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외진 통로, 열댓그루 남짓 계수나무가 모여 있다. 나 혼자 ‘계수나무 숲‘이라 부르는 곳. 열댓걸음 걸으면끝나는 길이지만 끝까지 갔다 오고 또다시 갔다 오며 넓어지는 곳. 나의 계수나무 숲. - P152

내 안에 있는 한기를 달래기 위해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온기를 찾아본다. 나를 압도하는 추위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내 안에는 여전히 따뜻한 것이 숨 쉬고 있다. - P153

이리저리 돌려보고굴려보고 만져보고 상상하고 꿈꾸고 그 안에서 숨 쉬듯이살아내면서. 나는 이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덜 바쁜 두 눈으로 지금 바쁜 사람을 대신하기. 좀더 홀로여기에 멈춰 있기. 멈춰서 느리게 숨을 쉬기.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마음 위에 돋아나는 싹을 기다리기. 씨앗의 진동을 믿어보기. 나는 이것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 P155

이 모든 기억 속의 집은 훗날 시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시를 ‘쓴다‘고 생각하면 막막하고 어려웠지만 허구의공간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조금 덜 두려웠다. 내가 만든 공간 안에 화자의 숨결을 채워가는 시간은 신비로웠다. 내가그린 숲, 내가 지은 집, 내가 빚은 여름과 겨울이 숨을 쉬기수
시작한다. - P161

첫 시집을 내고는 꼭 마음에 폭 팬 자국이 생긴 것 같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막을 고백하기에 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뒤엉켜 있다. 끝내 고백할 수 없는 것을 간직한채 고백을 이어가는 목소리에는 무력이 묻어 있고, 그럼에도 이어가는 목소리는 얼마나 간절한지. 언제나 나를 사로잡는 건 절실함이었다. 언제나 나를 바로잡은 것이 나를사랑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진심이었듯이. - P167

또다른 여름입니다.
이 책을 품에 안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반가운 안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빛과 바람, 돌멩이와 언덕에게마음이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24년 5월검은개 흰 개와 함께 최지은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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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힘이 상자를 열게 했다는 것 외엔 별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네. 그러나 저녁은 활을 들고 토끼를 켜고 있었지. - P81

얼굴을 휘감으려 하고 있다 - P79

나는 바구니를 들고 약수터로 간다쏟아버리려고 - P30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둠에 먹혀들어가는 배롱나무가 보였다. - P70

창밖에는 갈대 우거져 있다횃불 든 사람들 오고 있다 - P16

던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의 손이 불에 탄 듯새카매져 있다. - P26

그날 이후이따금 너를 소환하곤 해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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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연을 키우는 것과 위스키를 만드는 것, 두 가지 모두하진에게는 사랑을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할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 P641

솔직히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맞고내 방에 오거나 내가 어머니에게 가면 그 비슷한 말을 숱하게들었으니까. 좋게 말하자면, 그냥 하는 말일 뿐이었고 독하게받아치려면, 할 수 있었다. - P646

나는 피식 웃었다. 오래전 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자기가 짓밟히는 건 참아도 자기가 사랑하는 게 짓밟히고 짓이겨지는 건 참지 못한다고,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닌 늘 있어왔던 일이라고. 그 말대로였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날 자기들뜻대로 굴리는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내가기지 수 없으니까. - P649

사랑이 진실을 만드는 진실이고 의미를 만드는 의미라는 건,
사랑이면 뭐든 할 수 있고 사랑으로 뭐든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이야말로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었다. 하진에 대한 사랑이 내 죄에 선을 그었고 준연에 대한 사랑이 내 공황에 선을 그었고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와 부모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 선 때문에 내 죄는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게 됐고내 공황은 잦아들 수 없는 게 됐고 나는 지금 이렇게 내 부모를침몰시킬 짓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 선들이생겼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더 사랑하고 계속 사랑하고 싶으니까. 사랑만큼 강렬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에 사랑만큼강력하게 지켜야 할 선을 긋는 것도 없었다. - P655

이제서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진의 말들, 행동들, 하진이 내게 했던 사랑을, 그리고 내가 하진에게 했던, 사랑이 되지 못한 채 욕망에 불과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은 기꺼이 두번째가 되어 주는 것이고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 않는,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시도와 노력이고 행위였다.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만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랑은 누가 하지 말라고해도,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비좁은 마음에서, 작고 유약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사랑, 사랑의 원형 같은 게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고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 결국 모든 부모가 하게 되는 사랑이 바로 그랬다 - P658

그래서 고통이 오직 고통이기만 한 건고통의 크기나 깊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걸 기꺼이 대가로 치를만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치스러운 것들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사랑이, 그 사랑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 없기 때문에고통은 신물 나는 것이고 욕망도 결국엔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것이었다. - P665

크고 깊게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내쉬며 비강을 헹궈 낸 뒤 다시 위스키를 입안 가득히 채웠다. 홍 씨가 우적우적 복숭아를씹을 때처럼, 입 전체를 우물거리며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풍미와 맛을 남김없이 빨고 감별했다. 꿀꺽 삼킨 뒤에도 미뢰에 남은 맛뿐 아니라 입천장과 양쪽 벽에 남은 맛까지 혀로 샅샅이훑었고 하얀 입김에 스민 잔향들까지도 손끝으로 더듬듯 음미했다. 역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 P671

나는 책상 위 문진으로 총기 함 자물쇠를 후려쳤다. 고리째떨어져 나간 문을 열어젖히자 엽총 두 정이 약속처럼 나란히세워져 있었다. 나는 사냥터에서 아버지가 들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애꿎은 사냥개나 잡았던 그 총이었다. 서랍을 열어 총알도 꺼냈다. 아버지가 웃으며 내 귀 옆에 대고 흔들었던 돼지탄이었다. - P674

노래가 끝났다. 노래는 끝난다. - P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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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우리는 줄어들겠지. - P26

"알겠어요." 나는 대답했다.
"진심이야." 그는 말했다. "뭐가 필요하든."
"알겠어요." 나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 P41

함께 학교 밖에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게 나라니 믿어지니?
마야는 썼다. 내가 얼마나 평범해졌는지 봐. 그 옛날에는 이렇게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 P63

"텔레비전에 죽음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알아? 아는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걸 깨닫지 못하지. 그러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사방이 온통 죽음이야. 잊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것을 일깨우지 않는 방송을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보고 싶어." 마침내나는 말했다.
"나도 보고 싶어." 타냐가 말했고 잠시 조용해졌다. "어쩌면 그냥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나봐" - P313

우리 얘기 좀 하자, 나는 썼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얘기 좀 하자, 나는 다시 썼다. 당장. - P211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뭐라고?"
"집에 오긴 할 거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집에 오긴 하는 거야?"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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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버지는 며칠쯤 지난 뒤 나한테 말했다. 가장이 됐으면 가장답게, 점잖게 행동하라고. 회사가 아니라면, 아버지가의장이 아니고 내가 대표이사가 아니라면, 또 증류소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을 것이다. 아버지 와이프나 제대로간수하시라고. 점잖은 게 뭔지 좀 가르치시라고. - P589

내가 더는 하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사랑은 끝났고 모든 것은 그저 의무와 책임이 되고 말았다는 걸. 하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했던 하진과 결혼과 증류소를 가졌으니까, 이 모든 걸 갖기 위해 누구보다 큰 대가를 이미 치렀으니까. - P592

나도 피식 웃었다. 자조는 아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진 기분이었다. 가느다랗고 위태위태하지만 그래도 걸렸는 있던 것이, 툭. - P596

그날 집에 왔을 때, 하진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날 찾아왔을 때 내가 물었어. 혹시 너냐고, 증류소에 불을 지른 게 너아니냐고. - P623

다시 만들 수 있을까, 위스키?
메는 목을 삼켰다. 만들고 싶어졌어? - P630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 한 그루 심겠다고 말했다는 놈있잖아. 홍 씨는 피식 웃으며 하진을 봤다. 내 볼 때 그놈은, 농사꾼이야. - P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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