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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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수일님을 알게 된 계기는 1996년의 신문기사였었다. 그 때 교수님의 이름은 '무함마드 깐수'였고, 그의 체포는 그당시 꽤 화제가 되었더랬다.

그 후 다시 정수일님을 알게 된 것은 실크로드교류사에 대한 독서 덕분이었다. 그는 체포된 후 전향하였고,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엄청난 저작을 쏟아내며 한국의 실크로드학을 정립하였으며, 때마침 실크로드에 매혹되어있던 나는 그의 책을 몇 권 읽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1996년에 체포된 간첩 '무함마드 깐수'가 '정수일'과 동일인임을 알지는 못했더랬다. 2010년대의 어느 잡지에선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된 후 인터넷을 검색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정수일님은 한국 역사의 비극적 현실로 인한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조상은 일제의 조선 병합으로 인해 중국 연변에서 살게 되었고, 정수일은 중국에서 소수민족 출신 중국인으로 자랐다. 하지만 그는 천재였고, 조선족 출신이지만 베이징대학에 진학해 중국국비유학생 1호로 이집트 카이로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는 중국에서 유망한 외교관이었으나, 자신의 출신을 잊지 못해 1960년대에 북한으로 귀화하였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를 간첩으로 써먹고자 했고, 여러 신분세탁 루트를 통해 1984년에 필리핀 국적의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남한에 입국하였다. 하지만 남한에서 정수일님은 자신의 학문적 목적을 발견하였고, 결국한국의 실크로드학을 거의 혼자서 개척해내는 위업을 쌓게 된다.

나는 실크로드학을 개척해낼 수 있는 인물로 정수일뿐이 생각해낼 수 없다. 우선 정수일은 한국어 포함 무려 12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부터 한반도까지의 광대한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쓰여져 있는 원자료를 해석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학문적 여정에서 실크로드 지역에 관하여 언어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도 대단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만큼 실크로드학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는 인물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정수일 또한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기꺼이 실크로드학에 자신의 인생을 던진 것이다.

이 에세이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는 정수일이 옥중에서 자신의 인생을 반추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려했고, 그것이 중국에서의 출세길을 던지고 조국으로 돌아와, 결국 여러 격랑 속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고, 그것으로 민족에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 하는 결심을 말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정수일님에게는 안된 일이지만(그는 다시는 북한의 가족을 볼 수 없었다) 그가 남파간첩으로 남한에 오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나무위키에서도 쓰여져있는 말이지만, 정말 북한은 천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엄청난 천재 학자를 남한에 공짜로 넘겼다. 그리고 덕분에 남한 학계에서 중동과 실크로드에 대한 연구 수준이 엄청나게 깊어졌다.

정수일 교수는 결국 2025년 2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굴곡진 인생과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뒤로한 채.

19세기말 이후 한민족은 격동의 한 세월을 보냈고, 많은 이들이 그 세월 동안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그리하여 결국은 세계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우리 민족의 남은 과제는 통일이리라.

통일이 되어, 정수일 교수의 북한 가족이 남한에 있는 그의 묘소로 참배오는, 그런 미래를 나는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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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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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시대마다 소설가들은 훌륭한 작품들을 써내지만, 소설가도 인간인지라 자신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는 한다. 하지만 후세의 소설가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고 과거의 고전을 소재로 새로운 창조물을 완성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새로움과 관점을 안겨주곤 한다. 바로 이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처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출발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이다. 우리는 여주인공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에 주목하지만, 진 리스는 소설에서 허무하게 사라져버린 로체스터의 첫 부인 '버사'에 주목한다.

'제인 에어'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버사는 서인도제도 출신이며, 로체스터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형의 농간에 걸려 서인도제도까지 가서 버사와 결혼한다. 하지만 로체스터에게 버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부터 광기를 물려받은 미친 여성일 뿐이다. 로체스터에게 버사는 책임감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후세의 소설가 진 리스는 그런 버사에게 주목했다. 진 리스 또한 서인도제도 출신 여성이었고, 그러하기에 서인도제도에서 살고 있는 크리올 여인들이 가지는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진 리스는 '제인 에어'에서 쓰여진 버사의 서사에 격분했고, 결국 버사의 이야기를 다룬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완성해냈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인종에 따른 여성들의 계급관계다. 샬롯 브론테 또한 '제인 에어'에서 19세기 가부장사회에서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매력적인 여성을 그려내지만, 제인 에어는 결국 백인 여성이며, 그녀는 버사라는 크리올 여성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즉 그 당시에 깨어있는 여성이라 할 수 있는 샬롯 브론테에게도 식민지의 혼혈 여성에 대해서는 조금의 이해력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세기 영국 사회에서 식민지는 단지 수탈의 대상이었고, 식민지 사회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샬롯 브론테에게도 당연한 사고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같은 여성임에도 제국의 여성과 식민지 혼혈 여성간에도 계급이 존재했던 것이다.

진 리스는 이것을 파악했고, 버사를 너무나 아름다우면서도 불행한 삶을 살다 간 매력적인 여성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녀는 결코 제인 에어에 꿀리지 않는 강인한 여성이었으나, 제인 에어와는 달리 가부장제와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되어 버리고 만다.

솔직히 기존 소설을 다시 해석해 새로 써내는 소설들을 몇 번 만나봤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소설은 본 적 없었다. 정말 창의적인 재해석이 어떠한 것인지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대단한 소설이다. 나도 이런 날카로운 시선을 갖고 싶은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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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5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정말 압도적이죠. 저도 이 소설 읽으면서 너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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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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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는 주로 역사의 인물들에서 영감을 얻는가 보다. 내가 김훈 작가를 알게 된 계기인 '칼의 노래'에서부터해서 여러 작품들이 실존 인물들을 소재로 쓰여졌고, 이 책 '흑산'또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정약전이라 해서 그에 대해서만 쓴 것은 아니다. 정씨 삼형제는 모두 천주교와 얽혀 있었고, 그리햐여 이 책은 한국 천주교 초기의 신유박해가 주요 시대배경이 된다. 특히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이야말로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 아니었던가.

즉 이 소설에서는 왜 조선인들이 천주교에 이끌릴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게 되었는지가 자세히 나온다. 특히 정약전이 유배가는 과정에서나 흑산에서의 삶에서나 부정부패가 관료사회에 뿌리깊이 퍼져 있고, 정부는 제대로 된 통치를 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백성들이 혹독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어, 결국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천주교를 새로운 이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정약용도 마찬가지였거니와, 정약전도 절망에 주저앉지 않는다. 그는 결국 흑산에서 새 삶의 소명을 찾고 마침내 '자산어보'를 세상에 남길 의지를 가진다. 풍파가 몰아치는 세속사에서도 그는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는 것이다.

'흑산' 또한 김훈의 작품이며, 그리하여 역사속에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김훈답게 생생하게 그려낸다. 최근작에서는 안중근을 살려냈는데, 그 다음에 그릴 인물은 또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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