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래로부터의 탈출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2월
평점 :
나이들수록 기억이 흐려지는건 피할 수 없어요. 오히려 어르신들은 오래전 일이 더 또렷하게 떠오른다고 해요. 요양원에서 지내던 노인이 기억을 지키려 탈출을 감행하는 sf소설이라니 기대되었습니다

사부로는 스포츠 중계를 보다 옛날에 녹화한 경기 영상만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기억도 안나는 경기를 보고 옛날 경기를 보여주지 말라는 건 너무 자기 위주 아니냐는 비난을 해요.
나는 매일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게 아닐까 불안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믿음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증거를 하나 찾아내면 된다. 그런데 그 증거는 어디 있지?
물론 내 머릿속에 있을 것이다. p.25

사부로가 있는 시설의 직원들은 일본어도,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언어를 사용해서 거주자들은 그 말을 전혀 알 수 없어요. 사부로는 자신이 약 백 살이란 건 알지만 이곳에 들어온 경위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여기는 감옥이다. 도망치기 위한 힌트는 여기저기에 있다. 조각을 모아라'라는 글을 발견해요. 사부로는 엘리자, 도크, 밋치를 동료로 포섭해 조각을 모아 함께 탈출하기로 해요. 얼마후 도크에게 예상치못한 변화가 생깁니다. 사부로와 있었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거예요.
"적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어. 신중하게 대처해야겠지. 적어도 나는 찍혔으니까 내게 경솔하게 떠들어대면 안 돼. 정보가 누설될 위험이 늘어날 뿐이야. 적은 내 기억에서 정보를 빼낼 수 있을지도 몰라.p.92
도크는 당황하지 않고 상당히 논리적으로 상황을 분석해요. 그후 엘리자가 실종되고 사부로는 계획을 잠정 중단합니다. 이어서 사부로도 사라져요. 돌아온 사부로가 자신을 기억못하는 걸 알게된 밋치는 많이 실망합니다. 그뒤 반전이 있어요.
"벌레에 물린 건 위장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거야. 중요한 건 긁어서 생긴 상처지."
밋치는 팔에 생긴 찰과상을 다시 들여다봤다. 글자처럼 생기지 않았다. 일본어와도 알파벳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글씨를 쓰면 바로 들통 나니까. 봐. 긴 것과 짧은 게 섞여 있잖아."
"모스부호! 가스" p.118

사부로가 마침내 기억 잃는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을 찾아냈어요. 일기장에는 만화의 수법으로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야 볼 수 있는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시설에 추가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죽이지 않고 기억만 지우고 생활에도 어려움이 없어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들을 가둔건지 호기심이 끊이지 않습니다. 휠체어에 탄 백 살이 넘는 팀원들이 탈출계획을 세워요. 사부로는 엘리자에게 특별한 감정도 갖고 있어요.
줄곧 의문인 건 왜 주인공이 노인이어야 했나 하는 점이었어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오마쥬한 작품인가 싶기도 했구요. 기억을 잃는다는 것 외에 사고능력은 뛰어나다해도 신체적 약점은 극복하기 어려우니까요.
중반을 넘어 왜 사부로와 시설의 사람들이 모두 고령자였나가 설명됩니다. 그제서야 이 소설이 그저 추리 미스터리가 아니라 SF였다는 걸 떠올리게 되지요.
21세기 후반 이후 인공지능으로 인한 인간의 실업, 급속도로 진행된 고령화, 인공지능 의존으로 인한 평화, 유전자 조작, 변이 인간 등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은 두려운 점도 있어요. 스릴넘치고 논리와 게임하는 기분이고 뭔가 뇌가 확장되는 기분이 드는 내용이었어요. 작가가 암투병 중에 쓴 유작이라는 점이 안타깝고 더 감탄이 나와요. 추천합니다.
* 이 리뷰는 네이버 이북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