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이론의 비밀



마르크스 혁명 이론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역사에서 창의적 생산자인 인간은 노동할 때 새로운 생산 방법인 도구와 기술을 발전시켜 생산을 변환시킨다. 생산 양식 초기 단계에서, 생산 관계와 재산 분배는 이러한 새롭고 개선된 생산 기능과 기술 발전을 돕는다.


하지만 이후 단계에서는 커져 가는 새로운 생산력이 기존 생산 관계와 재산 분배에 갈등이 된다. 지배 계급은 자신 이익에 이끌려 변화를 저지하고 현존하는 재산 분배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배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새로운 생산 기술과 생산력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지배 계급은, 이제 과잉 생산을 방지하고 자신 이익과 투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생산 기술과 생산력을 속박하고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런 생산 관계는 인간의 생산력이 계속 발전하도록 하는 혁명에 의하여 산산조각나야 한다. 마르크스는 세계를 뒤흔드는 갈등과 그것의 결과를 유명한 두 문장으로 정식화한다. ‘생산력의 발전 형태로부터 이 관계들은 족쇄에 묶인다. 그런 다음 사회혁명 시대가 온다.’


그런데 왜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채찍질하여 필연적으로 도래할 혁명을 일으키라고 하는가? 혁명이 가차없이 자동으로 다가오고, 땅위 어떤 세력도 그것을 멈출 수 없는데도 말이다. 왜 불가피하게 일어날 혁명을 위하여 싸워야 하는가?


답은 이렇다. 마르크스 이론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에게 대항하는 혁명이 불가피하며 그것의 성공이 역사의 필연적인 경제적 법칙에 의하여 보장받는다는 것을 믿게 한다면, 프롤레타리아가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하여 혁명을 실현할 것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가 성공한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마르크스 선전을 믿고 혁명을 위하여 싸운다면, 그들은 자신 행동으로 혁명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이는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자주 알려준 관점이며, 그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명제」(1845) 에서 가장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그는 두번째 포이어바흐에 관한 명제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객관적 진리가 인간 사고 방식에 공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천 문제이다. 실천에서 사람은 진리를 증명해야 한다. …’


이 말은 사회나 역사에 관한 이론이 객관적 혹은 증명된 분석을 제공하기에 참이 아니라 오히려 효과를 낼 경우 참이라는 뜻이다. 만일 이론을 사람이 믿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도록 한다면, 그 이론은 참되게 될 것이다. 대중을 움직여 사회 조건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이론 개념이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바로 ‘실천‘(praxis)이다.


급진적 실용주의는 어떤 진술이든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바라던 목표를 발생시키는 효과를 낼 경우 참되다는 견해다. 실용주의에서는 진술이 객관적으로 증명되고 검증될 경우 참되지만, 급진적 실용주의는 사람이 진술을 믿어야 실현된다.


그래서 마르크스 역사 이론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장이 아니며, 선전 혹은 급진적 실용주의이다. 객관적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대신 어떤 진술이든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그것이 실천되어 효과를 낼 경우 참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이론이다. 즉 단순히 선전적이고 조작적이며 공격의 신화나 자기 미화나 전능(全能)의 환상에 근거한 이론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감정적으로 강제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행동을 취할 때 효과가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 이론이다.”


그래서 마르크스 이론에는 종교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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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의 소외와 분업 이론

 
"마르크스에 따르면 산업 자본주의에서 소외는 네 가지 형태를 취한다. 노동자는 자신 노동으로 만든 생산품에서 소외되고, 생산 행위에서, 사회 본성에서, 동료에게서 소외된다.

 


첫째,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품에서 소외된다. 생산품은 ‘노동자 바깥에서 노동자에게 낯선 것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노동자가 대상에 부여한 생명은 적대적이고 낯선 것으로 노동자를 대면한다.’ 생산품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사유 재산으로 이용된다. 노동자는 생산을 더 많이 할수록 자신 생산력은 더 낮게 평가된다. 노동자 임금은 그로 인해 노동하기에 필요할 정도로만 계속 유지된다.


둘째, 자본주의 제도는 사람을 생산 활동에서 소외시킨다. 노동자 활동은 자신 개인적 이해나 창의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노동은 강요된 노동이 된다.’ 그 결과 ‘노동자는 자신 노동 바깥에 있는 것으로 느낄 뿐이다.’ 노동자는 일하면 일 할수록 더욱 비인간적으로 된다. 결국에 노동자는 먹고 마시고 성행위를 하는 동물적 기능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


셋째,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를 인간 종족의 본질적 특성에서 소외시킨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즉각적인 필요 만을 위해 생산하는 동물과 달리 인류 전체를 위해서 지식과 문화(예술, 과학, 기술)를 생산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제도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생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동물적 노동으로, 자신 개인적인 물리적 필요를 만족시키는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 소외다.’ 동료는 노동자 자신과 더불어 노동의 생산품을 위하여 경쟁하는 낯선 사람이 된다. 게다가 둘 다 ‘인간의 본질적 본성’에서 소외된다.

 

 

이런 일은 왜 벌어질까? 분업이 비인간적이며 사악한 결과를 낳는다. 분업은 노동자를 탈출구가 없는 제한되고 한정된 활동 영역에 얽매이게 만든다. 그 결과, 노동자는 모든 인간적 창조력을 성취하지 못하게 된다. 그의 창의력은 분업에서 결코 발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분업은 노동자든 법률가든 사업가든 모든 사람이 생존을 위하여 각각 제한된 전문 활동에 얽매이게 만든다.

 

 

분업은 또 다른 악을 낳는다. 분업은 아무도 자신 생존과 생계를 위하여 자신이 제공하는 수단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예속 상태를 만든다. 게다가 생산 관계는 사회 생활에서 인간 관계를 대신한다. 개별 인간은 더 이상 서로에게 인격으로 나타나지 않고, 사회 내 생산 관계라는 비인간적 과정에 속하는 경제 단위로 나타난다. 더욱이 분업은 개별 노동자를 동료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키며, 서로를 대립하게 한다. 각자는 개인 이익 증가를 위하여 일하지 사회적, 인간적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분업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 상이한 형태의 소유를 함축한다.’ 생산 과정에서 생산자와 생산 재료, 생산력의 소유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분업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생산하는 것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이 자신 사유 재산으로 취하는 상황이 생긴다. 생산자와 소유자 간 분업이 있는 곳에는 노동의 생산품이 생산한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비생산적 소유자에게 속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래서 분업은 사유재산 제도의 원천이며, 소유자 계급과 생산자 계급의 계급 분리에 이른다. 두 계급은 주인과 노예 관계에 있다. 생산자 계급은 원료와 광산, 공장을 소유하며 생산자가 생산하는 것의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다.

 

 

2.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이론


‘인간 의식이 인간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인간 의식을 결정한다. 어느 시대든 지배 계급 이념이 지배 이념이다.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세력인 계급은 동시에 사회의 지배적인 지적 세력이다. 물질적 생산 수단을 마음대로 가지는 계급이 정신적 생산 수단을 통제한다. 지배 계급은 지배적인 물질 관계에 대한 관념적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 사유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이념은 진리의 왜곡, 곡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지배적이며 압제적인 경제적 계급 관점에서 보이는 대로의 실재를 반영한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계급 투쟁에 따라 결정되며 지배 계급 이익을 반영하고 증진하는 관념의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신흥 부르주아들의 정치 이론은 인류 이익을 위하는 듯이 보이는 자유와 평등을 요구했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에게 결여된 정치 권력을 제공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와 유사하게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신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리스도 삶을 모범으로 본받으라고 요구한다. 이 이상은 영적 목적에만 이바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적 정적주의(靜寂主義: 수동적인 묵상 생활을 최고 행복으로 간주하고 여기서 영혼의 완성을 기하는 이론)와 신에게 재가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모든 세속 지배자들에 대한 수동적 복종을 장려하는 데 이바지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의 모든 주된 이념과 가치는 계급 이해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기만적으로 피착취 계급이 시민 사회의 착취적 부정의와 비인간적 측면의 진상을 깨닫지 못하도록 유지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헤겔의 이데올로기 이론


세계사는 ‘절대자의 진리’(이하 이데올로기로 해석)가 인간 의식에 전개하고 드러내는 무대다. 철학적으로 이해할 때 역사는 시간 상 유한한 정신에 전개되고 나타나고 드러나는 이데올로기 구조다. 이런 식으로 헤겔은 역사가 근원적인 이데올로기 구조를 갖고 있고, 역사가 목적론적이어서 목적을 갖고 있고, 역사가 인간을 이용하여 이데올로기 목표로 향하여 움직이는 목적적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간결하고, 현명하고, 교활한 ‘이성의 간계’(이하 이데올로기로 해석)는 이데올로기 목적에 인간 열정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절대 힘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는 역사에서 계기적으로 등장하는 위대한 국가와 역사에서 심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을 활용한다.

 

 

먼저 헤겔의 국가관을 살펴보자. 이데올로기는 당신이나 나와 같이 개인의 인간 정신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영혼에 자신을 전개하고 드러낸다. 이데올로기란 오늘날 소위 문화와 아주 비슷하다. 역사의 참된 주인공은 국가, 민족 문화와 정부의 총체성이다. 이데올로기의 목적 때문에, 자유라는 의식에 도달하는 주인공은 당신과 나와 같은 개인이 아니라 위대한 국가다.

 

 

실제 개인은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갖지 못한다. 개인은 유기체의 세포처럼 국가의 의존적 부분이다. 개인은 국가라는 큰 유기체 부분이다. 당신은 국가에 봉사할 의도를 갖고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고 헤겔은 말한다. 개별 인간은 자신 욕망에 따라 이끌린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개별 인간 욕망을 자신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국가를 유지하고 지지하며, 국가가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데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 욕망을 추구하면서 좋아하는 음식과 옷, 전기 제품을 구입하며 당신이 선택한 경력을 쌓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실제로 행하는 것은 국가의 지속적인 제조와 마케팅, 금융, 교육 역할에 이어져 있고, 그래서 국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지속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별 인간의 욕망을 사용한다.

 

 

‘인간은 자신이 소유하는 모든 가치, 모든 정신적 실재를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갖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도 자신 문화와 시대의 산물에서 도피할 수 없다. 철학자도 국가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문화의 수레이며, 자신의 사유를 시대 이데올로기로부터 끌어낸다. ‘모든 개인은 시대 아들이다. 그러니 어떤 철학이 동시대 세계를 초월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한 개인이 자신 시대를 뛰어넘고 로도스의 거대한 동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다. 철학은 시대를 초월할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플라톤이 시도했듯 이상적 사회의 청사진을 제공할 수 없다고 헤겔은 말한다. 철학은 ‘사유에 반영된 자기 시대’일 뿐이다.

 

 

나폴레옹같이 세계사적 인물이 자신 개인 욕망을 추구할 때 자신이 부지불식간 이바지하는 이데올로기의 큰 목표를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도자의 위대함은 제한적이다. 지도자는 이미 발전할 만큼 무르익은 것을 정식화하고 행동에 옮긴 자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이바지하여 등장할 역사의 다음 단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 세계사적 인물은 자기 길을 방해하는 사람을 파괴하고 지배하는데, 이데올로기가 세계사적 인물을 다루는 방식도 동일하다. 세계사적 인물의 본성은 지배 열정에 불과하다. 일단 이데올로기가 세계사적 인물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목적을 달성했다면, ‘알곡이 빠져나간 텅빈 껍데기처럼’ 떨어진다. 알렉산더 대제는 일찍 죽었으며, 카이사르는 살해당했으며,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로 추방당하여 갇혔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파괴적인 지배는 국가에도 시행된다. 일단 국가들이 역사에서 한 단계 발전에 이용되었다면, 이데올로기는 다른 국가에게 그 다음 발전 단계를 구현하게 하고 원래 국가는 정체하게 만들고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게 한다. 어떤 특정 역사 시대든지, 하나의 국가만 자유의 수단이다. ‘이 국가는 이 시대의 세계사에서 주도적인 국가이다. 그리고 오직 한번 최고의 시절을 맞을 수 있다.’

 

 

헤겔에게 역사는 집단에 달려 있지 개인에게 달려 있지 않다. 역사는 한 국가의 정신, 그들 전체 문화와 관계있지, 과학과 기술과 상관없다. 헤겔에게 역사는 진보를 행하여 직선적으로 곧바로 나아가지 않고, 변증법적으로 빙돌며 나아간다. 역사는 이성에는 명확하고 의식되지 않으며, 무의식적 욕망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가득 차 있다.

 

 

계몽주의는 과학과 기술, 민주주의와 같은 위대한 발전이 일어나고, 역사가 결국 지상에 인간 생활 향상으로 나아간다고 굉장히 낙관적으로 본다. 하지만 헤겔에게 역사는 과학과 기술 발전이나 자연권과 민주주의 발전과 확산으로 인간 진보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역사는 ‘행복의 무대’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역사는 자유를 향한 운동이지만,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게 그러하며, 오직 선을 통해서만 움직이지 않고 필연적으로 악을 통해 움직인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 의식적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 욕망을 이용하여 알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개별 인간은 역사의 게임에 등장하는 작은 볼모에 불과하다.

 

 

‘국가를 넘어설 수 있는 개인은 없다. 개인은 특정 개인과 확실히 단절될 수 있어도, 이데올로기와는 단절될 수 없다.’ 하지만 국가는 확실히 잘못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헤겔은 우리 문화와 우리 정부가 윤리의 실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헤겔은, 예를 들면, 워터게이트 사건을 도덕적, 법률적 스캔들로 보는 우리 비판이 미국 문화의 도덕적, 법률적 이상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헤겔 요지는 우리 이상이 우리 국가가 산출한 이상이며 이 이상은 우리가 정부를 비판할 때 호소하는 이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법정이 데모 집단에게 징역형이나 벌금을 부가하는 경우 집회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대한 침해하는 근거에서 법정을 비난한다. 우리가 호소하는 이런 민주주의 이상은 우리 사회의 법률적, 정치적, 교육 제도를 형성하여 우리 생활을 만들어나간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이상과 도덕 신념을 내면화 했기 때문이다.

 

 

헤겔은 계몽주의와 개인의 불가양도 권리 때문에 개인이 이성적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이상화하는 견해와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인간이 독립하고 구별되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필요성보다 다른 사람과 통일성을 이루고 자신 목적보다 더 큰 목적에 참여하는 사회 전체 일부가 될 필요성이 더 크다는 것을 인식했다. 우리는 여기 헤겔이 하는 말의 위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민감하고 예민한 곳을 건드리고 있다. 고독하게 산다는 우리 느낌, 파편화되고 원자화되는 세계에 산다는 느낌, 우리가 더 큰 총체성에 소속하지 않았다는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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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원리들이 수학의 정리처럼 이성적, 보편적 진리임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철학자가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그렇지만 니체는 칸트가 도덕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 야망을 가리켜 영혼의 ‘은밀한 농담’이라고 불렀다. 도덕적 논쟁이 제 1원리에 기초한 증명을 통해 해결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칸트는 논증과 합리화를 가르는 경계를 넘고 말았으며, 니체가 비웃은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예컨데 자신을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자위가 잘못이라는 칸트의 논증이 그렇다. 그의 더 유명한 논증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누구도 실질적으로 도덕적 주장들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성공을 거둔 적이 없다. 다시 말해 어떤 도덕적 논쟁도 증명을 통해 해결된 적이 없다. <정의론>에서 전개된 롤스의 핵심 논증도 칸트 논증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은 공리화될 수 없다. 이성은 우리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우선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없다. 그 이유는 모든 이성적 사고가 ‘전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명한 전제가 없다면 순수이성은 우리 물음에 답을 줄 수 없다.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사실적 도덕 신념들 사이에 더 큰 정합성이 달성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도덕적 인식론에서 중요한 것은 자명하고 공유 가능한 토대를 찾는 일이라기보다, 주요 도덕적 신념들 사이의 정합성을 높이는 일이다. 하지만 이성 혼자서는 경합하는 가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점을 찾을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이성 혼자서는 우리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 또는 사람들이 지닌 여러 경합하는 권리들을 어떻게 서로 비교할지를 알려주지 못한다.”<옳고 그름>

 

 

 

 

 

 

 

 

 

 

 

 

 

 

 

 

 

 

 

“플라톤 생각과 달리 흄은 이성의 추론 즉 형식적 추상의 지식이 도덕적 행동에 동기를 부여할 수 없으며, 정념(감정)에 맞서 싸울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쾌락이나 고통을 주는 갈망과 느낌, 정조다. 수학과 인과적 관계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데 쓸모없다. 이성은 욕망에 의하여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에만 쓸모있다.

 

 

중고차 거래인이 갖고 있는 수학 지식과 중고 자동차 가격에 대한 지식은 그가 덕을 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을 주도하는 정직의 감정이나 부정직 감정들이 그에게 유익할 것이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정념을 섬기고 복종해야 한다’고 흄이 말한 뜻이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정념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 장치를 제공한다. 게다가 흄은, 이성이 나의 동기를 비판할 수 없고 내가 행동하게 만드는 정념과 감정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비난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흄은 다음과 같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요지를 밝힌다. ‘내 손가락의 상처보다 전세계 파멸을 선호하는 것이 이성에게는 모순적이지 않다.’ 이성은 나에게 이것이나 저것을 선택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성은 관념의 형식적 관계나 사실의 항속적 결부에만 집중할 뿐이다. 그리고 이 둘은 나의 선택에 동기를 부여하는 나의 정념과 상관없다.

 

 

이성이 나의 도덕적 행위를 지배할 수 없다면, 그리고 이성이 욕구로부터 생기는 행위의 동기를 비판할 수 없다면, 윤리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 행위나 인격에 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흄의 대답은, 그것들이 어떤 행위와의 항속적 결부에 있다고 발견될 수 있는 정조나 감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선으로 보아야 하는가를 묻지 말고 대신 경험적 사실에서 무엇을 승인하는지 물으라고 흄은 말한다. 도덕적 승인과 승인받는 행위 간의 어떤 항속적 결부가 있는지 살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도덕성이란 상호 이해의 보편적 정조에 근거한다고 결론짓는다.

 

 

흄이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물리적 자연과 인간 본성, 도덕성, 정치에 대한 자신 지식에 그처럼 확신에 차 있었던 때가 과거에는 없었다. 그들은 보편적 진리의 토대 위에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세계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거나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대단히 낙관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계몽철학은 미국 건국 이래 미국의 철학적 전망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에너지 문제, 환경적 문제, 인플레이션, 실업과 가난, 도시의 퇴락, 인종 문제 등을 해결할 지식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별로 없다.)”<방송강의 철학사>

 

 

 

 

 

 

 

 

 

 

 

 

 

 

 

 

 

 

도덕심리학은 감정이,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직관이 도덕 영역이며, 이성은 오히려 직관에 부수된 작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며, 그 후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혹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적당한 이유 찾기와 같은 ‘이성적’ 추론을 한다. 핵심은 사람이 감정적으로 먼저 판단을 내린 후 이성을 사용하지만, 반면 이성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잘못된 직관이라도 일단 형성(판단)되면, 그럴듯한 정당화 사유를 만들 수 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인식조차 못한다. 한 마디로 직관이 바뀌지 않는다면, 자신 스스로 내린 도덕적 판단이 틀리다고 여기지 않는다.”<바른 마음>

 


 

 

 

 

 

 

 

 

 

 

 

 

 

 

 

“인간은 실제로 절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 인식보다 행동이 앞서게 된다. 예를 들면 여러 선택지에 대한 사람들 몸이 다르게 반응하기에 감정이 의사결정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과거 경험이 신체 반응에 각인된다는 것인데, 이를 ‘신체 표지’라고 한다. 신체 표지가 무의식 단계에서 작용하여 사람들이 부정적인 길을 선택할 때 위험을 알리는 자동 알람 체계로 기능한다. 이 자동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뇌 속에서 1,000분의 몇 초 안에 작동하여 사람들이 즉시 부정적인 행동 방침을 기각하고 다른 선택지를 고려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선택지를 강조하여 재빨리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선택한다. 이 결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스피노자의 뇌>

 

 

 

 

 

 

 

 

 

 

 

 

 

 

 

 

 

“진보는 자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에게도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감정을 이입해야 한다고 믿는다. 완전한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이 네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네가 그 사람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황금률 그 이상이다. 이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당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진보의 감정이입 원칙은, 당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더욱 강한 황금률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을 위해 하려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해주어라’는 의미다.
 


진보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입은 인간이 선과 악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 가치를 통해 세상을 보고, 진정으로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당신과 다른 도덕 가치를 가진 모든 사람을 적이나 악마를 대하듯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사람 가치에 대한 존중과 열린 마음이다.
 


진보주의의 최고 도덕 가치는 감정이입인 반면, 보수주의는 도덕 자제가 높은 우선권을 가진다. 그 바로 위에는 도덕적 권위, 도덕적 질서, 그리고 보복(징벌)이 위치한다. 보수주의 도덕에서 감정이입은 낮은 우선권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 권위, 도덕적 자제 그리고 보복에 윗자리를 양보해야 된다. 이것은 일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복지수혜자, 기술 훈련 없이 직업을 구하려는 사람, 섹스를 자제하지 못한 미혼모, 등과 같이 도덕적 힘(자제)이 없는 사람들과 충분히 감정이입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자기중심적 감정이입을 하는 보수는 자신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만 돕는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 공동체 밖에 있다고 간주할 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결과 많은 보수는 재난을 당한 이웃(가치를 공유하는 명확한 공동체 구성원)과 다친 외국인 노동자(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들)를 구별하여 돕거나 돕지 않는다.”<도덕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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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은 글라스고 대학의 스코틀랜드 출신 도덕철학자 프란시스 허치슨 작품을 발견했다. 허치슨은 도덕 원리가 기독교 말대로 성경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며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말대로 이성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그저 우리의 감정과 찬동, 반대에 대한 우리 정조에 의존한다고 허치슨은 말했다.

 

 

경험론자 흄의 새로운 발견은 이것이었다. 도덕적 신념이 신적인 것도 이성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우리 감정을 표현할 뿐이라는 이 견해를 우리 모든 신념에 확대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전혀 지식이 아니며 확실성이 없고 확실하다고 보여 줄 방법도 없으며, 다만 우리의 감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참되다는 우리 감정에 근거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천문학과 물리학, 화학, 생리학이라는 위대한 새로운 과학의 모든 업적들, 계몽 시대 모든 경이는 무너진다. 이것들은 우리가 질서정연한 형식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이 참되다고 하는 정조, 감정에 불과하다.

 

 

흄의 흥미진진한 새로운 철학적 전망은, 지식이 감각 지각에서만 나온다는 로크와 버클리의 경험론과, 도덕이 정조나 감정에서만 나온다고 주장한 허치슨의 도덕철학을 결합했다. 흄은 우리의 가장 뛰어난 지식, 즉 우리의 과학적 법칙이 우리가 감정에 이끌려 믿게된 감각 지각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사유를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감각 지각과 감정만 갖는다.

 

 

흄은 두 종류의 지식이 있음을 부인한다. 철학자가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우월한 지식, 실재의 본질에 대한 지식, 형이상학적 지식이 있다는 인식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며 완전히 착각이라고 그는 말한다. 속기 쉬운 대중에게 이런 인식을 속여서 말하는 철학자는 사기와 거짓말을 한 것이다. 플라톤이나 성 토마스, 데카르트가 말한 형이상학은 그런 자들을 믿는 사람들의 ‘무분별한 오만’ ‘거만한 허위’ ‘미신적인 경신’의 산물이라고 흄은 말한다.

 

 

우리는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결코 알 수 없다고 흄은 주장한다. 궁극적 실재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무뢰한이거나 바보이다. 바보라 함은, 우리 인간이 감각 지각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궁극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뢰한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 한계를 알면서 자신의 그릇된 철학을 따르라고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갖는 감각 지각의 원인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고 흄은 말한다. 우리는 세계 속에 있는 사물의 참된 성질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들이 왜 그렇게 존재하는지를 결코 알지 못한다. 이성은 세계 본질이나 목적이나 계획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인간 지성은 제한적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형이상학은 그것의 근거인 교설과 더불어 거짓되고 허튼 소리인 것으로 폭로되어야 한다. 즉 감각 지각에 의한 일상적 지식과 이성에 의한 우월한 형이상학적 지식이라는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는 교설 말이다.

 

 

흄의 요지는 관념(이성)이란 그 관념이 도출되어 나오는 상응하는 인상(감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 관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성질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것에 관한 인상을 가질 경우에만, 그것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가질 경우에만 무엇이 존재한다고 알 수 있다. 그래서 흄은 우리가 물리적 실체에 대한 인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줌으로써 실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파괴한다.

 

 

흄은 철학자들이 마치 물리적 실체, 정신적 실체 등이 독립된 존재를 갖고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것처럼, 그와 같이 텅 비고 무의미한 낱말들을 사용한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분석해 보면 그것들(실체, 마음, 자아)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인상이 없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개별적 성질뿐임을 발견한다고 흄은 말한다. 그래서 실체니 마음이니 자이니 하는 이런 말들은 아무 인상에서도 나오지 않았기에 의미가 없다.

 

 

그래서 흄은 모든 관념이 그것에 상응하는 인상에서 생긴다는 규칙을 사용함으로써 이런 관념들을 파괴할 수 있다. 그의 규칙은 간단하고 강력하다. 인상이 없으면 관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인상이 없으면 관념은 무의미하다. 그처럼 흄의 경험론 규칙은 지식으로서 우리 관념의 가치를 검토하는 테스트일 뿐 아니라(인상이 없으면 그 관념은 무가치하다) 우리 관념의 의미에 대한 테스트이기도 하다(인상이 없으면 그 관념은 무의미하다).

 

 

우리의 관념 연합은 우리 관점의 세 가지 성질에 근거한다. 그래서 이 성질들은 마음이 하나의 관념에서 다른 것으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의 관념을 다른 관념과 연관짓게 한다. 이 세 가지 성질은 관념연합의 세 가지 법칙인 유사성과 근접성, 원인과 결과의 기초다. 즉 우리 사유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관념에서 그와 닮거나 그것 가까이에 있거나 그것의 결과인 다른 관념으로 이끌리게 하는 이 세 가지 법칙은 우리의 모든 추론을 포함하여 우리 모든 정신 작용을 특징지으며, 특별히 우리 과학적 관념들을 특징짓는다. 관념연합의 세 가지 법칙 가운데 원인과 결과에 의한 관념 연합이 우리 관념 사이에 가장 강력한 연관이라고 흄은 말한다.

 

 

그러면 과학적 지식은 인간 심리의 법칙이 원인과 결과로서 함께 연합시키는 관념에 불과한가? 천문학의 인과법칙, 역학과 만유인력과 기체 운동의 법칙은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관념을 연합하는 우리 심리 표현에 불과한가? 그럴 경우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전혀 갖지 못한다. 우리는 과학 지식 대신 우리 관념들이 원인과 결과에 의하여 연관된다고 우리를 느끼게 만드는 은근한 힘에 대한 감정만 가질 뿐이다. 과학 법칙은 심리학적인 연합 법칙과 이 법칙들이 발휘하는 강제의 감정에 의하여 연관된 감각 인상에 근거할 따름이다.”<방송강의 철학사>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객체와 주체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보편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보려고 시도한다. 자연의 법칙은 고정되어 있고 불변이다. 물질 우주는 ‘거기’에 존재하고, 자연 법칙에 지배되고 우주를 생각하는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개인의 감정과 신념, 관점에서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은 어디서 왔을까? 자연의 법칙은 가설, 곧 과학자의 직관과 마음에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과학자들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 자연법칙의 정수를 파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닐스 보어는 ‘물리학은 (객관적이며)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정리하고 조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험자와 관찰자, 이론가는 외적인 어떤 것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직접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쉬운 베이즈통계학 입문>

 

 

 

 

 

 

 

 

 

 

 

 

 

 

 

 


“우리는 과학이 인간 세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과학에서 말하는 자연 법칙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이해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모델’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중력이란 지구 주변 공간이 휘어진 것이라는 현재의 상대성이론도 100년 뒤에는 다른 해석으로 바뀔지 모른다.

 

 

과학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은 16~17세기에 나타났다. 그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었다. 16세기 중앙집권적 국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기독교적인 생각이 접목되면서, ‘자연의 사물에게까지 법을 만들어 부여하는 신’이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진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운동법칙을 애기하면서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을 사용했던 초기 과학자들 중 한 명이었다. 신이 우주를 만들 때 우주의 물질에 법칙을 부여했다.

 

 

자연에 보편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이 왜 그런 법칙이 존재하는지, 혹은 누가 그런 법칙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문제도 생긴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반론에 다른 논박도 있다. 자연의 법칙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적 형태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한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이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한 변수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예술과 같이 창조적 활동이다.”<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허시간에서 우주가 유한하지만 경계나 특이점을 갖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실시간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특이점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블랙홀 속으로 떨어지는 불쌍한 우주비행사는 여전히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가 허시간에서 살았을 때에만 특이점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허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실시간이고, 우리가 실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시간에서 우주는 특이점에서 시작과 끝을 가지며, 그 특이점이 시공 경계를 형성한다. 또한 그 특이점들에서 과학법칙은 모두 붕괴한다.
 


하지만 허시간에서는 특이점도 경계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허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마도 실제로는 더 근본적이며, 우리가 실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 모습을 기술하기에 편리하도록 고안한 인위적인 개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과학이론이란 우리 관찰결과를 기술하기 위해서 만든 수학 모형에 불과하다. 과학 이론이란 우리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실시간, 허시간, 어느 것이 진짜일지 물음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유용한 기술(記述)인가이다.”<시간의 역사>

 

 

 

 

 

 

 

 

 

 

 

 

 

 

 

 

 

"문자, 즉 시니피앙이 인간을 결정하는 첫 번째 원인이자 시작이다. 모든 것은 문자와 더불어 시작된다. 그리고 문자는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그때그때 새로운 사건과 의미를 발생시킨다. 사건을 가능하게 만들고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시니피앙이다. 시니피앙은 이성을 대신하는 새로운 로고스 지위를 부여받았다. 전통적으로 로고스는 존재 이유와 본질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종 근거와 법칙을 의미했으나 그것은 사물 자체에 속한다기보다는 사물 법칙을 인식하는 이성에게 귀속되었다. 하지만 라캉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래 이제 이성보다 무의식이 더 본질적인 것이 되었고 무의식을 규정하는 시니피앙이 이성을 대신하여 새로운 시대의 로고스가 되었다."<에크리>

 

 

 

 

 

 

 

 

 

 

 

 

 

 

 

 

 

“사회 질서는 인간의 지속적 외재화 과정 가운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질서는 ‘사물들의 본질’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들’로부터 유래할 수 없다. 사회 질서는 오로지 인간 활동의 산물로 존재한다. 경험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서툴게 혼돈하지만 않는다면, 사회 질서에 다른 어떠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는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현 체제를 추론한다.

 

 

“롤스가 사회 계약론을 제시할 때 계약 당사자들 간 놓인 ‘자연상태’를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동등한 힘과 권리를 갖고, 합의에 이르는 처지가 대등한 상황”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런 상황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다. 현실에서 계약 당사자들은 힘과 권리가 동등하지 않으며, 절대 대등하지도 않다. 홉스 철학도 비슷하다. 그의 논점은 “국가 전체 입장을 고려할 때 모든 시민의 중요한 이해관계는 같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이는 군주 이익은 대체로 국민 이익과 같다는 가정과 연관된다. 하지만 무정부 상태 방지를 위해 군주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확장한다. 홉스가 절대 권력 부여보다 권력 분할 방식을 추론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실재의 사회적 구성>

 

 

 

 

 

 

 

 

 

 

 

 

 

 


 

 

자연상태와 자연법 가정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인간이 만든 법률은 바로 자연법에서 파생되었기에 법의 특성을 갖게 된다. 만약 인간의 법이 자연법에 배치된다면 법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밝혔다. 지금 현대까지도 자연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연법은 기하학의 공리처럼 아무도 알 수 없는 조작적 정의일 수 있다. “예컨대 자유방임주의 사상과 인권 사상은 청교도주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게다가 중세와 근대와 달리 신학적 기반을 떠난 현대 사상에서 자연상태와 자연법 이론은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불완전 이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러셀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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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다. 우리는 숨을 쉴 때마다 한 번에 500밀리미터 정도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여기에는 대략 아보가드로수의 전자가 들어 있다. 아보가드로수란 1 뒤에 0이 23개나 붙은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다. 그런데 이 많은 전자들은 서로 완전히 똑같다. 전자는 색도 모양도 없다. 그 내부에 더 작은 세부 구조 따위도 없다. 그래서 모든 전자는 똑같다.

 

 

우리는 전자가 그 자체로 질량과 전하를 갖는 실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가 결과물에 불과하기에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들은 기호와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전자는 무엇의 결과물일까? 물리학자들은 이 무엇을 ‘전자장’이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전자를 기술하는 방법이 양자장론이다.

 

 

양자장론이 보는 세상은 이렇다. 전자장에서 전자가 만들어진다. 전자는 실체가 아니라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장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전자는 서로 구분할 수 없이 똑같다.

 

 

전자는 특별한 반지름을 갖는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른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그냥 점프를 해야 한다. 문제는 점프를 하는 동안 궤도 사이를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한 궤도에서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짠하고 나타난다. 역시 이유는 모른다.

 

 

전자가 이렇게 점프를 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우리가 원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점프할 때 드나드는 빛뿐이다. 빛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점프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나는 상태’가 반드시 정해져야 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려면 입구와 출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리에서는 입구와 출구 모두 에너지로 기술된다. 즉 시작 에너지와 끝 에너지가 필요하다. 가로 방향을 시작 에너지, 세로 방향을 끝 에너지 순서로 이들을 늘어세우면 2차원 격자 모양의 배열이 얻어지는데 이런 숫자들의 배열을 수학에서는 ‘행렬’이라고 부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는 행렬이다’라고 말했다.

 

 

결정을 이루는 각 원자 껍질의 전자들은 새로운 상태에 놓인다. 얼핏 생각하면 전자들은 이웃 원자의 전자들과 몸을 맞대고 찌그러져 있을 것 같지만 양자역학은 우리 예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각 껍질의 전자들은 마치 안개같이 고체 전체에 스며들듯이 퍼지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서울시의 각 구를 원자라고 해보자. 구의 경계에 사는 주민들만 따로 뽑아내 헬리곱터를 타고 서울시 상공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살도록 하자. 이들은 구라는 한계를 벗어나 서울시 전체의 상태에 거주하게 된 거다. 이런 전자의 상태를 ‘띠(band)’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띠는 물질을 이루는 원자 전체가 만들어낸 가상의 구조물이다. 적어도 결정으로 된 물질은 이웃한 두 원자를 접착제로 붙이는 방식으로만 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띠는 물질의 특성, 즉 전기적 특성인 전기력을 말해준다. 물질의 한쪽에는 전원의 양극, 다른 쪽에는 음극을 연결하면 원자핵은 양전하니까 음극으로 끌려가고, 전자는 음전하니까 양극으로 끌려간다.

 

 

도체와 부도체 구분은 띠의 특성이 결정한다. 도체 내부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전자는 분명 개별 원자에 묶여 있을 수 없다. 모든 원자들이 만든 총체적 구조, 즉 띠에 놓인 전자가 전류를 만든다. 하지만 부도체는 왜 존재힐까? 여기서도 띠에 존재하는 전자가 있다. 띠에도 추가적인 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부도체는 전원을 연결해도 띠의 전자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전류가 흐르는 동안 도체 내 전자는 금속 내부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 이렇게 자유로이 흐르는 전자를 ‘자유전자’라고 부른다. 자유전자는 모든 원자가 만든 총체적 구조를 타고 흐른다.

 

 

전하가 있거나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만들어진다. 전류가 있거나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재미있는 결과를 추론할 수 있다. 자기장이 변하면 전기장이 만들어진다. 반대로 전기장이 변하면 자기장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전기장이 자기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장이 다시 전기장을 만드는 상황이 가능하지 않을까? 전하나 전류 없이, 오직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를 만들어가며 공간으로 진행한다. 맥스웰은 이것에 ‘전자기파’란 이름을 주었다. 놀랍게도 전자기파가 정말 존재한다. 바로 ‘빛’이다.

 

 

에너지를 전기장 형태로 저장하는 장치를 ‘축전기’라고 하고, 자기장 형태로 저장하는 장치를 ‘코일’이라고 한다. 전기장은 전하가 만든다고 했으니 전하를 저장하는 것이 축전기다. 전하에는 양전하와 음전하 두 종류가 있다. 따라서 양전하와 음전하를 저장할 분리된 장소 두 개가 필요하다. 양전하와 음전하는 서로 당기니까 이 두 장소를 가까이 가져다 놓으면 전하들이 서로 당기며 고정된다. 실제로 축전기는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금속판이다. 이렇게만 하면 부피가 너무 크기에 띠 형태로 만들어서 셀로판테이프처럼 감아둔다. 코일도 별거 아니다. 자기장은 전류가 만든다고 했으니 도선만 있으면 된다. 도선을 용수철 모양으로 둘둘 감아놓으면 그 내부에 자기장이 갇혀 저장된다.

 

 

에너지보존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전기에너지에서 자기에너지로 형태만 바뀐다. 전기를 이용하여 불을 밝히거나 전열기를 뜨겁게 하려면 전기에너지를 빛이나 열에너지로 바꿔야 한다. 이렇게 해주는 장치를 ‘저항’이라고 한다. 결국 모든 전기 장치는 축전기, 코일, 저항의 조합의 구성된다.

 

 

저항은 왜 생길까? 전류는 원자 전체가 만든 전도띠에 전자가 있을 때 생긴다. 즉 하나의 전자가 모든 원자 위치에 동시에 존재하는 기괴한 양자역학적 상태다. 상태 자체가 전자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렇다면 전도띠의 전자는 자유롭게 움직여야지 왜 방해를 받을까? 전자는 원자라는 규칙적인 방해물이 있을 때,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운동할 수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전공자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만약 원자 배열 규칙성이 깨지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구리에 아연이나 니켈 같은 불순물이 들어가면 말이다. 그러면 저항이 생긴다. 장애물들이 똑같이 생겼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다르게 생겼다면 운동에 방해가 된다. 고체에 불순물이 없어도 온도가 높아지면 저항이 커진다. 온도가 높아지면 물질을 이루는 원자들이 더 격렬하게 요동치는데, 이는 원자들의 규칙적인 구조가 더 많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순물 하나 없이 순수한 결정 물질의 온도가 절대 0도가 되면 저항은 사라진다.

 

 

그런데 1911년 이상한 현상이 발견된다. 불순물이 들어 있는 도체 온도를 절대 0도로 낮추는 실험에서 온도가 0도에 이르기도 전에 도체 저항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초전도가 부르는 현상으로 이후 1950년대에 가서야 그 이유가 설명된다. 1986년에는 아주 높은 온도에서도 특정 물질의 저항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견된다. 이것은 기존 초전도 이론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데, 이를 고온초전도라 부른다. 아직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는 이론은 없다.

 

 

라디오나 핸드폰 같은 장치는 전파를 보내거나 받을 수 있다. 전자기파를 송수신할 수 있어야 한다. 전자기파는 전기장이 자기장으로, 자기장이 전기장으로 바뀌며 진행한다. 따라서 전기장을 저장하는 축전기와 자기장을 저장하는 코일을 서로 연결해주면 송수신기가 된다. 보통 코일을 L, 축전기를 C라고 쓰는데, 이런 연결 회로를 ‘LC 공진회로’라고 부른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전자기진동은 용수철에 달린 추의 진동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단진동이라는 의미다."

 

 

 

 

 


운동 법칙(F=ma)의 질량과 중력의 질량은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중력을 받으며 운동하는 물체를 기술할 때, 두 개의 질량이 상쇄되어 운동 방정식에서 사라진다. 지구상의 물체가 모두 같은 속도로 낙하하는 이유다. 중력이 어떻게 전달되느냐는 의문에 대한 단서는 전자기 현상에서 나온다. 두 개의 자석은 방향에 따라 서로 당기거나 밀어낸다. 사실 이 질문은 중력에서 했던 질문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질량이 있으면 주변에 중력장이 존재한다. 마치 거미가 있으면 주위에 거미줄이 있는 것과 같다. 달은 지구를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만든 중력장을 느낀다. 질량이 움직이면 중력에 변화가 생기며 이 변화는 중력장의 진동으로 전달될 것이다. 그 진동의 이름은 ‘중력파‘다. 2017년 노벨물리학상은 중력파를 실제로관측한 과학자들에게 수여되었다. 중력파란 정확히 무엇이 진동하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앞서 이야기한 두 번째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뉴턴의 운동법칙 F=ma에는 세 개의 알파벳이 등장한다. 힘(F), 질량(m), 가속도(a)다. 뉴턴에 따르면 이 수식은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해석된다. 물체에 힘(F)을 가하면 가속(a)된다. 속도가 바뀐다는 의미다. 같은 힘에 대해 질량(m)이 클수록 가속은 작다. 문제는 왜 질량이 여기 있냐는 것이다.

지하철이 설 때 몸이 앞으로 쏠린다. 정지해 있던 몸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니 가속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중력이나 전자기력같이 나를 앞으로 미는 힘은 없다. 그렇다면 이 가속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하철이 설 때, 내가 느끼는 속도의 변화는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일까? 하지만 여기에 힘은 없고 단지 지하철이 정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할 차례다.

가속되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는) 힘을 느낀다. 뉴턴의 운동법칙 F=ma를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며 해석해보자. 그 사람이 느끼는 가속도에 질량을 곱하여 힘을 얻는다. 결국 이 힘은 질량이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질량이 만드는 힘은 중력이다. 결국 운동법칙에 질량이 등장하는 이유는 가속되는 사람이 느끼는 힘이 중력과 같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등가원리‘라고 부른다. 가속과 중력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체를 던지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있다. 물체의 궤적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구 위에서 이 궤적은 2차람수라는 도형으로 주어지며 이 도형을 그려서 미래 위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중간에 궤적이 갑자기 끊어지면 어떨까? 어려운 말로 불연속점이 생긴 것인데, 이 경우에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할까? 통계물리학에 따르면 상전이가 일어나는 순간 물리랭들은 무한히 커지거나 불연속이 된다. 즉 상전이 전후를 연속적으로 연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체로부터 고체 특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전이가 일어날 때 무언가 새로운 특성이 돌연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 역사에서 전쟁이야말로 일종의 상전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상전이가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상전이를 경계로 이전과 이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상전이는 이후 세상이 갖는 특성을 결정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상전이의 결과물이다. 우리 모두가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미국이 초강대국인 이유, 우리가 분단된 이유 등은 모두 이 상전이의 결과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물질에서도 상전이를 통해 얼음이 물이 되거나 물이 수증기가 되듯이, 상전이 이전에 물질이 갖지 않았던 속성이 새롭게 생겨난다. 이처럼 구성요소에서 없던 성질이 전체 구조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창발이라 부른다. 창발은 많으면 다르다고, 층위가 다르면 새로운 법칙이 나타난다고 말해준다. 우주에는 쿼크에서 우주공간까지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층위들이 있다. 각 층위는 자신만의 언어와 법칙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인접한 위아래 층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지만 부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뜨거운 물체의 경우 그 물체를 이루는 원자들이 더 격렬하게 운동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온도에 기여하는 운동은 ‘무작위’ 운동이다. 비유를 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봉을 조사하여 분포를 구하면 평균과 표준편자를 알 수 있다. 표준편차는 분포의 폭과 관련된다. 이것은 자료가 평균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즉 얼마나 무작위한지를 나타낸다. KTX에 탄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 사람의 몸을 이루는 모든 원자 속도는 빨라진다. 이것은 원자 속도분포의 평균값이 커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온도를 결정하는 것은 평균이 아니라 표준편차다. 평균이 크다고 표준편차도 큰 것은 아니다.

혹자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물질적 풍요는 분명 과학기술 발전 덕분이다. 하지만 부를 분배하는 것, 즉 분포의 표준편차를 줄이는 것은 또 다른 이슈다. 온도는 표준편차가 결정하 듯 우리가 아무리 부의 평균을 높이더라도 표준편차를 줄이지 못하면 사회는 뜨거워진다는 말이다.


뇌터 정리에 따르면 에너지 보존법칙은 시간에 대한 대칭에서 기원한다. 공간에 대한 대칭은 운동량 보존법칙을 준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여도 상황에 물리적 변화가 없는 경우, 즉 공간에 대칭이 있는 경우 물체의 운동량(질량에 속도를 곱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등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영원히 등속운동을 한다.

이제 중력을 대칭 시각으로 보자. 위아래 방향은 중력 때문에 대칭이 깨져 있다. 옆으로는 대칭적이다. 특별한 방향이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물체는 옆 방향으로는 어디로든 움직일 수 없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방향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특별한 방향이 없다는 가정에 위배된다. 그래서 물체는 옆으로는 이동할 방향을 정하지 못하여 혹은 대칭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래로만 낙하한다. 대칭으로 보는 세상은 뉴턴역학과 철학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대칭은 물리학과 상관없는 수학적 성질이다. 좌우가 같다거나 모양이 구형이라는 것은 물리법칙과 직접 관련이 없다. 수학은 물리보다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대칭이 보존법칙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닐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보존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대칭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칭이 먼저고 보존법칙은 그 부산물이 아닐까 하는 거다. 오늘날 많은 물리학자들은 대칭이 더욱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은 게이지 대칭이라는 추상적인 대칭성을 갖는다. 수학적으로 복소수와 관련한 특성이다. 양자역학이 게이지 대칭성을 가진다고 가정하면 수학적으로 전기장이 존재해야 한다. 양자역학이 전기장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아할 것이다. 이처럼 대칭은 때로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두 가지 개념을 하나로 묶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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