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해부하는 의사 -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가 풀어놓는 인생의 일곱 단계
리처드 셰퍼드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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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신고를 받고 출동한 아파트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침입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욕조 안에는 지퍼가 채워져 자물쇠로 잠겨 있는 빨간 가방이 있었다. 가방에서 풍기는 심한 악취에 순경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가방 안에는 벌거벗은 채 태아자세로 등을 대고 누워있는 시체가 들어 있었다. 그는 바로 영국 비밀 정보부에서 암호해독가로 일하던 게리 윌리엄스로 이 사건은 '가방 속 죽음'의 미스터리라 알려지며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가방을 채운 자물쇠의 열쇠가 가방 안 시체 안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과연 이 미스터리한 죽음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었던 걸까.


"이 사람은 왜 죽었는가?"

시신이 발견된 장소를 시작으로 부검실에서 주검에 새겨진 비밀을 밝혀내는 한 법의학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저자는 게리 윌리엄스의 성적 취향과 부검을 통한 분석으로 비극적 사고로 결론 내렸지만 '가방 속 죽음' 사건은 이중 스파이 비밀 요원 청부 살인 등의 음모론을 낳으며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 책은 단순히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는 거에 멈추지 않고 인생의 각 단계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죽음의 종류를 다루고 있다. 아이와 젊은이의 때 이른 죽음, 꿈이 시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위기에 힘들어하던 중년의 죽음, 자신의 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험을 느낀 노년의 죽음 등 살인부터 불운한 죽음, 질병부터 사고사까지 저자가 들려주는 죽음에는 인생의 아픔과 슬픔, 감동적인 이야기가 함께한다. 


그 어느 죽음 하나 안타깝지 않은 건 없겠지만 어린아이들의 죽음과 노년의 죽음은 인생의 시작과 끝이 닮아있음에 더욱 숙연해지는 죽음이었다. 그들의 신체는 자유롭지 못했고 보호받지 못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리도 삶의 끝에 자유롭지 못한 정신과 신체로 인해 홀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스스로 선택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저자가 단순히 부검을 통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려는 것보다 주검을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 사회가 정의하는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세상은 다 무대입니다. 세상 남녀는 그저 배우이고요.

등장도 하고 퇴장도 합니다.

한 사람이 생전에 여러 역을 하는데, 인생은 7막입니다.


맨 처음은 어린애, 유모 품에 안겨 칭얼대며 토악질을 합니다.


다음은 구시렁거리는 학생, 책가방을 둘러메고 환한 아침 같은 얼굴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마지못해 학교에 갑니다.


다음은 사랑에 빠진 역할...


중략


이 파란만장한 인생 연극을 종결짓는 마지막 장면은 제2의 유년이자, 완전한 노망의 단계입니다. 이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입맛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요.

_윌리엄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2막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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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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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

'돌았니?'

'제정신 아니구나'


우리 눈에는 사실이 아니거나 터무니없게 생각되는 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사람들 눈에는 반대로 자신들이 믿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평평한 지구 학회', 기후변화는 미국을 경제적으로 해를 끼치기 위해 중국이 고안했다는 '트럼프', 빌 게이츠가 인구 감축 계획으로 코로나19를 퍼트렸다고 믿는 '코로나 음모론' 


왜 같은 것을 보고 서로 다른 논리에 빠질까?

모두 자신이 옳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내가 보고 믿는 것이 정말로 진실일까?


 

우주에서 찍은 구형의 지구 이미지도 음모론의 산물이라 치부하는 '평평한 지구 학회'단체는 그 어떤 과학적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지 않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확신한다. 거기에는 집단이 만들어내는 소속감과 내러티브가 강력하게 존재해 그 어떤 사고도 받아들이지 않게 뇌가 작동한다. 이런 소속이 만들어내는 확신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으로 인터넷 기술의 발달과 코로나19이후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책은 확신은 뇌에서 어떻게 생겨나고, 개인에게 어떤 기능을 하며, 확신을 바꾸는 게 왜 어려운지에 대해 뇌과학 이론과 최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일종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학, 유전학, 심리학, 뇌과학 등으로 추적하며 지나친 자기 확신을 왜 경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한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 확신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뇌가하는 일이다. 책에서 설명하듯 뇌는 깜깜한 뼛속 방에서 감각기관이 보내는 신경 자극을 수신해 그로부터 세계의 상을 만들어 낸다. 이미 내가 믿고 확신한 그 세계는 그 어떤 반대되는 의견이 들어올 수 없다. 문제는 비합리적 확신이 사적으로만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세상에 퍼지는 데에 있다.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잘못된 발언이나 틀린 확신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 부작용을 각종 음모론을 통해 우린 이미 많이 봐왔다. 그리고 서로 끊임없이 헐뜯고 비난하며 자신만 진실이라 확신한다. 


내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 말을 섞는 건 정말 곤혹스러운 일이다. 차라리 벽을 보고 혼자 말하는 게 나을 정도지만 내가 믿고 진실이라고 믿는 게 과연 진실인지 그 또한 의심할 필요는 있다. 그렇기에 뇌의 사고를 막기보다 곤혹스럽더라도 저자의 말처럼 뇌의 문을 살짝 열어두고 분별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할 필요성도 있는 거 같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대화를 시도해 보는 거 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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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 가족
마민지 지음 / 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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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라지만 롤러코스터는 어디서부터 추락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생보다 훨씬 친절하다. 남부러울 것 없는 시절을 영원히 누리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불행은 자꾸 갱신될 뿐이다.


부동산 열망을 그린 다큐 <버블 패밀리> 마민지 감독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1980년대 한국의 도시개발사와 한 평범한 가족이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면서 겪게 된 흥망성쇠를 신랄하면서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한 가족의 망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봤다는 게 어불성설 같지만 우리 집도 한때 아빠가 사기를 당해 모든 식구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공감이 갔던 거 같다.


저자의 어린 시절은 마치 영화 속에 나 나올 법한 흔히 잘 사는 집, 상류층 생활을 해왔다. 수백만 원의 생활비를 펑펑 쓰고 고가의 가구들과 골프 용품들은 가격 생각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사버리고, 국가에서 해외여행이 허용된 순간부터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고가의 물품들을 주저 없이 사들였다. 1980년대 당시 손만 댔다 하면 돈을 몇 배씩 벌어들이는 게 부동산, 건축업이었다. 저자의 부모님 또한 그 시장에 뛰어들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IMF가 찾아오면서 순식간에 불어난 빚더미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잠실 46평 최고급 아파트에서 10평도 되지 않는 월세로 밀려나기까지 부모님은 부동산의 꿈을 놓지 못했다. 아빠는 여전히 부동산에 열을 올렸고, 엄마는 부동산 상담 텔레마케터로 일하며 또다시 일어날 부동산에 희망을 걸었다. 그 사이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고 밀린 학비와 급식비로 인해 담임선생님한테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코로나 확진 후 의식을 잃은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그토록 희망을 걸었던 부모님의 꿈은 더욱 멀어져 갔다.


IMF 시절은 나도 생생히 기억난다. 뉴스에서는 종일 국가부도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멍한 표정으로 길거리에 주저앉아있었다. 어떡해서든 먹고 살 거라며 일용직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그것도 공을 치기 일쑤였다. 그런 쓰라린 시절을 수많은 가족들이 함께 겪어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많은 이들이 생을 포기하거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 책의 이야기는 특수한 한 가족사가 아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겪었고 싸워냈고 이겨내 지금에 이른 것이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겪지 않으리라 하지만 지금도 오르고 내리는 부동산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과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로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보며 과거 그와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 오죽하면 제2의 IMF가 올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올까.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은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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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는 미술사 도슨트 : 모더니즘 회화편 - 14명의 예술가로 읽는 근대 미술의 흐름
박신영 지음 / 길벗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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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모더니즘 회화'는 다양한 특징을 가진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모네의 인상주의, 고흐의 표현주의, 고갱의 원시주의, 마티스의 야수주의, 피카소의 입체주의, 달리의 초현실주의 등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왕과 귀족, 종교인 등 권력자의 전유물이었던 미술은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자유를 찾은 예술가들로 인해 새로운 그림들의 등장을 예고했다. 귀족이 주인공이 아닌 친서민적 사실주의가 등장했고, 그림의 형식 또한 다양하게 변화한다. 빛의 미술을 통해 '모더니즘 회화'의 문을 연 모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보이는 그림'으로 그린 고흐, 모든 대상을 도형으로 분해서 그린 세잔, 색을 붕괴했던 마티스와 파격에 파격으로 맞선 피카소 등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14명의 예술가들의 작품들과 그 속에 깃든 역사적 배경, 명화에 깊은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담겨있다.


모더니즘 회화를 다소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적인 고전 회화와 달리 다양한 기법과 파격적이고 난해한 작품들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물감을 흩뿌린 그림과 한두 가지 색으로 칠한 것이 전부인 그림이 엄청난 가치로 인정받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특히 자주색, 녹색과 빨간색이라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2,500억에 거래됐다고 하니 나는 그냥 백지로 내놓고 100억 받아볼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내 그림은 슬프게도 코딱지로 머물겠지만...


책 속에서 따로 소개된 모더니즘 회화의 비주류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들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는데, 특히 얼마 전 전시회를 갔다 왔던 달리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등장은 너무 반가웠다. 초현실주의는 '근대 문명에 대한 저항'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명확했던 미술이었고, 다른 예술가들보다 더 의식적으로 시대를 반영하려 했기에 환상과 판타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배경은 끔찍한 전쟁이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이해되는 모더니즘 회화의 흐름

보는 거 만으로도 빠져드는 작품들과 예술가들의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은 마치 도슨트의 설명을 따라 한 시대를 파노라마처럼 여행한 듯하다. 그리고 이 책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 우리 집 잘 보이는 책장 앞에 꽂아놓은 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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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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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이선희 작가의 소설 <계산서>와 <여성 명령>은 나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1930년대, 여성의 삶을 이렇게 섬세하고 세련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낼 수 있다니, 무엇보다 어려운 옛말조차 흐름을 전혀 방해하지 않으며 전개 또한 무척 흥미로워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와 더불어 삶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해온 천희란 작가의 <백룸>은 일상적 규범성이라는 틀과 억압에서 어디 있을지 모를 출구를 향해 나아가는 '나'를 그린다.


누런 벽으로 둘러싸인 방, 윙윙거리는 형광등, 어디 있는지 모를 출구를 향해 계속해서 방을 건너간다.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무한히 펼쳐지는 공간, 자신의 위치나 시간의 흐름도 파악할 수 없다.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창밖으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반대편의 창들만 보일 뿐이다.


작은 아이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방을 통과하는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저걸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겨우 출구를 찾았다며 문을 열지만 결국 그곳은 새로운 레벨의 백룸이었고, 그것이 또 무한 반복된다. 옆에서 보는 거 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답답한데, 저게 그렇게 재미있을까?


그런데 게임 <백룸>을 소재로 한 소설을 만났을 때, 책의 해설처럼 게임의 공간과 규칙은 우리가 초월적으로 우리 삶을 목격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으로 제출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미궁과도 같은 현실 이야기가 곧 우리 삶의 화두와 닮아 있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고,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기에 무한히 이어지는 방을 계속해서 건너간다. 그곳에 어떤 위협이 존재할지 몰라도 살기 위해서라도 출구를 찾아야 한다. 가차 없이 죽음을 당할지라도, 다시 일어나 방을 건너고 죽고 살아나고 다시 걷는 거처럼. 하지만 현실이 게임과 다른 건 우린 언제든 주어진 규칙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삶을 운용하는 건 바로 '나'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알며, 이 시공간 안에 얼마간의 규칙이 있으며 그것을 따라야 함을 안다. 또한 이 공간 안에서 얼마간 방향감각을 잃음으로써 이 안의 규칙을 균질하게 적용할 수 없음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바깥에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러나 더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어야만 지금 눈앞에 '보임으로써 믿어지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있다. _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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