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소디 인 베를린
구효서 지음 / 뿔(웅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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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이야기 속데 또 다른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글이다. 
그간 일제 식민시대를 겪으면서 원치 않았던 , 생존을 위해서, 강압에 의해서 고국을 떠나서 살아가야 했던 우리의 조상들의 한이 서린 얘기를 18세기에서 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흘러들어오기 까지 긴 흐름의 강을 작가는 음악이란 매개를 소재로 해서 엮어냈다.

일본인 하나코는 약사이자 60이 넘은 여인으로 40년 전에 헤어진 첫 사랑 야마가와 겐타로. 한국인 2세로 한국명은 김. 상.호 - 자살이란 죽음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가 홀연히 아무 언질도 없이 일본을 떠났고 독일로 유학 갔단 소릴 듣고서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 그에게  , 그가 남긴 다섯 줄의 유언 가운데 두 줄의 문장(" 아 , 이것은 모질지 못한 것이다. 모진 짓일까, 내가 늘 찾던, 내가 평생 가 닿고자 했던 곳이 하나코였다는 사실을 못내 고백 하는 것")이 과연 하나코 자신에겐 어떤 의미였는지 알기 위해서 그의 행적을 더듬어서 독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독일 체류자인 이 근호란 통역자를 대동하고서 그의 발자취를 역 추적하면서 이근호에게 겐타로가 평양에 소장되 있던 요한 힌터마이어란 사람에 대한 것을 적은 두루마리 뭉치를 보여주면서 이 사람과 겐타로 간의 이야기가 서로 나뉘어서  전개된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식과 자신의 음악 열정으로  우연히 하나코와 연결이 되고 18세의 처음 만남은 20세가 넘어가면서 사랑으로 변해가고 , 각 기관에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싶어 본 오디션에 번번히 낙방한 겐타로는 연주보다는 작곡이 어울린다는 생각에 독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집주인인 키르호프의 호응과 맥바흐 스승을 만나게 되고 우연히 발견한 요한 힌터마이어란 사람의 음악 기법이 자신의 창작 기법과 상당히 같다는 것을 알고 이를 추적하던 중 그의 조상이 사실은 독일인 아닌 조선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당시 동 베를린 도시를 방문 중  국가 안전보위부 방첩부에 이송이 되고  거기서 북한 대사관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 후 리명우란 사람으로 부터 TNF라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북에 입국.   TNF 열람 후에 복사 후 노동당 중앙 위원회 직속 기구인 35호실에 자신도 모르게 정보원이 되어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후 다시 독일에 온 그는 대한민국에서 그를 음악회에 초청하게 되고  공항에 내린 즉시 국가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다음 그들이 요구한 대로 진술을 하고 17년 복역 후 다시 독일로 와서 20년간 살다가 어느 날 자살로 마감한다. 

두루마리의 주인공 요한 힌터마이어는 교회의 오르간 풀무꾼으로 일하던  중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아이블링거에 의해 요한... 이라는 새 이름을 부여 받고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어느 날 무음으로 혼자 연습한 곡이 아이블링거에 의해서 연주된 사실을 알게 되고 이는 곧 두 사람간의 음악적 영감의 무급제공자란 사실과 그에 대한 결과임을 알게 된다. 이 후에 작곡 하란 요구를 받게 되고 스승의 제자인 크로마이어가 스승의 여동생인 레아에 대한 감정을 알게 된 후 집으로 소환이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점차 발표하는 곡마다 좋은 반응을 보인 요한과 스승 사이에 어느날 음악의 작곡을 함에 있어서 형식의  자유와 논리에 대한 이견을 보게 된다. 이에 고향으로 오게 된 요한은 아버지로 부터 조상의 기원이 sun이란 나라에서 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강제 징집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스승의 말 한마디로 풀려나게 되고 다시 스승 밑에서 일하게 되던 중 스승과 레아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보게 된다. 그 뒤 스승과 자신이 생각하는 신앙에 대한 차이로 인해서 이견을 보이게 되고 얼마 후 스승이 레아와 요한의 관계에 대한 증오와 질투, 그리고 스승의 고발로 교회 법원에 서게 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이 머물 곳이 아님을 알게 된다. 자신의 곡에 이견을 보였던 스승이 제자의 곡이란 발표를 했을 때엔 이미 요한은 멀리 멀리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나코는 겐타로의 자살에 의문을 갖고 시작하게 된 여정이 그가 40년 전 자신의 아버지의 반대로( 아버지는 일제 시대때 조선인에 학대한 전력이 있는 군인이었고 , 뭣보다 하나코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드러냄으로써) 독일로 가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 뒤이어 그의 주위 사람을 탐문해 가던 중 집주인  사망시 곁에 빌헬름이란 사람이 있었고 그가 잠적하자 그를 알고 있는 기고가 슈타인도르프를 찾아가게 된다. 그 곳에서 그가 쓴 랩소디 인 베를린이란 글을 보게 되고 그 속에 표현된 SS장군인 "뱀"이라 불린 사람이 집주인 이었으며, 트럼펫 연주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찾게 된 당시 10세 소년이었던 빌헬름이 켄타로와의 만남을 갖게 되면서 집주인은 심장마비로,  추측컨대 각종 기자들과 다른 사람들의 취재에 시달린 겐타로는 TNF의 글을 보는 상황과 맞물려서 자살이란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하나코와 이근호의 추리로 여정을 끝내게 된다. 

무척 긴 여정의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정말로 현실적인 일로 피부에 와 닿는 구절들이 많다.
 여기엔 오랜 디아스포라의 민족의 대표격인 나치하의 유대인들의 고단한 삶도 들어있고, 하나코의 아버지와 하나코의 관계, 레아와 아이블링거의 관계, 요한과 레아의 아련한 시선의 마주침과 겐타로와 하나코의 사랑얘기가 아주 절묘한 시점을 찾아서 맞물리는 톱니바퀴의 연상시킨다.
시대는 흘렀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어떤 흐름을 보여준다. 또한 요한 힌터마이어가  자신이 깨달은 삶과 죽음. 양쪽의 입력이 같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고 동쪽의 끝을 향해 계속 간다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글 속의 글엔, 겐타로- 그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일본에서 태어났고 스스로 다르지 않으려 했으나, 다르다고 규정당한 한인 2세의 디아스포라가 자리잡고 그 방황의 삶을 요한의 글을 읽어 봄으로써 자신이  가닿고자 했던 곳이 대한민국도 아니요, 일본도 아니요, 독일도 아닌 자신의 진심을 알아 줄  세상의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단 점에서 아련함이 더욱 전해져 온다.
 통역자  이근호 또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자신이 두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독일 이란 제 3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설정 또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이란 가슴으로 품어 본 글의 결말에선 다소 한 가닥의 작가의 뜻을 내비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1년이 흐른 후 겐타로의 음악회를 열게 함으로써 집주인 딸 에밀리, 그리고 맥바흔 교수를 위시해서 북에 있는 요한 힌터마이어의 가족들의 초청해 함께 음악을 듣게 된다는 사실엔 역사의 진실 속에 가려져 있었던, 알고는 있지만 애써 밝히지 않았던 우리네 조상들의 한 이 서린 역사의 한 단면을 작가는 기나긴 강의 흐름속에 세세히 그네들의 감정을 살펴서 써 내려간 글이 긴 여운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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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영혼의 편지 -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대인 여의사 릴리가 남긴 삶의 기록
마르틴 되리 지음, 조경수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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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의 자녀들은 아들 게르하르트, 딸 일제, 요한나, 에파만, 도테아가 있다. 그녀는1944년 3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기전 카셀 근교에 있는브라이테나우 노동 교정 수용소 밖으로 편지를 빼내었고  그리고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와 그녀들의 자녀들간의 오고 간 편지가 아들 게르하르트가 다른 형제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보관하고 있던 편지 250통, 나머지 자매들이 그 사실을 알고 서로가 알고 있었거나 모르는 사이 보낸 편지를 추려서 찾은 편지 300통이 합쳐져서 이 세상에 우리에게로 왔다.

 

1900년 아버지 요제프 슐리히터러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에서 태어난 릴리는 재학에서 의대를 전공했고, 그 와중에 개신교 신자이지만 카톨릭에 심취한 독일 청년 에른스트얀과  만남을 갖게 된다. 이 시기에 두 사람간의 오고 간 편지로 봐서는 릴리는 아주 적극적이었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아가씨라는 인상을 받는다. 첫 사랑과의 실패로 우울해 하던 얀의 감정을 때론 엄마처럼, 때론 누이같고 사랑스런 여인의 심성으로 보듬어 안아준다. 부모의 반대가 있었지만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연이어 자녀가 태어나면서 두 부부가 공동으로 임멘하우젠에서 병원을 차리게 되고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아돌프 히틀러가 제국총리로 임명되는 시기를 거쳐서 점차 국민전선과 좌파로 나라의 정당이 갈리는 시기가 있던 때였다. 나치의 집권으로 인해서 반유대주의가  확산이 되고 남편은 유대인과 결혼했다는 사실 하나로 병원 보이콧을 당하게 된다. 이 와중에 릴리의 동생 엘자는 영국으로 이주, 약리학을 공부하게 된다. 아이들의 진학과 해외송금도 막히는 사태가 오고 엘자의 노력으로 영국 이주가 가능해 졌지만 생업의 보장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를 하게 된다. 이후 유대인들은 연극 . 음악회 관람을 금지 당하게 되고 남편 얀은 이 와중에 대리의사 자격으로 병원을 돌봐주던 리타와 불륜관계를 맺게 되고 리타가 임신을 하게 되자 나라의 암묵적인 강압에 의해서 릴리와 이혼을 결정하고 리타와 재혼한다.

 

한편 릴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카셀로 이주하게 되고  아들 게르하르트는 방공대로 징집이 되어 나가게 되고 릴리는 게쉬타포에 체포되어 브라이테나우 노동교정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이후 아이들은 아빠와 살길 원하지만 거절 당하고 아이들끼리만 살게 된다.

여기서 부터  삶을 놓치게 될 때까지 기나긴 편지의 서신들이 오고 간다. 초기의 편지엔 금방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던 내용들이 들어있어서 음식 수급이 부족함에 따른 책, 푸딩가루, 핀셋. 거울 등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품목 요청을 하는 편지 구절이 나온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엄마 노릇을 하게 된 첫 딸 일제의 고통스런 마음과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는 편지의 내용도 나온다.  아들 또한 엄마의 바람대로 독서 하기를 노력하게 됬으며, 끝 마무리엔 시 구절을 적어 놓아서 한결 엄마의 마음을 놓이게 만들어 준다.

연합군의 카셀 대 공습 이후로 임멘하우젠으로 들어가서 생활하게 된 아이들이 리타와 겪는 심적 고통과 나치즘이 정한 인종계급 서열에 따른 피해를 받게 됨으로써 진학에 애로를 겪게 된다.

릴리와 주고 받은 편지의 내용중엔  집으로 곧 돌아가려면 교통 여비가 없으니 돈을 보내 달라는 것과 구두굽 갈 돈과 기차역에 마중 나올 수 있는 희망의 말을 주고 받는다. 이에 일제는 돈을 보내게 되고 얼마 후 계획된 대로 엄마를 석달 넘어서 만나게 된다.

''' 나의 단정했던 엄마가 얼마나 달라 보였던지, 엄마는 거친 옷감으로 도니 자루 같은 옷을 입고 맨발에 나막신을 신고 계셨고, 어금니가 하나 없었다. "시간은 십 분입니다." 라고 간수가 명령하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 일제가 엄마를 만나고 처음 본 모습을 적은 구절

 

엄마가 아빠에게 석방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부탁한단 말에 일제가 부탁을 했지만 얀은 내켜하지 않았고 이후의 편지에서도 다시 한 번 부탁을 했지만 성사되지를 못했다. 1994년 3. 17 일 카셀의 게슈타포가 그녀를 아우슈비츠에 넘기고  가는 당시에도 릴리는 편지에 머리핀, 바디 파우더, 치약 같은 생필품을 부탁한다. 편지에는 얀에게 다시 부탁함을, 아이들 고모인 로레에겐 아이들 돌봄에 있어서의 서운함을 표시한다. 이후 어떠한 일로 사망하게 되었는지 조차 모른 채 사망 통보만 받고 릴리는 그렇게 아이들 곁을 떠난다.

 

 

몇 년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둘러봤다. 말로만 듣던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둘러본 그 때의 기억이 이 글을 읽어 나가면서 새삼 또 다시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잠재적인 기억속에 내재된 나쁜 기억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단 사실을 또 한 번 이 기회에 일깨워준다. 당시  둘러본 수용소의 건물은 유대인들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 지자 건물 위로 더 지어서 층을 추가한 흔적이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유대인들의 피골 상접한 모습이며, 그들의 머리카락을 섬유처럼 짜서 옷감을  만든 사진은 보는 내내 인간 학살에 대한 극한 광기를 보는 것 같아서 몸서리 쳐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여기 릴리 또한 평범한 의사이자 의사의 아내로 예술을 즐기며 자녀들과 사랑하는 남편과 가정을 일구고 사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데 유독 유대인이란 사실 하나로 가정이 파괴되고 심지어 아이들 마저도 엄마와 떨어져 살아가야 하는 생이별은 히틀러의 광적인 아리안 인종에 집착한 광기에 의해서 시작되었단 사실에 말로 표현 못할  역사의 한 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끌려간 순간까지도 여자로서 추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릴리의 생필품 요구 품목을 보고 있노라면 활달했던 그녀의 인생에 어느 누가 무슨 권리로 한 인간의 삶을 이렇게 망쳐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어진다. 비록 편지일 망정 엄마 곁에서 자신의 생활상, 학교 선생님 얘기, 학과목 얘기,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의무감에서 오는  일제의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성장엔 측은함이 여지없이 우러나온다. 의붓엄마인 리타와의 화합될 수 없는 얘기는 엄마를 두고 불륜을 저지른 아빠에 대한 원망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아서 한 켠의 가슴에 울컥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하지만 릴리는 그 와중에도 얀에 대한 원망을 적은 편지 내용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혼 후에도 아이들이 생각하는 아빠에 대한 원망만은  갖지 않도록 애쓴 마음도 보이고 자신 또한 법률적으로, 그리고 제 2의 여인이 안방을 차지하고  당분간 같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원망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는 듯 해보였다. 얀이 노력을 했었든 하지 않았었든 초기의 그가 보인 행동은 한 때나마 부부로서 살았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수 없는 행동을 보였단 점에서 읽는 내내 릴리가 당한 처지가 더욱 안타까웠다.

 

그간 홀로코스트에 대한 여러가지 얘기가 실존 인물들에 의해서 책으로, 영화로 많이 나왔지만 이 책은 그녀의 자녀들이 엄마가 죽은 후 수 십년이 흐른 후에 편지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유대인 특유의 질긴 생명력과 그 후에 겪은 그네들이 살아온 인생의 후기를 보는 것이 또 다른 의미를 주고 있다.  릴리의 죽음 후 엘자 이모가 있는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고 다시 독일로 돌아온 형제도 있고 정계에 진출한 아들도 있고, 그의 자손들 또한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기 다른 종교를 갖고서 생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편지로 역은 이  책은 우리에게 전쟁이 남겨준 상처와 그 치유과정에서 벌어진 그 후손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고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는 현재 진행형 모습을 보여줬단 점에서 우리의 가슴을 잠시 나마 위로를 받게 해 준다. 유대인 스스로의 역사 인식 차원에서 엄마의 이름을 기억하고 노력하는 일환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은 끝났지만 그 사람들이 받았던 고통은 잊혀졌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우리들 가슴에 소수의 사란들에 시행된   전쟁이 주는 의미와 그 피해 의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겪지는 못했지만 이런 글을 통해서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겠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잔잔하면서도 슬픔과 희망이 교차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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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동행
미치 앨봄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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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인 저자가 어렸을 적 부터 부모에 의한 가르침과 행동으로 다녔던 유교 회당에서 겪었던 기억이  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레 관심밖이었던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에 익숙해 질 무렵, 그들의 가정사의  일부 행사에 참여했던 랍비인 앨버트 루이스로부터 부탁을 받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8년이라는 길다면 긴 세월속에서 그와 나누었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긴엔 작가와 동년배의 시대 사람으로서 또 다른 사람의 세월이 섞여서 그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져 있다.  

"내 추도사를 써 주겠나?"  - 이런 부탁을 자신에게 왜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서 추도사를 쓰려면 자신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랍비의 모습밖에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와의 인터뷰를 위한 긴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랍비 자신의 어릴 적 태어나던 해 부터 그 자신이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고, 랍비가 되기위한 도전에 한 차례 실패 후에 우연히 캠프 지도사로 나서면서 유대교 학자의 권고로 다시 랍비에 도전하게 된다. 이에는 자신이 몰랐던 그 만의 잠재력을 발견해 준 유대학자의 도움이 컸다.  

이후에 랍비는 작가와 매번 만나면서 그간  느끼고 생활에서 어려웠던 시기, 종교와 전쟁, 부모와 자식간의 사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묻고 싶었던 작가의 질문에 삶의 철학을 들려준다. 자신이 처음 부임했던 현재의 회당의 주위엔 유대교 회당이 하나 밖에 없었기에 타 종교와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가지 실천 운동을 한다. 서로의 종교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주차장에서 벌어진 카톨릭 신부와의 화해, 타 종교의 지도자를 초빙해서 설교를 듣게 하는 적극적인 행동도 보여 준다. 이렇게  철저한 유대의식에 입각한 실천 행동을 한 랍비였음에도 자신의 자식을 잃었을 때의 괴로움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음을 신도 앞에서 고백하고 , 그것을 당당히 이겨 나갈 수 있었던 종교적인 힘도 솔직한 모습으로 신도들에게 말해주는 용기도 보여준다.  

작가가 종교가 갖고 있는 신의 존재가 과학의 힘으론 증명 될 수 없고 과학의 힘으로 보여주는 인류의 발전관계가 종교가 설명하는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설명을 하고 난 후의 랍비가 보여준  말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과학과 종교간의 교리 사이에 있는 해결 되지 않는 미완의 숙제가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위태한 상황도 맞게 되고 자신이 그 동안 모았던 스크랩, 종교를 떠나서  간직해온 아랍 교과서와 그 속에 담긴 가족 사진을  보여준 장면은 뜨거운 감동을 주게 한다.  

행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엔 원초적인 생각- 만족 할 줄 아는것, 감사 할 줄 아는 것-( 자신이 가진것에 대해서 자신이 받은 사랑에 대해서 ,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것들에 대해서  ) 

이에 작가는 뚯을 같이한 사람들과 기금을 모아 노숙자 쉼터지원을 하게 되고 그러던 중에 헨리 목사를 만나 또 다른 인생의 뚯을 알아간다.

 

 헨리 코빙턴이란 사람은 브루클린에서 7남매중 여섯째로 태어나서 어릴 적  아버지는 마약상으로 살고 있었고, 엄마와의 싸움 끝에 엄마가 쏜 총을 팔에 맞아서 엄마가 교도소행을 가게 되면서 침례교회에 다니게 되고 그 곳에서 위안을 얻게 되지만, 성령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담배, 절도 , 강도짓을 하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과실치사 혐의로 교도소 7년행을 갖게 되면서 하나님이 무얼 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외면하게 된다.   

복역 후에 해충방제 회사에 근무하고 오랜 여친인 아네트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안정을 찾아 가듯 하지만 첫 아이를 잃은 후에 경제적인 어려움과 상실에 쌓인채 방황을 하게 된다. 마약상으로 많은 돈을 갖고 있는 형을 보면서 마약에 손을 대고 많은 부를 쌓아 가지만 자신도 마약을 하게 됨으로써 중독에 이르게 되고 결국 자신의 부하로 있던 사람에게 협박으로 마약을 얻어서 가지고 온다. 그러던 중 보복이 두려워서 집 쓰레기통 뒤에 숨어서 하나님께  이 현실에서 살아남게 해 준다면 모든 것을 끊을 것을 맹세하게 된다. 이후에 목사로서의 길을 걷던 그는 작가가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의 버려진 옛 교회를 구입해서 노숙자와 함께 전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만난 작가와 헨리사이의 친밀감은 작가가 타인을 바라보는 기준에 의하면 적합하지 않은 자였다. 타인의 삶을 이끌 정도의 사람이라면 마약이나 감옥을 나오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고, 더군다나 그가 초대해서 간 교회에서의 시설도 비참하고 타의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방식과도 달라서 지원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음을 솔직하게 내비치고 있다. 결국 랍비에게 이 사실을 말하게 되고 랍비 또한 종교를 떠나서 모두 하나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특정의 누구를 골라서 도움을 주란 것은 없다는 말을 해 준다.   

결국 작가가 신문에 이들 교회의 사정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숙자들 개개인의 사연을 칼럼에 씀으로써 그 교회는 헨리의 말 따라 기적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수 많은 옷, 가방, 구두, 식량, 돈 지원) 

랍비의 평화로운 음율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 하게 됨으로써 이승에서의 제 2의 스승인 그를 떠나보내게 되고 유대 회당에서 추도사를 낭독하는 것으로 그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한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든, 무신론자이든 간에 어려운 일이 닥칠 땐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고 간절함을 구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책  내용중 인간은 늘 신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는 말 처럼 ,평소엔 신을 외면하다가 어려움이 닥칠 땐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에 매달리게 된다. (랍비는 이러한 행동보단 평소에 꾸준한 기도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 과학이 날로 발전하고 인류의 기원과 타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의 힘으로 뭐라 증명할 수 없는 것을 과학이 증명해 내고 있을 때 우리는 종교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과연 신은 존재한가? 라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랍비는 과학이 발달해고 삶이 끝나는 순간 너머엔 뭐가 있을까로 물음을 제시하면서 생명이 다하는 지점, 바로 거기에 신이 계신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내가 믿는 종교와 타 사람이 믿는 종교가 달라서 오는 서로간의 서로의 교리가 맞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있어서 랍비의 처신은 참으로 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단 생각이 든다.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믿어야만 ' 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고 겸손하게 인정 할 줄 안다는 것(이것이 종교인들이 인정하기엔 참으로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일 것이다.)이란 말엔 오랜 종교인으로서 교리를 받들어 생활 해온 종교인의 표용력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타계하신 법정 스님이 고 김 수환 추기경님이 초청해서 설법하셨던 명동성당이나, 법정 스님이 살아 생전 길상사에서 추기경님과 다른 종교인들의 초대한신 일들을 생각해 보면 종교의 기본 원리란 것이 결국 하나의 공통된 진리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가 있다. 또한 밥퍼의 주인공인 최 일도 목사님이 실천하고 있는 봉사 활동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 최대한 같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베품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항상  좀 더 채우기에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그간 생각해 오던 , 아니 우리 모두가 생각해 오던 질문들- 타 종교 사람과의 결혼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 결혼 생활에서 오는 갈등 해소 문제, 돌아가신 분을 보면서,"아직 내 순서가 아니야", 하는 보이지 않는 죽음이란 문제 앞에서 느끼는 물음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많이 던지게 하고 그 물음에 아주 간단하면서도 쉽게 놓치고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문제의 해결을 명쾌히 말해 주고 있단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눈물이 많아졌다. 요즘 우리나라에 슬픔이 겹친 경우도 그랬고, 책을 읽다 보면 옆 사람이 눈치 챌까봐 참고 읽으면서도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 책에서도 그랬다. 두 사람의 진솔한 대화는 간간히 랍비의 생활화된 유머와 종교자로서 갖고 있었던 진지한 태도, 경험이 어우러져서 읽는 도중엔 간간히 웃음도 나오고,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영원이라는 안식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어릴 땐 몰랐던 삶의 귀로에 대해서도 진지한 물음도 갖게 되고 공허함도 느끼게 된다. 랍비가 말한 것처럼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단 말엔 일말의 공통된 공수레 공수거란 불교 용어도 생각나고, 종교에 의해서 치러지는 전쟁은 결국 인간들이 종교의 교리를 어기고 한다는 말엔 공감이 많이 와 닿는 느낌이다.  

8년이란 세월 동안 랍비와 나눈 대화는 결국 과오를 뉘우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선 헨리에게 까지 그 연결고리가 이어짐과 신도들이 그를 렙 이라고 부른단 사실에선 두  사람의 종교 지도자가 작가를 중간고리로 해서  서로가 서로를 이어준  인연이란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작가가 진정한 유대인의 종교를 다시금 바라보고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된 점과 그 이후의 행동으로 기부 활동을 하게 됨은 작은 씨앗이 번져서 결국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단 희망도 엿보이게 한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종교를 대하는 태도와 그 실천 행동에 대해서 잘못한 점을 알게 되고 반성하는 기회도 가져 온다.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그의 솔직 담백한 고백과 더불어서 쓰여진 책이라서 그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고 감동의 여운이 책을 덮고서도 한 동안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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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양장)
레베카 크누스 지음, 강창래 옮김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최소한의 무기로 최대의 희생을 할 수 있는 무기를 갖고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대에서 책이란 소재를 통해서 본 인류가 저지른 , 또는 자행되고 있는 사실을 여러 나라의 비교와 더불어서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책 속에서는 과거 나치즘, 발칸반도, 이라크, 중국이 행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인류의 보고자산인 책과 도서관, 그 밖의 문화유산을 어떤 식으로 파괴하고 그 나라 국민들을 유린 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도서관과 책이란 떨어질수 없는 관계에서 이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서구문화에서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그간 종교자들 사이에서만 통용이 되었던 읽히고 써졌던 것들이 일반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용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서 그 폭은 넓어졌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은 종교의 지배권력을 깨뜨릴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단 점에서 발전이 되어 민족주의, 군사력위주의 군국주의로 변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는 곧 인종학살, 문화말살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의 학살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도서관의 역할은 그 중 가장 피해를 입게 되는 공격의 대상지로서 도서관의 파괴는 도시. 왕궁. 사원의 파괴외에 전리품으로 인식이 되서 그 안에 있는 책이 불살라 지거나 귀중한 자료는 침략 본국으로 약탈의 대상이 되었고, 통합적 검열을 요구하는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명령아래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종교 개혁시기가 가장 약탈이 심했던 시기로서 파리 혁명처럼 개인과 수도원의 책들이 약탈 당함은 물론 나폴레옹 같은 경우는 국립도서관을 세워서 누구라도 볼 수 있게 개방했다. 

20세기의 도서관 역할은 거미줄같은 시스템속에 지역. 국가, 국가적인 네트워크에 연결된 시스템속에 한 구성요소로서 그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는 곧 정부와 경제 , 재산권. 국가 . 민족적 정체성이면 기초형성 하는 과정에서 보존하고 통합할 수 있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도서관은  적들의 이익에 반하여 파괴를 당하게 되고 그 이유는 검열, 의도적인 파괴,테러행위 등 에서부터 전쟁이나 문화말살 과 문화의 말살을 불러일으킨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제시된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이다.

나치즘은 1차 대전후의 나라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히틀러가 주장한 아리안의 우수 혈통 보존에 따른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의 산물로 탄생됬다.
나치의 개념인 폴크(우리의 개념)와 레벤스라움(주거공간)이 합쳐진 것으로 자국의 신체 불편한 사람은 부터 처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유대인 말살정책에 본격적인 학살을 시작한다.
그들이 갖고 있던 책과 도서관, 종교자들을 태우고 처형하는 것은 물론, 생활의 제약을 주게되고 이는 곧 폴란드에 있는 유대인과 슬라브족까지 포함시키는 행위로 번진다. 다만 유럽의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같은 도시들은 나치의 보조역학을 담당하게 되지만 그 안에서의 유대인들의 책들은 여지없이  불살른다. 
이는 패전하면서 오히려 연합군과 러시아가 독일로 들어가서 오히려 책을 약탈하고 태우는 과정을 답습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결국 이는 이념적인 극단주의, 군사주의가 만든 독성의 한 부산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발칸반도의 세르비아가 행한  크로아티아내의 카톡릭 신자들, 보스니아의 무슬림에 대한 인종적 차별주의에 입각한  인종말살정책, 코소보의 알바니아에서 행해진 무슬림에 대한 학살은 나치즘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자행됬다. 강간, 학교, 책, 모스크의 파괴,  도서관의 파괴는 하나의 유고 연방이라는 기치아래 행해진 무자비하게 행해진 인종의 대청소였다. 이는 곧 자기 민족 중심적으로 발전이 된 것이 인종주의로 변모한 예시로 보여준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표면적인 이유는 범 아랍주의를 신봉한 바트당의 수장으로서 정권을 잡고 이란과의 전쟁후 돈과 채무면제, 석유정책 조절을 위한 요구가 아랍세계에서 거절 당하자 쿠웨이트가 가진 부와 전략지정학적인 이점에 사로 잡혀서 물길을 확보한단 구실로 일으킨 전쟁이다. 쿠웨이트의 도서관과 책들이 불태워지고 각 정치가와 학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 조차도 무자비하게 학살한 형태는 자국의  공포분위를 조장한 형태를 그대로 답습한다. 쿠웨이트의 정보 체계 시스템 파괴는 타 아랍국들이 생각했던 서서히 변화를 일으켜 하나의 아랍국가를 실현하는데 지장을 초래했다. 

중국이 행한 자국의 문화혁명은 마오가 정권을 잡고 급진주의자로 대표하는 자신외에  그 당원들과 서서히 변화를 꾀하는 온건주의자들의 실세가 번갈아 가면서 맡아서 하는 나라 행정에 따라 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마오가 주장한 대약진운동으로 말미암아 대 기근이 발생하고 이는 곧  극좌파와 급진적 공산주의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시도로 기존의 모든 중국 문화를 거부하는 문화혁명으로 발전하게 된다. 각 도처에 지식인들이 투옥이 되고 사상개조 운동에 참여를 하게 했으며, 대학과 교직원 숙청, 그리고 홍위병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자행한 각종 행위를 무마한다.  이들은 대학과 대학도서관을 약탈하고 혁명이 끝난 후 도서관은 침체를 걷게된다. 차후엔 정부의 운영 방침에 따라 도서관에 대한 지원을 하게 되지만 이 운동의 결과는  비젼에 방해가 된다면 무엇이든 없애버리것을 합리화하고 극단적인 이념에 맞추기 위해서라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 정부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고  봤다.

중국의 티베트 정복과 문화말살위기는  중국이 내세운 공식적인 합리화로 시작이 된다. 마르크스 공산주의 철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민들이 봉건체제의 희생자이고 혁명을 기다리는 긴급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안에서 일어난 반란을 돕고 제국주의자들 음모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일제가 자기네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함으로써 우리의 도로나 여러 서양적인 시설을 세움으로서 도움을 줬고, 스페인이 라틴 제국의 원주민들의 종교 개화와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훨씬 행복함을 줬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중국은 티베트의 저항하는 일부도시를 중국의 다른 주로 편입시키고. 영토 일부만 자치구로서 남게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더불어서 종교자들, 사원파괴 , 각종 희귀 불교 경전을 불사르고, 인종 말살에 가까운 혹독한 노동과 한족과의 차별을 둠으로써 강제적으로 편입시켰다. 
전체적으로 티베트 사원이 99% 파괴, 문헌은  60%파괴, 인쇄, 문서의 파괴는 85% 파괴를 가져옴으로써 고유한 불교 신앙에 기반을 둔 고립국의 고유한 티베트 말살 정책에 일조를 가한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달라이라마의 세계여러 나라를 통해 자국의 현 상황을 호소한 것이 알려지고 망명지에서 문화시설과 의료원 개설등을 통해서 티베트의 문화를 이어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중국은 자신들이 속한 나라의 과정과 같은 방식으로 티베트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그들 나라가 가지고 있는 불교라는 종교아래 세상을 바라보는 티베트인들의 관념을 간과했고 . 이는 소통될 수 없는 단절이 존재함을 알게 했다.

위의 모든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나라가 한 나라를 어떤 이념에 입각해서 행해진 말살 정책은 (이념, 민족주의. 군국주의. 인종주의) 결국 유엔이 정한 여러 협약도 무색하게 할 만큼 다양하고 무소불위 식으로 행해진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전쟁의 기초적인 전술이지만  자국민만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인종주의에 입각한  인종 말살, 그리고 그들의 언론 통폐합을 점령하고 지식인들의 보고인 책을 공략함은 가히 인간이 가진 최악의 극단적인 행위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휴머니스트와 이념주의자들의 상반된 갈등으로 야기된 사상 충돌은 개인적인 선택을 존중해야하고,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는 계속 진행중이기 때문에 이런 정신에 조금이라도 입각한 이념주의자라면 , 일말의 양심이 있는, 인지있는 영장류라면 이러한 행위는 근절되어야 하고 또 앞으론 없어야 하며 세계 각국의 문화 보존 차원에서라도 각 조약들로 묶인  법률적인 효력과 제제가 더욱 강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끼게 해 준 책이다. 
하지만 매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유엔의 이러한 조치들도 먹히지 않는 현 세계의 강대국들의 이익에 반한 행동과 그에 아랑곳 하지 않는 나라들의 행동이 과연 이러한 제제만으로도 해결을 볼 수 있을지는 아직도 지구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여러 사건들을 생각한다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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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서양의 원죄와 인간의 권리를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난 장지글러의 글을 좋아한다.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그나마 서양인들 중에선 양심적으로 우리가 듣고 싶고 알고 싶어하는 (비록 서양 여러나라에선 그다지 탐탐치 않겠지만..) 사실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반성과 앞으로 나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시간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인 "세계의 절반을 왜 굶주리는가?" ," 탐욕의 시대"에 이는 이번 책을 서양국가들이 역사라는 시대에 어떻게 인종차별주의에 입각해서 제3세계를 정복하고 지금까지도 착취를 해 오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보고서이다. 

1.증오의 기원 

증오의 기원을 두 갈래로 나누어서 서술한다. 첫 번째는 병적인 증오로서 대표적인 것이 코란에도 그르치는 행동을 한  9.11테러 사건에 대한 사실을 말하며, 두 번째 증오로는 이성적인 증오를 말한다.남반구 많은 주민들이 서양의 윤리 규범 , 세계를 지배하는 서양체계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데서 차이점을 둔다. 여기엔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의 고유성을 주제로 한 비동맹 운동에 속하는 나라들이 주도가 되어 회의가 이루어진 반둥회의. 비동맹회의의 부활을 말해준다. 

서양의 첫 번째  범죄행위는 노예사냥- 아프리카에서 어린이를 포함해서 2,000만명이  끌려가서 배 안에서 강간, 굶주림에 죽거나 살아남은 노예들은 카푸나 라고 불리는 요새형태의 주택에서 생활하다가 노예로 팔려간다. 이들은 서양인들이 그들의  폭동을 우려한  방지책으로 교묘하게 부족별로 분산 시켜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유지를 해 나간다. 

두 번째 범죄는 식민지 정복- 인종차별주의에 기인함으로써 프랑스의 경우 아프리카에 이어서 베트남, 캄보디아에 이르기 까지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다.  

한편 이러한 우려속에서 코피아난과 메리 로빈슨에 주도된 더반 회의는 보상요구를 하는 남반구 국가들가 이에 거절을 하는 서양 국가들의 파행으로 실패를 한다.  

과거 서양이 해온 착취의 과정은  정복을 한 후에 삼각무역이라는 것을 통해서 원주민 말살정책을 하고, 19 세기까지 이러한 정책들이 일괄되게 식민지 건설로 이어진게 된다. 이어서는 남반구 주민들에게 세계화된 서양자본이 세계무역기구,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거대 다국적 민간기업들이 강요하는 현 체제가 가장 살인적인 체계라고 말한다.   

일례로 면화 정책을 통해서 본 그들의 행보는 , 자국의 국민들 사업을 보호한단 명목아래 미국이 행하고 있는 정책(50억 달러의 지원금을 준다)으로 인한 면화 생산으로 나라 살림을 하는 아프리카 여러국가들을 위기에 몰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는 세계무역기구의 농작물 덤핑 금지를 문면화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가난한 이 나라에서는 제소할 생각마저도 못한다. 이는 곧 가정파괴. 기근, 아동 성매매에 이르는 과정을 순리대로 밟는 전철을 계속한다. 

유럽연합과 맺은 경제협력협정강화 또한 투자에 대한 울며 겨자먹기식의 협정조인을 하게 만든다.  

인도나, 중국, 나이지아에서 행하고 있는 소수에 의한 과두 정치체제는 각 개인들의 실 생활을 악화일로로 걷게 만들고 있지만, 이마저도 외면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도의 영양실조, 농민들의 자살, 중국의 티벳. 몽골.위구르에 대한 탄압, 나이지리아의 군사 평의회와 석유회사간의 이익도모하에 협의된 돈 착취) 

프랑스에서 시작된 인간의 권리에 관한 보편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서양은 수단의 자이푸르의 학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지역에 가한 폭탄 행위에 대해선 꿈쩍하질 않는 이중성을 면밀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볼리비아에서 행해지고 있는 행보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뭉클함이 전해온다.(내가 알고 있는 레일라도 비록 인디언은 아니지만, 한국 남편을 볼리비아에서 만나서 한국으로 온 백인이다. 정말 예쁘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화상으로 통화한다고 하고  풍요롭지 못한  친정살림에도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엄마다.)   

인디언 출신으로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에모 대통령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착취당하고 살았던 그 후손이었기에 더욱 그 고질적인 것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우선 에너지 회복 운동이라고 불린 작전을 통해서 알제리, 노르웨이, 베네수엘라의 도움으로 석유와 가스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서양 기업에 대해서 국가 공기업을 선언하고 일정의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해서 다시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실천한다. 광산, 제철, 전기 분야도 연이어서 국영화로 돌림으로써 그간 기업들이 누렸던 막대한 부를 일정 금액으로 국고에 환수한다.  

두번째로 행한 실천은 가난과의 싸움이다. 백인이나 혼혈인들보다 월등히 영양실조, 구루병 같은 기초적인 병에 시달리는 원주민들에게 공공지출을 함으로써 서서히 변혁을 주도하고 신분증 발급을 무상으로 해 줌으로써 법의 보호망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세 번째로 행한 실천은 과거의 정권은 식민지 국가로 정함으로써 민족국가 건설에 힘쓰는 점이다. 하지만 이에는 여러 거쳐야 할 산이 있다. 라티푼디움에 익숙한 대 농장 소유주와의 갈등, 다인종, 다민족임을 내세워 국가 개념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것에 반대파인 펠리페 커스페의 백인 몰아내기 주장을 무마 시킬 수 있는 시간과의 싸움이 걸려있다. 또한 유능한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거의 없다는 사실도 그엔겐 넘어야 할 산이다.  

또한 서양의 용병을 이용한 보복을 어떻게 근절시키느냐도 관건이다.  용병이란 1945년 이후 나치전범과 그 조력자들,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루마니아의 철십자단원, 파시스트의 뿌리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심지어는 그 전 정권때까지도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행동한 사람들이기에 이들이 그간 누렸던 기득권의 와해를 두려워해서 일으키는 행동이다. 그의 자손들 또한 막강한 부의 바탕아래 철저한 인디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를 뿌리내린 사람들이기에 각종 무기를 소지하고 이에 대응하는 전략과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있음으로써 에모의 정권에 반기를 들게 한다.  

작가는 여전히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기아의 발생원인과 농업관련 천연자원의 가격인상의 주도원인은 국제통화기금의 개발도상국가들의 외채증가 억제를 위한 구조조정 계획서 제출요구가 오히려 농업국가들의 외채 갚는 방안이 자국 농업 장려 계획보다는 먼저이기에 제출서 우선 순위가 바뀜을 , 그래서 남반구 여러나라의 식량재배 농업이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투기 또한 세계 농산물 가격을 좌우하는 서양 8대 기업의 행사력과 맞물려 주식폭락에 따른 각종 펀드들이 시카코상업거래소에 몰림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는데서도 유래한다고 말한다.  

옥수수를 이용한 자동차 연료에 소모되는 과정은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기초식품을 이용한 농업연료로의 전환이라곤 하지만  이는 점점 빈곤의 악순환만 재생되게 할 뿐이다. 

기존의 위의 두 책의 내용을 한 권으로 통합해서 다룬 책이란 생각이 든다. 빈곤의 악순환의 원인과 서양의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각종 협정조인, 세계의 빈곤 국가들을 위한 기구라고 세운 유엔의 여러 기구들의 이름뿐인 정책과 그에 따른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다뤄지고 있다.  

위의 여러 나라에서 치러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빈곤의 악순환과 그 고리에서 나오기 위한 볼리비아 같은 나라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도 이런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 하는 회상과 더불어서 보리고개를 마치고 경제대국으로 일어서기 까지 우리 선조들이 이룬 성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우선적으로 든다. 우리도 일제 시대를 겪었고, 지금도 위안부나, 제 3세계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징병들의 생활과 그 후손들의 현 실정을 생각할 때, 일본의 무성의한 태도에 화가 나고 있는 실정도 남반구 사람들이 겪는 심정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때린 자는 무심히 채찍질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맞은 사람의 가슴속에 남는  기억은  아주 오~래 동안  쉽게 가시지 않는다. 서양은 지금도 이것을 간과하고 있고 자국민들을 보호한단 명목하에 치러지고 있는 다양한 정책, 이로 말미암아서 다른 세계국민들이 겪게 될 고통을 나몰라라 하고 있다.  

지금은 누가봐도 보이지 않는 총성하에 각국의 이익을 챙기는 시대를 감안하고라도 남반구 사람들과 서양이 진정으로 하나의 지구촌 친구로 같이 걸어가자면 저자의 말대로 그들 고유의 문화 정체성의 회복, 인권에 대한 깊은 인식, 남반구에서 민족국가가 설립이 될 수 있도록 서로 협력하는 일일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뿐이 아닌 진실된 맘으로 자신들이 했던 과오를 뉘우치고 서로가 인정하는 풍토하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을 해 나간다면 남반구 사람들의 한 맺힌  감정도 서서히 없어지란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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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쉬튼 2010-05-0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쓰셨네요 때린자는 기억을 못해도 맞은자는 기억에 남는다. 이말 너무 맞는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