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소녀들
스테이시 윌링햄 지음, 허진 옮김 / 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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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데이비스는 고액의 수입을 벌어들이고 멋진 집과 완벽한 약혼자를 가진 성공한 심리 상담사이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의 책상 서랍에 신경 안정제를 포함한 다양한 약을 넣어 두어 심리적 위안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약혼자의 이름으로 또 다른 신경 안정제를 처방해 자신이 복용하고, 캄캄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에 불안과 무서움을 느끼는 등 어둡고 불안정한 내면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순전히 그녀의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1999년 7월, 클로이가 나고 자란 루이지애나의 작은 마을 브로브리지에서 리나 로즈라는 열다섯 살의 소녀를 시작으로 여자애들이 실종되기 시작했다. 처음 실종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뉴스를 보던 클로이의 아빠는 클로이를 꼭 안아 안심시켜 주었고, 클로이에게 그런 아빠와 집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무사함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클로이의 세상은 무너지고 굳건했던 믿음은 깨져버렸다. 집에서 놀던 클로이가 아빠의 벽장 깊숙이 숨겨진 작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 아빠가 여자애들의 연쇄 실종의 범인임을 입증할 증거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클로이는 엄마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고 엄마는 클로이를 데리고 경찰서로 향했다. 클로이는 경찰에게 증거품을 넘김과 동시에 아빠의 죄를 뒷받침할 만한 증언을 함으로써 아빠의 범죄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그해 9월 말 어느 밤, 아빠는 집 거실의 레이지보이에 앉아 TV를 보며 간식을 먹던 중 가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연쇄살인범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아빠는 그저 클로이와 오빠 쿠퍼를 바라보며 "착하게 지내라"라는 말만 남긴 채 아무런 저항 없이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끌려나갔다. 경찰은 그런 아빠를 순찰차에 내리치고 처박아 피를 흘리게 했다.

그때 클로이가 열두 살, 쿠퍼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 후 아빠는 형량을 협상하여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으로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그런데 아빠가 저지른 첫 번째 사건의 20주년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클로이 주변에서 또다시 어린 소녀들의 실종과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도 아빠가 저지른 수법 그대로.

모든 증거가 대중에게 공개되지는 않았었기에 클로이는 당시 사건에 관련된 관계자에 의한 모방 범죄를 의심하고는 범인이 흘린 증거의 퍼즐을 맞추며 범인을 추적하는데….



『깜빡이는 소녀들』은 시작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끈적한 긴장감과 의심과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심리적으로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와 주인공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죄책감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죄책감일까?

심리 스릴러 소설답게 약혼자 대니얼을 포함한 주인공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모종의 음모를 가지고 주인공에게 접근하고 주위를 맴돌고 머무는 것처럼 의심되었고, 심지어는 주인공에게조차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가' 혹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찐득찐득 온몸을 휘감아오는 회색빛 우울함과 답답한 긴장감에 가슴이 옭매이는 듯한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중간을 넘어서면서 암울하기만 했던 심리 묘사와 긴장감이 상황의 급전개와 반전의 연속, 서서히 드러나는 불안과 긴장감의 실체로 대체되면서 초반과는 또 다른 긴장감과 쾌감과 충격으로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또한 주인공의 심리와 진실을 파헤쳐 가는 행적을 따라가며 하나씩 맞춰지는 퍼즐 조각으로 인한 일련의 진실을 깨달으며 그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교묘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통제하고 영향을 끼치며 누구에게도 본모습을 들키지 않고 살아가는 범인의 모습은 작가의 의도대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았고, 종국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에는 소름과 함께 뒷목 잡고 쓰러질 만한 분노를 일으켰다.

이보다 더 '끝날 때까지 긴장과 의심을 멈추지 말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소설은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작가 또한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들을 통제하며 실로 짜릿한 쾌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이 해의 마지막에 찾아온 심리 스릴러계의 깜짝 선물 같은 『깜빡이는 소녀들』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안 읽으면 100% 후회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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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놀고 싶어 - 풍차 지킴이 쏠의 모험 특서 어린이문학 5
조미형 지음, 윤다은 그림 / 특서주니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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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농땡이를 피우거나 땡땡이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을 거예요. 또 남들보다 장난을 심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구요.

물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그러한 행동들을 했겠지만, 어떨 때는 그 행동들이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줄 때가 있었을지 몰라요.


이 책은 놀기를 좋아하는 날다람쥐 쏠이 장난치고, 농땡이 피우고, 땡땡이를 부리면서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고 때로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져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는 등의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행동을 바꿔 나가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랍니다.



날다람쥐 쏠은 하루 종일 숲을 돌아다니며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도토리를 던져 친구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새들을 쫓아내기도 하는 등 숲속 동물들에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때로는 그 행동들이 너무 과해서 장난이 아닌 괴롭힘이 되어 버리곤 했죠.

심지어 어떨 때는 다 같이 하기로 한 활동에서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으로 빠지기도 했답니다.

모두들 쏠에게 그러지 않도록 충고했지만 쏠은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신나게 놀다 보니 어느덧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이 되었고, 쏠은 집안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난로를 피웠어요. 한 달 넘게 이어진 눈 내리는 추운 날씨 때문에 쏠은 계속해서 난로 속으로 땔감을 밀어 넣었답니다.

그때 갑자기 연통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마 오랫동안 내린 눈으로 연통에도 눈이 많이 쌓였기 때문인가 봐요. 연통에 쌓인 눈을 털어 줘야 했지만, 밖에 나가기 귀찮아진 쏠은 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고는 난롯가에서 도토리를 까먹으며 잠이 듭니다.


그런데 쏠이 잠든 사이 난로의 불씨가 튀어 집에 불이 났고, 꼼짝달싹할 수 없었던 쏠을 숲속 친구들이 무사히 구조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길고 털이 풍성했던 쏠의 꼬리털이 그만 불에 타버리고 말아요.



다음날 기술자 부엉이가 숲속 마을을 찾아와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고는 그 결과를 숲속 동물들에게 알려주었어요. 바로 배관과 난로 옆에 쌓아 둔 땔감이 문제였던 거예요. 이에 추운 날씨에 난로를 치울 수 없었던 숲속 동물들은 자신의 집에도 불이 날까 걱정이 되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풍차로 에너지를 만들어 집안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어요. 난로보다 훨씬 안전해 보이는 풍차 건설에 숲속 동물들은 모두 찬성했어요. 그리고 풍차가 세워지면 그 풍차를 유지, 관리, 보수할 관리자로 모두들 입을 모아 쏠을 지목했어요.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쏠은 이제 자신도 숲속 친구들을 위해 일할 때가 됐다고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풍차 지킴이가 됩니다.



풍차가 세워지고 쏠은 숲속 동물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뜻밖의 강풍으로 풍차 날개가 세차게 돌며 엔진이 과열되어 풍차에 불이 나고 마는데요.

과연 쏠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요?



주인공 쏠은 그저 재미로 한 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입고 자신 또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반성합니다. 그러한 반성을 통해 조금 성장한 쏠은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친구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남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려움과 트라우마 또한 극복하며 쏠은 한층 더 성장하게 됩니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죠. 아니 어쩌면 혼자가 편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말처럼 혼자일 때보다 친구들과 소통하고 다양한 관계를 나눔으로써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감정과 위안, 자기 성장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혼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여럿이서 돕는다면 결코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어요.


혼자가 좋을까요, 아니면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좋을까요?

쏠과 그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같이 확인해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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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
캐런 조이 파울러 지음, 서창렬 옮김 / 시공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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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미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공공장소든 으슥한 곳이든 낮이든 밤이든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총기 폭력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보며 다른 작가들처럼 총격 사건 가해자를 넘어 가해자의 가족들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저지른 일을 맞닥뜨렸을 때 가질 생각과 그 후 그들의 생활에 닥칠 변화가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 생각이 가지를 뻗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들 중의 한 명인 링컨을 암살한 존 윌크스 부스와 그 가족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존 윌크스 부스에게 자신의 관심이 가는 것은 싫었기에 그를 최대한 중심에 두지 않고 그의 가족에 관한 일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셰익스피어 연극배우 주니어스 브루터스 부스는 1822년 아내 메리엔과 미국의 메릴랜드 주 벨에어 근처의 삼림지대로 건너와 그들의 뿌리를 내린다. 그곳에서 그들은 10명의 아이들을 낳고(그중 네 명은 일찍 죽는다) 20여 년 가까이를 살지만, 그들의 집과 아이들의 존재는 모두가 다 아는 동시에 비밀에 부쳐져야 할 존재였다.

그 이유는 훗날 그들이 볼티모어로 이사를 간 후에 드러나는데, 그곳으로 쳐들어온 아버지의 본처 애들레이드에 의해 밝혀진 아버지의 이중 결혼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부스 가족을 생애 처음으로 그들이 직접 잘못한 것도 아닌 아버지의 잘못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모욕 받고 괴롭힘당하게 했다.


살아남은 아이들 중 준과 에드윈, 존은 연극배우인 아버지를 따라 배우가 되었는데, 아버지는 에드윈을 그의 후계자로 마음에 둔 듯했고 실제 에드윈만이 배우의 길로 들어선 그의 아들 중 가장 성공한다.


자신의 미래는 장미빛이리라 믿던 에이시아와 존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에이시아가 자신은 무언가 큰일을 이루어낼 수는 없겠지만 소박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스라는 이름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하는 반면, 존은 무게감 있고 영향력 있는 자신만의 족적을 남길 거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훗날 그들의 인생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그런 존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세인트티머시 학교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존이 북부인의 태도를 버리고 강한 남부인의 특질을 가지게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가 가족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을 저지르는 시발점이 된 듯하다.


그리하여 존은 그렇게 정립된 자신만의 그릇된 신념을 행동으로 관철하며 남은 가족들을 가족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게 만들며 사람들 속에서 고립되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한 인물이 로절리였다. 한순간도 걱정을 끼친 적이 없는 자식이었던 로절리의 삶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희생만 요구되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초라한 삶이었다. 희생을 해도 누구도 감사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은 누구도 존중하지 않았다. 거기에 길들여진 그녀는 스스로의 삶에 만족했을까?

저자는 이 책의 등장인물 중 로절리가 가장 허구적인 인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존의 잘못된 신념과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 그의 남은 가족은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 사랑하는 아들과 형제를 부정해야 했고, 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에 의해 존 자신은 비열한 협잡꾼에 난폭한 주정뱅이가 되어버렸고, 가족들은 모두 비열하고 음침한 독사 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 온 나라는 그들을 하지도 않은 기행과 악행을 저지르는 인두겁을 쓴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매도하고 모욕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부스 가족들이 겪은 고통들을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자니, 비록 존이 미국이 사랑하는 위대한 인물을 죽였지만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연좌제를 적용하여 법에 의해서가 아닌 개인적인 분노 표출의 표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존 윌크스 부스는 그저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을 죽인 역사에 박제된 평면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설을 끝낸 지금은 저자의 절제된 문체에도 불구하고 존 윌크스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부대끼며 과거를 살았던 입체적인 인물이 되어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책은 벽돌책으로 두꺼웠지만 읽다 보니 롤러코스터 같은 부스 가족들과 링컨의 서사에 소설이 짧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했다. 역사가 스포 그 자체이지만 결말을 알든 모르든 부스 가족들의 삶은 너무나 파란만장하고 가족애는 아름답고 희생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언뜻 보면 상관없을 것 같지만 미국의 역사와 서서히 톱니바퀴를 맞추기 시작하며 정해진 역사의 시간 속으로 흘러가는 부스 가족의 삶을 통해 작가의 상상력이 재창조한 역사의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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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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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출판사에 근무하는 남자친구 코헤이와의 결혼을 간절히 바라는 아카리는 자신의 생일날 시부야의 유명 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는 코헤이의 문자를 받고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하며 행복한 꿈에 젖는다. 하지만 약속 당일, 약속시간이 다 되어 담당 작가로부터 급하게 부탁받은 일 때문에 약속을 취소해야겠다는 코헤이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에 아카리는 레스토랑은 나중에 가도 되니 잠깐이라도 만나자고 코헤이에게 애원하지만 코헤이는 바쁘다며 급하게 전화를 끊어 버린다.

서운하고 화가 난 아카리는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마침 문득 생각난 유명 케이크 가게에 가고자 방향을 바꿔 스크램블 교차로 앞에 섰다. 신호가 바뀌어 수많은 인파가 길을 건너는 가운데, 아카리는 우연히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갑자기 그가 방향을 틀어 아카리 쪽으로 다가오며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 순식간에 아카리를 향해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무차별적 공격을 당한 아카리는 계속해서 가해지는 고통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그대로 죽게 되는가 싶던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남자를 제지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소리와 함께 아카리의 눈앞에 나이 든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 남자의 입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떨렸고, 아카리는 그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것만 같아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가 남자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댔다.

"약속은 지켰다고… 전해줘…."

결국 아카리를 구하려던 남성은 죽고 아카리는 구사일생 목숨을 구하지만 그 사건은 아카리에게 크나큰 몸과 마음의 상처를 남김과 동시에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성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을 남긴다.


성인 잡지에 실리는 유흥업소 기사를 쓰는 프리랜서 무명 기자 쇼고는 시부야역 앞 스크램블 교차로 묻지마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사건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범인 케이치가 사건 발생 일주일 전까지 근무했다는 회사 사장의 인터뷰를 보고 케이치가 자라온 환경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는 케이치에게 흥미를 느낀다. 쇼고는 케이치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구치소에 찾아가 면회하고 그의 과거에 대해 조사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쇼고는 자신이 케이치의 과거를 알아내서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를 깨닫는데….



소설은 묻지마 살인 사건의 생존 피해자 아카리와 그녀의 남자친구 코헤이, 가해자 케이치의 과거 행적을 파헤쳐 나가는 삼류 기자 쇼고 이렇게 세 사람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된다. 그 과정에서 '인생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묻지마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개인의 일탈이 아닌 가정폭력과 학대, 주위와 사회의 무관심으로 연결, 확대하여 지금도 누군가의 관심과 손길을 바라고 있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첫 부분부터 발생한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책을 펼친지 얼마 되지 않아 소설에 훅 빠져드는 몰입감과 가독성이 장난이 아니었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안타까운 상황이 너무나도 잘 전해져 미스터리 추리 소설임에도 읽는 내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살짝 당황스러웠다.


소설은 어머니의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진 가해자가 어머니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분노와 증오를 동시에 가지고, 자신의 분노의 칼날의 끝을 타인에게 겨누어 타인의 행복과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도미노처럼 발생하는 타인들의 불행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해자의 불우한 과거가 정상참작 요소라는 점이 잠깐 언급되었을 땐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남을 공격해도 될 면죄부로 작용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사회와 부모에 대한 불만과 원망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죄의 경계를 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인간이기에, 인간이고 싶다면 지켜야 하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저마다의 고민과 불행을 안고 살아간다. 남들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배부른 투정일 수 있어도 그것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인생, 아니 생사를 결정할 만큼 커다란 고민과 불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인생을 탓하고 원망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이다.


"약속은 지켰다고… 전해 줘…."

아키히로는 누구와 무슨 약속을 한 것일까?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아키히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한마디를 전해 그를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할 사람을 찾는 여정을 떠나는 아카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심신에 새겨진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건을 파헤쳐 나가는 쇼고 역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사회파 미스터리 추리 소설임에도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에 집중했기에 개인적으로 소설에 더 깊이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을 덮은 후에도 계속 가슴이 뭉클하며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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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 지브리 음악감독과 뇌과학자의 이토록 감각적인 대화
히사이시 조.요로 다케시 저자, 이정미 역자 / 현익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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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보았던 영화 중 인상 깊었던 영화들을 꼽을 때 어떤 기준으로 나누든 꼭 몇 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차지한다. 그 작품들은 하나같이 영화와 정말 잘 어울리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감미롭고 듣기 좋은 영화음악들이 특징인데, 영화를 떠올릴 때 어쩌면 장면보다도 음악이 먼저 생각날 때가 있기도 할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인생의 회전목마'나 《바람이 분다》의 '여로', 그리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Summer' 등은 인생 명곡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곡들이다. 아마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안 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음악들은 분명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음악들을 작곡한 히사이시 조가 뇌과학자이자 해부학자 요로 다케시와 만나 뇌와 음악에 대해 고찰하고,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해 통쾌한 비평을 날리는 책이 나왔다고 해서 흥미를 끌었다. 결코 어울린다고 보기 어려운 이 조합 속에서 어떠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지 매우 궁금했다.



사람들은 흔히 절대음감을 몹시도 부러워한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같은 데에서도 절대음감을 천재들이 가지는 부가적인 재능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실은 이러한 내용을 전면 반박하고 있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사실상 사람들 모두가 절대음감을 타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만 3세 전후로 하여 철저하게 훈련한다면 누구나 절대음감을 가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모든 동물들이 사실상 절대음감이라는 점을 언급하는데, 순간 '그럼 내가 닭보다 못난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동물들에겐 이러한 음정이 소통의 중요 요소라는 사실을 읽으면서 자괴감 아닌 자괴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좌우지간 원래 타고나는 능력을 늦기 전에 단련하지 않으면 잃어버린다는 것인데, 인간 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능력이기 때문이리라. 있으면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 능력인데, 상당히 의외였다.



그렇다면 소리를 듣는 능력, 그 사용처와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귀를 단순히 청각 기관이라고만 생각을 하고, 귀 안쪽에 있는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을 단순히 청각 기관과 장소를 공유하는 별도의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인식을 반전시킨다.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이 청각 기관한테 얹혀사는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이 먼저 있었고 이로부터 청각이 파생된 것이라는, 일반적 통념과는 다소 어긋난 사실에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청각이 시각보다 여러 방면에서 앞선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보통 시각이 가장 빠르면서도 직관적으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동시에 주어지는 자극에 대해 청각 자극이 시각 자극보다 더 빨리 뇌에서 인지되며, 귀가 신체 운동과 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기에 눈을 통해 인식한 것보다 귀를 통해 인식한 것이 더 큰 감동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시각과 청각을 공간성과 시간성 측면에서 구분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들의 이중 구조, 정확히는 더 본질적임에도 저평가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기능들에 대해 설명하는 등 독자들에게 확실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선사한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소리에 대해 '그냥 듣기 좋은가 보다'라고만 생각하지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거기서 뭘 더 생각할 수 있을까 싶지만, 히사이시 조와 요로 다케시라는 각기 다른 두 분야의 거장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의 뇌와 청각(음악)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그것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두 사람 사이의 대담 형식이지만 히사이시 조의 역할이 맞장구를 치거나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대화가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쪽에 치우쳐져 있고 거의 요로 다케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어져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제한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대화가 탁구처럼 오가는 모습을 기대했었기에 아쉬움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당히 다양한 장르의 화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흘러가는 두 사람의 대담은 놀랍도록 균형과 조화를 이루었기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신선한 자극을 받는 것과 동시에 편안하게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고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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