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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외할머니께 여쭤 본 적이 있다.
일제시대나 6.25를 거치면서 무엇이 가장 무서웠느냐고...
할머니는 전쟁, 그 자체가 주는 그 이상의 감정과 말로는 표현이 안된다고 하시면서 일제 때는 순사들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고 학교 다닐 때는 일본 말을 하지 못하면 매를 때렸다는 일본 선생에 대해서, 또 6.25 사변은 어휴~ 그 북한 공산당과 중국 놈들이라면 지금도 벌벌 떨린다고 하신 말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뇌리 속에 연일 기억 속에 휘몰아쳐 왔다.
매해 수상작에 대한 여러 가지 이름들이 있고, 그 가운데 2015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문학상이라고 하는 주류의 포함이 되긴 하지만 독특하게도 에세이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올 해에는 유력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나온 것을 선두로 누가 수상 할까에 대한, 미리 생각해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이 작가는 전혀 뜻밖에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이 작품을 대하면서 왜 한림원이 이 작가에게 수상을 안겨줬는지에 대한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작고 큰 싸움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탐욕과 그릇된 욕망에서 비롯된 점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침공당한 자신의 조국인 소련을 구하기 위해 겁 없이 뛰어든 어린 소녀들의 전쟁 회고록을 담고 그녀들의 생생한 녹취가 들어간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탄생을 시켰다.
이 책은 원래 1983년에 처음 작품으로 출간을 하려고 했으나 당국 검열에 의해 좌절이 되고 이후 1985년 첫 출간되었고, 2002년 저자는 검열에 걸려 내지 못했던 부분까지 추가하여 다시 책을 출간했다.
자신이 직접 찾아가 녹취록을 곁에 두고서 그녀들이 근 40여 년만에 풀어놓은 전쟁의 상흔과 사랑, 아픔, 그 트라우마와 지금의 삶 자체에 대한 두서없이 내뱉는 말들은 그 어떤 문학작품들보다도 더 심금을 울려준다.
맞다.
작가가 말했듯이 우리들은 전쟁이라는 소재를 접하는 문학작품들을 대할 때, 알게 모르게 남성적인 시각에 의해서 그려진 책들을 많이 대해왔고 내가 살기 위해서 적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남성적인 치열한 싸움에 근거한 배경만 이해를 했을 뿐, 여성으로서 전장에서 행한 일이라고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야전 병원의 간호사나 통신병 정도의 역할만 생각해 왔던 기존의 나의 생각을 바꿔버리게 한 책이기도 하다.

어느 한 주인공을 기준으로 삼아 그녀의 일생을 통틀어서 여성의 시각으로 본 전쟁이 아닌 저자 자신이 말했듯 이 작품은 일명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 작가 자신은 ‘소설-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를 통해서 새로운 변신을 보여준 작품이 아닌가 싶다.
코러스라 하면 요즘은 노래 부를 때 합창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여기서 뜻하는 바는 아마 위의 뜻도 포함이 되지만 '입은 다르나 목소리는 같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말이 한결같음을 이르는 말. 즉 이구동성이란 뜻이 더 어울릴 듯한 말이 아닌가 싶다.
서로가 겪은 전쟁의 기억을 더듬으며 한두 명씩 쏟아져나오는 말들이 모두 어우러져 하나의 큰 틀을 이룬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더욱 그런 느낌이 와 닿는다.
얼마 전 방송에서 방영된 프로그램 'tv 책을 보다'를 보니 바로 이 작가의 작품을 두고 여러 패널들이 나와서 작품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 자신의 태어난 배경을 무시하지 못하는 가족의 연대적인 출신과 활약은 그녀가 아마도 이런 작품을 당연하게 쓸 수밖에 없었단 것을 상기시키면서 여성들이 왜 전장에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전쟁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지, 그 전쟁 후에 남겨진 사람들과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추억까지 모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쟁이 일어나고 모두가 전장에 참여를 했을 그때의 그녀들은 16살 에서 19살, 때론 20살까지의 청춘들이었다.
당시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교육을 시킨 투철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어린 소녀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를 하게끔 유도를 했었고, 남성들보다도 여린 체력에 대한 차이, 여성으로서 맞는 치수가 없는 탓에 남성 군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큰 구두를 질질 끌어가며 진흙과 부상병을 이끌고 무기까지 가져와야 했던 전장에서의 그녀들은 이미 여성이 아닌 전쟁에서 살아 남아야 했던 한 인간이었으며, 남성과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모습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술로 이어진 이야기라고는 하나, 마치 우리나라의 할머니, 어머니들도 똑같이 이런 전쟁의 상처를 갖고 살아왔다는 동지애를 느끼게도 만드는 책이다.
- 둘째를 기다리고 있었어..... 두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고, 둘째를 임신 중이었지. 그런데 전쟁이 난 거야. 남편은 전선으로 떠났지. 나는 친정으로 가서 수술을 했어...... 그러니까, 그게 뭔지 알아? 임신중절 수술...... 물론 당시 낙태는 금지돼 있었지만.... 어떻게 낳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지.... 전쟁이라는데! 죽음이 판치는 세상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 -p 116
-나는 지금도 숲은 안가. 특히 늙은 참나무나 자작나무들이 자라는 곳은..... 그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 p 146
"내 전쟁에는 세 가지 냄새가 있어. 피냄시, 그리고 클로로포름과 요오드 냄새...."-p 239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p 338~339
가깝게는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 여성들이 참전했던 전쟁에 대한 상처와도 모두 똑같은 상처를 겪어왔단 점에서 전쟁이 주는 깊은 상처는 그 무엇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연출시킨다.
행군을 하면서 생리혈이 뚝뚝 떨어지는 땅을 모른 척 하면서 같이 행군하는 남자 군인들, 누이라고 부르며 죽는 군인들을 대하는 여성 간호사 군인, 몇 개의 대형 솥을 이고 지고 군대를 따라 다니면서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 여성 군인, 한 겨울에 피가 말라 붙은 군인복을 빠느라 손이 얼고 상처로 얼룩져 버린 고운 손, 자신의 가장 찬란하던 때가 전쟁 때였던 시기란 말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말이다.

여성이기에 비록 처참한 전장이라고 하지만 밝은 별을 보기 위해 보초를 자초한 사연, 죽음을 맞이할 때라도 벗겨진 자신의 모습보다는 온전한 자신의 모습이길 바라는 심정, 총탄이 날아올 때 팔과 얼굴 먼저 보호하게 되는 심리까지, 여성으로서 한시라도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애를 썼던 여성으로서의 행동을 읽을 때면 무엇이 이토록 이런 여인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을까를 원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전쟁이 끝났을 때, 그녀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을까?
화냥년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친정에도 가지 못하고 강에 투신한 우리나라 여성들이 있었듯이 전쟁의 결과는 그녀들을 오히려 자신의 전 행동들을 감추기 바쁘게 만들었고 친청 엄마는 돌아온 자신을 몰라봤으며, 가방을 싸 주며 오히려 동생들을 위해 집을 나가 달란 말까지 듣는 경우를 당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남성들은 우대를 받으며 훈장에 대한 보상을 받지만 전쟁에 참여한 여성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달리 한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청춘을 불사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전선에서 싸우고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남성 못지 않은 그녀들의 이력이 오히려 결혼이나 연애는 사회에서 받아주기기 힘이 든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한 배신감은 40년 간의 침묵을 강요하는 결과물로 낳는다.

전장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죽음으로 안타까움을 맞는 가운데 전쟁 전의 삶과 전쟁 후의 삶으로 나뉜 그녀들은 한 인간으로서 두 개의 인생을 산 두 사람이 같이 공존하는 모습을 대하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도 눈길을 끌지만 전쟁으로 인해 인생의 한 순간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그녀들에게 미안함마저 느끼게 된다.
치마를 입고 싶었고 화장과 예쁜 머리 치장과 멋진 남성과 춤을 추는 꿈을 꿨던 어린 소녀들이 한순간의 피를 보고 다시는 붉은 것을 보지 못하는 상흔의 상처는 누가 어루만져줘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 아닐까?


2차 세계대전이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맞물리고 비단 이 이야기가 저자가 취재한 여성들에 한해진 것만은 아닌 것인, 모든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 만큼 이제는 남성만의 시각으로 보여준 전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목소리를 통한 또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게 한 책이 아닌가 싶다.
적군과 아군으로 만나서 부상당해 한 병원에 누워 있지만 결국엔 이념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을 상기할 때 진정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나가는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말이 가슴에 두고두고 남는 책!
포스트가 없어질 때까지 연신 붙여가며 어느 대목 하나 놓칠 수 없는 책이기에 별 다섯 개로는 모자란다는 말이 어울리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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