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답장하며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P10

이곳 올드독코퍼레이션은 빈티지 의류 마니아를 위한 중고 마켓 겸 커뮤니케이션 앱 ‘올드독‘을 만드는회사다. 직원들은 자기 직장에 대해 질문받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무신사와 당근마켓 사이의 IT 스타트업." 오스틴은 이 회사의 초창기 멤버 중 하나였다. - P11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때로는 내가 맡은 직무보다, 왕복 세 시간을 쏟아야 하는 출퇴근길보다, 농담 한마디를 받아치는 일이더 힘겨울 정도로. - P13

나는 그게 정말인지 오스틴에게 물었다.
"제가 예쁜 걸 잘 알아봐요‘ - P18

"여기 올드독 거래 게시판 보면, 옷을 산더미처럼쌓아두고도 20년 전에 나온 파타고니아 신칠라를 사려고 50만 원을 태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 대표는빈티지 패션을 가지고 친환경이니 대안적 패션이니하는데, 누가 그걸 믿겠어요. 그냥...... 예쁜 거에 눈이회까닥하게 하는 것 같아요." - P19

"그 여자가 차였는지 찼는지 어떻게 알아요?"
"딱 보면 알죠. 딱 봐도...... 페미 같잖아요. 페미니까차인 거죠."
"네?"
"머리가 짧으니까요." - P24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어때?"
"그 사람은 호모포비아야." - P29

사람이라면 그 공연을 통해 수치심을 덜어낼 수● 있을까? 자기 몸을 긍정한다는 것이 그런 다정한 경험을 통해 성취될 수 있는 일일까? 누구도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데, 오로지 다정함만으로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을까? 그 대안적인 스트립쇼는 프릭쇼와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른가?
저는 이 질문들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 P39

하려는 대신, 그 감정을 ‘나도 안다‘고 주장하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 안에서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한지 물으신다면, 저는 간극을 극복하고 연대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틈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의 틈인지확인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 P45

노동이라든지 투쟁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무척 멋들어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엽서를 다옮겨 적은 뒤 맨 밑에 보낸 이의 이름도 꾹꾹 눌러었다. 성식이 형. - P54

"울지 마쇼. 태수 씨의 지령이오."
"태수씨?" - P56

내 생전 남의 대변을 사진으로 찍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병원 생활이라는 게 그랬다. 개인의 모든 식생에 집중하게 되었고 작은 변화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거나 자그마한 희망을 품게되었다. - P67

"있잖아, 수민아. 그냥 죽고 싶은 마음과 절대 죽고싶지 않은 마음이 매일매일 속을 아프게 해. 그런데 더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온갖 것이 나를 다 살리는 방식으로 죽인다는 거야. 나는너희들이 걱정돼.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돈이 더 많이들어서." - P73

차장님, 평생 차장님으로 남아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차장님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것 같지?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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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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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초반부의 예술론에 취하듯 홀리고 나면 후반부 미친남자의 판소리가 광광 울려 퍼집니다… 그야 말로 미친 사랑의 노래 이 책은 소설보다 장시에 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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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9

이날을 기다렸다. 늘 이날을 기다렸지. 이 병을 샀을 때부터언젠가 올 이날을 고대했다. 마셔 보자. 37년 전에 병입한, 31년산 캠벨타운 위스키가 어떤 맛을 내는지. 온더록스 잔에 아버지는 넉넉히 위스키를 따라 내게 건넸다. - P491

오면서 밟아 왔던 그 언 눈이 아니라 싱싱하고 보들보들한 새 눈이었고, 이 눈 덕분에 불길은 얌전하고 착실하게 이 증류소만을 태워줄 터였다. 고생 끝에 낙이 있었다. - P509

톡, 톡, 톡, 톡. 자른 손톱을 줄로 갈고 15분 정도 따뜻한 수건을 덮은 채 마사지를 받은 나는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바버숍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사지를 해줬던 여자가 재킷을 가져와 뒤에서 입혀줬다. 나는 재킷을 입고 느슨히 했던 넥타이를 바짝당겨 맸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떻게 봐도 방화범처럼 보이지 않는,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기품 있고 다소 권위적이지만 섬세하고 앳된 인상의 남자, 내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아버지의 분신, 같은 성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혈족이 거울 속에 있었다. - P524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나는 하진한테 가야 했다.
수갑을 차고 철창에 갇히더라도, 하진의 저주를 받고 성대가 찢어질 것 같은 하진의 절규를 듣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한 번도느껴 본 적 없는 고통과 후회를 느끼고 차라리 내 손으로 모가지에 칼을 쑤셔 박고 싶어지더라도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얘기를 맞추고 내 거짓말을 짜맞추고 그런 걸, 그따위걸 나는 할 수 없었다. 가야 했다. - P536

나는 기다렸다. 하진이 나아지기를, 다시 일어서기를 하진은 그럴 수 있는 여자니까. 이전까지, 그 모든 일에도 꺾이지 않고 더 올곧고 옹골차게 자신을 길러 냈던 사람이니까. 처음부터먼저 성큼성큼 다가왔던, 한창 말다툼 중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내가 안아 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안아 주던,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삶까지 강력하게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이니까. 그게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든 게 재가 돼도 재가 될 수 없는 것을가진 내가 사랑한 하진. - P553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안 했죠. 준연은 두 손을 드러내 보였다. 하진과 사랑을 하지도 않았고 해원 씨한테 하진을 놓아 달라고도 안 했고 하진에게 해원 씨가 나한테 와서 그런 짓까지했다는 말도 안 했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전. 아무것도 한게없는데, 다 해원 씨 혼자 벌인 일이죠. 다. 전부 다 해원 씨 혼자 - P564

우린 악연인가요?
오늘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나요?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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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지난 지 이틀인가 사흘 뒤 나는 경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권준연의 친구가 맞냐고. - P413

그래서 더 상품이고 여지없는 제품인 거죠. 아니라면, 작품이라면 왜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겠어요? 이미 작품인데요? 배우들은 시장에서 산 옷을 뒤집어 입어도 배우예요. 사진가들은 싸구려 똑딱이 카메라로도 기가 막힌 걸 찍어내요. 예술가들은 명•품이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명품들은 늘 예술가들이 필요하다못해 매 시즌마다 갈아치우기까지 하죠. 작품인 척해야 하니까•요. 너무나 제품이고 상품이라서 항상 새거여야 하고 남다른 척해야 하니까요. - P420

같은 얘기잖아.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 결혼이 영향을 받는거잖아! - P450

지난번 해줬던 말, 여러 번 생각했어.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않고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게 사랑하는사람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해 줄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 사랑은 기꺼이 두 번째가 되어 주는 거니까. 더는 어떤 이유가 남아있지 않을 때 마지막 이유가 되어 주는 게 사랑이지. 해원이 이미 내게 그런 사람이고 나도 해원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 P455

두 사람의 영상을 보고 나면 나는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젖히고 새벽 2시고, 3시고 뭔가를 써 내려갔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화기획서, 그걸 쓰는 동안에는 즐거웠으니까. 증류소를 삼키는 화염, 승리의 트럼펫 소리처럼 울려 퍼질 시커먼 연기를 떠올리면 내 괴로움들이, 불안함과 두려움, 수치스러움과 열패감이 모두 증발하고 산화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머리로 눈을 뜨면 망상이라는 생각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냐는 자괴감에 시달렸지만. 한동안은 계정까지 지워 일부러 영상을 안 보려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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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선 비슷한 냄새가 나요. 무언가를 태울 때 나는 냄새. 옷에 스며든 불과 재의 기운. 그런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은밀하게 부풀어요. - P58

물빛은 물과 빛의 포개짐이지만물은 물에게로, 빛은 빛에게로 돌아갈 뿐이죠. - P59

다만 나의 잎은 뾰족하여 악몽을 터트리기 좋고흙은 비밀을 감추기에 적당한 재료인 것입니다 - P61

근사한 여행이었죠?
여독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그가 묻는다. - P70

손가락을 움직이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이너의 나라이구나. 사월이 끝났을 뿐인데 세상이 끝나버린기분이 들어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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