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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은 눈부신
동화!
너른 광장 하나가 있다. 그곳에는 늘 한 자리에 머물러서 내가 서 있는 쪽을 지그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딘지 모르게 바쁘게 사라졌다가 다시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다. 광장의 한쪽에는 프리지아가 한 가득 피어있고, 뿌리 깊은 높다란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기도 하다. 나의 아이가 좋아하는 아기 사자 인형이 작은 벤치에 놓여 있고, 그 옆에 있는 멋진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는 악보 하나가 살포시 부는 바람에 팔랑팔랑 소리를 내며 페이지를 넘긴다. 하늘 위에는 뭔가가 둥실둥실 떠다니는데 가만히 보면 구름이
아니라 책이다. 그렇다, 이곳은 다름 아닌 ‘기억’이라는 나만의 광장이다. 이 광장은 당시의 감정이나 기분, 정서를 동반하는 온갖 매개체들이
존재하는 나만의 우주 즉, 나만의 천체이다. 기억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끼거나 인생의 마지막에 임박했을 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이 광장을
함께 거닐며 그것들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이별을 마주할 수 있다면 어쩐지 그 이별이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헤어짐을 배워가는 손자
“노아한테 뭐라고 하지? 내가 죽기도 전에 그 아이를 떠나야 한다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하지?” / 31p
세상에 이별에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일생에 누구나 한 번은 이별을 마주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특히 가족과의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깊은 상실감과 무기력함을 느끼곤 할 것이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속 할아버지는 서서히 잃어가는 기억만큼 하루하루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손자의 이름이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좋아서 항상 ‘노아노아’라고 부르는 그는 손자와의, 기억과의 이별 앞에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이별의 의미를 모르는 아이에게도, 이별을 설명해야만 하는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기억이라는 광장으로
손자를 이끌며 두려움 없이 작별할 수 있는 서로만의 방식을 찾아나간다. 두 사람이 굉장히 좋아하는 수학 이야기를 하거나, 광장에 존재하는
반짝이는 추억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원의 넓이를 계산할 때 필요한 원주율 외우기도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게임이다.
할아버지는 비밀의 문을 열어서 온 우주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런 신비한 숫자들을 사랑한다. 할아버지는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200번째 자리까지
외운다. 아이의 기록은 그 절반이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사고는 확장되고 할아버지의 사고는 수축돼서 둘이 중간에서 만나는 날이 올 거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 40p
‘중요함!’ 한 건물을 이렇게 깜빡인다. ‘기억할 것!’ 한 건물을 이렇게 얘기한다.
하지만 바닷가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높은 건물은 ‘노아의 사진들’이라고 반짝인다.
“저 건물들은 뭐예요, 할아버지?”
“기록을 보관하는 곳. 중요한 것들이 전부 저 안에 들어 있지.”
“예를 들면 어떤 거요?”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모든 것. 사진, 영화, 그리고 네가 준 가장 쓸모없는
선물들.”
할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리고 노아도 웃음을 터뜨린다. / 62p
이 소설이 가장 빛나는 지점은 아이의 사고는 확장되고 할아버지의 사고는 수축돼서 중간에서 만나는 날이 올 거라고
말하는 데에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점점 자라고 한 사람은 점점 작아져서 몇 년이 지나면 중간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서 존재한다.
광장이 하룻밤 새 작아졌음을 눈으로 보면서, 모든 게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며 삶에 대한 기대마저도 잃기 마련이지지만 여기, 이
우주처럼 어디로 확장될지 모르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으니까. 나를 추억해 줄 테니까, 슬프지 않다. 이렇듯 상실과 새로운 시작을 따뜻하고
담담하게 담아내는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이별이 단순히 단절과 사라짐이 아니라는 잔잔한 울림을 준다.
“제 손을 왜 그렇게 꼭 잡고 계세요, 할아버지?”
아이는 다시 속삭인다.
“모든 게 사라지고 있어서, 노아노아야. 너는 가장 늦게까지 붙잡고 있고 싶거든.”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보답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더욱 세게 잡는다. / 81p
나랑 평생을 함께
했잖아요. 내 평생을 가져갔으면서.
“여보, 기억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어. 물과 기름을 분리하려고 할 때처럼
말이야. 나는 계속 한 페이지가 없어진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 / 85p
이별을 준비하면서 할아버지는 아내와 나눈 시간들에 대한 회상과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유독
사무친다. 반세기가 넘도록 서로의 사람으로 지내며 히아신스 향기가 나고 가끔 고수 냄새도 풍기는 정원에서 공유했던 그들의 시간이 지금은 이토록
생생한데, 그 기억이 지워지게 될 것을 생각하면 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이별을 직면하게 되고나니 더욱 크게
느껴지는 서로의 존재와 그 애절한 마음을 “당신의 히아신스. 그 향기가 이렇게 강렬했던 적이 없는데.” 이 한 문장으로 압축한 저자의 표현이
애잔하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우리가 맨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신이 잠자는 시간이 고문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응. 잠은 같이 잘 수 없었으니까.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기가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전 몇 초 동안 얼마나 괴로웠다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리기 전 몇 초 동안 말이야.”
그녀는 그에게 입을 맞춘다.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점점 길어질 거예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이유는 당신의 머리가, 당신의 세상이 남들보다 넓었기 때문이에요. 그게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 97p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은 마치 『어린 왕자』와 같은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기법으로 인해 확실히 프레드릭 배크만의 전작과는
차별화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보일 생각으로 시작한 원고가 아니라고 한 저자의 말처럼 두터운 서사나 흥미로운 전개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 되돌아볼 ‘나’라는 기억의 광장에 앞으로 무엇을 채워나가야 할 지 청사진을 그려보게 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