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중요한 것은 모종의 얼굴과 시간에 꼭 들어맞는 언어를 찾아내어 백지 위로 옮겨놓는 일 자체가 아니라. 이제 막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언어 앞에서. 머뭇거리는. 저항하는. 언어의 그 방향성을 자각하는 것. 행여나 어떤 말로 고정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흐리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그렇게언어는 주저하는 마음으로 흐릿한 궤적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하여 중요한 말은 종이 위에 쓰인 말이 아니라.
쌓이고 쌓이면서 지워지고 지워지는 말들. 지워지고 지워짐으로써 종이 위에 다시 드러나는 말들. 그렇게 말과 말 위로 겹과 겹을 만들어주는 말들이다. - 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