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이 이긴다 (스페셜 양장 리커버 개정판) - 사람을 남기는 말, 관계를 바꾸는 태도
이해인 지음 / 필름(Feelm)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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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참을 수 있잖아."
"그건 네가 예민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누군가는 안다. 그 '정도'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자신에게는 아무 일 아닌 것이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_p.69)

2025년 8월,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 초판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해인 저자는 호기롭게 선언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문장을 내놓은 직후, 그녀는 생애 가장 '다정하지 못한 계절'을 지나야 했다. 가장 가까웠던 가족과의 법정 공방, 오랜 시간 쌓아온 인연과의 아픈 단절. "정말 다정한 사람이 이기는 게 맞긴 할까? 내 다정함이 오히려 나를 패배로 몰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그녀의 내면을 거칠게 갉아먹었다.

이번 스페셜 양장 리커버판은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뒤, 더 단단해진 사유를 담아 돌아왔다.

우리는 흔히 다정함을 남에게 맞춰주는 유약함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다정함이란 단순히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연약한 마음이 아니라, 상처받고 억울한 순간에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강인한 선택이자, 불합리한 세상에 맞서는 가장 투쟁적인 비폭력의 힘이라고.

그녀가 아픈 계절을 지나며 깨달은 다정함의 세 가지 방향은 명확하다.
다정함의 끝은 반드시 '나 자신'을 향해야 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선 때로 과감한 '관계의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외부의 소음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생산해 내는 것이 가장 강력한 방어다.

누구에게나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듯, 마음의 에너지에도 '긍정 총량의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의 다정함은 무한하지 않다. 긍정의 에너지가 바닥났는데도 억지로 친절을 짜내는 건 결국 자신을 소진시키는 일일뿐이다.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 다정함을 억지로 꺼내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누구에게나 늘 다정할 수 없고, 모든 상황에 친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를 지키는 첫 번째 권리이자, 무리하지 않고 살아가는 '진짜 어른의 용기'다.

다정하지 못한 계절을 통과했지만 다시, 다정함을 선택하기로 한 그녀.

수많은 이별 속에서도 마음을 닫아걸지 않고, 내 곁에 남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기꺼이 다정해지기를 선택하려 한다. 남몰래 삼켜낸 고독의 시간이 결국 내 안의 단단한 뼈대가 되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_p.24)

불행한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 결국 좋은 삶은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다정하게 살아낸 루틴의 반복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녀는 다시 한번 깨닫는다.

여전히 나에게 다정함은 참 어려운 영역이다. 사회화와 인간화를 거치며 꽤 친절한 언어와 태도를 갖췄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다정함은 여전히 상대적이고 조심스럽다. "다정함은 노력의 결과이고, 관계는 우연이 아닌 선택의 산물이다"라는 말처럼, 타인에게 온기를 내어주는 일에는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몸이 부쩍 축나는 게 혹시 내 기준에서 너무 많은 다정함을 끌어다 써서 그런 건 아닐까?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는데, 몸이 골골대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세게 이기려고 했나 보다. '긍정 총량의 법칙'을 무시하고 다정함을 풀할부로 당겨쓴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하고. 예전보다 꽤 많이 다정해진 게 병을 키웠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다시 차가운 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지만 조금 골골대더라도 다정함은 잃지 말아야겠지. 일단 당분간은 남에 대한 다정함은 셔터 내리고, 나 자신에게만 극도로 친절한 ‘셀프 다정 루틴’에 들어가야겠다. (이기적으로 마무리하나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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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극우가 온다
정민철 지음 / 페이지2(page2)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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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 반에서 민주당 지지한다고 하면 '대깨'라고 놀림 받아. 대가리 깨졌다면서 병신 취급당한다고. 애들이 쉬는 시간마다 이재명 대통령 욕하는 밈 보면서 낄낄거리는데, 거기서 정색하면 나만 왕따 돼."

지금 10대들의 교실에서 민주당은 '꼰대' '위선' '조롱거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_p.63


“왜 내가 장애인 이동권 때문에 출근길에 늦어야 돼? 내 시간 손해 보는 건?”

“왜 내가 여성을 배려해야 해? 남자만 독박 징병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래도 우리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지 않겠냐”

“진지 빨지 마, 역겨우니까.”


단순히 "요즘 애들이 보수화되었다"는 통계 수치를 접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1020 극우가 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공포에 압도당했다. 책이 파헤친 1020 극우화의 실체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인을 모독하고 약자를 조롱하고 소외계층을 패배자로 낙인찍는 행위가 일종의 '힙한 놀이'이자 '가장 쿨한 문화'로 자리 잡은 잔혹한 생태계였다.


01년생인 저자 정민철은 여의도라는 갈라파고스를 박차고 나와 아이들의 진짜 전장인 인스타그램과 틱톡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목격한 현장은 참혹했다. 아이들은 가장 자극적인 극우 유튜버의 논리를 흡수하고 그것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소속감은 느꼈다.


도파민과 뇌 해킹: 과거 '일베'가 직접 찾아가야 하는 하수구였다면, 지금의 극우 콘텐츠는 알고리즘을 타고 릴스, 쇼츠를 통해 아이들의 뇌를 직접 공략한다.

혐오의 힙화(Hip): 이제 민주주의나 진보는 '지루한 꼰대 언어'가 되었고, 약자를 비하하고 금기를 깨는 행위는 '쿨하고 힙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밀폐된 커뮤니티: 카카오톡이 아닌 디스코드나 익명 커뮤니티라는 벙커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암호와 문법으로 결집하며 외부의 소통을 차단한다.


1020 세대는 더 이상 거리로 나가 정의와 공정을 외치지 않는다. 그들은 온라인이라는 폐쇄된 벙커 안에서 알고리즘이 설계한 세상만이 유일한 진실이라 믿는 세대가 되었다. 우리의 뇌를 소리 없이 잠식하고 지배하는 알고리즘의 실체는 공포를 넘어 경악 그 자체였다.


'취업이 힘들다'고 검색하면, '여자가 네 일자리를 뺏고 있다'는 혐오 영상을 보여주고, '군대 가기 싫다'고 검색하면 '페미니스트들이 군인을 비하한다'는 자극적인 클립을 무한 재생시켰다. 알고리즘은 타협이나 공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선택만을 정답처럼 제시한다. _p.116


책을 덮고 나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놀람'을 넘어선 '공포'였다.

집에서는 욕 한마디 안 하는 착한 내 아이들이, 방문 닫힌 그 모니터 너머에서는 어떤 모습일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혹시 알아?"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서로를 응시했다. 이미 내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어떤 걱정을 하는지 다 안다는 눈치였다.

"엄마, 중학생은 그냥 다른 생명체라고 생각하면 돼. 뭘 알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 언어야. 나중에 그 뜻을 알게 되더라도, 이미 아이들 사이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돼. '씹선비'나 '진지충' 소리 듣기 딱 좋거든."


내 표정이 꽤나 썩어있었나 보다 "나중에는 나쁜 뜻인 걸 알고 이제 안 쓰니 걱정 마"라며 나를 위로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공격적이며 타협을 모르는 새로운 '콘크리트 우파' 세대가 지금 아이들 방 안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진실은 본래 지루하다. 거짓말은 자극적이고 재밌게 가공되지만 진실은 복잡하고 어렵다. 도파민에 중독된 1020세대에게 '점잖은 훈계'는 소음일 뿐이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려면 진실도 '무기를 갖춰야한다._p.234


이 리뷰를 쓰면서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했는지 모른다. 300페이지 중 단 한 글자도 버릴 게 없었다. 모든 내용을 다 담아내고 싶은 욕심에 쓰고 또 쓰다 보니, 인스타그램의 글자 제한이 야속할 정도다.


혐오와 조롱이 넘쳐나는 전장에서 홀로 외로이 분투하고 있는 저자 정민철. 그에게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연대는 이 책을 제대로 읽고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부디 더 많은 이들의 손에 이 책이 들리길,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거짓과 혐오의 어두운 벙커에서 벗어나 진실을 바라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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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 - 지구 생물부터 우주 행성까지, 세상을 해석하는 양자역학 이야기 최소한의 지식 4
김상협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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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피고, 사건 당시 건물 앞뜰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창 A와 B 가운데 어느 쪽으로 침입했습니까?"

전자: "저는 두 창을 동시에 통과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피고가 A에 있었으면 B에 없고, B에 있으면 A에 없다는 건 자명합니다. 목격자가 있었다면 금방 확인됐을 일입니다."

전자: "하지만 사건 당시, 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어: "아인슈타인 검사님, '목격자가 있었다면'이라는 조건을 너무 쉽게 일반화하시네요. 목격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두 곳을 동시에 지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게 가능해? 혼란하다 혼란해. 🤯

근데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 '양자역학'의 세계다.


양자역학이라고 하면 보통 복잡한 수식과 슈뢰딩거 고양이부터 떠올리며 도망가고 싶어질 거다. 그런데 이 책, 《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의 저자 김상협은 "계산은 맞는데, 나도 이게 뭔 소린지 안개가 낀 것 같았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수식으로 증명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양자역학이라는 '마스터키'를 들고 우리 주변의 문들을 하나씩 열어젖힌다.


이 책의 백미는 양자역학을 물리 안에만 가둬두지 않고 화학, 생물, 천문학으로 연결한다는 거다.

[화학] 벤젠의 미스터리한 결합 구조? 양자역학이 없으면 설명이 안 돼.

[생물] 식물이 광합성을 할 때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1조분의 1초 만에 찾는 비결? 그게 바로 '양자 중첩' 덕분이야.

[천문] 다 타버린 별인 '백색왜성'이 중력을 견디고 붕괴하지 않는 이유? '불확정성 원리'가 별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지.

[일상] 지금 네 손에 든 스마트폰의 플래시 메모리? 전자가 벽을 통과하는 '양자 터널링' 현상을 이용한 거야.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이 세 가지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A는 큰길, B는 공원길, C는 골목길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론 한 번에 하나의 길만 갈 수 있다. 하지만 양자 세계는 다르다. 분신술을 써서 세 명이 동시에 A, B, C를 걷는다.


이 분신들이 집 앞에 도착하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여러 경로를 따라온 에너지들이 반응 중심에서 만나면, 서로 리듬이 맞지 않는 비효율적 경로는 상쇄되어 사라지고 리듬이 딱 맞는 경로만 강화되어 살아남는다. 결국 별도의 계산 없이도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자동으로 선택되는 거다.


오늘 내가 집으로 오는데 내 몸은 분명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집으로 갔을 거다. 최종적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남아 있는 하나, 그것이 바로 가장 효율적인 나인 셈이지.


이쯤 되면 "에이, 그건 눈에 안 보이는 미시 세계 이야기잖아!"라고 하겠지?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도, 우리 손안에서는 더 기가 막힌 '초능력'이 벌어지고 있다.


앞에 아주 높고 단단한 담벼락이 있다. 공을 던지면 튕겨 나오고 달려가면 부딪힌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절대로 벽을 넘을 수 없는 것이 '고전 역학'의 세계다.

그런데 양자 세계의 입자들은 좀 황당하다. 벽 앞에서 "어? 벽이네? 근데 난 파동이기도 하니까..." 하면서 벽 너머로 '스르륵' 통과해 버린다. 마치 해리포터가 9와 4분의 3 승강장 벽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걸 '양자 터널링'이라고 부른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싶겠지만, 이게 없었으면 우린 지금 인스타에 사진 한 장도 저장하지 못했을걸?

우리가 매일 쓰는 스마트폰의 플래시 메모리가 바로 이 '벽 뚫기' 원리를 이용한다. 전자가 단단한 절연체 벽을 터널링으로 통과해야 비로소 데이터가 저장되는 거다. 결국 우리는 매 순간 분신술(중첩)로 최적의 길을 찾고, 벽 통과(터널링)로 정보를 저장하는 마법 같은 물리 세계에 살고 있다.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분명 이해하기 어려운데, 저자가 일상의 언어로 콕 집어주면 마치 SF 보듯, 법정 드라마 보듯 너무 재미있다는 거다. 이제 계산은 수학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저 이 경이로운 세계를 즐기자!


복잡한 수식 한 줄 없어도 책을 덮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거다. 이제 길가에 핀 꽃 하나를 봐도 "오, 너 지금 양자 중첩으로 효율 뽑고 있구나?" 하고 아는 척할 수 있다. (난 준비됐다구)



아인슈타인: "의심하게"

보어: "믿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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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혜영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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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원하는 저희 부부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실 순 없으실까요?"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오로지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걸까."

저렴한 마감 세일 식품만 먹고, 옷은 중고 매장에서만 겨우 사는 삶에서 해방되고 싶다.


도쿄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스물아홉 살 리키에게 찾아온 이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구원이자, 동시에 거대한 늪이었다. 매일같이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그녀에게 '천만 엔'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거액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었으니까.


편의점 마감 세일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매월 월세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는 '미래'라는 단어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접하게 된 대리모 제안. 자신의 자궁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인생을 바꿀 돈을 받는다는, 이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거래에 리키는 결국 몸을 던지기로 한다.


자신의 '우월한 유전자'를 세상에 남겨야 한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힌 전설적인 발레리노 모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아내 유코의 고통이나 대리모의 인권보다는, 오직 자신의 완벽한 복사본을 만드는 데만 집착한다. 유코 역시 남편의 욕망에 질질 끌려다니며, 다른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는 이 상황에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임신이 진행될수록 리키는 단순한 '배양기'가 아닌, 아이를 매개로 갑을 관계를 뒤흔드는 주체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며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과연 이 위험한 거래의 끝에 리키가 꿈꾸던 평온한 삶은 기다리고 있을까?


리키는 책상 위의 서약서를 내려다봤다.

망설임 없이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었다.

"그래도 괜찮겠지?"


소설은 가난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깎아먹을 수 있는지, 그리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여성의 신체를 등급 매기고 상품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키에게 대리모는 '선택'이 아니라, 막다른 길에서 마주한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반면, 자신의 유전자가 특별하다고 믿는 모토이의 태도는 현대판 우생학의 변형을 보여준다. "누구의 유전자가 더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을 기능과 효용으로만 판단하는 차가운 시선을 꼬집는다.


'모성'이라는 신성한 포장지를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추악한 거래와 계급의 민낯을 마주하는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제비'는 둥지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한 번 거래의 대상이 되어버린 리키의 삶과 몸 역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안락한 둥지를 찾기 위해 결정한 일이지만 결국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끝없는 비행을 택한 리키의 모습에, 그리고 '나는 왜, 아기가 있어도 이렇게 쓸쓸할까.'라는 그녀의 독백에 독자 또한 쓸쓸해진다.


자본이 생명마저 집어삼키는 시대, 리키의 선택을 과연 윤리의 잣대로만 비난할 수 있을까. 사회가 개인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을 때,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자신의 몸이라는 사실이 서슬 퍼른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마지막 반전이었던 리키의 결정에 책을 덮고 한참을 이 뒤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게 됐다.

이 뒷 이야기를 책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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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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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의 '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이 서늘하고도 뜨거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랑의 에세이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는 한 개인의 고백을 넘어, 오랜 시간 침묵 속에 갇혀 있던 한국 여성들의 잔혹한 연대기다. 뮤지션이자 작가인 이랑은 2021년 겨울, 언니의 죽음을 마주하며 이 기록을 시작했다. 그는 언니의 죽음을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가족과 타인을 돌보고 사랑하느라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써버린 '소진사(消盡死)'라고 정의한다.


"그래그래, 네가 힘들고 죽고 싶을 만도 하지. 엄마는 미쳤고, 아빠는 쌍놈이고, 할매들도 다 정신병자고, 친척들은 사기꾼이니." _p.25


책은 외할머니에서 엄마로, 다시 언니와 저자 자신으로 이어지는 가난과 폭력, 차별의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가부장제의 굴레 안에서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미친년'이라는 낙인을 감수해야만 했다. 저자는 이 굴레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우리가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문장을 길어 올렸다.


언니는 그 전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한 시간 정도 삶의 고됨을 토로했다. 그런 언니에게 '전화기를 끄고 일주만이라도 조용히 쉬라'고 충고했다. 언니는 울먹거리며 '얘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언니는 자살했다. 나는 일주일만 쉬라고 했는데, 왜인지 언니는 영원한 쉼을 선택했다. _p.96


언니의 죽음, 친구의 죽음, 그리고 반려묘의 죽음까지. 죽음은 늘 예고 없이, 혹은 우리가 잠시 잠든 사이에 그림자처럼 찾아온다.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남겨진 자들의 비명과 차마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흉터처럼 남는다. 저자는 그 흉터를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가족을 집어삼킨 거대한 비극의 뿌리를 추적한다.


할아버지의 유산 100억을 들고 아들들만 데리고 도주했던 외할머니. 하지만 애지중지하던 아들들에게 버림받고 병든 몸으로 쪽방을 전전한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가 뭐가 그리 가엽다고, 부양할 능력도 없으면서 기어이 할머니를 모셔온 엄마. 그 모든 굴레와 짐은 고스란히 장녀인 언니의 몫이 되었다. (정말 속이 터져 죽는줄)


이 책에는 미친년이 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수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늘 뒤로 밀려나고 참아야 했던 일들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그 벽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고통스러운 투쟁이 필요했다. 이랑 작가는 그 한복판을 지나오며 기어이 살아남은 이다.


책장을 덮고 나면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면서도 묘한 해방감이 차오른다. "밥을 잘 먹어야 해. 밥을 먹으면 힘이 생길 거야"라는 고양이 준이치의 다정한 위로처럼, 이 지독한 역사를 통과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승리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평범한 식사일지도 모른다.


비록 가슴 찢어지는 고통일지라도,

그 사랑의 기억이 우리를 일으켜 다시 밥을 먹게 하고 하루를 더 버티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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