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광수(1892~1950)가 쓴 근대 소설 『무정』(1917) 이전의 작품인 이인직(1862~1916)의 『혈의 누』(1906), 『귀의 성』(1907)이나 이해조(1869~1927)의 『자유종』(1910), 『옥중화』(1912) 같은 소설을 ‘신소설’이라 부릅니다. 이인직과 이해조는 기존의 구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써 인기를 끌었습니다.
신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희한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건 진행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수시로 끼어듭니다. 스토리는 복잡하고 정신없이 전개됩니다. 또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우여곡절’이나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 이외 다른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플롯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보통 신소설은 문학적으로 수준이 낮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신소설의 이런 특징을 단순히 근대 이전의 미발달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 소설인 이광수의 작품 시기와 거의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근대 이전 ‘구소설’ 작품에도 이러한 플롯 문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인직이나 이해조 모두 소설가로서 자질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럼에도 대중은 왜 그들 작품에 열광했을까요?
신소설은 공동체가 개인으로 분해되어 모든 사람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다투며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 욕망을 채우려고 모든 사람이 아귀가 되어버린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에 나타난 조선 말기 사회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인 유대가 사라지고 각자 자유롭게 개인들로 흩어져 생존을 위해 자신을 지키고 자신 욕구를 채우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 대중은 공동체가 붕괴되어 우연한 사건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고독하고 불안에 떠는 개인들로 흩어진 낯선 자유주의 세상 묘사에 공감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공동체 붕괴 현상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도 나타났습니다. 당시 어느 프랑스 가톨릭 신부는 경건하고 건강한 삶의 마지막 모델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운 일이라고 썼습니다.
“동구권 노동자들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발자크와 도스코옙스키, 체호프 소설, 그리고 보들레르와 투르게네프, 마야콥스키 시집을 포함한 백 권 남짓한 책이 잘 정리되어 꽂혀 있는 서가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달력이나 잡지에서 오린 성인(聖人)들의 초상화나 쿠르베나 르누아르 그림을 집주인이 손수 만든 액자에 끼워 걸어놓은 식탁 옆 아름다운 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상 대화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정신을 집중해 듣고, 어떤 가벼운 화제라도 정신을 집중해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영영 사라질 것이다. 그들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연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전환한 러시아는 자유가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 자유는 그들이 기대한 바와는 달랐습니다. 어느 프랑스 신부가 한 예견이 맞았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1948~ )는 『세컨드핸드 타임』(2013)에서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인들이 자유를 어떻게 여기게 됐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련 붕괴 이전 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20루블(1,7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고, 그 돈은 제게 충분했어요. 그런데 진짜 돈이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온 거예요. 원한다면 이제 여행을 해도 좋고, 파리에 가볼 수 있고, 스페인에서의 축제와 투우도 볼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은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접했던 것들이죠.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저는 이런 것들을 직접 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책은 인생을 대신하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수다를 떨며 매일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나날의 막이 내렸고, 우리는 월급과 추가 일당을 받기 위해 노동을 시작했어요. 돈은 자유라는 단어의 유의어였어요. 사람들은 서재에 있던 책들을 전부 내다 팔았죠. 책에 실망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요새 무슨 책을 읽고 있어?’라고 물어보는 것도 실례가 되는 시대가 돼버렸어요. 러시아 소설들은 인생을 성공하는 방법이나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요. 체호프의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차를 마시면서 삶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뿐이에요.
사회주의 안에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통을 이겨나가는 그런 세상이 있단 말이에요. 어느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차도 살 수 없었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차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요. 아무도 베르사체 양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고, 마이애미에 별장을 사지 않았어요. 소련 지도자들은 중소기업 사장님 수준에서 살았지 소련 붕괴 이후 등장한 러시아 신흥재벌만큼은 절대로 아니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구리욕조를 사세요’라고 하는데. 그 욕조 가격이 방 두 칸짜리 아파트 값이라고요. 그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이런 게 자유인가요? 작고 평범한 일반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無) 존재라고요, 삶의 바닥에 있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 뭔가요? 소비가 우상시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제 뭔가 숭고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하며 잠드는 게 아니라, 오늘 못 산 물건을 떠올린다고요. 삶은 돈과 어음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일 뿐이고, 자유가 곧 돈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말들을 하지요. 아무튼 전 제 손주들이 불쌍해요. 가여워요. 이 모든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매일매일 세뇌당하고 있으니까요. 전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회주의 시절에 우리가 얼마나 열악하게 살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대는 걸 듣는 것도 이젠 지쳤어요. 그때는 분명 화려하지 않았지만 정상적이었던 삶이었어요. 그때도 사랑과 우정이 있었고, 원피스와 구두도 있었어요. 그때는 작가와 배우들의 목소리를 갈급한 마음으로 들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죠.“
시장을 도입하는 것과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계획 경제에서 시장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전환이 아니라 권력이 정부 관리에서 자본주의 기업가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이동하는 정치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오랜 세월이 걸릴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은 공산화되기 이전부터 마을 재산을 모두 평등하게 나눠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상업과 사유제를 경시하며, 혼자만 이익을 얻겠단 생각이 없었습니다. 모두 토지를 공유하고 함께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금도 마을 단위로 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내서 가난한 집이 조금 덜 내도록 했습니다.** 소련 붕괴 후 서방에서 흘러들어 온 자유주의는 모두 함께 살아가는데 익숙한 러시아 농촌 공동체에서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사상이었습니다.
러시아어 ‘소보르노스쯔’(sobornost)는 이러한 유대를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공동체 정신’ 혹은 ‘공동체 의식’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정신은 그들의 종교와 민족성이 어우러져 생겨난 개념으로 러시아 역사의 매 단계마다 그 위력을 발휘하면서 문학과 예술, 사상의 방향을 주도했습니다. 소보르노스쯔는 러시아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규정하는 근본 개념이었으며, 러시아인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종교적인 토대이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정신’은 자동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공공 모두의 노력으로 실현됩니다. 우리 각자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와줄 힘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1897~1980)와 피터 모린(1877~1949)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항상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습니다. 모두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어려움에 처에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히 어려운 게 아닙니다.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이 서로 친밀하게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지원을 무조건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합니다.
역사의 다른 시기와 달리 지금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자원이 충분합니다. 음식이나 의료 서비스, 쉼터 등 기본적인 자원은 모든 이에게 돌아갈 만큼 넉넉합니다. 우리 후손은 너무도 당연히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억만장자 2,047명은 전 세계 극빈층 가난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은 걸까?” 만일 어느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아무 때나 사회의 구조적안 모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며, 구성원은 사람이 아닙니다.
라캉의 지적처럼 인간은 항상 타인과의 만남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직 ‘우리’ 안에서만 나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현은 자기실현이 아니라 ‘우리 실현’ 속에서만 온전히 수행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에 대한 관심은 고립된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와 네가 더불어 이루어내야 할 ‘우리’에 대한 지향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실현은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입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고 그 안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중동 대부분 이슬람 국가 역시 자유주의 국가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내다봅니다. 그들 역시 공동체주의라는 신념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종교 기원은 창시자가 태어난 날이나 선지자가 깨달음을 얻은 날로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슬람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시기를 종교 기원으로 삼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움마’라 부르는 공동체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고립된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을 제시했습니다. 개인은 공동체 일원으로서 이슬람 사회에 종사하여 하늘나라에 그들 자리를 얻습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이슬람 세계의 산업화가 늦어졌습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자기 이익을 기반으로 핵가족을 책임지며 독자적인 경제적인 결정을 내리는 개인주의가 있어야 했지만, 이슬람 세계는 공동체를 다른 관계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중동 정부들은 공동체의 선(善)을 지지하기에 개인의 자유나 소수자의 권리를 따로 떼어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의지가 곧 공동선이므로 그 공동선이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도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조화와 효율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체로 사유재산은 폐지되며, 개인의 이기심은 억제되어야 했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에 종속되어야 하는 사회가 플라톤이 『국가』(BC 380?)에서 주장하는 이상사회였습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싹튼 개인주의 경향이 시민생활의 전통을 침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은 공동체 생활에 대한 참여를 소홀히 하고 개인의 부와 안락만 열심히 추구했습니다.
우리는 정치란 대중이 스스로 정치에 적극 참여해 자신 이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정치가나 정당이 하는 약속을 선거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각자의 이해관계를 일단 떠나 스스로가 속한 공동체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계속 토의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건 좋은 정치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건 나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공동체에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물질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공의 장에서 서로 설득하려는 게 본래의 정치입니다.
현재 이란을 지배하는 체제 역시 루소가 꿈꾼 공동체주의 이상을 이슬람교식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이란인들도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지만, 특정 이익을 위해 사회가 희생된다면 그때 손실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어디에서나 존중받을 수 있는 보편적 인간 속성으로 파악하는데 그러한 인식은 인간과 역사를 무시하는 자유주의자 특유의 성향일 따름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 전체의 유익보다는 자기 이익에 방향을 맞춘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유주의가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부처는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 자아들은 실재로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우리의 자아와 욕망을 전체 관점에서 바로잡을 때, 우리가 사적으로 겪는 좌절과 패배와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은 더 이상 이전처럼 심하게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부처는 말합니다.
프랑스혁명을 비판했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9)는 혁명 이후 시기의 도덕 위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위기 원인을 종교개혁과 함께 도입되었고 계몽주의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 개인주의(‘서구 세계의 질병’)의 대두에서 찾았습니다. 이 ‘질병’의 중요한 증상은 인민주권이나 개인 자유와 같은 이념들과 이와 병행해서 나타난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입니다.
개인주의는 홉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사상가들에게는 개인이 사회철학의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콩트에 따르면 사회는 선(線)들이 점으로 분해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들로 분해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오직 집단과 공동체로 분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
* 소련 사회는 사적인 소비가 대단히 억제되어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대단히 풍요로웠습니다. 책 이외 소비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는지 독서광이 아주 많았습니다. 도서관이나 체육관, 문화궁전 등이 번성했습니다. 함께 책을 읽는 독서회, 교외로 나가 여가 활동을 즐기는 조합, 시를 짓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임 같은 것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습니다.
소련 사람들은 지질학과 고고학을 배우는 등 아주 많은 과외 활동을 했음에도 돈 한 푼 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10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소비에 들어가는 돈은 똑같은데 소비 형태가 달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정약용 역시 마을 단위로 공동 소유한 토지를 공동 경작하고, 생산물은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실천이 어려운 여전론 대신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나누고, 가운데 부분은 공전으로 삼아 공전에서 나온 생산물을 조세로 납부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정전제를 주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