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결코 덜 비극적이지 않으며 매일매일의 덧없음을 상쇄해주지 않는다. 평균 수명이 늘어난 것은 통계적 사실이지만 이것이 개인의 장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양쪽을 다 내려다볼 수 있는 능선에 올라와 있다. - P23

1964년에 <말>에서 "내가 더는 전진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 나의 진전이다"라고 했다." 당시 59세였던 그는 "산을 오르는 자의 젊은 취기"가 그립다고 고백한다. - P25

유예란 이런 것이다. 결말의 임시 생략, 근본적인 불확실성.
삶은 이제 탄생에서 죽음까지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선율적 지속(앙리 베르그송), 켜켜이 쌓인 시간성의 밀푀유다. - P26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 전개 따위는 끝까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의 문 앞에 떠밀려 있는 상태로만 시간 속에 정주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머물되 고정 거주지는 없는 노숙자들이다. - P29

오래 사는 것이 절대 규범이 되면서 문명은 노쇠, 기력 상실,
의존을 더욱더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참아주지 않는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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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극장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 P117

영화적 움직임을 복원하려는 의지 - P135

공백과 흰색의 덧칠을 구분할 것 - P141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무덤에서 일어난 순간헛된 기대인 걸 알면서도 그의 걸음이 복수를 향하지 않기를간절히 바랐다. 피츠 제럴드(톰 하디)에게 살해당하는 아들 호크(포레스트 굿럭)의 참상을 목격한 장면부터 이미 내정된 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글래스의 처절한 걸음이 종국에는 복수 이외의 다른 곳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 P151

여름, 그리고 밤. 따로 부를 땐 몰랐지만 연달아 입에 올리면 이상한 단어. 그 울림에는 꿈결 같은 애잔함이 깃들어있다. 눈뜨면 사라질 하룻밤 환상 같은 시간. 들뜬 열기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은 기억들. 어딘지 포근하고 그리운 작별인사의 추억. 그 모든 흔적에는 한때 모두가 지나왔고, 이제다시 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애상이 묻어난다. <남매의 여름밤> (2020)의 영어 제목은 ‘Moving on‘이다. - P177

지나간 것을 애잔하게 포장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다. 그리고 기억과 추억의 태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요소는 결국 구체성이다. 주체가 설정되지 않은 공간은 추억이라는 보편타당한 감성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하지만장소는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 성립한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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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니야. 희생정신으로 똘똘 뭉친 옛날 여인이니까. 이타적인 면도 있고 인내심도 강하시지.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 하는 거 아니겠니?" - P87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했는데, 그것도 우리 시어머니와 비슷했다. - P87

"이모라고 부르라고 글자도 줄고 어감도 낫잖니? 놀러 올 거면얼른 메모해라. 윤경호, 경기도 안산시......" - P81

태우의 마지막 말은 내게 모종의 압력으로 다가왔다. 이러다 도박빚으로 수배 중인 외삼촌도 며칠 안에 만취한 상태로 남편 품에안겨 우리 신혼집에 들이닥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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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빠지진 않았어?"
영경은 그거 아주 훌륭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두 언니들을 차례로 보았다.
"어떻게 더 안 나빠지겠어? 원래 나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없는 병이라는데." - P15

수환이 뻣뻣한 손을 움직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영경은그의 병상 옆으로 와서 눈을 내리깔았다. 오전 면회 때 기순이 붙들고 울던, 제멋대로 자란 관목처럼 굽고 흰 그의 손가락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 P20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 P25

그나마 자신의 분자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라고, 영경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드는 일이라고 수환은 생각했다. - P27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병을 비우고 과자 한봉지와 페트 소주와 생수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영경은 큰 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은 모텔 입구에 멈춰 섰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갑자기 수환이 보고 싶었다. 오후에 면회를 온 영선과 영미 생각도 났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영경은 고개를흔들었다.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도 자신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감정조절장애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33

종우는 손을 우뚝거리며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늙은 간호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요양원 사람들은 입주자들뿐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까지도 모두 늙었다. 힘을 써야 하는 몇몇 간병인들만이 젊었다. 종우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 P37

몸이 어느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바뀐 것을 느꼈다. l - P39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종우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거듭 묻는데도영경은 오랜 시간 울기만 했다. - P39

미리 뺐지. 갔다 와서 빼면 더 이상할 거 같아서. 그러니 얼마나낯설어, 집이? 거실에 내 책이랑 음반 빠진 자리가 뻥뻥 뚫렸는데그걸 보고 있으려니 잠이 오겠냐고? 근데 주란이 저거 말하는 본새좀 보라고 규가 흥분했다. 안 자고 부스럭이 뭐냐, 부스럭이? 내가과자봉지냐? - P46

그들이 떠날 때까지 개가 죽을 둥 살 둥 깨어있었던 것에 대해 규와 훈은 의견이 갈렸다. 규는 낯선 사람들이자기를 해코지할까봐 그런 거라 했고, 훈은 낯선 사람들로부터 주인집을 지키느라 그런 거라 했다. 둘 다 주장의 근거로 다친 뒷다리를 들었는데, 규는 그로 인해 강화된 개의 자기방어기제에 무게를 실었고, 훈은 그로 인해 강화된 개의 주인에 대한 의존과 충성심에 중점을 두었다. 주란은 가엾은 개의 이력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라고 충고했다. - P49

너희들은 아무튼 평생 종합적이질 못해. 이번에도 보라고. 한놈은 생태만 보고 한놈은 습지만 보잖아. - P51

던져 놓으면 어쩌나? 얼른 펴서 하우스를 지어야지.
훈은 저들 부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런 식의 걱정도 팔자인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양을 지나 낙산 쪽으로접어들자 오른편에 다시 그립고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활공하는새들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훈은 그게 오히려 낯설었다. 속초에 도착할 때까지 작은 항과 해수욕장들을 거점으로 한유흥지들이 꽈배기처럼 부풀었다 줄어들며 7번국도를 감싸고 꿈틀꿈틀 이어졌다. - P54

왜?
모기 같은 건 고객님 부담이래.
훈도 웃었다.
모기 같은 건 우리 부담이래?
응, 우리 부담이래.
어쩌냐, 부담스러워서 - P56

딱 두놈이거든 젊은 놈 하나 늙은 놈 하나 후우, 젊은 놈이 직장 담당이고 늙은 놈이 지역 담당인데 늙은 놈이 받아서 후우, 본인이담당자가 아니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직장 담당이고 후우, 지역 담당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는 거야 분명히 목소리는 후우, 늙은 놈맞는데 환장할 노릇이지. - P61

다 메스껍다!
오래 씻어서 미안하다.
다 메스꺼워! 다 메스껍다고! - P68

"글에 담긴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글자도 아니고, 글씨체도 아니고."
"문체요?" - P79

나는 좀 부끄러워하면서 달링과 신랑을 합쳐 달랑이라고 부른다고 대답했다.
"달랑이라고 부르면 달랑거리면서 달려오겠구나."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농담에 나는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딱히 장난기라고 할 만한 것이보이지 않았고 말투도 날씨 얘기를 하듯 무심했다. - P83

그렇게 그녀와 나는 두달 남짓, 나름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게 월요일 오후에 그녀의 집에서 만나 묽은 블랙커피를 마시며 얘기를나눴다. 누군가의 삶을 간단히 요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모의 삶이야말로 가장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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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는 추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동안 가치 체계가 뒤집히긴 했다. 플라톤은 지식의 단계도 나이를 따라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50세가 넘어야만 선을관조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는 일종의 "입헌노인통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 P13

사실, 나이는 우리가 비교적 기꺼이 따르는 협약이다. - P16

늙는 것이야말로인간이 유일하게 찾아낸 오래 사는 법이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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