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상점 TURN 2
강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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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거기 맞죠?"
"여기 그거 하는 곳 맞죠?"
"사람...."
"죽......여주는 곳 맞죠, 여기. 그죠?"

상점이 문을 닫으면, 이곳의 주인인 유희는 조용히 삽을 들고 뒤쪽 마당으로 향한다.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작게 분해되고 나면 다른 거름들과 마찬가지로 마당에 묻힐 터.

어느 곳에서도 해결해 주지 못한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던 여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곳 『식물, 상점』 이다.

개업 후 얼마 지니지 않아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식물 가게 '식물, 상점'은 SNS에서도 유명세를 타며 사람들이 북적거리게 된다. 하지만 영업이 끝나고 밤이 되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눈빛, 초조한 손동작, 주눅 든 모습으로 묻는다. "여기, 거기 맞죠?"

사람도 식물과 똑같이 다듬으면 나아질 거라 믿었던 유희는 조금 손보면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유희를 거쳐 간 남자들 때문에 그 믿음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늘 친절하게 다가왔고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어김없이 유희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적어도 식물은 썩은 부위를 잘라내고 백신을 돌리고 정성을 쏟아 기르면 다시 기존 모습으로 살아나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 뭐, 없애버려야지

이미, 표지에서 짐작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호미를 들고 밖을 바라보는 한 여자, 마치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을 연상케하며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거 같다. 하지만 주인공 유희는 도저히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으로 차분하게 모든 일을 수행한다. 프로란 이런 것일까, 마지막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와 마주했을 때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남자친구에게 폭력과 협박을 당하는 현진, 자신을 폭력으로 통제하는 아빠 때문에 늘 불안한 중학생 민하, 직장 내 상사의 성희롱과 괴롭힘에도 참아야 했던 명하, 이걸 벗어나기 위해서 누구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늘 그렇듯 피해자가 도망가야 할까?

소설이니깐, 공포와 스릴러를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내적 갈등이 생긴다.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지. 하지만 끝내 죽음을 당하고 마는 피해자들은 그들은 이유 없이 그들의 폭력에 삶이 무너지고 만다. 작가님이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한 남성이 "남성이 너무 이유 없이 죽는 거 아닌가요?"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유 없이? 이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이유 없이 죽었던 걸까? 그럼 지금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하는 그 수많은 여성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수히 죽고 사라져간 여성들을 떠올리려 애쓰면 이 소설을 쓰셨다는 강민영 작가님. 소설 밖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소설 속에서만이라도 이름 없이 죽어간 그녀들이 다치지 않고 이름이 기억되는 죽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어야지.
그땐, 내가 잘못했었다는 말을 했어야지. _p.256

손을 씻지 않길 잘했다.
"이제 적당한 거름이 필요한 시기가 온거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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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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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왜 이곳에 왔을까?
그들은 언제 떠나갈까?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들은 누구일까?

벽 없이 생활하며 경계 너머에 사는 사람들
떠돌이, 방랑자, 야만인으로 불리던 유목민 1만 2,000년의 역사. 『노마드』 이다.

몇 년 전 한 방송사를 통해 방영된 지구상의 마지막 순록 유목민 네네츠인들의 유목생활을 담아낸 '가디언즈 오브 툰드라'를 본 적이 있다. 이미 10년 전 그들을 만나 '최후의 툰드라'를 찍었던 방송사는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그들을 만났다. 365일 길 위에서 생활하며 하루에 많게는 35km 정도의 유목생활을 하는 그들. 그들은 당시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까.

마치 시간을 오랜 과거로 되돌려 놓은 듯 유목민들의 삶은 무척 놀라웠다. 지금 시대에 여전히 전통적인 유목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연의 위대함과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책의 저자 앤서니 새틴은 그런 유목민의 삶을 오랜 시간 추적하며 역사 속 그늘진 곳에 자리한 유목민들의 역사를 복구해냈다.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과 목축 생활로 옮겨갔던 정착민과 유목민의 공존과 협력을 그린 1부, 제국의 흥망과정을 다룬 2부, 현대의 탄생과 서구의 학자들, 정착민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유목민의 역사를 그린 3부로 이어지며 인류 역사의 절반을 차지했던 유목민의 오랜 역사를 풀어냈다.

대부분 기록을 하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유목민의 특성상 그들의 역사를 담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머물렀던 거대한 언덕과 건축물, 이동 중 맺은 교역과 문화 교류 등을 심층 분석하고 탐구하니 유목민들이 정착민 사회에 끼친 영향이 상당했고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음이 밝혀졌다.

유독 흥미로웠던 건 스키타이인, 흉노, 페르시아인, 몽골, 아랍인 등 유목민들에 대한 그들만의 사회, 군사, 경제활동 등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었다. 특히 칭기즈 칸을 중심으로 한 몽골인들의 강력한 제국 건설과 그들로 인해 지금의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 그들의 광활하고 거침없는 이동에 또다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은 대부분 정착된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이동하는 삶을 살아왔다. 1만 2,000년의 역사, 저자는 우리 세계, 우리 문화,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목민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책 한 권에 유목민의 광대한 역사를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다양한 집단이 모여 그들의 지식, 역사, 사고, 문화들이 서로 이동하고 나누고 합체하면서 지금의 현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유목민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그들에 대해 무지했던 나에게 이 책은 유목민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알게 해줬다.

그리고 현재...

지구상 마지막 남은 순록 유목민...
자연을 벗 삼아 오로지 순록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잠시 툰드라를 떠나 학교생활을 했다 다시 돌아온 청년들은 이제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유목생활을 해야 하는 툰드라와 편하고 비전 있는 도시, 청년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툰드라 다큐를 보며 이 책의 여운을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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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 지느러미 TURN 1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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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삼촌이에요?"
뼈. 누군가 발라 먹기라도 한 듯 적나라하게 드러난 갈비뼈와 두개골, 이빨 몇 개. 그게 다였다.
막냇삼촌이 죽었다.

치명적 존재의 달콤한 저주 그리고 사랑
조예은 장편소설 『입속 지느러미』 이다.

조금 있으면 여름 장마철이다.
매해 장마철이며 일어나는 사고.
갑자기 일어나는 홍수와 물 범람에 희생되는 사람들, 우린 장마철이라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에 사람들이 안타깝게 희생됐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중 누군가는 사람에 의해 아니 물고기에 의해 희생됐다면... 인간이면서도 물고기인 이 치명적 존재가 피에 굶주려 한다.

죽은 삼촌이 조카 선형에게 남긴 가게 하나
문을 연 순간 어둡고 미끈거리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가게 안, 죽은 물고기 들 사이 알 수 없는 생명체를 인지하고 선형은 그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찰방 찰방 거리는 지느러미를 지나 두 눈이 마주쳤다. 그건 인어였다. 혀가 잘린 인어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아니 노래를 할 수 없었다. 인어에게 더 이상 홀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른 듯 반듯하게 잘린 혀. 선형은 그 잘린 혀가 계속 신경 쓰인다. 다시 저 혀가 되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왔던 삼촌의 모습이 떠올랐다. 손가락 두 개가 사라졌고, 한 쪽 귀가 사라진 삼촌의 모습이.. 삼촌 또한 간절했던 것일까. 인어의 노래를 들을 수만 있다면 제 엄지손가락 하나쯤 내어줄 수도 있을 거 같다.

생선 내장이나 알탕도 먹지 못하지만 끔찍하고 징그러운 이야기를 쓸 때면 늘 즐겁다는 조예은 작가, 내 스타일이야 ㅎㅎ
나도 날아다니고 다리 많은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지만 배를 뚫고 나오는 바퀴벌레, 순식간에 곡물과 사람을 먹어치우는 대형 메뚜기떼 등 고어한 영화들은 즐기며 본다. 물론 이 책에 묘사된 여러 장면들은 그 정도는 아니다. 충분히 누구든 비릿한 그 공포의 상황을 상상하면 즐겨볼 수 있는 정도이니 의심하지 말길...

바닥에 뒹구는 얼굴이 뜯긴 머리와 다소곳하게 쌓인 장기, 녹아내린 초콜릿같이 점도 높은 검붉은 웅덩이. 지옥을 닮은 풍경 한가운데 인어가 웃고 있다. 인어의 혀는 자라났을까?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

'장마철이 되면 식성이 변함. 다룰 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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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 동화 여주 잔혹사
조이스 박 지음 / 제이포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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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왜 어린이나 아저씨나 아줌마는 잡아가지 않고, 아가씨 또는 공주만 잡아갈까?
백설공주의 계모는 거울에 매달려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쁜지 안달복달할까?
빨간모자 소녀의 할머니는 깊은 숲속에서 왜 혼자 살까?
깊은 숲속 접근이 불가능한 탑에 갇혀도, 독사과 먹어 죽어서 유리관에 전시돼도 왜 항상 왕자가 나타나 구원해 주는 것일까?

지금 21세기의 우리에게 전래 동화는 무슨 의미일까?
새롭게 다시 읽는 전래동화의 숲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이다.

어릴 때 '흥부와 놀부'를 읽으며 흥부는 능력도 없고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 왜 저렇게 아이들만 많이 낳아 가족들을 고생시킬까 진짜 저런 남자 만나면 안 되겠다 교훈 삼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공주가 나오는 동화는 불쌍한 공주, 언제 왕자가 나타나 구해주고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까? 생각했지. 왜 공주는 늘 약하고 당하기만 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할까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거 같다. 남자가 당연히 여자를 구원해야 하고 여자는 당연히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던 거였다.

사회적 경험을 하고 책을 읽으며 사고가 확장되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남성이 준 유리 구두에 맞춰 발을 자르던 여성
가부장 권력에 순응하고, 평가당하고, 양도되던 여성
그동안 내가 읽었던 동화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은 숲으로 간 동화 속 여주인공들을 찾아 본격 해부에 나선다. 공주를 잡아간 용은 사실 여자 그 자체였고, 여자는 용처럼 용맹하고 파워를 지닌 존재이자 신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며 더 이상 깊은 숲에 있지 말라 말한다. 애초에 용은 없었다. 예쁜 공주의 모습을 하며 왕자가 와서 구해주길 여자는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오래전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세뇌당하고 잘못 주입된 고정관념이 여성을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남성이라고 해서 여성보다 더 우월해야 했던 동화,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월해야 하는 젠더 갈등을 부추기지 않는다. 동화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에 전래 동화를 새롭게 써야 한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당시의 상황과 필요에 맞게 다시 쓰여야 하는 것처럼 옛날이야기도 여러 가지 변형을 통해 반드시 다시 쓰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럼, 이제 어떤 옛날이야기를 새롭게 써야 할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흥부와 놀부를 새롭게 써볼까
아이들과 함께 옛날이야기를 써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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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내 마음을 그리다
김선현 지음 / 한길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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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몸의 아픔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던 프리다 칼로, 성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에곤 실레, 사랑하는 사람과 닮고 싶었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스페인 독감마저 물리친 장수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 성공할까 두려워하면서도 후원과 관심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빈센트 반 고흐,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자로서의 자신감과 당당함을 표출했던 타마라 드 렘피카 등 57명 화가가 남긴 자화상 104점이 담겨있다.

자화상은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자신의 내면과 정체성을 외적인 모습으로 표현해 미술치료에서 많이 사용하는 치료기법으로 말로 표현하지 못한 숨겨진 마음을 찾아낸다. 책에 소개된 자화상은 화가로서의 번민과 고통,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려는 모습도 보였지만 아픔, 고통,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 또한 느껴졌다.

대부분 자화상이 우울과 불안, 고독, 슬픔 등이 느껴졌는데, 유독 도전적이고 당당함이 눈에 띄었던 작품이 있었다. 책 표지로도 선정된 타마라 드 렘피카의 <녹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이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뇌쇄적 눈빛과 대담하고 도시적인 신여성의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에서 타마라가 여성으로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맞서고자 했던 모습이 화풍에서 그대로 전해져 더욱 인상 깊었던 거 같다.

같은 시대, 우리나라 화가였던 나혜석 또한 당시 여성 화가로서 멋진 행보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사회적 질타 속에서 외롭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건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심리학에서는 '나'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세 가지의 '나'가 있다고 한다.
'되고 싶은 나' , '노력하면 될 수 있는 나', '실제의 나'
되고 싶은 나를 위해 노력하려 하는 나지만 실제의 나는 그러지 못하는 거 같아 자주 좌절감을 느낀다. 여러 화가들의 자화상을 보며 진짜 되고 싶어 하는 나는 무엇인지, 오늘은 그 숙제를 해봐야겠다.

때론 우리의 환경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움직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시간이 흐른 뒤 그때가 운명 같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어떤 경우는 "그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때 그 상황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바로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_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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