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캐스팅하면 어때? 한 역할을 세 사람이 맡는 거야. 실험적으로 가보자. 나쁘지 않을 거야. - P132

괜찮냐니까. 말을 좀 해봐. - P133

"언제 왔어요?"
"세 시간 전에 공항 떨어졌어. 너는?"
"방금 왔어요. 무궁화호 탔거든요." - P136

천장과 바닥이 맞붙기 시작한다. 녹아내리는 유리지붕 뒤편에서 검표원이 걸어온다. 항아가 나와 눈을마주친다. 그렇지만, 하고 말한다. 꿈속에서조차 쇠고집이다. - P134

부산역에 내린다. 플랫폼을 통과해 계단을 오른다.
정문으로 나가 택시를 탄다. 새벽 부산의 추위는 엷거나 부드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정도다. 하늘 가장자리가 부옇게 밝아오고 있다. 택시에서 내리자 병원 뒤편으로 번지는 붉은 기운이 보인다. 일출이다. - P135

과연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디션장이 내 앞에 나타난다. 항아가 종을 흔든다. 링포 오디션, 링포오디션. 두번째 조가 무대에 오른다. 황 쌤과 선배, 선이 있는 조다. 황 쌤이 남자, 선이 여자, 선배가 천사 역을 맡겠노라고 한다. 항아의 눈길이 느껴진다. 항아가웅을 볼 때처럼 나도 선을 보고 있을까? 아니길 바라며 배를 누른다. 꿈속인데도 속이 울렁인다. - P118

"다들 예쁜 걸 좋아하니까요."
"맞아요. 옷도 사람도 그렇죠." - P19

"그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배를 한 대 태우겠다는오스틴을 두고 전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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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속 어린것들이 아른거린다한 모금에도 잠기고 한 방울에도 쪼개질 것 같다 - P23

나는 그가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 좋다나는 이 누수를 멈추고 싶지 않다 - P48

공인 날에는 멀리 차고비눗방울인 날에는 후후 분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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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강아지나 고양이 중 한 마리만 키워야 한다면 어느 쪽이야?"
"둘 다 별로, 난 동물 안 좋아하잖아."
마트의 반려동물용품 코너 앞을 지나며 선주가 물었을 때 정현은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선주는 입을 떡 벌리고 정현을돌아보았다. 어떻게 인간 된 자로서 개나 고양이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바라보는 듯했지만 곧 답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물었다. - P67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보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떠나지 않고서 머무를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계속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나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난 연어 안 좋아해" - P70

"너 지금 속으로 개편 들었지?"
정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너야말로 진짜 미친년이야. 정신 좀 차려. 걘 결혼도 해서 잘 산다며." - P73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얼마나 더? 하도 오래돼서 요샌 빚이 내 반려자 같고 그래."
정현의 말에 서일은 정색을 했다.
"넌 진짜 뭘 아껴본 적이 없구나. 어떻게 반려자랑 빚을 비교해? 그건 반려라는 단어한테 모욕이야." - P77

정현에겐 그 말이 꽤 달콤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다시 맞잡은 서일의 손도 너무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토록 변변찮은 자신을 믿는다는서일의 말을, 정현도 믿고 싶었다. 돌고 돌아 마침내 귀의해야 할 종교를 만난 것처럼 정현은 다시 서일을 믿었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선주가 서일의 머리채를 잡지만 않았다면 정현은 서일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전셋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 P84

"그래, 번호 하나만 골라줘."
"나머지 다섯 개는 다 골라놨어요?"
"응. 하나만 더 있으면 돼."
"반줄 거예요?"
"뭐?""
"당첨되면 반 줄 거냐고요."
"그래, 줄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번호 하나만 골랐는데 왜 반이나줘요?"
서일의 번호를 가진 초등학생은 정현보다 더 야무진 데가 있었다.
"그렇지...... 네 말이 다 맞다." - P87

반려빚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코트 깃을 세우고 현관에 서서 정현과 작별 인사를 했다. 반려빚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정현을 떠났다.
정현 역시 현관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찬장에서 소금을 꺼내 와 현관밖에 팍팍 뿌렸고 문이 닫히자마자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다시는 얼씬도 못 하도록. 꿈속에서 정현은 마냥 홀가분했고 깨어서도 그랬다. 마침내 0이 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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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를 만나러 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기차로다섯 시간 반, 한밤중에 타면 새벽녘에 도착하는 셈이다. KTX나 비행기표를 살까 고민하다 결국 무궁화호표를 끊었다. 항아도 부산에 갈 때면 늘 무궁화호를 탔다. 그럴 만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고 했다. - P101

. 즉시 솟구치는 감정을 온몸으로 보여낼 능력이 곧 시작될 현장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 P105

천사는 관계에서 태어나.
처음 시놉시스를 보여주던 날 항아는 말했다 - P106

목 이모님은 본인이 옛 영화들만 좋아하는게 아니라고, 좋은 영화들이 오래 남아 옛것이 되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도 그런 거 만들어. - P111

접촉의 모양과 달리 말들의 질감은 꾸준히 험악하다. 이제 여자는 남자의 말을 끊기 시작한다. 그것은 선의 특기다. 대화가 엉키면 말들의 틈새에 가위를집어넣어 한 갈래씩 자르는 것이다. - P121

연극에서 석 씨를 처음 발견한 날 항아는 내게 전화를 걸고서 헐떡이며 말했다. 어떻게든 같이 작업하고 싶어. 나중에는 무작정 무대 뒤로 찾아가 물었더랬다. 독립영화에는 관심 없으세요? 지원 사업에서 떨어지기는 했는데요. 석 씨는 항아의 시놉시스를 읽은 후자신의 명함을 넘겨주었다. 항아는 명함을 이마에 붙이고 내 집 앞으로 찾아와 말했다. 이번 영화는 뭔가가될 거야. 확신이 들어. 뭔가가 느껴져. - P125

항아야, 하나의 역할에 필요한 건 한 사람뿐이야. 다른 사람이 그걸 대신할 수는 없어. - P134

"오는 동안 내내 잤거든요. 꿈꿨는데 형도 나왔어요.
천사 역할이었어요."
"징그러운 소릴 하네." - P137

그러고 보니 기차가 출발지와 목적지를 이어주고 꿈이 현실과 잠을 이어주듯, 영화와 소설을 만드는 일 역시 무언가를 이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과 상상을, 생활과 희망을,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를, 보기 전과 본 이후를 이어주는 덜컹대는 이음새처럼요. - P141

천사는 경계 따위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곁에머물며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주는 존재일까요. ‘나‘의 꿈을 가로지르며, 항아의 죽음을 오르내리며, 천사는 언제까지고 그들 사이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걸까요.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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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말한다 밤하늘에 작은 눈썹이 하나 떠간다 - P74

다시는 새를 호명하지 않겠다 결심했는데 - P75

새들이 내 안에서 목욕한다목련꽃이 내리는 비에 한 잎 두 잎 제 몸을 씻듯내 안도 섬세하게 씻을 수 있다 - P77

제발, 순수한 척, 모르는 척, 흰색인 척 그만해요 - P79

나와 차장님은 아이들 그네를 밀어주면서, 미끄럼틀을 태우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놀이터에모래가 없네요, 그런 이야기도 하고, 제가 사실 주식으로 천만 원을 잃었는데요, 그런 이야기도 했다. 아니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나였다. 이상하게 차장님의헤벌쭉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이 잘도 나왔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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