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마침 기적적으로, 등 뒤를 쌔액 하고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게 자전거를 탄 사람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소리질렀다. 저기요. 저기요오, 잠시만요, 119 좀, 119 좀 불러 주세요오오오. 멀어지던 자전거 후미등의 빨간 불빛이 멈춰섰다. 이윽고 그것이 되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살았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 P207

안 아프게 해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네, 제발요, 하고 말했고 그러자마자 고통은 없어졌다. 나는 조금씩 무릎에 힘을주어 보았다. 다치기 전처럼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였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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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멜로디
조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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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숨으로, 환한 진심으로 겨울같이 시린 마음들을 지나치지 않고 멈추어 꿰어낸 이야기의 조각보. 그 너비와 두께를 펼쳐내어 애써 덮어주는 미더운 작가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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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전시실은 권은이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들로 채워져있었다. - P221

그 사진과 사진에 대한 권은의 설명이 실려 있었다. 권은은 이렇게 썼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찍은 후지사의 반자동 필름카메라는 열두 살의 내게도 살 자격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촬영을 떠나기 전날이면 이 필름카메라를 한 장씩 찍으며 내가 왜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않으려 했다. - P222

네가 이미 나를 살린 적 있다는 걸......
반장,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승준은 ‘시작‘이라는 제목의 그 사진 앞에서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P223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그 피로감을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들에게 전가하는 영국 사람들얄궂게도 그들은대개 나스차 자매처럼 이민자들이었다-을 대할 때, 아무도전쟁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할 때,
목이 졸리는 듯한 두려움에 잠식된다고도...... - P225

"왜, 초조해?"
민영이 물었다.
"그래 보여?"
"초조하면 두 손으로 괜히 무릎을 쓸잖아. 몰랐어?"
・그랬나." - P227

반장 때문에 권은이 죽었다는 반 아이들의 상상 속 목소리가 무서웠던 것도 맞지만, 권은의 방에서 나와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그는 다음번 권은에게 갖다줄 무언가를 이미정해놓곤 했다. - P229

"실은, 난민 캠프 촬영을 마치면 혼자서라도 가자지구로 넘어갈 생각이에요."
"거긴 작년 10월부터 국경이 봉쇄됐다고 들었는데, 가능한일이에요?" - P235

"그래, 양쪽 다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 하지만 민간인이특히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 지금은 전쟁이 오히려 명분이 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어. 범죄에 대한 명분 말이야." - P299

한 발 더 다가온 살마가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다치지 마,
라고 말했다.
"다시는, 절대로..…………"
그 말은 단순한 당부가 아니라 그녀의 시간을 호위하는 주문이 되리란 걸, 그 순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 P241

그녀와 그는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눈은 아직 쌓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새겨지는 발자국을 상상하는 건어렵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열두 살의 그녀가 빛을 담은조각배 같은 오목한 발자국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으리라. - P242

어딘가에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 카메라 너머 누군가를 감싸주기 위해.
그 사람의 슬픔을 나눠 갖기 위해. - P243

그 사랑이 늘 평탄한 건 아니었어.
도망치려 한 적도 있었지. - P246

"교체한 부품만 빼면 다 멀쩡하더라고. 스크래치도 거의 없고. 오래 썼을 텐데, 그만큼 앞으로 또 오래 쓸 거야."
카메라를 건네며 그가 말했고,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 P250

거울 속 세상과 그녀를 위해,
영원에서 와서 영원으로 가는 그 무한한 여행의 한가운데서,
멜로디와 함께…빛이,
모여들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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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우 - P109

그래, 바다가 보이느냐.
땅의 끝이 가까워졌느냐, 길이 좁아지느냐, 땅이 다소곳해지더냐, 크게 숨을 들이마셨느냐.
땅끝에 홀로, 우뚝 섰느냐, 근육은 팽팽한 것이냐, 정신은 훤칠한 것이냐.
그리하여, 바다의 끝이 보이느냐, 경계가 선명하게 보이느냐.
그렇다면, 돌아보지 말거라. 거기가 땅끝이라면 끝내, 돌아서지 말아라. 끝끝내 바다와 맞서거라. 마주하거라. - P110

벚꽃터널 안으로 한번 들어가보라. 거기 꽃그늘 뒤덮는또하나의 터널이 있거니와, 눈보다 두 귀가 훨씬 더 커진다.
온몸이 귀가 된다. 귀가 된 온몸은 얇은 스웨터와 면바지 속에서 저절로 더워진다. - P112

이런 시스템은 굳이 벚꽃터널 속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알아야 한다. 지구→ 식물의 뿌리 → 식물의 꽃→ 꿀벌벌꿀→ 인간? 이런 사슬이 이제는 멀리서도 다 보여야 한다(사실 ‘?‘만 빼면 일찍이 교과서에서 다 배운 내용이다). - P113

뒷날 20세기 말엽에, 전설을 전해 듣고, 온몸이 달아 섬주위에서 몇 날 밤을 지새우던 물 사내들은 안개 속에서 다들 익사하고 말았다지요. 아마.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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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재취업에 애를 쓰던 혜원의 직장이 결정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고 받아 온 유니폼도 내어릴적 기억과는 달리 꽤 세련되게 바뀌어 혜원에게찰떡같이 어울렸지만, 그렇지만, 유니폼에 챙 달린모자에 흰 장갑까지 끼고 서서는 어색하게 웃는 혜원을 보자 나는 속에서 치받쳐 오르는 이 말을 도저히참을 수가 없었다. 혜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P177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야쿠르트 아줌마와 보험 아줌마 커플. - P178

"그거 제일 많이 사가더라"
혜원이 다 까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P180

돈이라도 쥐고 있어야지, 늘그막에 기댈 남편도 자식도 없으면서, 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었고 분하게도 그 말에 담긴 악의를 감각하기도 전에 먼저 수긍해 버리고 말았다. 오 - P181

그러므로 그 돈 천만 원을 헐어서, 우리는 변기를고쳤다. 비용을 아끼려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양변기를 주문해 동네 철물점에 설치를 부탁했다. 변기 가격에다 출장비까지 합해 삼십 만 원이 들었다.
나머지 구백칠십 만원은, 저축했다. - P185

내가 졸업하고 직장을 구한 뒤에는 각자의 자취방을 정리하여 하나로 합쳤다. 비록 반지하지만 방이 세개나 있는 월셋집을 얻은 것이다. 보증금 이천에 월세오십, 관리비 오만 원. 관리비에는 주차장 사용료 만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둘 다 차는커녕 운전면허도 없었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도 조만간 생길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래, 그때는 - P193

그렇다. 지금은 피로를 팔아 피로한 삶을 사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는 그조차 할 수 없는 때가 올 것이다. 내 노동의 가치는 조금씩 떨어질 것이고 결국에는누구도 돈과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노쇠하고 병들어 고칠 곳투성이인 몸뚱이를 어디서도 찾아 주지 않을 것이다. - P199

그런데 이 노래의 끄트머리를 입속에서 돌돌 굴리다 보면 나는 문득 덜컥 불안해진다. 야쿠르트 없으면 요구르트를 달라는데, 그런데 요구르트도 없으면그땐 어떡하지. 야쿠르트도 요구르트도 그 비슷한 것도 없다면 그땐 뭘 줘야 하지.
다그러면 그다음엔,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까.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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