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이 월세방을 알아보기 위해 변두리 부동산 사무소의중개인과 처음 이 집을 방문한 것은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다. - P229
그것은 정환이 고향을 도망쳐 나오던 아홉 살의 초봄, 역으로 가는 새벽 첫 버스를 기다리며 보았던 풍광과 흡사했다. 소도시의 산자락에 들어선 집들 사이로 새벽은 유난히 게으르게 찾아오고 있었다. 진달래 능선이라 부르던 뒷산 기슭에서봉화처럼 타오르는 꽃불을 정환은 보았다. 그것은 입술 가득진달래 꽃물을 들이고 다니던 코흘리개 정임이의 얼굴과 겹쳐졌다. - P233
정환의 삶은 비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계를 버리고 달아나기로 몰래 결심했던 그 순간부터 비밀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중심 추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애인?" 동료가 어깨 너머로 사진을 훔쳐보고 물었을 때 정환은 웃었다. - P243
그것이 있는 한 정환은 완전한 체념을 할 수 없었다. - P245
정환은 황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씨는 매일 아침자신이 파내어버린 캄캄한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었으며, 울음을 터뜨린 다음날이면 나무 한 그루를 불살랐다. - P247
"오빠아 가자." 정임이가 정환의 소매를 끌었다. "너 혼자 돌아가란 말야!" - P253
넌 내 아들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단내 나는 치마폭과 설탕을 묻혀 튀겨주던 누룽지, 침 흥건한 입맞춤이 이제 정환의 것이 아님을 뜻했다. - P255
"한없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소.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오. 하긴 살았을 때도말은 많이 하지 못했지, 숨이 차서, 늘 짧고 간단하게 말해야만 했다오." - P259
불길이 진달래 가지의 끝에 이르자 무수한 불티들이 어둠을 거슬러 올랐다. 그 어둠 저편에서 진달래 관목들이 붉은 봄빛을 내뿜으며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 P2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