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연을 키우는 것과 위스키를 만드는 것, 두 가지 모두하진에게는 사랑을 요구하는, 사랑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면 할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 P641
솔직히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맞고내 방에 오거나 내가 어머니에게 가면 그 비슷한 말을 숱하게들었으니까. 좋게 말하자면, 그냥 하는 말일 뿐이었고 독하게받아치려면, 할 수 있었다. - P646
나는 피식 웃었다. 오래전 준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자기가 짓밟히는 건 참아도 자기가 사랑하는 게 짓밟히고 짓이겨지는 건 참지 못한다고,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닌 늘 있어왔던 일이라고. 그 말대로였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날 자기들뜻대로 굴리는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내가기지 수 없으니까. - P649
사랑이 진실을 만드는 진실이고 의미를 만드는 의미라는 건, 사랑이면 뭐든 할 수 있고 사랑으로 뭐든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이야말로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었다. 하진에 대한 사랑이 내 죄에 선을 그었고 준연에 대한 사랑이 내 공황에 선을 그었고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와 부모 사이에 선을 그었다. 그 선 때문에 내 죄는 결코 떨쳐 낼 수 없는 게 됐고내 공황은 잦아들 수 없는 게 됐고 나는 지금 이렇게 내 부모를침몰시킬 짓을 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켜야 할 선들이생겼다. 사랑하고 있으니까, 더 사랑하고 계속 사랑하고 싶으니까. 사랑만큼 강렬하게 원할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에 사랑만큼강력하게 지켜야 할 선을 긋는 것도 없었다. - P655
이제서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진의 말들, 행동들, 하진이 내게 했던 사랑을, 그리고 내가 하진에게 했던, 사랑이 되지 못한 채 욕망에 불과했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은 기꺼이 두번째가 되어 주는 것이고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 않는,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시도와 노력이고 행위였다.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시키거나 돈을 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중심적인 마음만 따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사랑은 누가 하지 말라고해도,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이고 비좁은 마음에서, 작고 유약한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사랑, 사랑의 원형 같은 게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고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 결국 모든 부모가 하게 되는 사랑이 바로 그랬다 - P658
그래서 고통이 오직 고통이기만 한 건고통의 크기나 깊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걸 기꺼이 대가로 치를만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치스러운 것들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사랑이, 그 사랑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 없기 때문에고통은 신물 나는 것이고 욕망도 결국엔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것이었다. - P665
크고 깊게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내쉬며 비강을 헹궈 낸 뒤 다시 위스키를 입안 가득히 채웠다. 홍 씨가 우적우적 복숭아를씹을 때처럼, 입 전체를 우물거리며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풍미와 맛을 남김없이 빨고 감별했다. 꿀꺽 삼킨 뒤에도 미뢰에 남은 맛뿐 아니라 입천장과 양쪽 벽에 남은 맛까지 혀로 샅샅이훑었고 하얀 입김에 스민 잔향들까지도 손끝으로 더듬듯 음미했다. 역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 P671
나는 책상 위 문진으로 총기 함 자물쇠를 후려쳤다. 고리째떨어져 나간 문을 열어젖히자 엽총 두 정이 약속처럼 나란히세워져 있었다. 나는 사냥터에서 아버지가 들었던 총을 꺼내 들었다. 애꿎은 사냥개나 잡았던 그 총이었다. 서랍을 열어 총알도 꺼냈다. 아버지가 웃으며 내 귀 옆에 대고 흔들었던 돼지탄이었다. - P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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