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석주가 적극적으로 손을 본 원고에 대해서는 지나치다고 질타했고, 석주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원고에 대해서는 무성의하다고 호통쳤다. - P50

도대체 누가 알까 싶은 미세하게 틀어진 쪽 번호위치를 지적하고, 모든 도표를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 P51

그는 석주가 찾지 못한 오식을 말없이 바로잡았고, 석주가 원고 귀퉁이에 적어둔 제안을 간결하게 수정했다. 그래서 어느순간부터 교정지가 석주에겐 충고이고 질책이자 격려가 되었다. 표정도 말도 없는 그 교정지가 석주를 조용히 가르치는셈이었다. - P53

편집부에서 일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P55

무슨 일이든 모르는 채로 시작하는 법이지요. 일이란게 원래 그런 겁니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홍사원이 만들 수 있는책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봅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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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임이 돌아왔다. 요카타- 하고 기다란 숨을 뽑아내던이름 없는 할머니의 비밀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고양이의 흔적을 포착해냈던 우리 삶의 다정한 투시자. 살을 에는 차가움마저도 귓속말의 온기로 풀어낼 줄 아는 작가는 이제 팬데믹이라는 모진 상황을 통과해 더욱 끈질기게 세상을 바라본다. - P305

고양이에 대한 이 소설의 기초적인 밑그림은 이쯤에서 판가름이 난다.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믿고 싶어하는 것. 보고 싶고듣고 싶지만 사라졌고,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은것. 그래서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광장에 세워둔 그것. 즉, 고양이는 소망의 다른 이름이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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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던 해, 홍석주는 대학에 입학했다.
소도시에 위치한 그 종합대학의 사학과는 인기 있는 과는아니었지만 문과대학 내에서 가장 오래된 학과 중 하나였다.

석주는 거의 매주 책을 대출했다. 책 가장 뒷면, 도서 대출카드에 이름과 날짜, 회원 번호를 쓴 뒤 사서에게 제출하고확인을 받는 방식이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나달나달한책장은 낱장으로 분리되기 일쑤였고,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몇 페이지가 통째로 사라진 경우도 흔했다. 끝까지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책이 허다했지만 석주는 새로운 책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 P15

작품을 냉정하게 보라는 건 단점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 작품이 지닌 고유한 지점,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을발견하라는 의미기도 하죠. 좋은 점을 찾는 건 부족한 점을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부족한 부분에서 잠재성을 발견하는건 더 어려운 일이고요. - P25

점심값을 준다는 걸 깜빡했구나. 희주랑 같이 맛있는거먹고 들어와라, 졸업 축하한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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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라와 함께 앉기 위해서 무릎을 많이 구부려야 했다. 하지만 번호순은 담임이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기간에만 유효할 뿐 그 뒤의 자리 배정은 순전히 선생님의 권한이다. 담임이 권한을 남용해 아이들을 성적순대로 앉히는 일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 P11

소라가 물었다.
"작은유진이가 그 일∙∙∙∙∙∙." - P15

일이 아니라 사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문과 뉴스에 나오고 우리는 경찰서에도 가야 했으니까. 나는 입을다물었다. - P15

"대답은 어제 이미 했잖아. 난 아니라고!"
난 뒷말을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 P27

뭐 한다고 하지? 아, 뭐 한다고 하지? 가수 팬 카페에서노닥거리는 중이라고 할 수는 없다. - P34

"소설가가 되려면 개나 소나 다 되는 대학생보다 슈퍼마켓에서 배달하는 게 더 멋지지 않겠냐? 오토바이 타고 배달다니며 세상 경험을 하는 거지." - P39

내가 다니는 학원은 곳곳에 분원이 있다. 건우도 그 학원에 다니는지 몰랐다. 나는 전교 1등으로도 모자라 하필그 학원에 다니는 작은유진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날 자랑스러워하는 건우에게 그 유진이는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 P47

"도대체 어떤 여자가 한용운한테 배신을 때려서 이런 시를 쓰게 했나 몰라. 까짓것 여자가 떠난다고 하면 쿨하게 보내 줄 것이지 이렇게 지지리 궁상을 떨며 시는 써서 우리한테까지 피해를 주냐!" - P64

"지금은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아도 커서 후유증이 나타날수도 있대. 늘 조마조마해." - P71

아, 내게도 언제 다쳤는지 기억나지 않는 무릎의 흉터 같은게 아니었다. 기억을 떠올리자 벌레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불쾌해져 나는 진저리를 쳤다.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불쾌감이었다. 엄마가 말한 후유증이란 게 이런건가? - P73

우리 가족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퍼즐 판이 있다. 그 퍼즐판 속 내 모습 조각은 늘 불안정해 보인다. 그래서 퍼즐 판이 조금만 흔들려도 가장 먼저 튕겨 나갈 것 같다. 그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 내게주어진 자리의 모양이 그렇다. 공부 잘하고, 어른들에게 순종하며 예의 바른. - P83

기본 과목은 날마다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해 놓아야 한다.
국어 자습서를 펼쳤다. 지문으로 나온 소설을 읽는데 ‘성‘,
‘폭‘, ‘력‘자가 볼드체로 도드라졌다. - P89

"벌써부터 저 모양들이니 나중에 우리가 늙으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마음 단단히 먹고 있어야지. 안 그래, 여보?" - P93

"유진아, 이거 수리해 줄 테니 너 쓸래?"
액정 한쪽이 깨진 구닥다리 휴대폰이었다. - P105

하지만 엄마가 건우네 집을 부러워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긴 이르지만 나중에 만일 건우와 결혼하게 된다면 엄마가 지금 부러워하는 모든 게 내 것이 된다. 그런의미에서 엄마가 내게 휴대폰을 사 준 건 가치 있는 데 투자를 한 거다. 난 엄마를 끌어안았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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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와 나는 열기에 달궈진 시월에서 아이스커피를석 잔이나 마셨다. 세 번째 잔은 공짜였다. 단골을 위한서비스라고 했다. 커다란 선풍기 두 대가 소음을 내며돌아갔다. 헬리콥터를 탄 기분이었다. - P112

시커멓게 타고 바싹 말랐던 할머니가 답했다.
얼마 후에 할머니가 쓰러져 입원하셨는데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할머니는 입원하고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 P114

기다려보자. - P117

니나에게 결별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미소나 눈동자, 목소리를 기억에서 말살시켜버리는 일이었다. 그건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P119

이상한 건 엄마야.
그렇게 말해버렸다. - P120

하나도 슬프지 않아. 너는 괜찮을 거니까. 괜찮아야하니까. - P121

상처에 딱지가 생기지 않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어. 희수야. 내가 너에게 딱지가 생기지 않는 상처를준적이 있니? - P122

짹짹짹.
새가 운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 P126

니나에게 답장이 왔다.
딱 한 줄이었다.
나는 새가 울 때 함께 울어본 적이 있어요. - P129

학생들,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내렸다. 버스는 점점머리 희끗한 사람들의 차지가 됐다. 그들은 늘 창 너머를 애틋하게 바라본다. 살면서 봤던 수없이 많은 풍경을일일이 헤아리는 사람들처럼. - P141

아버지, 아버지가 너무 무거워.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 P143

갔다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나는 그런 사람들이대단한 것 같아요. 그래도 어쨌든 가잖아요. 힘들게 갔다가 힘겹게 돌아올 줄 알면서. 타인에게 가는 길도 그런 길 같아요. 힘들게 갔다가 힘겹게 돌아오는 거. - P146

내 삶이 내게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자유로워진다. - P154

주말에 눈이 온대요.
금요일마다 승호 씨에게 문자가 온다. 틀린 일기예보가 전부지만, 나는 그 한 줄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이어쓰는 상상을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창문을 열고 냄새를맡는다. 차고 축축한 공기. 정말 눈이 올지도 모르겠다. - P156

동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삶이자여기에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하나의 세계처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혜린을 통해 알았다. 페른베. 먼 곳에 가닿고 싶어 하는 마음. - P158

소설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생이라고 믿게됐다. 아직 만나지 못한 혹은 놓치고 돌아선 나와 당신이라고.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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