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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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출생지는 이란이다.  

그의 바램은 자신의 모국어로 쓴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출판하는 것이다. 즉 결말이 빛을 향해 열린 입구인 이야기를 쓰기위해 시작한 것으로 그간의 자신이 써 온 테두리에서 벗어나 희망의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란의 검열기관을 거쳐야하고 그 기관의 책임자인 포르피리페트로비치의 손을 거쳐야만 탄생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선 그가 어떤 장면을 읽었을 때 반대를 할지를 미리 상상하고 작가는 자신이 하고싶었던 진정한 이야기, 글에 쓰여진 실제이야기, 글은 쓰여졌지만 차마 검열에 걸릴까봐 줄을 그어간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란의 샤의 전제정치를 내리막길로 몰아넣은 이란의 대혁명은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작가은 한 구절 한 구절을 이루기까지 왜 이 글이 이렇게 쓰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나라인 이란의 상황과정과 전통적인 보수체계로 돌아선 나라의 상황에 따라서 남,녀 간의 접촉은 있을 수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남녀간의 로맨스를 이루어나가는지, 그 전개는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해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소설속에 작가가 때로는 주인공인 다라에게 말을하고 다라는 작가가 의도하진 않는 행동을 나서게되는 상황으로 가는 것까지 화술을 곁들여서 보여주기때문에 소설이라고도 할 수있고, 작가의 자신의 나라의 검열에서 오는 작가의 글쓰기의 한계에 부딪치는 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점에서 사실 보고서 형태를 띠고있다.  

집 안의 남자들이 아니면 접촉할 수 없는 이란에서 작가가 내세우는 여 주인공인 사라는 테헤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 정작 자신은 현대의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나라의 정책에 따라서 오래된 고대 시를 외워야만 하는 현실에서 어느 날 공공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빌리고자 하지만 없단 말을 듣게되고 그녀를 따라붙은 한 남자를 의식못한 채 집으로 오게된다.  

 일주일 간 그녀의 집 근처에서 노천에 펼쳐놓은 책을 파는 한 남자로부터 원하는 책을 사게 된 그녀는 책 속에 한 단어당 일정치 않게 점이 찍힌 것을 알게되고 이를 연결한 결과 한 통의 편지같은 내용을 읽게된다.  

사연인 즉슨 그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쫓아다닌 다라란 남성이 그녀가 원하는 책을 갖고 있었고 오랫동안 지켜봤단 말과 함께 다음 도서관에서 어린왕자를 빌리란 말로써 그들의 사랑은 시작이 된다.  

테헤란 대학에서 영화학을 전공하다 금지된 비도덕적 영화,비디오를 대여했단 죄목(우리가 보기엔 전혀 금지가 될 수없는 현시대의 유명 영화들이다. 다만 미국산이란 것이 걸릴뿐.)으로 감방에 갇히게 된 그는 도시를 떠나지 않겠단 약조하에 석방이되고 여전히 감시의 대상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페인트칠을 해 주면서 부모와 같이 살고있는 청년이다.  

이들의 관계는 근 1여년간 서로의 모습을 정면으로 보지도 못한 채 흘러가고 대학에서 자유에 죽음을/ 감금에 죽음을 이라는 피켓을 들고 찾아 온 그녀 앞에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숨죽인 만남을 지속한다.  

역기서 작가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있는 연인들의 만남서부터 설렘에 이르는 대화나 과정을 묘사하기까지 솔직한 자신의 글 솜씨를 꺼내놓길 망설인다.  

사라와 다라의 이름이 지어진 유래, 이란의 문학성이 내포하는 은유를 모르고선 나의 작품속에 들어있는 대화를 이해할 수없는 근거까지 들추어내면서 독자들이 검열이란 세계의 맛을 들어다 볼 수있게 한다.  

예를 들어 여인의 가슴이란 표현은 석류, 입술은 생김에 따라서 실크, 루비, 애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자면 자연과꽃의 비유하는 옛 시인의 이야기를 들추어내며 이란의 고전 문학의 세계로 이끌기도 하고 둘이 만나서 코코아를 마시는 장면의 대화에선, 

사라가 말한다. "아주 뜨거워요." 

다라가 말한다. "내것 역시 그러네요." 

정작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부분에선 과감히 줄을 그어가면서 대신 훨씬 은유적이고 검열관이 넘어가길 바라는 생각에서 다른 분위기의 말로 마무리를 짓는 행위를 보여준다.  

따라서 한 글에 작가가 검열관에게 보여주는 대사와 그 옆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왜 이런 이야기를 쓰는지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어법에 대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기에 다소 소설속의 남녀간의 이야기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으나 작가 자신의 비유와 설명까지 들어야히기에 처음은 혼동이 올 수있다.  

작가는 또 검열관 외에 이란에선 나라의 일부 지성인들괴 비평가들의 검열또한 있기에 쉽게 한 문장을 쓰고서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단 사실도 말해준다.  

즉 사라와 다라의 통화장면을 놓고서도 누가 먼저 거느냐에 따라서 지성인들은 독방까지 간 다라의 행동이 왜 먼저 걸어야하는 것으로 따질 만큼 참을성이 없단 뜻으로, 비평가인 페미니스트 입장에선 남성우월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쓴 글이란 것으로 비판을 받는 현실의 양갈래의 힘든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이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은 너무나 기기묘묘해서 부연설명 없이는 이란인 아닌 사람들이 이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불가등한 지경이다.-p 295  

작가의 위의 말처럼 끝내 두 연인의 사랑의 결말에 대해선 끝까지 마무리 짓지못하고  

작가 자신은 서둘러서 카펫을 타고서라도 집네 도착해  문을 걸어 잠그어야 한다것 뿐... 이란 말로 매듭을 지으면서 독자들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한 숨 빠지게 만들지만 문학을 함에 있어서 작가로서 자신의 온전한 표현방식을 포기하면서까지 검열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는 쓸 수없는, 그래서 이 글을 완성했어도 이란에선 출판될 수없음을 알기에 작가의 고통스런 창작의 노력은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문학작품을 보여준다.  

밀폐된 사회란 느낌이 드는 이란이란 나라에서 미국에 현지 살고 있는 이란작가의 작품이기에 현시대를 같이 살고있는 세계의 문학 독자들에게 아라비안나이트에서나 가능할 은유의 세계와 코카콜라, 밀란쿤데라, 미국의 영화을 곁들여서 글을 비유하는 솜씨는 또 다른 그의 작품세계를 기다리게 하는 흥분을 준다.  

비록 검열이 아무리 심하다해도 다라와 사라는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의 만남을 갖는다는 설정엔 뜨거운 사랑 앞에선 이마저도 무의미함을, 조마조마한 사랑의 줄타기같은 아슬함을, 그리고 끝내는 검열에 맞서 자신이 생각한대로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 작가에 대해 위로를 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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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양장)
김려령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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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년전  태희는 오명랑이란 이름으로 동화작가로 등단한다.  

온 가족의 축하와 자신도 곧 유명작가의 대열에 낄 것이란 희망은 이렇다할 인기작품을 내놓지 못하자 식구들의 눈치가 보이고 내친김에 이야기 공부방을 개설하고 아이들 모집에 나선다.  

 

잘 듣는 아이가 말도 잘한다. 

선착순 소수 정예모집! 

1개월 무료수강! 

-동화작가 오명랑의 이야기 듣기교실- 

하지만 정작 모인 학생은 총 3명 

영어학원 가기 싫어서 여 동생을 데리고 온 5 학년 종원이, 그리고 여동생 1학년인 소원이, 같은 학년이지만 반은 다른 5학년 나경이-  

이 세 명 앞에서 명랑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시작할까 하다가 세상의 그 누구에게도 발표한 적이 없는 건널목씨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리랑 아파트 후문을 거쳐서 가면 바로 초등학교가 나온다.  

이 길엔 신호등도, 건널목도 없이 그냥 아이들이 대충 차가 오지 않으면 건너가기 일쑤다.  

어느 날 이 아파트에 살고있는 쌍둥이 형제가 길을 건너다가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길을 건너게된다.  

 그런데 이 아저씨의 머리에 있는 모자가 이상하다. 앞 뒤는 빨간색, 양 옆엔 초록색 동그라미가 그려져있고 길을 건널때를 대비에 어깨에 메고있던 카페트를 펼치자 그 카페트엔 하얀 줄이 그어져 있는 영락없는 건널목 표시가 된다.  

 멀리서 보고 운전하던 차들도 그 표시를 알아보고 이런 일이 계속되자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 (즉 복숭아를 건널목씨에게 준 인연으로 복숭아 할머니라 불린다. ), 마을 부녀회장, 그리고 경비원 아저씨의 성원에 힘입어 기존에 살던 팔각정이 있는 고물상 집 옆방에 살던 곳에서 빈 경비실에서 지내게된다.  

 성실한 모습과 어린이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쏟는 그에게 어느 날 1502호에 살고 있는 도희란 어린이가 부모가 싸움을 하는 것을 피해 밖에 있는 것을 보고 경비실에 있게 하고 이후부터 건널목씨가 알고 있는 태석이와 태희란 어린이  살고 있는 집을 같이 방문하게 된다.  

태희 아빠와 일로서 만나다가 태희네 아빠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돈을 벌러 나간 엄마로부터도 연락이 끊긴 상태인 그 남매들에게 건널목씨는 기름이며 음식등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6학년이던 도희는 자연히 그 아이들과 친하게 되고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 도희네는 친할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되면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지게 된다.  

 그 사이에 태희 엄마는 남편의 죽음도 모른 채 일하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오게되고 아이들로부터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후 건널목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했지만 이미 건널목씨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난 후였다.   

참으로 따뜻한 이야기를 접했다. 

이미 어린이용으로 나왔다고 하던데, 이번 책은 어른들도 읽을 수 있게 양장용으로 나온 것이란다.  

자신의 어린 쌍둥이들과 부인을 사고로 하늘로 보내고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며 같은 또래의 아리랑 아파트의 쌍둥이들에게 신경을 써 줬던 건널목씨는 도희란 어린이의 상처를 들어주고 보듬어주면서 또 다른 가슴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던 태석 남매에게도 그 누구도 할 수없는 온정을 베풀어준다.  

 명랑이 스스로 할쉽게 할 수없었던 ,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에게 풀어놓음으로서 엄마에 대한 서운함과 고마운 감정의 화해를 표현하는 계기가 되고, 도희와 계속 이어온 인연은 새언니란 자리로 한 식구가 되는 경위를 알려준다.  

어려울 때 단 한마디! 

나 힘들어요.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 할때 건널목씨처럼 어느 것 하나 바라지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수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든다.  

많은 걸 잃고도 많은 걸 주고 간 건널목씨란 표현이 정말 가슴을 울렸다.  

세상에 워낙에 무서운 일도 많이 일어나고 슬픈일도 많다보니 웬만한 사건엔 매마른 감정이 되었다는 내 심장에 이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한 편의 이야기는 아직도 식지않은 감성이 남아있었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을 갖게했다.  

 어딘가에서 또 다시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고 다시금 그들에게 안전한 건널목이 되어주려 길을 떠난 건널목씨같은 사람이 우리들 곁에도 항시 있었음 하는 욕심이 생기게하는 책이었다.  

 소중한 작은 씨앗이 서서히 뿌릴 잡고 그 뿌리가 줄기가되어 자신이 해 온 일에 대한 같은 심정으로 행동을 옮기는 태석의 행동에도 미소가 방긋지어진다.  

 어린 가슴에 엄마가 필요로 할 때 없었던 엄마의 존재를 엄마 나름대로의 사연을 듣게 된 명랑이가 이 이야기를 마치고 맘에 담아두었던 , 말을 내뱉음으로써 건널목씨는 또 하나의 선물을 주고 간 셈이다.  

 지금 혹시 책에 나와있는 모습의 이런 분을 보신분이 계신지?  

 그렇다면 소리없는 응원과(왜냐면 아저씨는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에 부담을 느낄 것이 확실하니까...)  태희와 태석이, 도희, 그리고 아리랑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다고... 

부담갖지 마시고 한 번쯤 꼭 들러서 어여쁘게 자란 우리들 모습을 보러오시라고.... 

꼭! 좀 전해주세요!!!  

 이렇게 외치고 싶지 않았을까?

참! 그리고 이 글을 읽었던 독자들에게도 그 잘생긴 (필시 이런 일을 하신 분들은 미남일 것이란 확신이 든다.) 얼굴도 보여주시는 기회를 주시면 더욱 감사하구요~ 

어쩌면 성인 문학보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글을 쓴다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읽은 내내 도희,태석,태희,종원,소원,나경이의 맘 속을 어쩌면 작가는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잘 풀어쓴 솜씨가 정말 궁금할 정도다. (아울러 새삼 부러움 반, 질투 반도 느낀다. ) 

완득이 때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우리들의 감성을 적신 이 짧지만 한 편의 소중한 감동을 주는 드라마 같은 소설에 여운이 내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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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피라예 - 가장 최고의 날들
자난 탄 지음, 김현수 옮김 / 라이프맵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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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는 치과의사, 엄마는 가정주부,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반대하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가는 피라예의 가족구성이다.  

피라예란 이름- 아버지가 터키의 금지시인인 나즘히크메트의 부인의 이름을 자신에게 지어준 것이고 문학과 연국에 빠져서 관련학과를 가려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마르마라대학 치과대학에 입학한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에신과 함께 수업을 듣던 중 같은 과 아리프를 만나게되고 그와 함께 시를 통해서 서로의 교감이 같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보이지않는 자신을 구속하려는 행동에 부담을 느낀 그녀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나는 사랑의 경험을 한다.  

 이후 항상 유쾌한 과 친구 외메르와 같이 어울려다니면서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못본척, 외메르는 그런 피라예가 아리프와 헤어진 원인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까봐 친구로 남길 자처하지만 때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보이곤 한다.  

 그러던 중 나이는 7살 위로 같은 과를 전공하는 하심베이(여기서 베이란 것은 영주을 뜻하는 과거의 의미가 있었으나 현재는 Mister란 의미로 쓰인단다. 하지만 글의 전개를 보면 과거의 의미를 함축한단 뜻으로 쓰였단 느낌이 강하다.) 를 우연히 주차장에서 보게되고 이내 그는 그녀에게 접근을 한다.   

실제로 아나톨리아의 대 평원의 다야르바키르의 대지주의 아들인 그는 외메르와도 친하고 기존에 사귀었던 다른 남자보다도 더 강한 믿음을 보여준다.

 빈틈없는 그의 접근에 자신도 그에 대한 확고한 사랑에 대한 감정이 확실하단 느낌도 없이 일사천리로 부모님과 그와의 인사, 그의 부모님의 이스탄불 방문에 이어서 그의 군 입대와 병역을 마침으로써 그와 피라예는 결혼에 이른다.  

 애초부터 이스탄불에서 치과개업을 원한 피라예는 하심의 줏대없는 친구에 대한 배신행동과 자신과는 일말의 의논 과정없이 고향에 개업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보면서 우여곡절을 겪게되고 둘 만의 살림을 원한 파라예의 뜻도 저버린 채 시가에 들어가 살게된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손님접대에 지친 피라예는 남편의 치과로 일을 하러가게되고 그 곳에서 자신의 전공인 치과치료에 몰두하게된다.  

 어느 날 남자환자를 마스크도 없이 치료를 하는것을 본 하심은 그녀에게 손찌검을 휘두르게되고 그녀의 피임사실을 알게 된 시어머니로부터 못마땅한 내색과 말을 듣게되면서 임신을 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딸 디즐레가 태어나고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둘째아이를 가질 계획은 다시 손자를 바라는 시부모님의 뜻을 알게되고 이를 위해 다시 임신에 돌입하게 되지만 불임판정을 받게된다.  

 남편인 하심의 뜻과는 달리 빨리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 피라예는 친정아버지가 쓰러졌단 소식에 딸과 함께 이스탄불로 가게되고 시일은 길어지면서 하심이 마을의 한 처녀와 결혼한 사실을 듣게된다.  

 배신감마저 이젠 물러가고 이혼을 결심한 피라예는 하심과 딸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그들만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둘째 부인격인 그녀가 미숙아를 출산하고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될 것이란 말에 하심은 점차 파라예에게 매달리게되고 피라예는 이미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음에도임신 6개월차에 접어든 사실마저 감추며 이스탄불에서 지낸다.  

 마지막까지 매달린 하심의 말을 거절하고 하심이 부탁한 태어날 아이인 남자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줄 것을 부탁해보지만 이마저도 거절 ,  쇼핑 후 돌아온 집에서 하심이 마을사람들과의 토지 문제로 다투다 총에 맞아 죽었단 소식을 듣게된다.  

 흠인력이 좋은 소설이었다.  

기존에 터키의 문학하면 오르한 파묵의 책만 읽다가 알게된 이 여작가의 눈으로 그려낸 터키의 실 생활 모습과 구.신세대간의 갈등, 관습이란 것에 얽매어 성인이 될 때까지 살다가 화려한 대 도시의 이스탄불에서의 자유분방한 활기넘치는 생활을 하는 하심의 여린 감정이 잘 그려내지고 있다.  

이스탄불의 개방적인 부모밑에서 살아 온 피라예란 여인의 소녀에서 성인의 여인으로서, 자신의 연애관, 결혼에 이르는 과정, 대도시와는 다른 완전한 구관습에 얽매어 사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간의 갈등,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확고함이라곤 찾아 볼 수없는 하심의 모습이 내내 피라예의 인생을 방황하게 하는데 일조를 한다.  

 읽으면서 이 소설이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기존의 남녀간의 사랑은 물론이고 같은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다르게 살아온 고부간의 갈등이 남의 일같지 않은 아주 친근한 예전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보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부엌에 대한 주도권과 아들과 며느리를 내 손안에 쥐고서 살고자 해 꾸며놓은 초록방이라 불린 신혼방, 그 안에서 피임약을 발견할 정도의 사생활 침입을 느낀 피라예로선 이해 할 수 없는 행동들이 하심이 보기엔 가족으로선 당연한 관심사요,  보이지않게 감추어두란 말에는 생각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어머니의 입장에선 자신의 말대로 고분고분하고 수더분한 전통적인 며느리감을 원했겠지만 매사에 활달하고 개방적이고 솔직하기까지한 피라예의 행동엔 너무나도 다른 환경차이를 느꼈을 심정과, 그런 시어머니와 불쑥 내뱉는 말 한마디에 비수를 꽃는 시누이의 행동엔 동,서양의 문물을 가지고 있는 터키의 종교생활과 세습적인 전통관계를  동양적인 시각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을 듯 싶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현대의 씨받이라고도 할 수있는 구습적인 자손에 대한 대 이음을 중요시여겨 억지로 결혼시킨 전략이나 그런 전략을 알고도 거절하지 못했던 하심의 행동엔 어쩔 수없었단 말로는 용서를 할 수없는 피라예의 생각이 부딪쳐 이혼까지 가게되는 상황을 유도하게 되지만 어쩌면 피라예 , 그녀 자신도 이런 생활에 어느정도 타협점을 가지고 끈기있게 나갔더라면 이런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너무 강한 자신의 확고한 유리성만 쌓다가 그 유리성이 깨지자 더는 이어붙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데에는 하심의 행동이 가장 큰 사유가 되겠지만, 그런 하심의 행동을 바라보고 결혼까지 했을 때에는 어느 정도의 포기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좀 더 현명한 결정를 할 수도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친정엄마의 잔소리부터 시작된다.  

가난한 공무원 맏아들인 첫 남친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프에대한 미래에 대한 부정한 설교를 읽고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엄마는 정말 똑같은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웃음이 나온다.  

하심과의 결혼과정에 이르러선 그 지방 고유의 민속춤 광경은 아마도 터키를 방문했거나 TV에서 나오는 민속춤을 본 사람이라면 책에서 나오는 그 광경이 생생할 정도로 , 예단 준비서부터 잔치에서 벌어지는 음식접대, 손님초대까지 어느 하나 놓칠 수없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단 느낌이 들 정도로 여 작가의 섬세한 필치 솜씨가 두드러진다.  (우리네의 예단 풍습이 많이 닮았다.)

 자신없인 못살겠단 하심의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이젠 딸 다즐레와 곧 태어날 남자아이를 생각하면 다시금 살아나가야 할 이유가 생긴 피라예 인생 이야기는 아쉬움과 함께 그녀가 곧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개업한 치과를 토대로 이혼한 언니와 함께 또 다른 생의 삶을 시작 할 것이란 희망을 보게 된 책이다.  

간만에 흡인력이 좋은 책을 만났단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마도 여성의 눈에 쓰인, 개방적인 여성이 관습과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인생의 한 길을 거쳐나가는 흐름이 자연스런것도 있겠지만 파묵의 작품만 읽다가 터키에도 여전히 이런 관습이 있다고 보여지는 관습과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생을 찾고자했던 피라예란 인물이 소설속에서만 살고있는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의 우리의 이웃같단 친근감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불법복제 작품이 많다는 말이 보여주듯이 터키 국민들뿐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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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쾌락의 역사 - 역사상 가장 강렬했던 쾌락의 기록
레이 로렌스 지음, 최기철 옮김 / 미래의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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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원후 1세기의 로마를 생각한다면 단연코 쾌락으로 물든 시대였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  감성의 만족,,, 

그렇다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그 시대의 로마에선 쾌락을 어떻게 즐겼으며 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 바로 이를 다룬 책이다.  

기원전보다 기원후 1세기의 로마에서의 쾌락의 주인공의 중심은 무소불위의 황제였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표현을 보자면 유약하고 병약하게 생겼지만 정말로 의외의 욕정을 가진 남자로서 친구, 친척의 부인,노예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이런일에만 쾌락을 쏟았던 것은 아니다. 

 농신제란 나라의 축제일을 맞아서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빈부의 차이를 구분하지않고 즐길 수있는 축제를 주도했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도 여전히 그의행보를 답습하고 있고 여기에 덧붙여서 건축이나 기념물세우기, 화재로 인한 복구같은 선정적인 정치도 곁들여했다. 이런 쾌락은 네로황제에 이르러서 소수자들이 즐기고 있던 내실에서의 은밀한 즐거움까지 백성들에게 전이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면 쾌락엔 이런 정도에 그쳤겠는가가 작가의 토대로 이뤄진 다음의 내용이다.  

로마인들은 우선 도시가 가질수 있는 기능에 충실함을 보인다. 즉, 도시의 아름다움을 주도했고 이는 폼페이우스의 최초의 석조극장 건설에 이어서 카이사르대에 이르러선 광장안에 그림을 전시함으로써 백성들이 찾아와서 즐길 수있는 볼거리의 쾌락을 주도했다.  

 그후 아그리파의 대규모 건축공사 , 네로 때의 대화재로 인한 빈민가의 재건축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베시파시우스 황제의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모토아래 콜 로세움과 평화의 신정 설립은 또 다른 이정표를 낳았으며 이는 로마의 도시계획이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새로운 길을 열게된다.  

이런 황제의 주도아래 로마의 시는 점차 황제가 지닌 권력에 맞춰 화려한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고 이는 곧 황제의 정원, 시민들에게 개방된 정원이란 이분법적으로 갈린다.  

그랬기에 귀족들은 황제에게 맞서지 않되 자신의 금권력으로 쉴 수있게 만든 지방의 빌라가 유행하게 된다. 이들 부자들은 빌라를 지음에 있어서 문화활동 외에 규칙적인 운동을 할 수있는 체력단련실을 마련함으로써 휴양의 목적과 함께 규칙적인 생활을 위시했음을 중요시 여겼다.  

다음으로 누릴 수 있는 쾌락은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목욕의 문화와 에로티시즘을 얘기 할 수있다.  

목욕은 다름 사람과 어울릴 수있는 쾌락을 선사했으며 목욕탕의 종류도 냉탕, 열탕, 온탕으로 나뉠만큼 세분화되었다.  

계급의 차이도 없을만큼 누구나 같이 옷을 벗고 할 수있는 유일한 문화였지만 이마저도 자신의 계급 위치에 따라서 본의 아니게 물의 온도차가 생기기 마련인 목욕탕에서 구분이 지어지게된다.  (한가한 귀족들은 한창 뜨거울 온도와 적정한 온도의 물을 즐길 수 있었으나 힘든 노동직이나 노예들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물의 온도도 내려간 이후에 사용할 수 있었다.) 

과거의 어두운 면이 강조된 목욕탕과 함께 유리의 발달로 인한 환한 빛이 들어오는 신식 목욕탕이 공존해 있었고 목욕탕 안에서의 체력단련 소리, 마사지사의 소리,물건을 파는 사람들의 소리까지듣게되었다.  

 이 목욕문화가 발달한 것에는 목욕이 주는 자체의 쾌감, 남들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 성적인 섹스를 좋아할 것이란 상대를 보고 느끼는 이상한 쾌감이 공존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목욕탕에서도 남을 의식하는 행동을 하지않을 수없는 현상이 발생하게되고 남,녀 혼탕도 존재했다.  

 미드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로마인들의 에로티시즘을 엿 볼 볼거리를 가지게된다.  

로마인들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 동성간의 성이란 개념이 없었으며, 춤추는 사내아이란 뜻의 키나에두스를 혐오했다.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성이란 것은 성 행위의 주도성을 중요시했기에 자신의몸을 상대방에게 허락함으로서 희열을 느끼는 수동적 행동의 이런 부류들을 이용하면서도 동급의 인간으로 생각을 안했다.  

가장 큰 충격은 우리가 알고있는 로마의 대표적 인물인 카이사르조차도 어릴 적 친척들로부터 항문 삽입의 성을 당했단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린남아가 성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에 아무런 장애가 안됬으며 이로 인해서 결혼에 이르러서는 정착하는 과정이 된다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진 성개념이란 사실이었다.  

또한 폼페이의 프레스코화에 나타난 남녀간의 성 묘사는  여러 난잡한 혼교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지만 실제론 로마인들의 성 생활은 은밀한 내실에서 이루어졋고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지는 장면들은  현대들이 상상한 결과임을 작가는 말해준다.  

이들이 느끼는 쾌락은 만찬문화와 산해진미, 와인으로 이어지며 음악과 춤으로 이어지는 연장선을 보인다.  

즉, 생선젖을 이용한 감칠맛을 내는 음식조리법, 오늘날의 와인의 등급효시가 되는 과정, 귀족들에게까지 퍼진 가무의 연장은 거리의 온갖 소음으로 이어지는 폐단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뭣보다 가장 크게 즐겼던 것은 폭력과 잔혹성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남에게 고통을 가하고 괴롭게 만들고 굴욕감을 주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존재- P317  

이 구절처럼 로마인들은 대형 원형경기장에서 예루살렘 정복후 포로가된 유대인들을 죄수로 삼아 온갖 잔혹함을 즐겼다. 더불어서 검투사라 불린 사람들의 존재도 인기가 급상승되는 시대를 연다.  

 이 밖에도 수집 열풍이 불어서 광적으로 모음으로써 또 다른 쾌락을 맛보게 되고  이에는 아주 다른 특이한 인간수집도 모으는 사례를 남긴다.  

곱추나 난쟁이 같은 사람들은 노예로서도 아주 비싼 값을 치르는 수집대상이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존재로 살아갔다.  

 이처럼 기원 후 1세기인100년 동안 이루어진 로마의 모든 종류의 쾌락을 되짚어 본 작가의 내용은 그간 알고 있었던 다분히 상투적인 쾌락의 본질을 넘어선 전혀 다른 종류의 쾌락을 선사함으로써 독자를 끌어당긴다.  

 위의 쾌락은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안에서 풍요롭게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작가는 말한다. 즉 건설로 인한 대규모 인원동원이나 자금의 흐름은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의 원리와 비교해보건대 가능함을 제시해 준다.  

비록 폼페이의 사창가를 기준으로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의 성생활을 단정짓기에 무리가 있으나 로마인들이 생각했던 성에 대한 생각이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있는 계기가됬고 뭣보다 이런 쾌락의 진출이 브리튼 섬에서까지 받아들이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우리가 당시의 유적지와 유물을 볼 수있는 기회를 제공했단 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만든다.  

금.은.동의 채굴과정은 지금의 지구 온난화와 대기오염을 유발시켰단 증거가 새삼 놀랍기만 했다.  

당시의 기준으로 알 수도 없었거니와 그럴 의도로 행하진 않았을 행동들이 지금의 지구가 앓고있는 병에 원조란 생각을 해 볼땐 미래의 또 다른 우리의 모습도 생각을 한 할수가없게 한다.  

 비록 당시의 쾌락이 기원후4세기 접어들면서 스토아 학파와 그리스도 정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폄하되고 재평가를 받는 과정과 서서히 몰락해가는 로마의 시대상 어쩔 수없이 후퇴의 길을 걷게됬지만 현재도 여전히 당시의 사람들이 즐겼던 잔혹성이 지금도 답습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엔 씁씁함을 지울수가 없었다.  

 언제나 읽어도 궁금한 로마시대의 각종 책들은 지루함을 모르게 만드는 , 캐어도 캐어도 계속 솟아나는 물줄기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 책도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책으로,특히 간간이 책 속에 프레스코화 벽화와 다시금 방문지를 생각케하는 장소는 읽는 재미를 더욱 쏠쏠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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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트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4 년전 소아성애자인 룬드는 자신이 물색해 오던 금발의 소녀와 그 친구인 9살 소녀들을 유인해서 참혹하게 죽이고 60시간 방치한 상태로 두었다 잡힌다.  

4 년이 흐른 후 30대 후반의 이혼남인 프레드리크 스테판손은 5살의 금발의 딸 마리와 살면서 그 자신이 어릴 적 겪었던 친아버지의 이유없는 매질에 자살을 한 형을 생각하며 마음 안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  

어느 날 오후 딸 마리가 유치원에 갈 것을 요구하게되고 프리드리크는 유치원 앞에서 낯은 익지만 누구인지는 생각이 나지않는 어느 학부형에게 인사를 하고 딸을 유치원에 들여보낸다.  

집필을 위해서 자신의 집필실이 있는 섬에서 우연히 TV를 통해 나온 탈옥수 룬드의 얼굴을 본 그는 유치원에서 인사를 한 사람이 바로 그 범인임을 알게된다.  

하지만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딸은 실종된 상태- 

나중에 딸 아이의 참혹한 모습으로 변한 모습이 발견되고 부검된 시체를 보면서 오열을 금치못한다.  

담당 부검의의 소견을 들은 두 형사 노장 에베트그렌스와 스벤은 전에 일어났던 소아성애의 현장과 같은 동일인이 확실하단 말과 함께 프리드리크에게 범인 룬드의 정황으로 봐서 다시 재범을 일으킬 소지가 있단 소릴 듣게된다.  

한편 성범죄자와 일반재소자들을 분리해서 감시하고 있는 감옥인 아스프소스에는 부인을 사랑하면서도 동료인 남자 닐스를 사랑하는 렌나트 오스카숀이란 책임자가 근무하고 있었고 그는 성범죄자만 관리하는 특별관리구역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룬드의 탈옥은 심한 사회적인 충격과 개인적인 일로 인해서 더욱 혼란을 가져오고 일반 재소자구역에서 잠시 머물다 특별구역으로 옮기는 과정에 있는 성범죄자들이 죽어나가는 현상에 대해서 범인을 알고는 있지만 심증은 잡을 수 없는 릴마센이란 사람에 대해 골머리를 않는다.  

딸을 묻고 오면서 프리드리크는 방송국에 일하는 친구를 통해서 범인 룬드가 예전에 택시를 몰았으며 택시의 반경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임을 확인, 그 근방을 배회하면서 한 때 장인이 소지하고 있던 엽총을 가지고 그를 찾아나선다.  

 마침내 그를 찾아낸 프리드리크는 엽총으로 그를 죽이게되고 라슈검사는 그를 살인모의 및 고의 살인죄로 체포를 당한다 (검사는 종신형 내지 10년형을 구형한다.).  

 이는 곧 자녀를 가진 전국의 부모로부터, 특히 딸을 가진 부모들로부터 열렬한 성원을 받으면서 일약 국민영웅으로 떠오르게 되고 변호사와 이를 호응하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판사를 제외한 배심원단의 전원일치로 무죄로 석방된다.  

 하지만 법 앞에서 어떠한 인간도 다른 인간을 단죄할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운 검사는 다시 항소를 하게되고 자신의 무력감과 딸을 잃은 프리드리크는  모든 것을 포기한단 것을 변호사에게 알림으로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이 사건은 많은 국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지어진다.  

 일시 수용소로 내정된 룬드가 머물렀던 그 감옥에 간 프리드리크는 일반 재소자 구역에 송치되고 교도관들이하는 말 사이사이에 성범죄니, 일시 수용이란 말을 들은 릴마센은 목욕탕에 들어간 프리드리크를  죽인다. 

 소설이란 것이 하나의 창작물이란 것을 염두에 보자면 이는 분명 창작에 불과한 얘기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분노라든가, 인간이 정해놓은 룰 안에 존재하는 법의 테두리, 정의, 법정구형, 같은 것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자신의 분신과같은 딸이 하루아침에 처참한 모습(책에서 비교한 모습은 참혹한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분노가 절로 일어난다.)을 본 아버지의 심정은 법이 보장해준다던 범인색출이나 탈옥을 방조한 교도관들의 행동, 자신의 딸 이외에도 범인의 행각은 자살로 이어지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란 형사의 말 한마디에 그 자신이 스스로 단죄에 나서게만든 허술함을 꼬집고 있다.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정의는 꼭 실현되어야하니까.- p287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영웅으로 거듭니려는 의도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온 국민의 성원을 입는 영웅으로 변해있었고 이런 과정 자체도 힘에 겨웠던 한 아버지의 진실된 모습 포착은 우리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일의 결과는 어이없게도 1차 법의 결과대로 무죄에 대한 확신으로 법이 해결할 수없다면 우리라도 나선다는 자체가 죄가 아니란 또 다른 현상을 나타내보여준다.  

 나체로 국기 앞에서 노랠 불렀던 예단이란 인물이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단 것에 분노를 느껴 그를 죽인 벵트쉐델룬드나, 그 밖의 폭력성 행동을 보이는 타 국민들이 자신의 죄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작가는 통렬히 꼬집어보여주고있다.  

 마약범으로 일생의 절반을 교도소에 수감중인 릴마센의 캐릭터는 작가 중 한 사람인 헬스트럼, 자신의 살아온 모습을 비쳐주고 있기에 그가 다른 일반 재소자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면서 성범죄자에 대한 살인동기의 행동은 프리드리크와 같이 또 다른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단죄할 행동의 근간엔 이러한 것이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도 던진다.  

 어이없게도 성범죄자로 알고 있던 프리드리크가 실은 룬드가 다시 재범을 노리고 대상으로 잡은 두 여아중 한 사람이 자신의 딸이었음을 알게되는 과정은 정말이지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는 끊을래야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를 연상시킨다.  

 요즘 도가니란 영화가 온 나라에 관심을 모으고있다.  

비록 이것이 이 소설과는 다른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지만 힘없는 여아를 상대로 한 범죄라는데에는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있다.  

 사형제도도 없고, 최고형인 종신형만 있는 이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런 인간이하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과현 종신형만이 최고인가? 그렇게 숱하게 정신병원에서 치료감호를 받았는데도 항상 경미한 결과로 나온 룬드를 보는 심정은 법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절차에서 정말로 확신을 가지고 이런 범인을 수용하고 죄에대한 확실한 단죄를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물어도물어도 해결의 끝이 안보이는 문제점을 준 소설이었다.  

 두 사람의 작가는 각기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언론계통에서, 한 사람은 어릴 적 3차례의 성폭행을 당하고 마약에 찌들어 감옥소를 드나들다 자신과 같은 재소자의 재활을 위해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 

취재차 만나서 이 책을 구상했다는데, 교도소안에서의 주도를 쥔 자와 그 안에서 보호를 받고 굽신거리는 생활을 하는 재소간의 계급질서 관계, 오로지 출세지향적인 것을 위해 이 사건의 중요성을 알고서 종신형을 내린 검사의 행동, 교도관들이라도, 때론 결코 법이 내린 결정엔 어느정도의 무리수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말들엔 인생사에 꼬이고 꼬인 여러가지의 해답을 내릴 순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생생한 교도소내의 생활이라든가, 심문하는 스타일, 변호인의 법을 이용한 변호을 위한 말들, 법 테두리안에서 오로지 법적인 구형만을 생각하는 검사로서의 한계, 심신이 지쳐가는 프리드리크란 아버지의 입장의 표현이 살아있는 느낌을 주기에 지루함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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