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의 진실 - 조선 경제를 뒤흔든 화폐의 타락사
박준수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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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있던 1866년(고종 3년). 

보민평시소 총 책임자인 박일원은 산골에 시주전을 발행한단 발고를 토대로 무리들을 색출하러 갔지만 여지발이란 유장만 체포하고 오게 된다. 주막에 들러 쉬던 중 여지발은 의문의 여인이 주고 간 점심을 먹고 독살을 당해 죽고 만다. 

한편 육의전의 내어물전 대행수인 나징하는 송파장 상인들의 도고 행위로 육의전이 피해를 입게 되자 수하인인 엄자승을 통해서 송파상인들의 돈줄을 막기위해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행동을 하게 되고 여기에 연루된 돈들 중 일부는 안동 김문일가의 주 세력이었던 영돈녕부사 김좌근의 돈도 포함이 된다.  

여기에 자신의 권력과 조선왕조의 위엄을 살리고자 경복궁 중건에 박차를 가하던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좌의정 김병학의 권유로 당백전을 발행하게 된다.  

당백전은 실 무게는 줄이면서 액면가는 높이는 방법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던 상평통보 일부에다 당백전을 섞어서 유통하게 하는 강제적인 방법까지 동원이 되지만 실 생활에선 실질적인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 박일원은 여지발의 사건을 추적하던 중 현장에서 발견한 깨진 조각을 가지고 그것이 당백전 시화전임을 알게되면서 붙잡은 범인들을 추궁하던 중  이 사건이 송파상인 홍중오의 사주로 그 밑에서 일한 차인행수 황설주가 한 일임을 알게 된다.  

황설주를 체포하게 되고 그 배후 인물을 캐 물으려는 시도에 황설주는 윗선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풀려나게 되고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당백전으로 인해서 점차 시주전이 발행되는 악행이 발생하고 백성들은 땡전이라 불릴 만큼 제 기능을 못하는 사태에 대해서 김병학과  그의 동생 김병국의 건의로 당백전은 통용금지란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위의 이야기는 조선 말 당백전이란 하나의 동전이 나라의 부족한 비용을 대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란 말 하에 이루어진 화폐개혁이었다. 

하지만 일시에 많은 자금을 확보하려는 생각에 평소에 유통하던 상평통보의 보편성을 무시했고 주조이익 챙기기에 바빴던 탓에 실질적인 동전의 무게감소, 액면가는 십 단위에서 백 단위로 껑충뛰는 모험을 감행했다.  

여기에 육의전 상인들과 송파상인들의 보이지 않는 경제흐름에 돈줄 쥐기 경쟁은 나징하의 계획대로 였다면 육의전이 승리를 했을것임에도 불구하고 송파상인 홍중오의 적재적소의 실질 경제 원리에 대해서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것이 경제의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니 만약 당백전의 출현을 나징하가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실패를 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반대로 홍중오의 경제 흐름에 대한 인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투자의 흐름과 돈의 흐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경유착이란 말이 빈 말이 아니듯 나징하가 줄을 대고 있었던 쇠락해 가는 안동김문 일가의 권세가 김좌근이나 홍중오가 선을 대고 있었던 김병학과의 관계는 그들의 합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일반 백성들의 삶이 판가름 난다는 데에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겉으로 보는 양반가의 점쟎은 선비의 행동 속에 퇴직금을  나징하의 손에 맡겨서 이자를 받아먹는 행동이나, 당백전 발행을 알고 미리 돈을 거두어 들이게 하는 저간의 행동은 상인이나 녹록을 먹고 사는 사람이나 자신의 재산 불리는데에 있어서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백전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개 하는지에 따른 정책에 따라서 양화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서로의 집권의 야욕과 더불어서 그 곁에서 보좌하는 사람들의 일시적인 나태함, 그 밑에서 서로간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불리고 거두어가는 시전 상인들과 물건매점매석을 통해서 물가를 조장을 하는 상인들, 이런 와중에 쌀 조차도 구경하기가 어려운 시절이 되도록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린 백성들을 나몰라라 한 나라 윗선의 행실을 여러 각도로 보여준 책이다.    

***** 나라 재정이 부족하면 당백전을 발행하면 될 것이고 구리가 부족하면 백성들에게 구하면 될 것이고 당백전을 멀리하면 강제로 유통시키면 될 것이었다***** 

위의 구절은 나라를 다스린다는 위정자의 생각치곤 참으로 어이없는 태평스런 말이란 생각이 든다.  

무릇 요순시대처럼 왕이 누구인지 몰라도 내 배 배불고 등 따스하면 된다는 얘기가 나올정도는 아닐지라도 당백전이 갖는 의미와 주의의 여론을 무시한 대원군의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통용금지 이후의 또 다시 홍중오의 말 처럼 청의 소전이 통용되게끔 나라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으면 된다는 말엔 지금의 현 시대도 경제란 면에서 서로의 손익계산을 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생각이다.  

백성의 안중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손익 계산을 하는 상인들의 발빠른 행보는 지금과 비교해도  다를 바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통용이 되고 있다는 의정부의 글이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   

당백전이 땡전이란 말로 불리워지게 되기까지의 온갖 폐단을 안겨주었던 이 하나의 동전이 조선의 후기 경제를 뒤흔들었단 사실을 유추해내  세 방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다룬 이 소설은 경제에 다소 어두운 사람일지라도 쉽게 이해가 가기 쉽게 풀어낸 책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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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초승달 동맹 -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 이슬람 연합 전쟁사
이언 아몬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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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던 그 때,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한 세기적인 관심과 그 배후의 주도권을 쥐고 요리한 주동자의 인적사항이며, 뒤이어 세계를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한 시각과 공포를 몰아넣은 그 사건이 지금은 또 다시 오하마 대통령이 모스크 건립을 추진한다, 반대한다는 소리로 연일 외신으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그  사건은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쉽게 사사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안겨줬다.  

여러 책을 보자면 우선 이슬람이란 종교 자체에 대한 의견에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적다는 점이다. 일부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 교리를 이용해서  집중적인 과를 넘어서다 보니 그런 테러와 자살테러, 건물 폭파같은 그 유형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더욱 이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지는 않는지에 대해서 이 책은 그런 생각을 더 해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르네상스의 정신이나 과학적인 토대를 획기적인 발전으로 이룬 근간에는 이슬람으로 부터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고 그것이 르네상스로 이어지느 계기가 되었으며, 근대 과학의 기초로 가는 아주 다양한 문물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상호보완적인 유럽과 아랍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란 두 종교가 언제부턴가 삐걱거리더니 이제는 지하드, 성전, 알자지라 같은 단어만 들어도 테러를 연상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위의 세태에 대해서 두 종교간의 뿌리깊은 반목이 종교라는 이름하에 이루고 있는 현 세태에 대해서 또 다른 사실을 내세워 실은 종교간은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던 진정한 서로간의 도모하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병사안에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많았음을 알려준다.  

문명화된 기독교 유럽이라는 사고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쓰였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단결과 협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세기 별로 나뉜 역사적인 사건을 토대로 알려준다. 

1. 11세기의 에스파냐 같은 경우는 북쪽으로는 기독교 왕국이 , 남쪽에는 무슬림 에스파니아가 작은 나라들로 소규모 영주들로 대립을 이루고 있을 때, 필요에 따라서 남쪽의 나라간에 분란이 일어나면 그 분란을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에 몰두한 기독교 왕국간의 계획이 보이고 여기에 이슬람의 도움 요청이 있을시엔 자국의 기독교 군사들을 보내 상대 진영과 싸우는 역사를 보여준다.  

여기에다 로마 교황청 입장에서 바라본 에스파냐의 시국은 자칫하면 자신들의 종교인 카톨릭 몰락으로 이어질 걱정에 참견을 하게 되고 이는 곧 베르베르인이 세운 알모라비드 왕국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서로간의 이익에 반사하여 도와주는 역사의 현실을 보여준다.  

1072년 알폰소 6세의 톨레토 정복으로 인해 375년에 걸친 이슬람의 정복은 마침표를 찍게 되고 알폰소 왕은 무슬림들에게 유화정책을 실시한다.  

2.13세기의 이탈리아 무슬림의 도시 루체라 

시칠리아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아랍인들을 프란드리히 2세의 정치적 전략에 따라 이탈리아의 루체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이들은 자연적으로 노르만 정복에 자신들을 물건 취급하는 정책에 반대한 이슬람인들은 적개심을 갖게되고 이는 곧 프란드리히 2세의 개인적인 군사요충지요, 군사 보급지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은 황제에게 무슬림 시위대, 정예브대, 궁수 , 경기병을 제공하고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과도 교류를 맺고 살아간다.  

프리드리히가 이야기로써 예루살렘을 얻었을 때도 참여를 했으며, 롬바르디아 동맹에 맞선 군사행동에도 참여를 하게 된다. 이들은 끝까지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대한 충성을 했으며, 샤를 2세에 의해 전멸되기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간다.   

이 밖에도 14세기의 비잔티움과 투르크인들의 우정은 각기 다른 인종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위험에 대처해서는 서로 합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들의 역사 중엔 비잔틴 공주와 술탄간의 혼사가 이어짐으써 자국의 침략을 막는데 일조를 겸했고, 티무르의 공격으로 인한 비잔틴 왕국의 어려움은 세르비아군대의 충성스런 군대로 인해서 어려움을 돌파하기도한다. 

유럽중 가장 험난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인 헝가리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실리에 따라서 분할되어 다스려지던 중 구교가 행한 신교에 대한 박해로 인한 과정에서 오스만의 지지를 얻고 이는 종교를 떠난 서로간의 이익과 호감에 따른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150여년간 이슬람의 지배로 들어간 헝가리는 헝가리인들이 오스만 병합에 협력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로 넘어오면 큰 전쟁의 하나인 크림 전쟁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따른 위협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오히려 적국이었던 오스만을 지지함으로써 자국의 실리를 잇고자 한 것이 발단이다. 영국안의 바시보쥐크, 프랑스 군대안의 무슬림인 알제리군대, 오스만 제국안의 다양한 기독교 병사들과 서유럽인, 폴란드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이 섞인 상태에서 벌어진 전쟁은 발라클라바 전투, 퀴렉데레전투를 통해서 참여를 했으며, 이는 곧 종교와는 무관한 ,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한 군대로써의 싸움이었다.  

저자는 위의 여러 역사적인 군사 전투를 통해서 어디까지나 종교에 반해서 움직인 사람들은 없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종교의 분명한 선은 이 당시만 해도 없었단 사실을 통해서 지금까지 잘못으로 알고 있는 두 세계에 대한 반박을 열거해 놓았다.  

강대했던 이슬람 제국 오스만제국의 오만함은 제국의 군사적, 경제적 우위에서 유럽의 나라들을 대했다면 크림전쟁에 들어서면서 부터는(19세기) 제국의 힘은 약해지고 비로소 서구의 투르크인들을 빈 미개인으로 보는 시각으로 변했다는 점이 새로운 사실로 알게 해 준다.

종교에  열성적인 것에 비춘 결과가 아닌 이러한 배경에는 어디까지나 군사, 경제가 우위를 점령했으며, 이런 배경에는 동아시아의 농노가 군인으로 나서는 것이 일반화되어 차출된 것이 아닌 용병이란 제도가 활발했단 점도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한다.  

이들 사이에 종교를 떠난 협력심은 같은 테두리 안에 살고 있었고 서로 다른 언어를 알고 사용했을 만큼 다양성이 보장됬으며, 엘리트 사이의 친화성, 우정이 모두 포함되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단 설명을 곁들여 준다.  

역사라는 시대를 읽어 내려는 양심이 되어야 한단 저자의 일말의 양심고백은 그간 우리도 세계의 군사,정치, 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서구의 주장과 그 인식에 대한 한 치의 의심없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에 대한 생각만으로 그 이슬람에 대한 생각을 속단하고 있진 않나 하는 반성을 해 보게 한다.  

유럽인의 눈으로 본 유럽의 이기심과 그로써  인정이 되어버린 생각을 보다 뛰어넘어서 자신과 자신의 사회를 과감히 비판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단 저자의 말엔 많은 공감을 얻게 한다.  

그라나다 공방전을 끝으로 이슬람이 아프리카로 물러가고  기독교의 세계를 열었던 스페인의 역사를 들여다 보는 내내 복잡하게 엃혀있는 실타래를 풀어나가면서 읽기가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런 과정속에서 우리가 속한 현 시대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갖게 되고 뭣보다 지금의 독립적인 나라의 개념이 아닌 도시 공화국 형태, 타이파라 불려서 쪼개진 국가들, 그 안에서도 파리아스란 명목으로 실리를 챙긴 알폰소 국왕의 정치스타일은 지금에 와서도 그런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라는 "만약"의 가정을 가져보게 해 준다.  

복잡하게 이루어진 상황속에서도 이루어진 건축의 양식이나, 문학의 쟝르,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인한 교류는 위의 종교와 인종을 개념치 않은 결과의 산물이며, 개개인이 직접 마주하는 현실이 십자군이나 성전사 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는 , 자기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는 말엔 일말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존의 단순히 이슬람종교의 전파의 결과가 유럽에 끼친 영향의 일환으로 발전된 정치와 학문, 과학의 세계를 이끌었단 책이 있었다면 이번의 책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 신선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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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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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첫 아들인 소현세자는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의 댓가로 인질로 동생인 봉림대군과 고위 관리 자제들과 같이 볼모로 청에 잡혀간다.  

그 세월이 흘러서 청의 왕권 교체 다툼에서 그들만의 권력쟁탈전을 보게 되고 어디에서도 자신의 뜻을 말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청의 대신으로 일찍이 황제의 여자로 있던 조선에서 끌려온 양반의 딸인 흔을 하사 받은 고위관리와의 힘겨루기 경쟁, 심기원의 아들인 심석경에 대한 세자의 끊임없는 의심과 신뢰를 반복하면서 결코 누구도 믿을 수 없되, 믿지 않을 수 없으며, 죽여야 하되, 결코 죽여서는 안되는 , 반드시 살려내야 하는 심석경에 대한 애증의 폭을 드러낸다. 

청의 도르곤의 권력양위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파장이 조선에 몰고올 여파를 생각 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에 대해 대처하는 자신의 힘없는 무능함을 드러낸 말 한마디에도 신중함을 보인다.  

아버지인 인조가 자신을 생각하는 뜻과, 자신이 원치 않았음에도 자신은 조선의 세자란 사실에서 버거운 삶을 이어나간 소현은 조선에서 반정의 세력모함 주동인으로서 심기원이 내세운 회은군 이덕인과의 관계는 그를 더욱 고립으로 몰아가고 이 와중에 천한 출신으로 청나라 말을 익힌 잇점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아 통역일을 하는 신분으로 상승한 만상이란 인물이 등장을 하고 신의 내림굿딸로 지내던 막금이 흔을 모시면서 심석경과 흔의 안타까운 정인의 관계를 이국에서 이루지 못한 또 하나의 그림을 그려준다.  

인조를 보러가는 중에는 반드시 자신대신 아들인 원손이 청에 가 있어야 하는 현실에서 오는 아비로서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 애틋한 정 한 번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자란 아들을 바라보는 소현의 심성은 그 표현의 강도가 폭발을 누르고 지그시 자제를 행 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드리운다.  

회은군과 함께 심기원 일당이 소탕이 되고 자신의 입지가 더욱 좁아짐을 느낀 소현의 마음은 봉림에게 의지를 할 수 밖에 없고, 그런 형을 바라보는 봉림의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인다.  

역사상 가장 비운의 왕가쪽 인물이라면 단연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사도세자지만, 소현세자 또한 이에 못지 않은 불운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드라마 "추노"에서 소현의 자제인 원손이 제주도에 갇혀있다는 설정하에 무대가 이어지고 있던 상황의 극을 보면서 소현에 대한 궁금증이 다시 일었다. 

다른 작가들이 써 온 역사소설 속의 구성이 시대상의 압축과 소현의 마음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느끼게 한 반면 이 소설은 내내 무거움을 주고 남겼다. 

시종 일관 소현을 비롯한 주의의 인물의 내면에 생각이나 말 표현이 많은 함축을 하고 배제되어 있기에 소설상의 분위기는 답답함을 주기까지 한다.  

고국에 돌아와서 얼마 안되어 죽은 소현의 죽음 자체도 여전히 의문에 쌓여있고, 아버지 보다 뛰어난 인물은 친 혈육이라도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당시의 조선이란 나라의 정치세계는 소현이란 인물이 청에서 받아들이고 익힌 서양 문물에 대한 뜻을 펼치기엔 너무 좁았고 그런 소현을 지지해 주는 기반이 없었단 점에서 많은 안타까움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릇 태평성대라는 의미안에는 왕 자신의 내면적으로 뛰어난 자질과 소양도 갖추어야 할 기본기가 있어야겠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위의 환경요건, 보좌를 함에 있어서 훌륭한 신하들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세종대왕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런점에 비추어 볼 때 소현이 갖고 있던 내면의 자질은 그에 못지 않았을 거란 생각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오직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조선의 사정을 재건키 위해 자신의 뜻을 감추고 살아온 청국에서의 볼모 생활은 아버지 인조가 생각하는 그런 세자로 생각되어지지 않았단 점이 어긋난 행보를 보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앞서간 소현의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정신은 인조나 당시 조정대신들 눈엔 이단자의 눈으로 보였을 것이고, 심기원 일당의 반정모함 실패 사건은 소현으로 하여금 아버지 인조로부터 신뢰를 받기 어려운 단서를 제공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소설은 시종 이런 분위기조차도 내내 부자 지간의 대화라고 하기엔 짦은 말 몇 마디 속에 그 의중을 헤아리게 하였고, 심지어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서술방식으로 이어지고있다. 

타고난 신분에 따라서 소현은 소현대로의 왕세자란 신분에 맞게 자신을 주위에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천출출신인 막금이나 만상같은 인물들 또한 그네들 나름대로의 잡초같은 인생을 그들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다만 막금이나 만상처럼 속 시원히 자신이 살아남고자 애쓰는 과정이 현실적인 대안의 방법이었다면 소현은 소극적일 수 밖에 없는 신분의 위험을 감수하며 그날 그날을 살았다는 점에서 대비된 삶을 보여준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란 말이 있듯이 소현의 죽음 또한 정확한  것이라고 하기엔 의심의 여지를 두고 있기에 , 총명하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만 있었다면 효종과는 또 다른 청에 대한 조선의 현실적인 정치실현이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의 상상을 해 보게 한다.  

작가의 반어적인 문체 표현 속에 소현을 비롯한 인조, 심석경, 흔의 맘을 알듯 말듯 하게 하는 아쉬움은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도 그리 개운치 않는 느낌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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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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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슈바벤 마을에서 자란 나는 네모란 방이라 표현이 되는 기숙사에서 나를 포함한 5명의 여자들과 생활을 한다.  

그 일원중 롤라라는 여자아이는 자신의 가난을 벗어나고자 해가 지면 기차역에서 내리는 흰 셔츠 차림의 남자들을 유혹하고  기숙사에서 돌아온 후의 그녀의 등은 숲 속에서 뒹굴고 있는 나뭇잎의 그림이 주를 이룬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넘어진 그녀를 본 체육교사는 그녀를 따로 불러내게 되고 얼마 후 롤라는 나의 원피스에 있는 허리띠로 목을 매 자살을 한다.  

여섯 개의 침대에서 하나가 비워지고 나의 트렁크엔 그녀의 일기장이 숨겨져 있었다. 그 안의 내용엔 롤라가 강간을 당하게 됬고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자살이란 명목으로 처리되었음을 암시하게 한다.    

이후 일기장은 사라지게 되고 교내 대회에서 롤라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그녀는 당원에서 제적이 되면서 이에 찬성하는 행동으로 나는 손을 들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자살이란 점에 의문을 갖던 세 청년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는 나에게 롤라에 대한 것을 물어오게 되면서 교류를 갖는다.  

이들은 불법으로 낙인이 된 서적을 들여오고 읽으면서 그 책들을 사람이 살지 않는 여름별장이란 곳에 숨기고 민요로 내려오는 시를 읆는 이들을 경감인 프옐레가 감시를 하게 된다.  

그는 그들의 부모집을 가택수색을 당하게 되고 다시 경감에게 끌려간 그 셋은 모욕적인 벌을 받는다.  

이에 편지를 쓰게 된다면 서로가 알아 볼 수 있게 기호를 정하게 되고 이런 서신의 왕래 속에 숨 막히는 감시를 계속 당하는 생활이 된다.   

졸업 후 게오르크는 외진 곳에 교사로, 쿠르트는 도축장에서 기술자로, 에드가는 산업도시에서 교사로 , 나는 번역사 일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경감에게 다시 불려간 나는 그가 불러주는 대로 시를 읊어야 했으며, 이런 와중에 공장장의 딸인 테레쟈를 여 재단사의 집에서 비밀의 책 보관 장소열쇠를 맡기러 갔다가 만나게된다.  

경감 프옐레의 앞잡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도 계속 그녀와 만남을 지속하던 나는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협박에 응하지 않는 댓가로 해고를 당하게 된다.  

하숙집에서 엄마로 부터 도움을 받던 중 테레쟈의 주선으로 모피공장장 아이들에게 독일어를 가프쳐 주는 일을 하게 되지만 이 역시도 공장장 부인으로 부터 나에 대한 해고 경위를 듣고 잘리게 된다.  

한편 에드가와 게오르크도 해고를 당하게 되지만 쿠르트만은 해고를 면한다.  

게오르크는 쿠르트가 있는 곳에서 같이 지내다 기차역에서 폭행을 당하게 되고 법에 고소장을 내밀지만 병원에서 준 퇴원서 병인은 "구토를 동반한 여름철 독감"이란 진단서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게오르크는 출국신청서를 작성하게 되고 허가가 나올 때 까지 에드가의 부모집에서 에드가와 함께 지내게 된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점차 많아진 게오르크는 도시로 같이 가자는 에드가의 말을 뿌리치고 출국허가통지서를 받고 독일로 간 후 두 달뒤 엽서를 그들에게 보내게 되지만 그들이 받은 시기는 이미 그의 영혼은 이승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 얼마 후 프랑크푸르트 임시 숙소 6층에서 "즉사"로 죽었단 통보를 받게 된다.  

남겨진 에드가 또한 경감에게 끌려가 협조하라는 사인 종용을 받게 되지만 거절을 하고 경감이 그에게 내민 것은 쿠르트의 머리카락이 담긴 봉투를 보여준다.  

에드가와 나는 쿠르트에게 독일로 같이 갈 것을 권하지만 둘이 먼저 떠난 후 자신도 가겠다는 말로 거절을 하고 쿠르트는 옷장 맨 안쪽에서 게오르크가 남긴 시 아홉편을 찾아낸다.  

세관을 통해서 쿠르트는 도주자 명단, 붉은 등대까지란 시,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도축장에서 불법으로 동물의 피를 마시는자, 그리고 경감 프옐레의 사진을 독일로 보내는 일을 한다. 

독일로 무사히 도착 한 후의 나는 에드가와 엄마와도 각기 다른 도시로 정착을 하고 있던 중 끊임없이 감시를 당하고 체포 할 수 있을 거란 우편을 받게된다.   

그런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부당하게 해고 당했다는 사실 근거의 자료를 제출할 수 없게 되자 실업수당마저도 받지 못하는 궁핍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쿠르트가 보내 온 두툼한 편지가 도착 하기전에 받은 전보에는 쿠르트가 끈으로 집에서 목매달아 죽었단 소식을 접한 뒤였다.  

나는 테제쟈도 겨드랑이 아래에 있던 혹 때문에 애인이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조차 못 받고 죽었단 사실과 쿠르트가 보내 온 사진 속 프옐레 경감이 손자의 손을 잡고 쿠헨을 사주는 것이란 글을 보고 경감이 죽은 사람들이 모두 들어있는 자루를 짊어지길 원한다고 생각한다.  

헤르타 뮐러의 자전적 청년기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책은 끊임없이 사방에서 보이지 않게 조여오는 숨가뿐 삶을 묘사한다.  

루마니아 내의 소수 민족의 일원인 독일인으로서 루마니어와 독일어에 능통한 그녀의 주위는 당시의 독재자였던 차우셰스쿠의 정권하에서 겪었던 일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글이기에 더욱 와 닿는다.  

독재하에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던지고 있는 이 소설은 에드가의 말 "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져" 처럼 독재하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까지 그 불편함을 안겨주는 체제하의 고통을 드러낸다.   

감시를 당하게 되자 편지의 안부를 묻는 내용조차도 감시를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를 하고자 자신의 머리카락을 넣는다든지, 심문, 수색,미행을 나타내는 말 조차 암호처럼 써야 했던 당시의 우울한 시대를 사실적인 묘사와 조어로 보여준다.

경감 앞에서 끌려간 나는 그가 요구하는대로 민요의 시를 

 구름 한 점마다 세 남자친구가 들어 있네
구름이 가득한 세상에서 창녀란 그런 거지
어머니도 원래 그런 거라 하셨네
남자친구가 셋이면 어떠니
진지한 일에나 마음을 쓰렴 _125쪽  

불러주는 대로 읆었을 때의 고통감과 좌절, 모욕감, 두려움을 모두 동반한다.  

독재하의 어둠 속에서 억울한 죽음조차도 자살이란 이름으로 처리되고  법 조차도 국민을 일개의 소모품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체제를 여실히 보여준다.  심지어는 잡기위해 일부러 헛된 소문을 퍼뜨려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보이는대로 잡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체제를 여실히 보여준 점은 흡사 지금의 어느 분단 된 나라의 한 쪽을 보는 듯이 정확하게 집어주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허리끈, 자루, 노끈 이란 말 밖에 모른단 것처럼 작가의 분신인 나는 루마니아에 살고 있던 이방인인 독일인으로서  자신의 나라인 독일을 동경하고 그 곳을 탈출해서 정착하면서도 두려움에 떤 협박속에 살고 있는 삶의 연장선을 보여준다.  

"숨그네"에서 보여줬던 작가가 만들어 낸 말의 조어는 이 책에서도 그 솜씨를 발휘한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줬던 노래의 일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마음 짐승"이란 조어는 뮐러만의 독창적인 글의 향연을 보여준 제목이다.  

두려움과 불안의 연장선상인 삶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사치 일수 있는 그 당시의 공산 치하에서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마음 한 가운데에 있는, 가시가 언제고 날을 세우고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조마조마한 상황을 작가는 조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맛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 또한 북한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북한의 체제에 대해서도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정책적으로도 서로 유지를 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 읽어내려가면서도 우리가 처한 현실과도 비교를 해 보게 만든 책이다.  

뮐러의 책은 처음부터 쉽게 빠져들게 하지는 않는다.  

문체 자체가 읽어내려가면서 글의 문단과 문단의 연결성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지만 다시 들게만드는 매력에는 작가 자신이 만든 조어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체을 연상시키는 자루, 침대가 있는 기숙사의 표현을 네모난 방이란 표현처럼 읽을 수록 독자의 상상력을 부추기고, 조어의 맛을 곱씹어 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다.  

처음 부터 푹 빠져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갈수록 점차 속도가 빨라지고 그 내용면에 이끌려 글의 맛에 빠져들게 하는 책이 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모두를 지향하지만 뮐러 작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한 내면적인 고통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아견뎌왔고, 자신이 고백하듯이 루마니아에서의 삶 자체가 우연을 가장한 연극이었는지, 아니면 실제의 진실된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판단이 안선단 말엔 두려움과 불안이란 단어가 이 처럼 생생하게 전달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테레쟈에 대한 작가의 연민적인 사랑, 그녀를 앞잡이로 내세운 프옐레 경감의 행동이 자신의 열쇠를 카피하고 전화를 건 곳이 루마니아 대사관으로 연결된 사실에 다시 돌아갈  것을 말하는 나의 심정은 그 누구를 믿어야 하는 인간의신뢰에 대한  절망을 나타낸다.  

그리고 제모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 밀랍을 녹여 신체에 붙였다 떼어내는 과정을 묘사한 장면은 아직 제모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잘못된 체제속에서 끊임없이 잘못을 바로 잡고자 했지만, 아니 좀 더 자유스런 인간으로서 살고자 했던 청년들의  삶이  결국 자유를 찾아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경감에 대한 나의 생각은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을 하게 한다.  

손자에겐 한 없이 자애로운 할아버지로 변하는 경감의 모습의 이율배반적인 사진 속의 모습은 그래서 용서를 할 수 없는 감정으로 번지게한다.  

마음 짐승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때에 따라선 평생을 내 자신조차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일찍 알아버린 체제의 부당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겪은 작가 내면의 마음짐승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란  바로 이것이다란 말로 답을 내리기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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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녀는 이름이 없다.  

평소엔 얌전한 샌님인 아버지란 사람은 입에 술만 들어갔다하면 엄마를 마른 북어 패듯 패고 그런 무서움과 매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그저 이년, 저년으로 불리었고 정확한 나이도 알지 못한다.  그런 소녀의 머릿속엔 진짜 자신의 부모를 찾아서 만나는 것이다.

매를 피하다가 못한 엄마가 연례행사로 트렁크에 옷을 넣고 집을 나가던 날 , 그 뒤를 밟아 기차가 오는 역에서 머뭇거리는 엄마를 본 순간 자신이 먼저 떠날 것을 생각하는 소녀다.  

드디어 엄마가 며칠 째 집에 안들어온 것을 본 소녀는 기차 옆의 황금다방에서 마침 방학을 맞은 마담의 아들 숙제와 공부를 봐 준단 핑계로 드나들면서 언나라는 이름을 얻게된다.  

다방 아가씨중 장미란 이름을 가진 언니를 좋아했던 언나는 장미가 좋아하는 백수 백곰의 집에 같이 가게 되고 그 곳에서 백곰으로 부터 장미가 자신을 "고아에 불쌍한 년"이란 소릴 했단 소리를 듣고 싸우게 되지만 장미가 편을 든 것은 백곰이란 것을 알고 나온다.   

뛰쳐나온 기차길역에서 만난 태백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할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같이 지내게 되고 벙어리 행세를 본의아니게 하게 되면서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행복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  

하지만 사업에 실패한 할머니 아들가족이 들이닥치면서 며느리의 눈살어린 눈치, 손녀 두 명의 멸시, 아들이 엄마에게 사업자금 대 달라라는 소리에 결국 할머니는 소녀에게 돈 몇 푼을 쥐어주고 경찰서에 맡기고 돌아선다.  

경찰서에서 빠져나온 소녀는 어느 종착역에 내려서 목소리라 불린 사람 손에 이끌려 교회에서 식사를 하게 되고 그 곳에서 폐허가에서 살고 있는 어떤 남자와 살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폐허가 옆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남자가 오해를 받게되자 다시 그 곳을 떠나 거리의 각설이 패와 함께 동행하는 여행을 시작한다.  

각설이 패의 대장 또한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기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닌 단 말을 듣고 같이 찾기로 한 희망도 그가 집착하는 미남이란 여인과 용이라는 삼촌으로 불린 두 사람의 야반도주로 인해서 대장은 무너진다. 겨우 추스린 몸으로 전국장터를 배회하던 중 자리 싸움으로 인해서 대장이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자 달수 삼촌은 돈과 초코파이, 그리고 이제 여인이 된 소녀에게 생리대를 쥐여주며 서울로 가라 말한다.  

서울에 도착한 소녀는 공원에서 유미와 나리를 만나게 되고 상호를 만나게 되면서 그와 같이 밤을 보내게 된다.  

각기 다른 집안 사정으로 인해서 가출 소녀가 된 그들과 같이 지내게 되던 중 나리가 그가 겪어 온 고통이 그대로 답습이 되듯이 새 아빠에게 붙들려 집에 갇히게 되고 나리가 투신 자살을 함으로써 생을 마감한 것을 본 두 소녀는 항의를 해 보지만 소녀는 결국 청소년 보호 시설에서 지내게 된다.  

어느 날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된 소녀는 그 곳을 몰래 나와서 나리가 살던 아파트를 며칠 째 배회하던 중 새 아빠를 만나는 시점을 알고 접근, 칼로 그를 찌른다. 

 책을 읽은 지는 좀 됬지만 바로 내 느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책이다.  

흔히 말하는 결손가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녀가 처한 환경이 극단적이고 그녀가 자신의 부모가 가짜라고 여기는 어른들의 행동은 분노를 느끼게 한다. 

'내가 진짜 엄마를 찾으러 다니는 이유는 진짜엄마가 그리워서도, 진짜엄마가 필요해서도 아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확신하기 위해서, 이유는 그 뿐이다. 진짜를 찾아내야 가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 

 

이렇게 말하는 소녀는 진짜 부모가 어떤 사정에 의해서 자신과의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자신이 직접 찾아나선다는 성장이야기는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가슴의 상처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정말 의지하고 싶었던 다방언니 장미의 말 한마디와 잘못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백곰의 편을 든 점은 처음으로 감정적으로 의지하고자 했던 소녀의 마음을 닫히게 하는 데 일조한다.  

태백할머니와의 이별은 아들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진짜 부모를 찾겠단 생각을 잠시 접을 정도로 행복을 느낀 한 때였건만 핏줄이 앞선 상황에선 결국 소녀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경찰서에 맡기고 가는 가슴아파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엿보여 우울함을 줬다.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각설이 패와의 이별이다. 이들과 만나기 전의 무언의 폐허가 남자의 인생 또한 자신과 비슷한 만만치 않은 가슴을 가졌단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소녀는 어른들의 세계가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뜻대로 되지 않음을, 억울함을 호소 할 길이 없다는 막막함을 느낀다.  

전 남자가 소극적인 비 쥬류의 행동형 인간이라면 각설이패의 대장이나 달수 삼촌은 모처럼 만나는 부초 같은 인생을 보여주는동적인  인생행로를 보여준다. 

자신과 같은 신세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대장에게 의지하고 언젠간 딸을 만날 것을 희망으로 적금을 붓던 달수 삼촌의 인간상이 따뜻한 보금자리라면, 이런 인간들에게 야반도주와 돈을 가지고 간 미남이모와 용이란 인물은 가짜 부모의 형상을 보여준다.  

오래도록 의지하고 싶었고 진짜 부모를 찾는단 희망마저도 무너진 소녀에게 유미와 나리는  그런 의미에서 한가닥 의지하고픈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환경속에서 자란 그들 소녀들에게 의지할 것이라곤 서로에게 서로가 힘이 되어주는 보이지 않는 의리와 우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소녀에게 나리의 죽음을 새 아빠란 인간이 보인 최악의 저질스런 행동은 소녀가 용납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가짜 부모의 모습 그대로였고 나리의 복수를 위해서 행한 행동엔 그런 의미가 포함이 되어있다.  

누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지만 내가 모르고 지나치는, 무언의 눈빛을 받았을 지도 모르는  우리들 곁을 스쳐간 소녀의 성장은 그래서 읽는 내내 불편함과 아련함을 느끼게 해 준다.  

만나고 헤어짐을 겪어 오면서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한 몸의 변화와 함께 세상의이치란 것이 맘 먹은 대로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음을,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우리들 곁의 소녀의 모습이라서 더욱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곁을 스쳐 지나간 많은 소녀들을 우리들이 기억못하듯이 그 소녀도 우리를 자신의 곁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행인으로 기억할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짐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연령을 보니 비교적 젊은 층에 속하는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묘사법은 나이에 맞지 않는 인생의 세월 흔적을 엿보게 하고 그런 묘사를 야한표현법이라고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서 유아적인 소녀의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되게 하는 서술법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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