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인희는핸들을 잡은 채로 앞 유리에 천천히 내려앉는 하얗고 커다란눈송이를 보았다. 실제가 아니라 가상의 배경에서 내리는 것같았다. 눈이 유리에 점점이 붙어서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 P161
귀가한 인희는 식탁에 앉아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채점했다. 밤 열시가 넘었는데도 재영은 전화하지 않았다. -원룸 어떻게 할 거야? 곧 12월이야. - P165
메시지를 보낸 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인희는 가속페달을밟았다. 인희가 기다리는 일들은 너무 멀리서 더디게 오거나인희를 지나쳐 갔다. - P167
미용사는 이를 악물면 머리에 열이올라 정수리 탈모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미용사에게 손으로머리카락을 꼬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카락을 뽑는다는 얘기는하지 않았다. - P171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마자 인희는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더운 김과 묵직한 커피 향이 차고 건조한 얼굴을 덮었다. 창가에 서서 뜨거운 커피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창틀 앞에는 새끼손가락만한 장식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 P174
"너는 여전하구나. 불리하면 입 다물고 뒤로 숨고." 인희의 목소리가 조용한 차 안에 울렸다. - P177
박스 안에 있던 두통약을 남은 커피와 함께 삼켰다. 예전이나지금이나 산다는 건 오래된 책장 앞에서 서성이는 일 같았다. 칸칸마다 책을 쌓아두어 더는 꽃을 데가 없이 빽빽한데 정작필요한 책은 찾지 못했다. - P178
인희는 소파에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컵 안에 있던티백을 탁자 위의 다른 티백들 옆에 꺼내놓고, 컵에 물을 가득담아 스킨답서스 화분의 흙 위에 고르게 부었다. 화분 받침에물이 조금 고였다. 밤이 깊었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인희•는 코트 주머니 안에 든 하프 천사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웠던조각상이 조금 따뜻해졌다. - P184
정팀장은 거기 의사가 아주 잘 본다면서, 우리 와이프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도수 치료 몇 번 받았는데 무뚝뚝하고 힘센것도 닮았더라고요. 하며 실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치료 얘기가 끝나자 아까 대표님이 찾으시던데, 했다. 동희는 알았다고, 공동구매 모집 페이지가 완성되면 보내달라고 한 뒤 전화를끊었다. - P189
고객상담팀을 거기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동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먼 곳에서날아온 공이 얼굴을 강타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너무 얼얼해서 동희는 휴대폰을 든 채로 잠시 눈을 감았다. - P192
의사는 되도록 움직이지 말고 발을 심장보다 높이 두라고했다. 집에 쌀 있죠? 에코백에 꽉 채워서 단단하게 만든 다음그 위에 발 올려놓으면 좋아요. 그러고는 두 손을 벌려 어느정도 높이로 만들면 되는지 보여주었다. - P197
차를 한 모금 마신 대표의 안경 렌즈에 김이 살짝 서렸다. 동희보다 두 살 많은 대표는 사십대 중반부터 염색을 그만두고 안경을 썼다. 희끗한 단발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명품브랜드의 안경을 걸친 모습은 성공한 여성 사업가처럼 보였다. 동희는 대표의 머리가 검고 풍성하던 시절부터 같이 일했다 - P201
동희는 그러자고 대답하며 천천히 목발을 움직였다. 화원에서 화분을 고르는 정팀장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식물을 구경하는 모습엔찡한 구석이 있었다. - P208
동희는 데님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아직 뺨에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직원을 바라보며 주머니 안의 명판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지 않다고 답하기엔 직원이 너무 어려 보였다. 동희는 괜찮다. 와 괜찮지 않다. 사이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직원의 앞치마에 묻은 얼룩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 P218
밤은 불안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의 확장을 막지 않는다. 밤은 윤곽선이 없으며 그 자체로 나와 접촉한다는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경계 없이 커져버린 불안에 인물들은 잠식당한다. - P225
있다. 동희가 건너야 할 그 밤은 조금 쓸쓸하고, 영원할 것처럼 길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기만의밤일 것이다. - P235
『밤이 영원할 것처럼』은 달빛이 내려앉은 밤의 풍경을 떠올리게한다. 은은하고 쓸쓸한, 하지만 아름다운 빛의 풍경. 달빛이 비치는 곳에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른다. 타인의 내면으로 깊이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우리에게 몇 번이나 주어질까. 훌륭한 소설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각각의 단편을 읽고 멈추어 숨을 고를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소비하고 소모되는 내가 아니라 인간다움을 느끼고 생각하는 내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책을 읽는 시간이 내게는 특별하고 귀했다. 좋은 소설이 주는 내적 충만함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_최은영(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