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나 별거 아닌 사람이었던 걸까. - P155

이것이 그 일요일의 전말, 술에 폭 잠긴 채 생각했다. - P158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조금 황당해져서, 나는 술에 통통 불어난 손가락으로 괜히 미간을 벅벅 긁었다. 그걸 납득하고 나니, 완전히 별거 아닌 게 됐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겠지만 확실히 단단하게 웅크려얼어붙어 있던 마음 가장자리가 조금 노골노골해진것 같기는 했다. 이거 이 술 덕분일까. 여기에 넣었던가루 중에 뭔가가 진짜 효력을 발휘한 걸까. 신기하네, 정말로 신기해. - P159

입에 문 술을 꿀꺽 삼켰다. 술이 독한 것인지 기억이 독한 것인지, 금세 귀뿌리며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술잔을 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그 뜨끈한 감각이 머리까지 치밀어올라 이윽고 눈시울을 꾹 누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금세 커다란 눈물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 무릎을 적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 P174

나의 애인, 혜원은 오늘부로 야쿠르트 아줌마가 되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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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너가 감지되었습니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 주세요. - P111

"민호야, 나 이제 괜찮아. 너 다 용서할 수 있어"
영인이 빠르게 말했다. - P113

"영인이한텐 너무 고마워요. 사실 저도 이게 훨씬좋고요. 다 좋은데, 제가 이렇게 느끼는 게 미안할 만큼 다 좋은데, 그래도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가끔 들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저뿐만이 아니라...………영인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 P127

일은 잠시 휴게소에 들렀을 때 일어났다. 차에서내린 영욱 씨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주머니에서지갑을 꺼내 쥐어 주었다.
"먹고 싶은 거 다 사요,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만!" - P131

"전 헤어지면 무조건 감정전이를 해요. 얼마나 좋아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고, 저에게는 더 이상 이 사랑이 필요가 없고, 서로 윈윈이잖아요." - P134

사실 이 기억-담금주라는 것이 전부터 궁금하긴했다. 이름 그대로 인간의 기억을 우려내 담그는 술,
그것이 싹 익으면 참으로 맛난 술이 된다지. - P141

4. 유리병에 들어가 앉습니다. 가능하다면 모두 탈의한 상태가 좋습니다만, 속옷 정도는 입어도 상관없습니다. 편안한자세를 취한 뒤 괴로운 기억을 집중적으로 떠올립니다. 위과정을 하루에 1회, 매일 비슷한 시간에 반복하세요. - P145

술이 익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기억이 모두 술에녹아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싶은 순간에 주조를 멈추면 됩니다. 잘 모르겠다면 술맛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술이 다 되었는지 아닌지는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P145

-헤어짐, 상실, 사별, 번복될 수 없는 이별- 배신, 배반, 신뢰에 치명적인 타격-두려움, 불안, 미래의 특정 상황에 대한 공포-식욕, 성욕, 권력욕, 인정욕 등 주체할 수 없는 특정 욕구-우울, 조울, 특정한 원인이 없는 심리적 괴로움 - P148

나는 박스를 뜯었던 커터칼을 도로 집어들고 유리병 앞에 섰다. 다섯 개의 비닐 포대를 모두 뜯어 병안에 쏟아부었다. 서로 미묘하게 색이 다른 가루들이차르르, 바닥에 소복이 쌓였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망해도 어쩔 수 없지 싶은 심정으로 비닐 포대를톡톡 털어 모서리에 모인 가루까지 몽땅 털어냈다. - P150

차라리 방금 불붙은 듯 뜨거운 금단의 사랑 같은느낌이었다면 조금은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가끔 그런 게 그리울 때가 있었으니까.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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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손을 쓰지 않는다.
손이 손을 부르지 않는다. - P95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이 있었다.
사람과 자연 사이에 손이 있었다.
나와 너 사이에 손이 있었다. - P96

누군가 뺨을 어루만져줄 때온몸의 세포들이 화약처럼 불붙는 이유는상대방이 손으로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머리와 가슴으로가요온몸으로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 P98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 P101

헤어질 수 있는 자격은 그때서야 생기는 것이다.
먼 훗날, 아주 먼 곳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렇다고 후회하지도 않으며추억할 수 있는 권한은 그때서야 가지게 되는 것이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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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네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나는 평지 특화형 동물로서지형지물에 약하다 너로 인해방향감각을 상실한다 - P52

살아간다는 말보다 서늘하다는 말이 더 적절하다나는 네가 하는 말을 ‘다‘ 받아 적는다여기에서 ‘다‘는 사랑의 노동적 측면이다 - P52

또다른 나의 모습이 번거롭다.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피는 왜 마르지 않았을까. 이 모두를 종합해볼 때 상처는 생기기 전부터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 P55

객실에서 나와 복도를 쭉 걸으면 화장실이 나오는데 그사이에 극장이 있다. 벽의 일부가 허물어졌으며, 내려다보면 스크린이 보인다. 누군가 벽을 헐어 극장을 발굴한 것처럼. 좌석은 돌계단이고 쭉 내려가면 첫번째 열에 앉아 영화를 시청할 수 있다. - P58

이 호텔에서 복도를 오가는 방향은 삶의 방향이며 극장으로 내려가는 방향은 도망의 방향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나의섣부른 판단이다. - P59

나는 일기장에 쓸 말이 있다. 삶의 옆구리에는극장이 붙어 있어서 원하면 언제든지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데, 극장은 언제나 공포영화만을 상영하고 나는 이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든다고. - P60

-너는 너무 많은 시간과 마음을 요괴에게 쏟고 있어-그러라고 요괴가 있는 거니까 - P66

지말: 저는 식물을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모래인간: 식물을 키운다는 건 안 죽이는 연습을 하는 거야. - P72

아람부루사발라는 자기 전에 엄마가 껴안아줄 때면 근심에 싸이곤 했다 어떤 동화책에 따르면 포옹할 때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이 0.001g씩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주많은 포옹을 받은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영혼이 0g이 되어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었다 아람부루사발라는 이를덜덜 떨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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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고 있었구나.
아파트 발코니에 선 채 허공에서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는,
그러다가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가기도 하는 눈송이를 하염없이 건너다보며 승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치 눈이 내리는 것이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라도 된다는 듯이. - P9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 P10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분쟁 지역에 가서 목숨을 담보로 사진을 찍어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면서도 인정과 과시에 대한 조급함 없이시종일관 담담했던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11

어쩌면 지유가 세상에 온 순간부터 자신은 지유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친구가 자신에게 있었다고.
카메라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빛을 좇던 친구가있었다고 말이다. - P17

반장,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 P19

왼쪽 다리의 절반을 잃은 이후 그녀는 더이상 분쟁 지역을활보하며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의족으로 균형을 유지하며걷는 건 가능했지만 단지 그뿐, 빨리 걷거나 뛰는 건 사실상불가능했다. 통증 때문이었다. - P25

콜린의 일생을 한 편의 짧은 영상으로 제작하는 일...... - P26

독일 드레스덴에 소이탄을 퍼부은 영국 공군 소속의 조종사였던 아버지와 평생에 걸쳐 분쟁의 현장을 사진으로 증명하며 반전운동을 한 그의 아들, 그들의 불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 P27

일산에서의 인터뷰가 1월에 있었고 그가 병실을 찾아온 게같은 해 11월이었으니, 그 질문은 그 기간 동안 그가 열두 살의 그녀를 기억해냈다는 걸, 그러니까 열두 살의 그녀가 배고픔과 외로움을 혼자 해결해야 했던 그 방이 그의 머릿속에서온전히 복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P30

어느 순간 태엽이 다 풀린 스노볼은 작동을 멈췄다. 승준은스노볼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스노볼의 의미를 승준은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러니까 어른이 되어 그녀가 블로그에 남긴 편지를 읽은 뒤에야 알게 될 터였다.
"학교에는 비밀로 해줘." - P43

약속은 어렵지 않게 잡혔다. 먼저 만남을 제안한 사람은 승준 자신인데도, 약속 장소와 시간을 조율하는 내내 어색해했던기억이 났다. 그때껏 승준은 인터뷰이와 사적으로 따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을 느껴본 적도 없었으니까.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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