃고 있어.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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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흘은 날이 맑았다. 창밖으로 멀리 고가도로와 그 위를달리는 자동차가 보였다. 고가도로 앞으로 아파트와 상가 건물,
다세대주택,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있었고 가끔 새들이 푸른 하늘을 무리지어 날았다. 그녀는 피와 진물을 받아내는 주머니를 몸에 달고 링거를 맞으며 병실 침대에 누워 그 풍경을 바라봤다. 겨울이었다. - P87

사흘 뒤부터 그녀는 바퀴가 달린 링거 지지대를 끌고 병동 복도를 걸었다. 누워만 있으면 회복이 더디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부터였다. 그녀는 천천히 걷다, 중간에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봤다. 텔레비전을 건성으로 보면서 환자와 보호자, 방문객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 P87

그녀에게 그런 방문들은 뜻밖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잊은 건 아니었지만. - P88

그녀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병을 알게 되고,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을 짧게 정리해 말했다. 다희는 중간중간네, 그렇죠, 그랬어요? 라고 응답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다희와대화하는 동안 그녀는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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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혼자 취리히 거리를 산책했고 자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다. - P55

우수 어린 이 이상한 도취는 일요일 저녁까지 지속되었다. 월요일, 모든 것이 달라졌다. - P57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 P65

그때 그녀의 영혼은 선실에서 기어 나와 갑판 위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고 노래를 부르는 뱃사람처럼 육체의 표면으로 솟아올랐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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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아파트는 다른 세계였다. 실버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냥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산다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 P19

난 아무런 준비도 생각도 없이 덜컥 실버의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그렇게 좌충우돌, 고군분투의 삶은 시작되었다. 매우 조용히. - P19

하지만 실버아파트를 떠난다고 해서 노년이라는 미래와 현재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나는 ‘실버기‘의 문앞에 선 초보 노인이었다. 3장은 나의 실버기 입문기다. - P11

‘이곳은 실버아파트라 언제 비상사태가 생길지 모르므로 소방차 구역에 주차를 하는 것은 불법이나 이미 사다리를 장착했으니 신속하게 이사하시고……… - P21

할머니는 뒷짐을 진 채 방과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매우 즐거워했다. 물론 난 할머니가 왜 즐거운지 그 이유를아직은 알지 못했다. - P23

언제부터인지 오래되고 낯설어진 문장.
우리집에 놀러 와. - P25

"낮잠 시간이라 다들 벨 소리를 못 들으셨나 봐."
"아, 시에스타, 낭만적이네. 스페인 같잖아."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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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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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지만 매섭고 부드럽지만 또렷하다. 더 단단해진 최은영의 작심과 작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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