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은 눈을 끝벅거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당신 배우잖아요. 일어나서 영화를 찍어야지요. 혹시나 싶어 숨을 죽이고 기다렸으나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가 그리 괴로우십니까. - P53
그러니까, 저는 오로지 저 한 몸의 보신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 P59
그래서 우울증에 걸린 거 아닐까요. 뭐가? 다들, 그렇게 생각해서요. 그러자 나이 든 쪽이 발끈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그래서 그게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 P63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서 죽어가는 인간과 사라져가는 귀신, 그런 칙칙하고 음울한 것 둘이서 오래오래 웅크리고 있었다. - P69
그때였다. 뭔가 간지러운 것이 있었다. 내 속 깊은 곳에,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집어내긴 어려우나 아마도배 속 어느 지점쯤이었다. 부드러운 깃털 같은 것이 스치듯, 짧지만 선명한 간지러움이 반짝하고지나갔다. 감각이라는 것을 느껴본 지 너무 오래되었으므로 깜짝 놀라 아랫배를 움켜쥐고 그 출처를 찾는데 다시 한번 반짝, 이번에는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손으로 부여잡은 배 속 어딘가에따뜻하고 말캉한 뭔가가 있었다. 아주 작은 점이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고 그 부위를 인식하자마자 깨달았다. - P77
얘기가 너무 길었네. 자네가 내 얘길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찾아와줘서 고맙네. 들어줘서 고맙고. 그래, 들어줘서 고마워정말 고마워. - P82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어떤 얼굴이었다. 살면서 보아온 모든 이들의 이목구비가 조금씩 섞여 만들어진 것 같은 낯익고 아련한 얼굴, 도망치고 외면하며 잊으려 애썼던 것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다. 그 얼굴에 내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꼭 다시 만납시다. 이번에는 좋은 곳에서.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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