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 오아라
이승민 지음 / 새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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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숱한 욕망과 애욕에 얽혀 삽니다. 그것이 업보라면 어쩌겠습니까." (본문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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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미첼의 장편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모티브로 삼은 이승민 작가의 <<스칼렛 오아라>>는 불온한 욕망을 가진 낮과 밤이 다른 한 여자의 이중생활을 담은 소설이다. 이승민 작가는 십여 년 간 다수의 잡지사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소설가 성석제로부터 '자기 연민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도구인 성찰과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데 이러한 자신의 경험은 소설에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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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스물여덟 살의 작가 오아라. 그녀는 신춘문예 도전 4년 만에 경쟁률이 덜한 지방 일간지를 통해 등단하게 되었지만 나흘 후 식당에서 일을 마치고 밤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는 어둡고 외진 골목에서 쓰려져 요양병원 중증 격리병동에서 인형처럼 누워지내게 된다. '문학과 미래 편집부 김순옥'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아 단편을 쓰지만 김순옥은 그녀의 작품을 못마땅해하고 수정을 요청한다. 당선이후 모든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순진한 상상은 엄마의 병원비 독촉과 당선이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일상으로 물거품이 되었으며 하나의 불씨가 되어줄 원고 청탁에 심혈을 기울여 써 보냈던 작품이 누더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오아라는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플랜 ABC를 실행한다. 엄마 병원비 때문에 푼돈이라도 벌고자 했던 논술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학생의 아버지이자 성형외과 의사인 김중권이 플랜 A, 예술인 복지재단에 복지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이 플랜 B, 그리고 오피스걸인 스칼렛이 되는 것이 플랜 C이다. 플랜 AB는 플랜 C를 실행하기 위함이며, 플랜B를 위해 장편소설을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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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삶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내 삶과 이어지는 일은 늘 예기치 못한 이유로, 이외의 순간에 일어난다. (본문 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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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순옥은 오아라의 작품을 몇 차례 수정을 요청했다가 오아라에게 오히려 거절을 당하자 편집주간이자 유부남인 짝사랑하는 윤석향으로부터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때마다 김순옥은 동거남이자 사모님들로부터 스폰을 받아 생활하는 노아에게 성적욕망을 풀어낸다. 늘 사모님들로부터 을의 관계에서 생활하며 쿨한 태도에 대한 근원적인 동경을 갖고 있던 노아는 우연히 스폰을 구하는 스칼렛의 글에서 느껴지는 당당함에 호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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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환상으로 오아라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김중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아라와의 미래를 꿈꾸지만 오아라는 그가 건네는 상품권보다는 명품백을 원한다. 그런 오아라에게 돈을 주며 성적 욕망을 채우려는 남자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오아라에게 호감을 느끼는 노아와 함께 오아라는 낮과 밤의 다른 아슬아슬한 이중생활을 지속하게 되는데 그러던 중 <더 피플>지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게 되고, 명품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작가로 발탁되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김순옥으로 인해 그녀의 생활은 또다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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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욕망이 간절해지는 만큼 엄습해오는 불안과 두려움의 크기도 증폭된다는 것이다. (본문 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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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이렇게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스칼렛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작가 오아라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을 통해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아라가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초암 스님을 찾아가게 되고 혜광 스님과의 만남을 그려낸 부분은 그 욕망에 대해 좀더 깊이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오피스걸 스칼렛이 돈을 벌어야 작가 오아라가 살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구든 그 욕망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 모두는 욕망에 의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풍요로운 삶이든 꿈꾸던 환상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말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김중권이 작가에 대한 환상으로 오아라와의 미래를 꿈꾸는 것 역시 욕망아니겠는가. 그러나 김중권은 오아라의 욕망은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 우리 모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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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읽을 수 있을법한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 담아낸 욕망이라는 소재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욕망이 그리 나쁜 것만 아닐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희망도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테니. 이렇듯 이 소설은 욕망의 다양성을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각자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을까? 이 소설은 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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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엠마 힐리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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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놀랍다'라는 말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2013년 런던 북 페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아홉 개 출판사의 구애와 텔레비전 판권도 팔린 엠메 힐리의 데뷔작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에 대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이 말 뿐이다. 스토리, 반전, 미스터리, 탁월한 심리 묘사 등 뭐하나 빠지는 게 없다. 더군다나 스릴러 장르 속에 주인공 82세의 치매에 걸린 모드 할머니를 통해 치매가 가져온 비통한 가족의 삶을 너무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도 주목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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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적어두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엘리자베스가 실종됐으니, 진상을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엉망진창이다. (본문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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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 할머니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슈퍼에서 무엇을 사려고 했는지는 기억 못하는 것은 기본이요, 딸 헬렌과 손녀 케이시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다반사다. 이런 그녀의 기억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은 그녀가 써놓은 쪽지가 전부이다. 이렇게 모든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그녀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한 가지는 친구인 엘리자베스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왠일인지 헬렌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경찰서도 마찬가지다. 모드가 직접 엘리자베스의 집을 찾아가보지만 엘리자베스를 찾을 수 없었다. 마치 70년 전 수키 언니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깨진 접시로 인해 모드의 기억 저편의 한 조각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야기는 엘리자베스를 찾는 모드의 현재와 70년 전 가방만 남긴 채 사라진 수키 언니를 찾는 모드의 기억이 번갈아가며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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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독자는 엘리자베스는 어디로 사라졌으며, 수키는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모드의 기억을 따라 답을 찾으려 한다. 우리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과거의 이곳저곳의 시간을 오가며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모드의 기억을 쫓아 쉼없이 이동하게 된다. 왜 헬렌은, 경찰은 엘리자베스가 실종되었다는 모드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일까? 단순히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헛소리일 뿐이기 때문인가? 사라진 수키는 어떻게 된 것일까? 남편인 플랭크, 모드네 하숙하고 있는 더글러스는 수키의 실종과 관련이 없을까? 이러한 수많은 의문과 함께 소설에 대한 흡입력은 점점 강해진다. 놀라운 흡입력으로 쉴새없이 페이지가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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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는 이처럼 현재와 과거에 실종된 두 명에 대한 치매 노인 모드의 기억에 의존해 쫓아가는 스릴러물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에서 기억해야할 것은 또 하나 있다. 치매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작가가 너무 실감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 가족 중에는 치매를 앓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어느 날 그녀와 함께 차 안에 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내 친구가 실종됐어"라고 한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치매를 앓고 있던 아버지는 날 알아보지 못했고 아주 오래전 기억에 매달려 계셨다. 내가 이 책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었기에 너무도 실감나게 그려낸 치매 가족에 대한 심리 묘사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기억을 쫓아 실종자를 찾는다는 소재가 주는 신선함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거기에 스릴러는 덤이다. 혹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놀랍다'는 표현외에는 할 수 없다는 내 표현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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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엘리자베스가 사라졌다'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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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라임 청소년 문학 22
재스민 왈가 지음, 김지애 옮김 / 라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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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기보다 정서적으로 힘들고 예민한 시기인 청소년기의 자살은 보통 사전 계획 없이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작고 사소한 계기, 즉 친구와의 다툼, 부모의 꾸중, 경쟁에서의 패배 등이 자살로 이어지게 하는 사건들인데 청소년기의 자살은 정말로 죽으려고 하는 의도보다는 자신의 괴로움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헌데 여기 이러한 청소년기의 자살이 보여주는 특징과 달리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한 소녀가 있다. 클래식을 즐겨 들으며, 우중충한 쇼핑센터 지하에 있는 터커통신판매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고등학생 아이셀은 요즘 '평탄한 길'이라는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동반 자살방을 관심 있게 살펴보고 있다. 어두컴컴한 미래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아이셀은 혹시 마지막 순간에 변덕스러운 충동 때문에 육체가 정신을 배반하고 일을 그르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자살한다면 결과는 빼도 박도 못하기에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던 중 아이셀은 열여덟 살짜리 소년이 자살 파트너를 구하는 것을 본 후 인생 처음으로 행운이 찾아왔음을 예감한다. 4월 7일, 한 달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셀은 함께 자살 계획을 세우기 위해 얼음 로봇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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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전까지만 해도 주중에는 아빠와 주말에는 엄마와 지냈던 아이셀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올림픽에 출전할 뻔했던 랭스턴 최초의 소년인 티모시 잭슨을 살해하면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 후로 엄마와 재혼한 스티브 아저씨네 집으로 오게 되었다. 엄마가 말한 적은 없지만 아이셀은 행복한 가정에 끼어든 침입자가 되어 그들에게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느낀다. 엄마와 스티브 아저씨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조지아와 마이크 사이에 끼어서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얼음 로봇의 이름은 로만으로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을 하려고 한다. 엄마의 과잉 보호로 혼자서는 도저히 자살을 해낼 수 없어 파트너를 구하려했던 로만이었기에 엄마의 눈을 피해 자살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로만은 아이셀을 친구로 소개해야겠고, 아이셀은 로만의 엄마 식사 초대에도 응해야했다. 그렇게 자살 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두 사람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살할 마음에 변화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아이셀의 마음이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자살하기 전에 아빠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아이셀은 로만과 함께 교도소를 방문하기로 하는데, 이를 위해 캠핑을 핑계삼는다. 캠핑장에서 로만과의 첫 키스에서 아이셀은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로만과 달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모든 게 변했다고 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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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으며, 아빠가 티모시 잭신을 죽게 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고, 자신 안의 시커먼 구멍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며, 영원히 그 무게를 견뎌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이셀은 이제는 자신 안에 있는 슬픔과 맞서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어둠을 몰아내고 싶어진 것이다. 아이셀은 로만을 만나보고부터 모든 게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아이셀은 사람들은 따가운 눈초리와 숙덕거리임 아닌 관심과 사랑을 통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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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미래를 피하기만 했다. 그 어떤 것도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내 마음속의 미래는 늘 정지 상태였다. 어쩌면 이제 내 미래를 그려 보아야 할 시간이 온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있는 슬픔과 맞서 싸워야 할 시간이 다가왔는지도. (본문 2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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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뉴스에서 동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기에 이들은 자살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던가. 아이셀도, 로만에게도 미래는 어둡게만 느껴졌고 힘겨웠을 것이다. 자살을 계획하면서도 동생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는 아이셀을 보면서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생각을 멈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표현하지 못했던 아이셀과 아이셀의 엄마를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이때문이리라. 이렇게 나의 작은 관심과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동반 자살을 할 파트너를 구하고, 함께 자살 계획을 세운다는 특별한 소재를 통해 저자는 우리는 저마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소 무겁고 어두울 수 있을 소재에서 자살 파트너로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되는 스토리는 소설의 특별함을 더하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사랑임을 더욱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청소년기에 가족의 사랑은 더욱더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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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볼
브래들리 소머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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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시볼」은 2014년 런던 도서전에서 출간도 되기 전에 크게 화제를 모은 작품. 어항에서 탈출한 금붕어의 도전적이고 위험천만한 추락여행을 큰 기둥으로, 아파트 '세빌 온 록시'에서 벌어지는 인간 세상의 주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의 불교적인 세계관이 이상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슬프면서도 따뜻하게 그려진 작품 (책 표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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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캐나다 유명 문학상인 2016 조지 버그넷 어워드 수상작이자 알베르타 리더스 초이스 어워드 최종 후보로 선정된 작품으로 아파트 '세빌 온 록시'의 27층에 사는 금붕어 이언이 어항에서 탈출한 금붕어의 도전적이고 위험천만한 추락을 큰 줄기로 하여,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 등 세빌 온 록시에서 벌어지는 인간 세상의 주요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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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인생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상자가 하나 있다. (본문 9p)'로 시작하고 있는데 동화적인 느낌을 주는 표지 삽화와 제목과 달리 철학적 의미가 가미되어 의외의 느낌을 준다. 소설 내용중에는 금붕어의 철학에 대해 쓰여져 있는데 심도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그저 유머로 가볍게 넘기지 않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된 상자는 바로 '세빌 온 록시'라는 이름을 가진 아파트다. 여기 27층 발코니에 놓은 어항 속에는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즐겨온 이언이라는 수컷 금붕어가 위험천만한 추락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수중 감옥에서 탈출할 기회가 생기는 54장에 가서야 이언은 발코니에서 떨어지는데 저자가 이언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언은 인간들을 한데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며, 물고기의 지적 능력으로는 시간과 공간이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각은 줄이고 행동하라'라는 금붕어의 철학에 따라 자유를 갈망하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 이언이 이내 바닥을 향해 곤두박칠지기 시작하면서 세빌 온 록시 앞 인도와 맞닥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4초였지만 이 순간에 상자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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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사랑에 빠지는 케이티는 지금 만나고 있는 코너 래들리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세빌 온 록시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아파트에서는 바람둥이 코너는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기술이 전혀 없는데도 인내심이 강한 아파트 관리인 히메네스는 엘리베이터를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막 진통을 시작한 임산부 피튜니어 딜라일라, 여장을 하는 남자 가스, 은둔형 외톨이 클레어, 홈스쿨링을 하는 허먼 등이 각자의 칸에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자유를 갈망하며 탈출한 이언이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에 아파트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타인과 교류하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살아갈 수 있었던 이들의 삶이 각자 인물들이 겪는 해프팅으로 인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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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었던 클레어는 피튜니아 딜라일라의 아이를 받아주기 위해 노력했고,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의식을 잃었던 허먼 역시 피튜니아 딜라일라의 아기가 나오는 걸 도와주며 탄생을 목격했으며, 가스의 집 싱크대를 고치러 온 히메네스와 드레스를 입은 가스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혼자였던 이들이 함께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혼자 살지 않으며 우리가 서로의 삶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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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은 희미해지는 빛 속에서 그 그림자에 묶인 채 서서, 그 누구도 자신만의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인생을 함께 살아간다. 건물은 말 없는 파수꾼처럼 이 사실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지켜본다. (본문 3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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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는 각자의 상자와 각자의 칸에서 고립되어 혼자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충분히 혼자 살아갈 수 있기에 '함께'사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에게 관여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오롯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언의 추락이라는 큰 줄기에서 발생하는 상자 속 사람들의 사랑과 이별, 죽음과 탄생 등 인생의 모든 이야기가 펼쳐진 이 소설에서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물론 혼자였던 이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저자는 이 책의 인물들을 통해 그 용기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권해보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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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이 어항에서 물병까지 떨어지는 데는 4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마법을 목격했고, 사그라져가는 사랑의 고통을 느꼈다. 4초가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욕정의 짜릿한 전율과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자각과 자기 회의, 세상에 첫발을 디딘 새로운 생명, 그리고 고장 난 엘리베이터가 고쳐지는 희열이 있었다. 화재의 위험과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키시 요리 비법이 있었다. 이외에도 아주 많은 것이 있었다. 한 사람은 평생의 시간을 살지만, 세빌 온 록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는 4초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몇몇 순간들을 목격했고, 이 도시에, 이 건물에 더 많은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본문 373,3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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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피시볼' 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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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애틋하게
정유희 지음, 권신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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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가 인기리에 방영중인 듯 하다.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지는 않지만 종종 인터넷 뉴스를 통해 접하다보면 이 드라마가 무척 궁금해진다. 김우빈, 수지라는 선남선녀의 주인공을 내세웠으니 그것만으로도 많은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드라마는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던 중 소담출판사의 <<함부로 애틋하게>>의 출간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나로써는 이 책을 읽을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사실 책 제목만 본다면 독자들의 상당수는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 아닐까, 라는 착각을 할 듯 싶다. 하지만 이 책은 글과 그림을 담은 감성 에세이로 2012년 출간되었던 초판에 실린 글과 그림을 엄선하여 새롭게 출간된 책이다. 드라마를 기획한 이경희 작가는 제목을 고민하던 중 '함부로 애틋하게' 시를 발견하고 드라마 제목으로 차용했다고 한다. 원작 소설을 읽고 싶었던 독자들이라면 처음엔 실망할 수도 있겠으나, 일단 읽기 시작한다면 드라마보다 더 애틋한 사랑과 호기심, 설레임 등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음에 감사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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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애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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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비싸도 좋으니 거짓

이 아니길 바란다

나는 네가 싸구려라도 좋으니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값비싼 거짓이거나 휘황찬란한 가짜라면 나는 네가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기꺼이 환하게 속아 넘어가주마

함부로 애틋한 듯 속아 넘어가주마 (본문 26p)=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처 부치지 못한 수줍고도 당돌한 연애편지를 훔쳐보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정유희가 그려내는 알싸한 글을 접하는 순간, 사랑의 정체를 알고 싶어 안달하는 소녀와, 사랑의 실체를 가슴 시리도록 체득한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 함께 어른거린다. 더불어 권신아의 아름답고 판타스틱한 삽화들은 우리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같은 사랑의 모습을 재현한다. 작가 임경선 (표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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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고 720일 전즘으로 가까이 오지 말아요

저번처럼 겨우 냉동시킨 좌심실이 또 데일라 (본문 30_벌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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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24개월 할부 말고 일시불로 내게 와줘 (본문 34p_Turntable spi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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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라는 기록을 완전하게 삭제할 수 있는 확률은 네가 사막에서 고래를 잡을 수 있는 확률만큼 미미해 (본문 60p_ It's not 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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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이 풍부했던 사춘기 시절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와 같은 시집에 빠져 있었을 때가 있었다. <<함부로 애틋하게>>를 읽다가 이 시집이 생각난 건 책을 읽으면서 말랑말랑한 감성이 생겨난 탓이리라. 싯구 한 구절에 이렇게 설레일 수 있는걸까? 사춘기 그 시절, 수업 시간에 교과서 밑에 펼쳐놓은 원태연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담아냈던 수많은 감수성들이 이렇게 되살아날 수도 있구나. 그 옆에 그려놓은 그림들이 그 감수성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듯 싶다. 사랑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글이 또 있을까? 그 글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만큼 사랑을 설레이고 애틋하게 그려낼 수 있는 그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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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 안 해도, 서로 이거 하난 확실히 알고 있지

서로의 존재를 서로만큼 완벽하게 장악하는 중력은 태양 뒤에서도 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본문 106p_완벽한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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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글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함부로 애틋한 사랑을 너무도 아름답게, 설레임으로, 몽환적인 느낌으로 잘 표현해내고 있다. 드라마에서 담아내는 감수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감정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아직은 소녀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참 설레여지는 책이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애틋해질 수 있는, 어린시절 순수한 사랑을 꿈꾸웠던 그리운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함부로 애틋해지는 책이다. 사랑의 감정이 궁금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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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함부로 애틋하게'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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