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오늘날 주류 경제학 교과서는 경제학이 이른바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만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다거나 그르다는 식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작가 정희진(1967~ )은 가치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훨씬 강력한 가치판단을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이 가장 무서운 서명인 것처럼,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누군가가 자신 말이 ‘사실’이며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때 쓰는 상투적인 언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주장하는 배후에는, 우리가 모두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현실은 우리 현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실은 우리의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팩트풀니스(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와 관점)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현실 세계는 무한히 복잡합니다. 현실을 묘사하기 위한 어떤 설명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가치관은 사회적인 쟁점이 무엇인지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사회문제에 어떤 해결책을 쓸지 선택하는 데도 영향을 미칩니다. 종종 그러한 선택 뒤에는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유리한 이해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중립을 지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부와 권력이 특정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시도는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자는 뜻입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세상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순수한 사실’이라든가 ‘중립적인 서술’은 모두 은폐된 해석이며, 여러 가능한 관점 중 그냥 하나일 따름입니다.

















과학기술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블루어(1942~ )는 ‘사실’ 그 자체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사실’(fact)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만든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파케레’(facere)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사실’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겼습니다. 유럽에서 이 개념은 불과 5백 년 전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16세기까지 확증된 사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로 인해 곤란에 처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이나 진리는 오직 신의 마음속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이 가격이 싸지고, 안경이 개발되면서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경 덕분에 사람들은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책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인쇄된 것은 모두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고, 이에 따라 여론이라는 게 처음 형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에서 나온 말보다 종이에 쓰인 글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신문이나 교과서, 법전처럼 인쇄된 것은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만들어집니다. 사회학자들의 표현대로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확실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전문가 집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특별히 큰 힘을 가진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면, 사회과학이 행사하는 과도한 영향력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회학자 미셸 칼롱(1945~ )의 주장처럼, 우리가 믿는 경제학 자체가 우리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경제체제는 경제학이 만들어 낸 ‘사실’, 곧 우리가 믿는 경제학에 따라 생성된 결과물입니다. 세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우리가 만들어 냈기에 질서가 있는 듯 보이는 세상과 우리가 알 수 없는 ‘실제’ 세상(철학자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 물자체*)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세상의 규칙은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므로 어느 정도 질서가 있지만, ‘실제’ 세상의 질서(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를 지배하는 법칙은 우리 이해 능력을 넘어섭니다. 경제학이 그나마 가끔 세상을 설명하는 이유도 경제라는 세계의 조직과 구조, 통치 자체가 바로 우리가 고안해 낸 경제학 규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바로 우리 세상을 규정합니다.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달라지면 우리 세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경제학은 가난한 자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또한 어떤 경제학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제학 이론이 현재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현재 사회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에만 치중하게 됩니다. 

















* 물자체: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현상’이라고 부르고, 현상 너머의 실제 세계를 '물자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며, ‘물자체’ 즉, 사물의 실제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서 해석된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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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11-05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요즘 경제 관련 책 보고 있는데ㅎ

흥미로운 주제네요. 경제학이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지.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질서는 허위다.

숨길 것을 숨기고 난 후의

묵계에 불과하다.

- 이수영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에 구애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이 자신 생각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이 노력해서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일은 사회 문제를 개인 문제로 은근히 떠넘기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사적인 무기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말은 인본주의(휴머니즘) 뿐만이 아닙니다. 관용(똘레랑스) 또한 그렇습니다. 



관용의 모순


사회는 개인에게 ‘관용’이라는 미덕을 요구합니다. 흔히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편견 없이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관용하고, 기독교인은 무슬림을 관용하고, 지배적인 다수 인종은 소수 인종을 관용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관용]의 전도사로 알려진 사회운동가 홍세화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유연성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홍세화는 사회 문제를 똘레랑스라는 문화로 해결하자고 주장합니다. 인종이나 종교, 정치체제가 서로 다른 사람을 관용하는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 사람들은 서로를 자극하거나 증오하는 일을 그만두게 될까요? 홍세화가 수십 년 전 방문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오늘날 프랑스 국민 39퍼센트만이 관용이 중요한 미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관용이 증오와 경멸에 영구적인 치료제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관용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지 않습니다. 단지 단기적인 효과만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제 관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시하지 말고 올바르게 평가해달라고 점점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관용하는 사람의 겸손한 태도 뒤에 숨겨져 있는 경멸에 민감해졌습니다. ‘다수에게는 방해를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생각해도 좋다’는 식의 관용을 그들은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관용과 같은 문화적인 접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회 문제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우리 생활 방식과 생각만 바꾸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 등을 토닥여주는 관용 프레임은 자본주의 모순과 폐해,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취약성 같은 갈등의 근본 문제들을 가리면서 이를 정념으로 가득 찬 관용의 문제로 치환합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관용 주장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사회 문제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관용 담론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사회문제는 개인이 단순히 자신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관용을 숭상하면 갈등은 무조건 위험하고 나쁜 일로 여겨집니다. 관용은 갈등 상황에 항상 천편일률적으로 역지사지하면서 서로 양보하라고 요구합니다. 관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만사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로 양보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관용이 아니라 따져보고 저항해야 합니다. 



물론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화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끝까지 따져봐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관용 사상이 만연하면, 사람들은 갈등을 병리적인 상황으로만 간주하며 모든 갈등을 그저 역지사지와 자기 양보를 통해 봉합하려 합니다. 한마디로 기계적인 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장이 충돌할 때, 획일적으로 중간에서 타협하는 게 관용이 가르치는 갈등 해소의 준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를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로 만들기 원한다면 타인에 대한 관용을 가르치는 것만큼 타인이나 국가가 자기에게 가하는 불의에 용기 있게 저항하는 것을 인간의 마땅한 의무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차이가 중요하니 인정하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차이를 쉽게 좁힐 수 없기에 관용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관용이라는 느끼는 방식만 바꾸면 차이를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관용 담론은 그 차이를 더욱 공고히 만듭니다. 가령 미국 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그렇습니다. 흑인은 사회에서 값싼 노동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백인이나 자본주의 기업은 흑인과의 실질적인 평등을 환영할리 없습니다. 따라서 흑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라는 문화적인 관용 운동에만 쉽게 집중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흑인 권리를 높이는 일에는 눈을 감습니다. 단지 그 차이만 관용하라고 백인을 설득합니다. 















백인에게 흑인을 관용하라고 설득하는 일은 인종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관용 설파는 자본주의가 가난한 백인 역시 착취할 수 있게 만듭니다. 백인들이 자본주의 때문에 겪는 여러 문제의 원인을 오히려 흑인 탓으로 돌려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를 서로 분열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고용주와 교섭하는 노동자 집단 전체 힘이 약화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소득은 증가하지만, 가난한 흑인 뿐 아니라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소득도 줄어들게 됩니다. 관용은 인종주의를 강화하며,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안정을 뒷받침합니다.















라이프니츠는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관용에는 자본주의 동기가 뚜렷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다른 도시와 달리, 유대인들을 게토(Ghetto, 전근대 법으로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강제한 서유럽 도시의 거리나 구역)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와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있는 광범위한 무역 거래망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17세기 중반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해외 무역에서 15퍼센트나 되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관용에 속지 말라는 취지로 관용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착취당하는 사람이 관용으로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미천한 뱃사람도 싸구려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는 마치 자기가 왕이나 된 마냥 망상에 빠지는 것과 같다. 생계비를 벌려면 아직도 세상에 나가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종주의’와 ‘문화주의’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관용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관용이라는 가치가 문화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는 부족하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는 줄어든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거의 할 수 없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우리는 서로 간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경우와 인정할 수 없는 경우를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개인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상대방을 무조건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관용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각자 차이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기존 견해, 곧 현재의 지배적인 의견을 상대방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는 셈입니다. 입증의 책임(burden of proof)이 없는 사람에게만 유리한 게임입니다. 















이처럼 관용의 비대칭성은 대체로 간과됩니다. 관용 담론의  이분법 구조는, 지배와 종속의 문제까지 정당화 합니다. 관용은 관용 대상이 되는 자가 관용을 베푸는 자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표지(mark)하는 일인 동시에, 상대가 관용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폭력 행사까지 미리 정당화합니다. 


관용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화를 관용하는 일은 단지 모든 문화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관용은 ‘차이’보다 ‘우위’를 전제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존감’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좋게 생각하기에 자신이 속한 그룹을 좋게 여기고, 경계를 넘어선 그룹을 낮게 평가합니다. 가령 한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이슬람교나 유대교 모두를 진지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정말로 이슬람교가 기독교만큼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딜레마입니다. 당신이 자신 문화에 우위를 둔 채 ‘다양성 자체에 가치’를 고려한다면, 다른 문화에 사는 사람은 열등한 삶의 방식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이 아니라면 다른 문화를 동등하게 여기도록 상이한 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당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의 다양성 가치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차이를 관용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환원할 게 아니라, 차이를 바탕으로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합니다. 관용을 강조하면 차이나 우위만 부각되며, 경계의 이동이나 권력 차이, 이해 갈등이 무시됩니다.


단지 의견이 다를 뿐이야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내세웠습니다. 프랑스가 의도했던 박애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 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서로 모순된다는 점입니다.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못지않게 다른 문제는 박애가 평등과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점입니다. 지나친 관용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미국인들은 50년대 심지어 80년대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불평등해졌습니다. 관용이 고무되면 평등 가치는 더욱 쇠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을 옹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놀랍도록 독립적이며 개인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존중합니다. 자신이 싫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 적어도 겉으로는 – 관용을 보이며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마다 서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될 도덕적인 담론이나 논쟁에는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으며, 성급하게 토론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자신 견해를 말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괜찮아, 우리는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굳이 의견이 같을 필요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논쟁에서 이기거나 상대방이 틀렸다고 스스로 깨닫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모든 걸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러한 상대주의가 무관심주의로 발전합니다.















관용을 옹호하는 개인주의의 핵심은 ‘사회에서 좋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누구나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좋은 삶은 개개인이 각자 알아서 나름대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개인주의에 따라 공동체 유대는 상실되고, 도덕적인 지평들은 실종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이나 ‘헛헛함’은 결국 공동체 유대가 상실되면서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플라톤이 “민주정체에서 지나친 자유는 지나친 예속[전제주의] 이외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뀌지 않는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공동체 유대가 상실된 군중에게는 고독감이 커지며 파시즘이 싹틀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된다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규정했습니다. 공동체 가치의 깊은 유대가 다른 식으로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국민들은 삶의 의미에 굶주리게 되어 지도자의 사탕발림에 더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 사회는 고립과 고독으로 이어지며, 그런 조건에서는 정상적인 삶은 퇴화되고, 파시즘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 자유를 넘겨주거나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삶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당연히 ‘친숙한 것들’, 즉 자신 나라나 민족 때때로 자신 인종 속으로 퇴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유대가 붕괴되어 삶이 불안해지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심지어 파시즘까지도 삶의 버팀목이자 감정적인 도피처로 보일 수 있습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의 정치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각 시민이 지지하는 도덕적인 관점이나 종교적인 관점에 정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삶’에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동의하지 않기에, 정부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법률로 단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정부는 각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며, 각자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 전통,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로부터 시작해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 전통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 대부분은 이 범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각 개인은 사회의 문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기에, 우리 각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자신만의 가치관과 목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타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는 자유로운 양심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칸트의 선한 양심은 ‘자유로운 자아’를 전제로 합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자유를 양심의 원천으로 보는 칸트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칸트가 언급한 온전한 자유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항상 나의 자유를 확대하거나 제한합니다. 


레비나스가 양심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 주장은 옳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유대의 원천이 타인 상황에 대한 공감과 배려라고 주장했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들 짐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일이 공동체 유대의 출발점이라고 보았습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1929~ )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 구성원이 노력을 기울이면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이익을 함께 추구하면, 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합의를 통해 서로의 행동을 조정하면서, 상황에 관한 공통 이해에 이르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게 전체의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빈부 격차나 대립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호간의 동정심(sympathy)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 경제를 추구하는 미국에서는 동정심이 가득한 자원봉사자가 많지만,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결함은 이러한 ‘도덕 감정’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레비나스나 하버마스, 스미스가 언급한 공감과 배려, 이해, 동정 등은 사회와 문화에 지배당하는 개인감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관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면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는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에서 개인 도덕성이 집단에는 투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집단에 만연한 ‘이기성’을 지목했습니다. 여기서 ‘집단’은 사회나 국가, 민족, 계층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니버는 개인들의 도덕성으로 부도덕한 집단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일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따라서 톨스토이 류(類)의 개인 도덕성 함양으로 사회가 개혁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개인 도덕성과 사회 도덕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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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개인이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느끼고 행동합니다. 개인의 정신 상태는 군중의 정신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역(逆)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개인 의식과 개성은 사라지고, 대신 군중과 동일한 감정과 생각만 공유됩니다. 그렇기에 군중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지적 능력이나 전문성, 경험 등의 총합이나 평균은 군중에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군중 속에 남는 건 개인들의 무의식뿐입니다. 이처럼 군중이 무의식만을 공유한다는 사실 때문에 군중은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이성적인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군중 속에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의 평범한 자질만이 공유됩니다. 군중의 이런 평범함 때문에 군중은 무슨 일이든 미리 계획할 줄 모릅니다. 항상 그 순간의 자극에만 반응합니다. 
















달라이 라마

그렇다면 우리는 혹시 불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불교에서 자비*라는 개념은 관용이나 연민, 동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관용이나 연민, 동정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비대칭성, 즉 제거할 수 없는 지위 차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관용이나 연민, 동정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쫒기는 이방인에게 내미는 환대의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아주는 주인 행세입니다. 가령 부자가 자신을 동정하는 가난한 자의 뜻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자가 화를 안 내면 다행입니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자비와 거리가 멉니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평등한 자비심은 ‘의도적인’ 연민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 능력이 있다는 ‘무의식적인 평등 인식’에서 나옵니다.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관점에서 평등합니다. 부처에게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일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의식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비란 스스로를 부처로 인식하고,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부처라는 인식을 가지며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일은 나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는 일이 아닐뿐더러, 지위 차이가 없는 ‘평등 인식’은 개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사회 자체가 변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평등 인식은 집단의 무의식, 즉 사회 전체의 인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 무의식이 바꾸기 전에 그저 개인에게 관용으로 차이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며, 참된 평등에서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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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자비(compassion)는 공감(empathy) 및 동정(sympathy)과 함께 논의되곤 합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 감정에 이입하는 것’을, 동정은 다른 사람과 ‘함께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모두 타인의 표층의식에 접근합니다. 반면 자비는 이와는 다르게 개인의 표층의식보다 더 심층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마음에 접근합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마음이 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마음, 즉 하나로 공명하는 마음이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이 심층 마음을 불성(佛性)이나, 진여(眞如,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라고 했습니다. 융 심리학은 심층의 보편적인 마음을 집단 무의식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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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광수(1892~1950)가 쓴 근대 소설 『무정』(1917) 이전의 작품인 이인직(1862~1916)의 『혈의 누』(1906), 『귀의 성』(1907)이나 이해조(1869~1927)의 『자유종』(1910), 『옥중화』(1912) 같은 소설을 ‘신소설’이라 부릅니다. 이인직과 이해조는 기존의 구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써 인기를 끌었습니다. 



신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희한함을 느낄 것입니다. 사건 진행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수시로 끼어듭니다. 스토리는 복잡하고 정신없이 전개됩니다. 또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우여곡절’이나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 이외 다른 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플롯에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보통 신소설은 문학적으로 수준이 낮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신소설의 이런 특징을 단순히 근대 이전의 미발달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 소설인 이광수의 작품 시기와 거의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근대 이전 ‘구소설’ 작품에도 이러한 플롯 문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인직이나 이해조 모두 소설가로서 자질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럼에도 대중은 왜 그들 작품에 열광했을까요?



신소설은 공동체가 개인으로 분해되어 모든 사람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다투며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 욕망을 채우려고 모든 사람이 아귀가 되어버린 그런 세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에 나타난 조선 말기 사회는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인 유대가 사라지고 각자 자유롭게 개인들로 흩어져 생존을 위해 자신을 지키고 자신 욕구를 채우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당시 대중은 공동체가 붕괴되어 우연한 사건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고독하고 불안에 떠는 개인들로 흩어진 낯선 자유주의 세상 묘사에 공감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공동체 붕괴 현상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도 나타났습니다. 당시 어느 프랑스 가톨릭 신부는 경건하고 건강한 삶의 마지막 모델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운 일이라고 썼습니다. 



“동구권 노동자들 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발자크와 도스코옙스키, 체호프 소설, 그리고 보들레르와 투르게네프, 마야콥스키 시집을 포함한 백 권 남짓한 책이 잘 정리되어 꽂혀 있는 서가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달력이나 잡지에서 오린 성인(聖人)들의 초상화나 쿠르베나 르누아르 그림을 집주인이 손수 만든 액자에 끼워 걸어놓은 식탁 옆 아름다운 벽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일상 대화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정신을 집중해 듣고, 어떤 가벼운 화제라도 정신을 집중해 말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영영 사라질 것이다. 그들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연극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전환한 러시아는 자유가 무엇인지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 자유는 그들이 기대한 바와는 달랐습니다. 어느 프랑스 신부가 한 예견이 맞았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1948~ )는 『세컨드핸드 타임』(2013)에서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인들이 자유를 어떻게 여기게 됐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련 붕괴 이전 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20루블(1,7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고, 그 돈은 제게 충분했어요. 그런데 진짜 돈이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온 거예요. 원한다면 이제 여행을 해도 좋고, 파리에 가볼 수 있고, 스페인에서의 축제와 투우도 볼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은 헤밍웨이를 읽으면서 접했던 것들이죠.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저는 이런 것들을 직접 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책은 인생을 대신하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수다를 떨며 매일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나날의 막이 내렸고, 우리는 월급과 추가 일당을 받기 위해 노동을 시작했어요. 돈은 자유라는 단어의 유의어였어요. 사람들은 서재에 있던 책들을 전부 내다 팔았죠. 책에 실망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요새 무슨 책을 읽고 있어?’라고 물어보는 것도 실례가 되는 시대가 돼버렸어요. 러시아 소설들은 인생을 성공하는 방법이나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요. 체호프의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차를 마시면서 삶의 불만을 토로하는 것뿐이에요.



사회주의 안에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통을 이겨나가는 그런 세상이 있단 말이에요. 어느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차도 살 수 없었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차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요. 아무도 베르사체 양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고, 마이애미에 별장을 사지 않았어요. 소련 지도자들은 중소기업 사장님 수준에서 살았지 소련 붕괴 이후 등장한 러시아 신흥재벌만큼은 절대로 아니었어요!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구리욕조를 사세요’라고 하는데. 그 욕조 가격이 방 두 칸짜리 아파트 값이라고요. 그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이런 게 자유인가요? 작고 평범한 일반인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無) 존재라고요, 삶의 바닥에 있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 뭔가요? 소비가 우상시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제 뭔가 숭고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하며 잠드는 게 아니라, 오늘 못 산 물건을 떠올린다고요. 삶은 돈과 어음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일 뿐이고, 자유가 곧 돈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말들을 하지요. 아무튼 전 제 손주들이 불쌍해요. 가여워요. 이 모든 것을 텔레비전을 통해 매일매일 세뇌당하고 있으니까요. 전 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회주의 시절에 우리가 얼마나 열악하게 살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대는 걸 듣는 것도 이젠 지쳤어요. 그때는 분명 화려하지 않았지만 정상적이었던 삶이었어요. 그때도 사랑과 우정이 있었고, 원피스와 구두도 있었어요. 그때는 작가와 배우들의 목소리를 갈급한 마음으로 들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죠.“ 
















시장을 도입하는 것과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계획 경제에서 시장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전환이 아니라 권력이 정부 관리에서 자본주의 기업가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이동하는 정치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오랜 세월이 걸릴지 모릅니다. 사실 그들은 공산화되기 이전부터 마을 재산을 모두 평등하게 나눠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상업과 사유제를 경시하며, 혼자만 이익을 얻겠단 생각이 없었습니다. 모두 토지를 공유하고 함께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금도 마을 단위로 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내서 가난한 집이 조금 덜 내도록 했습니다.** 소련 붕괴 후 서방에서 흘러들어 온 자유주의는 모두 함께 살아가는데 익숙한 러시아 농촌 공동체에서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사상이었습니다. 















러시아어 ‘소보르노스쯔’(sobornost)는 이러한 유대를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공동체 정신’ 혹은 ‘공동체 의식’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정신은 그들의 종교와 민족성이 어우러져 생겨난 개념으로 러시아 역사의 매 단계마다 그 위력을 발휘하면서 문학과 예술, 사상의 방향을 주도했습니다. 소보르노스쯔는 러시아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규정하는 근본 개념이었으며, 러시아인의 구원을 보장해 주는 종교적인 토대이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정신’은 자동으로 달성되지 않습니다. 공공 모두의 노력으로 실현됩니다. 우리 각자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와줄 힘을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1897~1980)와 피터 모린(1877~1949)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모두 조금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나온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항상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습니다. 모두 가난해지려고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어려움에 처에 있는 사람은 아직 완전히 어려운 게 아닙니다.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이 서로 친밀하게 물질적이고 정서적인 지원을 무조건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합니다.
















역사의 다른 시기와 달리 지금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자원이 충분합니다. 음식이나 의료 서비스, 쉼터 등 기본적인 자원은 모든 이에게 돌아갈 만큼 넉넉합니다. 우리 후손은 너무도 당연히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억만장자 2,047명은 전 세계 극빈층 가난을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이나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은 걸까?” 만일 어느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아무 때나 사회의 구조적안 모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며, 구성원은 사람이 아닙니다. 
















라캉의 지적처럼 인간은 항상 타인과의 만남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직 ‘우리’ 안에서만 나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현은 자기실현이 아니라 ‘우리 실현’ 속에서만 온전히 수행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에 대한 관심은 고립된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나와 네가 더불어 이루어내야 할 ‘우리’에 대한 지향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실현은 궁극적으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입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고 그 안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중동 대부분 이슬람 국가 역시 자유주의 국가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내다봅니다. 그들 역시 공동체주의라는 신념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종교 기원은 창시자가 태어난 날이나 선지자가 깨달음을 얻은 날로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슬람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시기를 종교 기원으로 삼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움마’라 부르는 공동체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고립된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정의로운 공동체 건설을 제시했습니다. 개인은 공동체 일원으로서 이슬람 사회에 종사하여 하늘나라에 그들 자리를 얻습니다.



이런 사상 때문에 이슬람 세계의 산업화가 늦어졌습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자기 이익을 기반으로 핵가족을 책임지며 독자적인 경제적인 결정을 내리는 개인주의가 있어야 했지만, 이슬람 세계는 공동체를 다른 관계보다 우위에 두었습니다. 중동 정부들은 공동체의 선(善)을 지지하기에 개인의 자유나 소수자의 권리를 따로 떼어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의지가 곧 공동선이므로 그 공동선이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도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조화와 효율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체로 사유재산은 폐지되며, 개인의 이기심은 억제되어야 했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에 종속되어야 하는 사회가 플라톤이 『국가』(BC 380?)에서 주장하는 이상사회였습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싹튼 개인주의 경향이 시민생활의 전통을 침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은 공동체 생활에 대한 참여를 소홀히 하고 개인의 부와 안락만 열심히 추구했습니다.

















우리는 정치란 대중이 스스로 정치에 적극 참여해 자신 이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정치가나 정당이 하는 약속을 선거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각자의 이해관계를 일단 떠나 스스로가 속한 공동체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계속 토의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건 좋은 정치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건 나쁜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공동체에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게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물질적 이해관계를 떠나 공공의 장에서 서로 설득하려는 게 본래의 정치입니다. 

 















현재 이란을 지배하는 체제 역시 루소가 꿈꾼 공동체주의 이상을 이슬람교식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이란인들도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지만, 특정 이익을 위해 사회가 희생된다면 그때 손실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를 어디에서나 존중받을 수 있는 보편적 인간 속성으로 파악하는데 그러한 인식은 인간과 역사를 무시하는 자유주의자 특유의 성향일 따름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 이기적인 욕망, 전체의 유익보다는 자기 이익에 방향을 맞춘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유주의가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부처는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 자아들은 실재로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우리의 자아와 욕망을 전체 관점에서 바로잡을 때, 우리가 사적으로 겪는 좌절과 패배와 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은 더 이상 이전처럼 심하게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부처는 말합니다. 

 
















프랑스혁명을 비판했던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9)는 혁명 이후 시기의 도덕 위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위기 원인을 종교개혁과 함께 도입되었고 계몽주의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 개인주의(‘서구 세계의 질병’)의 대두에서 찾았습니다. 이 ‘질병’의 중요한 증상은 인민주권이나 개인 자유와 같은 이념들과 이와 병행해서 나타난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입니다.



개인주의는 홉스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전통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로 표출되었습니다. 이 사상가들에게는 개인이 사회철학의 출발점입니다. 하지만 콩트에 따르면 사회는 선(線)들이 점으로 분해될 수 없는 것처럼 개인들로 분해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오직 집단과 공동체로 분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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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사회는 사적인 소비가 대단히 억제되어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대단히 풍요로웠습니다. 책 이외 소비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는지 독서광이 아주 많았습니다. 도서관이나 체육관, 문화궁전 등이 번성했습니다. 함께 책을 읽는 독서회, 교외로 나가 여가 활동을 즐기는 조합, 시를 짓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임 같은 것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습니다.

소련 사람들은 지질학과 고고학을 배우는 등 아주 많은 과외 활동을 했음에도 돈 한 푼 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동차를 구입하려면 10년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소비에 들어가는 돈은 똑같은데 소비 형태가 달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정약용 역시 마을 단위로 공동 소유한 토지를 공동 경작하고, 생산물은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자는 여전론을 주장했습니다. 이후 실천이 어려운 여전론 대신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나누고, 가운데 부분은 공전으로 삼아 공전에서 나온 생산물을 조세로 납부하고 나머지는 농민에게 분배하자는 정전제를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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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할례’라고 불리는 여성 성기 절제는 잔혹하고 위험하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내려 온 현재의 습속입니다. 대체로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이 시술은 면도날로 여자 아이나 청소년의 음핵이나 포피, 음순 같은 성기 중 일부나 전부를 도려내는 악습입니다. 극단적으로 외과수술을 통해 질 입구를 좁히거나 아예 막아버리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 악습은 여성 순결을 보장해 적합한 혼인 상대로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여아와 청소년은 매력적인 결혼 상대가 아니며 부도덕한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심지어 해당 소녀뿐 아니라 가족의 미래까지도 위협받는 일로 간주됩니다. 이집트의 어느 조사에 따르면, 할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엄마일지라도, 결혼 적령기 딸이 할례를 하지 않았을 경우 혼인 상대로 꺼려질까봐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딸의 건강과 생명을 걸고서라도, 딸의 미래를 지키고자 할례를 시킵니다. 

















지금 북아프리카 지역의 할례가 순결의 상징이라면, 원시사회에서는 순결이 바로 악덕이었습니다. 원시시대 처녀는 애를 못 낳는다는 말이 돌까봐 두려웠지, 순결을 잃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혼전 임신은 애를 못 가질 거란 의구심을 단번에 잠재우고 아이를 잘 낳을 거란 보장이기에, 남편감을 찾는데 해보다 득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녀인 여자는 인기가 없어 멸시 당했습니다. 캄차달족(러시아 동부 캄차카 지방의 원주민족) 신랑은 신부가 처녀인 사실을 알게 되면 장모에게 ‘딸을 막 키웠다’고 호되게 화냈습니다. 순결이 결혼에 걸림돌이 되는 곳은 상당수 달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 방해가 되는 이 금기를 깨고자 아가씨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스스로 몸을 맡기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엄마들이 자기 딸을 처녀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남자를 찾았으며, 인도 말라바르에서는 아가씨들이 스스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원시 사회에서는 혼전 관계를 맺는 게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성생활을 절제하느라 욕망이 쌓이는 일이 없고 따라서 아내를 선택할 때도 욕망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원시 사회엔 성적 욕구가 생기면 지체 없이 바로 충족할 수 있었기에 미의식이 그다지 강하게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상당 부분 상상력에서 비롯되는데, 성적 대상을 상상력으로 미화시킬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후 젊은이들은 욕망을 지체 없이 충족하지 못하기에 사랑을 이상화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게 되는데, 원시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원시부족에게는 사랑에 관한 노래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애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례나 순결 같은 습속은 사회적인 성(性)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은 생물학적인 성(sex)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문화적인 성, 곧 사회에서 창조되는 성(gender)으로 ‘구현’되거나 ‘강요’됩니다. 정치철학자인 아리스 마리온 영(1949~2006)은 『계집애 같이 던지기』(1980)에서 남녀 몸동작이 왜 서로 다른지 설명해줍니다. 여성이 공이나 돌을 던질 때 흔히 취하는 ‘썩 마음 내켜 하지 않는 듯 보이는 몸동작‘은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이 어려서부터 자신 신체를 ‘다른 사람, 즉 나중 아기를 위한 몸’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담론이나 관습에 물든 산물이라고 영은 주장합니다. 여성에게 부여된 규범이 여성 몸동작이나 움직임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대다수 여성이 ‘육체적으로 불리한’ 존재가 됩니다. 



신생아 때부터 습득하는 젠더 학습은 무의식에서 일어납니다. 아이가 스스로 사내아이 아니면 여자아이로 규정하기 전에 다양한 형태로 암시를 받습니다. 가령 신생아에게 남녀 성인은 서로 다르게 인식됩니다. 아기는 여성과 상호작용하면서 맡게 되는 화장품 향내를 남성 냄새와 다르게 연상합니다. 부모나 의사의 머리 모양 등에 나타나는 차이가 신생아의 양육과 학습 과정에서 암시로 작용합니다.



두 살 무렵이면, 아이는 젠더가 무엇인지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접촉하는 장난감이나 그림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모든 것에서 기존 고정 관념인 남성과 여성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아이는 자신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인지를 파악하게 되며, 또한 주변사람을 정확히 성별로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젠더 사회화의 위력이 아주 막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젠더에 대한 도전은 현실을 뒤엎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젠더가 ‘주어지면’, 사회는 우리 각자 개인이 ‘여성’ 또는 ‘남성’으로 행동하길 기대합니다. 
















원시시대에는 너무 말라 몸이 나약한 여성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경제적인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혼 자체를 아예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해 힘을 합쳐 일하면, 각자 혼자 일할 때보다 더 부유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원시 사회에서 남성은 값싸게 여성이라는 노동력을 얻고, 양육의 덕을 보고, 때맞춰 밥을 먹기 위해 결혼했습니다. 애정은 결혼과 전혀 별개였습니다. 



결혼은 단지 상업적인 거래일 따름입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감정을 누르고 실용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실용성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 있습니다. 남녀가 찰나의 성적 욕구에 사로잡혀 한평생 서로 옭아매며 사는 우리 관습을 원시인들이 본다면 왜 그렇게 사는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할 지도 모릅니다. 체스터필드 경(1694~1773)의 지적처럼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기쁨은 순간적이고, 입장은 우스꽝스럽고, 비용은 지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지구상 어디서나 결혼은 가족이 상업적으로 계약한 매매혼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경제적인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 결혼이 가장 건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은 일의 대가로 제공되는 존재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경 <창세기>(29:20)를 예로 들면, 야곱은 라헬과 결혼할 생각에 7년 동안 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랑은 결혼예물이나 돈을 여자에게 보냈고 신부 아버지는 딸의 혼수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매매혼 흔적이 우리 결혼반지에 남아있습니다. 결혼할 때 반지를 주는 풍습은 로마에서 시작됐는데, 아내를 돈으로 사는 매매혼 때문에 결혼할 남성이 대금결제 증거로 철제 반지를 주었습니다. 

 















인도 역시 근래까지도 연애결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당사자들이 서로 선택한 결합에 ‘간다르마 결혼’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욕망의 열매’라고 낙인찍었습니다. 그런 결혼이 허용은 되었으나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변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란 변덕스러운 개인적인 선택인 낭만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열정에 빠져 결국 환멸과 쓰라린 마음으로 끝나게 될 결합에 이르기 전에 서둘러 결혼을 주선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또한 혼인은 개인 뜻이 아니라 집안 이해관계로 결정되었습니다. 부모는 충분히 숙고한 뒤 환경이 비슷한 사람과 혼인을 맺어주었습니다. 부부는 경제적, 문화적인 배경이 유사했기에 근대 이후처럼 감정으로 대립하거나 갈등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남성 집안과 여성 집안이 비교적 대등하게 혼인했기에 남성이 여성 집안에 의존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처가의 대표자였습니다. 조선에서 여성들이 혼인 후에도 자신 성(性)씨를 유지한 것도 바로 여성 집안의 대표자라는 표시였습니다. 강력한 중국 영향 아래 있었지만 조선에 전족이 없었던 이유도 비슷합니다. 조선 여성은 남편 애정에 따라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한 조선 여성은 성적인 이미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은 중국과 달리 집안 공동 운영자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남녀 사이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18세기 이전 유럽에서조차 사랑이란 우발적인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이 불안정함을 기반으로 하는 남녀 결합을 거부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나머지 남녀 관계에 사랑이 우선시되지 않았습니다. 유럽 중세뿐 아니라 로마법도 결혼 목적이 아이를 출산하기 위한 것이라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할 남성은 여성을 부양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만 진지하게 증명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열애에 빠지는 일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상태에서 비롯되는 경험이며,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커플이라면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가족으로서 사적인 만족을 지속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인간 성향이라는 생각이 생겨나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인류 발명 중 하나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그 대상을 이상화함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게 되었습니다. 누구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부추겨져 사랑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이 철폐되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이를 다루는 소설의 대중화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너나할 것 없이 낭만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역사학자 존 보스웰(1947~1994)은 오늘날의 낭만적인 사랑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지 언급합니다. 예전에 혼인은 집안 재산을 세습하려는 경우 아니면, 집안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고자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잘해 봐야 약점으로 치부되거나, 최악의 경우 질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 태도와는 정반대입니다. 

 


오늘날 우리 대다수에게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낭만적인 사랑은 일상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낭만적인 사랑에 기반 한 관계는 매우 최근까지 유럽 사회에서 보편화되지 못했으며,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이유가 우선시되는 그 밖 문화권에서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관행입니다. 예전엔 거의 경제적인 목적으로 부모나 일가친척이 소개한 맞선 형태로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지금이 예외적인 시기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만남 초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할 경우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간을 두고 발전하고 변해갑니다. 시작할 때 느낌만으로 발전하고 변하는 사랑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원시인’보다 미성숙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이제 낭만적인 사랑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삶의 선택지가 다양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이혼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했지만,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결혼한 남녀는 혼인 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삶의 동반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 같은 추상적인 단어가 뜻하는 애정 유형이 항상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을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가정하려 듭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95)은 이런 가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랑’이라는 욕망은 관계나 애정 유형이 너무나 다양해 단일하고 공통된 속성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말이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비슷한 말은 있지만 남성과 여성 간의 특별한 관계와 감정을 뜻하는 개념은 거의 없습니다. 한자의 애(愛)도 원래 고전 용례에서는 ‘아끼는 마음’, 가령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일본어에서 근대 이전에 많이 등장하는 이로[色]라는 말은 게이샤나 유녀들과 관계를 이르는 말로 지금 ‘사랑’과는 아주 다른 뜻이었습니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볼 때 느끼는 행복이나 각별한 감성, 상대에 대한 배타적인 의리, 보호하고 싶은 소망 등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다양한 현상이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현상을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통된 속성을 정의하려는 목표 자체가 아예 잘못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체를 다루는 생물학에서조차 공통된 특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꽃’ 같은 정도는 아주 간단하게 그 정의와 특성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꽃은 그 크기나 모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다양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고 하는데, 종의 수는 대략 26만여 종이나 됩니다. 나비나 나방, 딱정벌레, 벌, 베짱이, 메뚜기 같은 곤충은 100만 종이 훌쩍 넘습니다. 딱정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4만5,000종이 넘고 지금도 매일매일 새로운 종이 발견되는 실정입니다. 생물은 무척 광범위하고 다양하기에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작가 룰루 밀러의 책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처럼 말입니다.
















자연이나 인간 삶은 보편적인 이름 하나로 단순화하기엔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세상은 추상적인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가득합니다. 자연과 인생은 지극히 넓은 데다 깊고 오묘합니다. 어떤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현상으로 ‘한정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다양성과 해석의 주관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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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가였던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1748~1836)는 시민이 자신 경제 활동에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근대 산업사회에서 각 시민이 공적 업무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시간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공공 업무가 날로 전문적인 식견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의제가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예스는 대의제란 선거로 권한을 위임받은 전문가 집단이 공공의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치도록 구성된 정부 형태로서, 근대 사회 조건에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예스 지적처럼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모든 평의회위원이나 판사 뿐 아니라 대부분 행정관도 전문가가 아니라 보통 시민이 맡았습니다. 실상 아테네인은 대의제를 모르진 않았으나 거의 대의제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시이예스 논거와는 달리 아테네인들은 비전문가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인은 명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실제 정치에서 모든 ‘보통’ 시민의 확인을 얻는 걸 중요시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주요 관심은 통치의 능률보다 시민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있었습니다. 어떠한 행정이나 입법, 사법 문제에서도 최종 책임은 시민에게 있었습니다. 가령 민회 법령도 ‘민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에 의해서 통과된다는 공식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전문성을 중시하지 않은, 아마추어 중심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정책결정에 특별한 전문성을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다수의 일반적인 상식에 바탕을 둔다는 관념으로 옮겨갔습니다. 이것이 추첨제나 윤번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관리 선출이나 법정 구성은 추첨제로 결정되었습니다. 추첨에 따라 가난한 사람도 취임하여 보수를 받을 수 있으며 재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추첨은 기회 균등을 의미했습니다. 
















아테네인이 내린 가정은 만약 전문가가 정부에 관여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집단의 정책 결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것 자체가 권력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점을 갖게 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전문가로 이루어진 평의회, 즉 전문 행정관이 민회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르고, 법정에서 전문가들은 다른 판사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문제가 헤아리기에 너무나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정치는 수많은 싱크탱크와 법률가, 회계사, 대학교수들이나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여깁니다. 시민이 바로 정치 주체라고 상상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정치 주체라는 사실을 잊은 우리는 자신을 대표하지 못한 채 오직 전문가들이 내린 처방에 따라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만 셈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면, 차라리 가장 똑똑한 정책 전문가들이 모인 싱크탱크에 아예 정치를 외주 주면 되지 않을까요? 
















전문가에 의지하는 일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민주주의란,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있지만, 일반 시민이 사회의 중대한 결정을 직접 내릴 능력이 있다는 생각에 기반 합니다. 일반 시민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그 어느 전문가보다도 명확히 이해하는 만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문가에 대해 잘못된 가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가 일반 시민과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에 우리를 대변해줄 거라 믿고 맡겨두어도 괜찮다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전문가는 객관적이고 사심이나 편견이 없이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인간 마음이란 부자인지 가난한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더욱이 전문가들은 자신이 내린 결론의 타당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 분야 전문가는 다른 분야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전문가가 함께 결정해야 하는 문제는 각 전문가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한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보다는 전문 지식을 조금씩 공부해가며 자신 견해를 개발한 일반인이 종합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전문교육을 받으러 입학한 대학에서 교양교육까지 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전문가들이 인간의 새로운 상상이나 행동, 능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원리에 갇혀 있는 전문가들은 세상에서 가장 상상력이 부족한 자들이거나 상상에 금기를 부여하고 차단해야만 자신 지위를 보존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는 자신 분야를 빗대어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이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익이라는 동기가 절대화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다시 상대화할 정신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상상은 우매한 제약에 갇혀버렸다.” 

















마이클 샌델은 고대 아테네 같은 사례뿐 아니라 최근 사례를 보더라도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영국 사례를 듭니다. 1945년 윈스턴 처칠(1874~1965)의 보수당을 눌렀던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내각은 장관 가운데 일곱 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습니다.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1881~1951)은 전후 세계질서의 설계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열한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조합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하원 의장과 부수상을 지낸 허버트 모리슨(1888~1965)은 열네 살 때 중퇴하고 지방정부에서 일하며 명망을 쌓았는데,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발한 공로가 컸습니다.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1887~1960)은 열세 살에 중퇴한 뒤 웨일스에서 광부로 일했고, 장관이 되어서는 영국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수립했습니다.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권으로 평가되는 애틀리 정부는 노동계급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애틀리 전기 작가는 “영국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쓰일 윤리 언어를 마련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 문제로 여길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에서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지 마련”이라며, ‘정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정치인이나 기업가와 같이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한 영역에서조차 스페셜리스트가 득세함에 따라, 우리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좁은 분야를 다루는 전문가는 전체를 다룰 수 있는 지성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전문가가 사회 전반에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문가 특유의 분열적인 사고가 오늘날 우리 사회 위기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여하는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는 직업 정치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1924~2010)는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구분했습니다. 그가 말한 ‘정치’는 오직 주어진 현실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이미 주어진 세계 너머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정치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대의 장소는 의회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정당화하려고 애를 써도 일부 시민에게 오직 열등한 권리만이 부여되고 있는 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불평등이 사라지는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대의 민주주의의 DNA 자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를 우연한 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구분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세계가 시작되고 또한 끝나는 계기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현실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리와 규칙을 새롭게 창안하는 실천으로서의 정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에 대해 전혀 다른 전망을 낳게 합니다.



현재 삼권 분립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훌륭하고 지혜로운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한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삼권 분립이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더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훌륭한 인물을 뽑아 옳은 일을 하도록 시키는 체제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매번 실망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이벤트’밖에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일보다 민주주의 제도를 제대로 발전시키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요소보다 제도라는 구조가 우선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현존하는 방식에만 한정하여 규정하면, 부정투표 방지 등 절차상의 문제만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정적이고 중요한 민주주의 본질은 이 한계 밖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면, 기존 이데올로기만이 강화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 한정하여 우리가 희생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거는 귀족과두정입니다. 공자와 달리 노자는 ‘귀족과두정’을 반대했습니다. 공자와 노자 정치철학의 핵심 차이는 ‘귀족들의 존재 여부’에 있습니다. 공자 세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귀족들, 아니 공자 기대치로 보면 ‘군자’ 개념입니다. 공자는 윤리학적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정치학적 상상력은 그만큼 풍부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노자가 꿈꾼 세계는 성왕과 성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세계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중간 귀족 계층 – 노자 용어로는 ‘현자들’ -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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