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는 내가 그 등허리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걸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장이 안 좋아서 참외씨를 먹으면 안되는데 단걸 좋아해서 참외 속은 먹고 싶어했지. 그래서 참외씨를 하나하나 발라내야 했어. 내가 대리를 달았을 때니까 스물여섯이나 일곱쯤 됐을 때다. 그때 만나서 4, 5년쯤 사귀다 헤어진 사람인데, 회사 다니는 사람은 아니고 공부하는 사람이었지." - P94
그땐 아래아한글이 없어서 보석글을 썼다.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하이텔이니 천리안이니 하는 통신을 시작한게 서른대여섯쯤이었고, 한때는 통신중독에 게임중독이기까지 했다. 블로그는 귀찮아서 하다 말았고, 싸이월드 좀 하다가 트위터와페북으로 갈아탔지. 사실 나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 끊는 게 더 힘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이미지만으로 구성된우주였으니까." - P97
그녀는 서둘러 술과 안주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인터폰 벨소리는 멎어 있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반찬가게에서 사온 돌게장을 꺼내놓고술을 마셨다. 조금씩 술이 오르면서 그녀는 세운 무릎 위에 손을엇갈려 얹고 그 위에 턱을 고인 웅크린 자세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 P101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P106
통장에 입금된 여덟자리 숫자를 보고 나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한달에 35만원씩만 쓰던 그녀가 9년 5개월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나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 P107
관희는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탁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탁자 왼편의 햇살은 어느새 반짝이는얇은 끈의 두께로 줄어 있었다. 문정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고 생각했다. 그후에 그와 더 만난 건 얘기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헤어졌으니까. - P123
"다르죠. 달라요." "뭐가 그렇게 달라요?" "그앤 믿을 수가 있으니까요." "믿을 수가 있다?" - P127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 - P135
관희의 말대로 관주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작년에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산 캐논 600D 카메라는 돌고 돌아 오늘 오후에 문정에게 도착했다. 문정은 카메라를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돌길의 포석만 한 크기지만 무게는 그보다 훨씬 가벼웠다. 흔적도 없이 지워진 그들의 아이와 달리 카메라는 흠집 하나 없이 말짱했다. 메모리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의 버려진 헛간처럼 텅 비어있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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