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뽑으시나 봐요. 이렇게 더운데." - P130

"나 밥 해 먹기 싫어서 오는 거야. 이젠 못 해 먹겠더라고." - P136

은퇴 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한두 벌의 옷과 신발로 각 계절을 잘 살아냈다. 초상집에 가는 데 필요한 검정색 옷이 여름용, 겨울용 한 벌씩 있으면 충분했다. 더 이상필요한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있는 것도 버거웠다. - P143

이런저런 생각에 남편의 말을 흘려 듣던 나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내일 일도 모르고 살아온 인생인데 몇 년 후에대한 약속이 뭐 그리 어려울까 싶어서.
"그래요. 한 10년 있다가 다시 옵시다. 둘 다 살아 있으 - P145

나의 부모 세대가 쉰이면 흔연히 노인의 삶을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나는 환갑을 넘기고도 스스로 노인이란 사실을 남을 통해 알아 가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 가기 어려운 세대인가 보다. 우리는. - P168

"당신이 머리카락 빠지는 것에 신경 쓰는 것만큼 나도주름이 신경 쓰여." - P189

우리는 모두 은퇴한 이후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 삶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대개는 한두 가지의 질병에시달리고, 간간이 찾아오는 우울과 불면에 힘든 하루를 보내며, 직장을 은퇴하고 아이들이 독립한 후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가끔씩 절망하기도 하다가 또 스스로 위로해 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 P195

"노노 양보야. 우리끼리 양보하고 살아야지, 젊은 애들한테는 기대를 말아야 해."
중노인이 뭐라고 하든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아무반응도 관심도 없었다. 이런 일을 수시로 보고 겪는 모양인 듯,
그저 온전히 핸드폰의 세계였다. - P201

모호하고 우울하며 화가 난 듯했던 감정이 붕어빵으로해결되었다는 것은 일기에 기록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오늘의 일기 말미에 적었다.
‘우울할 땐 따끈한 붕어빵을 네 개 이상 먹기‘ - P210

A와 B의 은퇴를 축하하는 의미로 조촐한 파티를 갖고자 하니 지진이나 전쟁이 없는 한 다 참석하시오.
1. 시간: 돌아오는 토요일2. 장소: C가 정할 것임3. 드레스 코드: 풀 메이크업에 세미정장 이상(작업복출입 금지)4. 참가비: 두 사람을 뺀 나머지만 부담 - P225

남편의 생각은 고마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왜냐하면여행의 일정을 계획하고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고 운전하는 일들이 모두 내 몫이었기에. - P232

"집이 더 재밌어."
겨우 힘을 끌어 모아 내 귀에다 들릴락말락 한 음성으로 넣어 준 이모의 진심이었다. 이모의 딸들 얘기에 따르면요양원이 너무 좋아 집에는 가기 싫다고 하셨던 이모였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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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남해의 작은 요양소, 한 노인이 고리버들로 만든 안락의자에 앉아 흐린 눈으로 수평선을 보고 있다. 먼바다에서 파도가 치고 요트가 지나간 자리에 흰 거품이 인다. 정지비행하는 물새들이 허공에 떠 있다. - P111

오래전에 사랑했던 여인에 대해 말해야겠어. - P119

다른 이유가 있나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이유지요. 이제모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으니 나도 더 이상 사람을 기다리며 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 P133

이제 모요에 올일이 없겠네. 그 사람도 더이상 사람을기다릴 필요가 없겠네. - P134

왼쪽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이 오른쪽 창문을 뚫고 나갔다. 버스가 길고 가는 빛줄기에 꿰뚫린 것 같았다. 평소 같았으면 커튼으로 창문을 막았을 텐데 내버려뒀다. - P145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쉬었다 가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P149

"자기가 미워서 스스로 죽는 사람도 있어요."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안 되지."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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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감동이나 교훈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엌에서 끼니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책과 후회의 굴레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을 담담하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재생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P15

느릿하고 나태하지만, 쓸데없이 부지런하고 바쁜 저의 아침입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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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신을 따르는 친구였다고요. 당신의 약속 행진. 위험하고 위태롭고 결국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맹목적인 그 죽음의 약속에 좋아요, 좋아요를 모르핀처럼 톡톡 눌렀던 친구였어요. 라라라, 아아악. - P90

"그러시다면 음, 다시 돌려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사정이 있어서요." - P95

"아니. 아직은 아닌데요. 곧 강도짓을 한다고 했어요.
강도라고." - P98

점원은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자는 무서운눈으로 점원을 노려보며 검지를 올려 자신의 입술에 댔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그 신호에 점원은 말문이 막혔다. - P108

"장난이야."
모자는 응급 벨을 누르고 정신을 잃은 듯 쓰러졌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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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목소리를 확인한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들릴만큼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2층을 더 올라가야 하는 12층에 살았다. 이곳에선 흔히 있는 일이긴 했다. 이 소란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앞집은 비어 있는 것이 확실했다. - P41

다혈질이거나 과격한 노인들이 채팅방에서 발언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호응이 없었다. 대부분의 노인들에게 밥은 너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들리는 얘기로는할머니 한 분이 식당 앞에 서서 ‘저 놈들이 노인네들 밥 굶기려고 밥값 올리지 말라고 한다.‘라고 주장하는 서글픈 시위도 있었다고. - P49

난 갑자기 이 모임의 유일한 남성 멤버인 할아버지가궁금해졌다. - P55

"그래. 다 사는 방법이 다르니까. 우린 친구랑 같이 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인생이 별거야? 내가 세계 구석구석을 다 다녀 봤는데 어디가 제일 좋았냐 하면 말 통하는 친구들하고 다닌 데였어. 난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이 좋아.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그나마 건강할 때 옆에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지내는 게 최고지. - P56

• "아휴, H 할아버지가 문제야. 이분은 기타를 잡아 본 적도 없고 할머니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셔서 생활이 복잡하시다네. 그런데 기타라도 배워야 살 것 같다고 오셨는데." - P61

"회장은 죽어야 그만두는 거 아닌가?"
남편이 회장이 되었던 첫날을 상기하며 말했다.
실버아파트의 기타 동호회는 그랬다. 기타를 치러 모였지만 기타보다는 노래와 사람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었다. - P63

그렇지, 여긴 실버 카페지.
웬만한 일들은 그러려니 넘어가는 부분이 많은 사람들의 세계에 내가 살고 있었다. 복인지 화인지. - P69

"정말 갓난아기처럼 뭘 할 수가 없네요. 저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밥도 먹을 수가 없고 화장품을 바를 수도 없어요.
옷도 입지 못하겠으니 어떻게 교회를 가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됐어요." - P77

아하, 이렇게 치매가 생기는가 보다! 너무나 생각이 복잡해서 도저히 풀릴 기미가 안 보일 때, 가위로 엉킨 실을 싹둑 잘라 버리듯 그렇게. - P93

"영감님들, 대벌레를 잡아야 나라도 있는 거요. 산에 이렇게 매일 오르면서 저 해충을 한 마리라도 잡아 봤어요? 나라가 산이고 산이 나라지 뭐. 산이 다 망가져도 나몰라라 할거요?"
드디어 나의 장군 할머니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 P101

역시 이 아파트엔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얘기하자 남편이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답변했다.
"나한테도 아저씨라고 해."
무어라? 남편은 누가 봐도 할아버지인데 - P105

"곳곳을 다니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여긴 노인들이 많이 계신 곳이잖아요. 그분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죠. 이 산에 오르시는 모든 노인들을 위해서요. 저도 여기살거든요." - P113

나의 현재를 예쁘고 젊다고 봐 준 노인들은 분명히 나의시간을 지나간 분들이다. 그분들이 굳이 내게 말을 걸어온것은 늙음을 앞당기지 말라는 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사인을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내일은 예쁘게 꾸미고 식당 앞에서 고운 할머니를 기다려 봐야 할 모양이다. - P125

앞으로는 절대 ‘할머니들은 다 똑같아‘라고 생각하거나얘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세히 보면 그들도 다르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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