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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나온 여자 - 양선희 작품집
양선희 지음 / 독서일가 / 2021년 12월
평점 :
영화 대사로 유명한 이대 나온 여자라는 말은 뭔가 모호하면서도 어떤 우월의식과 높은 자존감을 나타내는 느낌을 줍니다. 학벌이라는 허울에 갇힌 여자, 동성애 아빠의 자녀들, 미혼모의 딸 등 소외된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이라니 기대되었습니다.

이 책은 2010년을 전후로 IMF의 그림자가 거둬지지 않은 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던 시기에 쓰인 작품을 모았습니다.
안희정은 노숙자들에게 소리지르는 노숙자 여자가 '나도 왕년엔 이대 다녔어'를 외치는 걸 보고 당황과 절망을 느꼈어요. 그녀도 이대를 나왔기 때문이죠. 이혼 후 초등학생인 딸 소진과 먹고살 궁리를 하던 때여서 더욱 위기감을 실감했어요.
그후 소도시로 와서 이대출신임을 내세워 개인 과외를 하며 살아가요. 소진이 하는 말에 울컥해 때리고 오랜만에 이대를 찾습니다. 우연히 동기인 신수진을 마주쳐요.
"너, 행복하지 않구나."
나는 생뚱맞은 말에 깜짝 놀란다. 행복이란 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겐 화석 같이 된 단어를 이 아이가 말하고 있다.
"너, 너무 살이 쪘잖아.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까지 살이 찌지 않아."p.22

충격적인 말을 들은 희정은 소진이 특목고에 가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가 엄마의 지방제거수술을 해주기 위해서라는 말을 듣고 또다시 충격받아요.
엄마의 자랑이던 이대에 다니던 딸, 대기업 직원인 사위가 있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IMF로 대기업이 공중분해되고 남편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남편은 중소기업에서 적응못하고 집에 있었지만 헤어질 생각은 없었어요. 엄마가 뇌종양으로 쓰러져 "김 서방은 취직했니?"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지만 않았다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평생의 자긍심을 무너뜨리는 것만 아니었다면 파경에 이르지는 않았을테지요.
'롱아일랜드 시티'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예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불안해하고 방황하다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럼 아빠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어?"
엄마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 존재에 의심을 품게 됐다.
그때부터 내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나는 공중에 떠서 허우적댔고 땅은 지금까지도 내 발이 그의 거죽에 닿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p.78

그 진실은 또다른 혼란을 불러와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됩니다. 환갑이 된 엄마는 가족을 잃고 혼자 20년 가까이 지내던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 고백해요. 엄마를 원망하고 자신의 비관하여 곁을 떠납니다.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암세포가 자신의 독설에서 싹튼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유령의 도시'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애널리스트 이야기예요. '아빠의 연인'은 아빠와 그의 친구가 남긴 편지로 두 사람의 비밀을 알게된 자녀들이 나누는 편지와 이메일로 되어 있어요.
그 영화를 보며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게 어떤 건지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런 걸 슬프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가슴이 아프고 절망스러웠다.
나는 두 분의 삶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저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나날들 말이다p.145

솔직히 두 남자가 감춘 비밀로 인해 결혼하고 이혼한 여자들에 대해 미안함이 없다는 점에서 이기적이었다는 성진의 생각에 동의해요. 자신들의 사랑만 숭고하고 안타깝나요? 사실을 모르고 결혼한 상대에 대해선 기본적인 양심이 없어요.
이 책에 나오는 불행의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약간씩은 실직, 경제적 위기에 대한 공포, 책임전가, 추락한 자존감, 불안감, 고독이 잠재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요. 글이 쓰인 시기가 10년 넘게 이전이지만 아직도 글 속의 상황과 감정을 공감할 수 있어요.
* 이 리뷰는 네이버 이북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