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파이어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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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크로스파이어1>을 읽으면서, 나는 준코를 보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잣대로 삼았다. 법이 집행하지 못하는 일들을 자신의 능력 ’염화방확능력’을 사용하여,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낙인되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며 스스로 정의를 실현시키고 있다는 준코를 과연 선인가? 악인가? 라는 저울질을 하며 1권을 재미있게 읽어 내려갔다.

2편에서는 준코와 형사들간의 대립이 있을거라는 예상을 나름대로 하면서, 왠지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전개 될거라 생각했지만, 내 예상과는 전혀 반대되는 내용으로 진행되어 갔다.
독자의 예상대로 진행되는 이야기라....? 저자 미야베 미유키는 그런 독자들의 뻔한(?) 예상을 미리 감지한듯, 오히려 박진감보다는 조금 잔잔한(?) 내용으로 전개시켰다.
그 잔잔함 속에서 먼가 일이 터질듯한 스릴이 있을 듯 말듯 진행되었다가 결국은 그 스릴이 폭파되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아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1편의 박진감과 액션과 스릴이 이어질거라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편에서 준코가 악을 처단하는 장면이나 범인들의 행각을 파헤치는 장면을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면, 2편에서는 초능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을 담았으며, 스스로 ’수호자’라 칭하며, 법으로 처단되지 못했던 죄인들을 집행하는 집단인 ’가디언’의 존재, 그들의 존재를 서서히(?) 알아가는 경찰들이 준코를 찾아가는 부분으로 전개되어 간다.

아무리 느려도 행인을 들이받지 않고 나아가는 군대는 꼭 필요하다는 치카코 형사의 말처럼 그들은 정말 아주 느리게 사건을 해결해 나갔기 때문에 스릴이나 박진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수사진행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건의 전후를 알아가는 , 혹은 내용을 정리해 나가는 부분으로 이용되고는 있다. 
그것은 오히려 빠른 전개가 아닌, 조금은 지루하게 진행되는 요소로 작용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마음을 닫아버린 준코에게 가디언의 한 일원인 고이치는 준코의 마음을 열어주는 또 다른 초능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을 하게 되고, 1편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염화방화능력을 가진 가오리와 그의 부모를 통해서 가디언의 실체가 밝혀진다.
가오리는 준코의 어린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가오리가 준코가 될 것인가? 아니면, 능력을 감춘 채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준코가 가지고 있던 내면의 갈등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결말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스릴과 액션이 아닌 잔잔함으로 일관되어진 내용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1편에 비해 많은 아쉬움을 가졌다.
그러나 그 결말은 선인가? 악인가? 에 대한 의문점에 답을 해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결말이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는 사건들, 혹은 죄에 비해 너무 작은 형을 구형받은 죄인들에 대한 진정한 죄값은 누가 처벌할 것인가?
법은 존재하나, 법이 모든 아픔과 슬픔을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준코의 행동에 선을 부여해야하나?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살인이며 죄이다.
그럼 준코는 살인지가 되는 것이며 분명 죄인이다.

저자는 두가지의 견해를 통해서 선 혹은 악을 부여할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준코의 옛 애인 다다가 이런 독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했던 부분에 좀더 갈등을 극대화 시켰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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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파이어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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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일본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다. 꽤 유명한 저자인 듯 싶은데, 일본 소설을 많이 접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이 저자는 낯설기만 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처음 접해본다. 읽으면서 책속에 푹 빠져서 흥미롭게 읽어내려간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흥미로운 주제 속에 담겨진 ’선’과 ’악’ 그리고 ’죄’와 ’벌’ 에 이야기가 밑바닥에 깔려져있어 더 이끌렸던 듯 싶다.

요즘 뉴스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많이 난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듯한 사람들의 기사, 한 사람을 불행으로 이끌어 놓는 파렴치한 인간들(?)에 대한 기사를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더욱이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하는 듯한 어린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읽노라면, 더욱 무서운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죄’’악’이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는 아이들은,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크로스파이어>에는 이러한 무서운 세상이 담겨져 있다. 무섭지만 흥미로운 주제, 그래서 자꾸 끌리게 되는 주제인 거 같다.
미성년자들의 죄는 늘 죄보다는 가볍게 (?) 벌을 받는 경우를 본다. 그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죄가 아무리 무겁다해도 말이다.
허나, 피해자에게는 미성년자가 아니라 ’죄인’인 뿐이며, 피해자에게는 이미 큰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그들의 상처는 누가 치유해줄 것인가 말이다.
’아오키 준코’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게 되었다.
’염력 방화 능력’을 가진 준코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에게 자신의 능력을 조절하는 능력을 배워왔고, 스스로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나, 몇년 전 여고생의 연쇄살인 사건이 미성년자이고 물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범인들의 판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준코는 스스로 그들을 ’처형’ 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사건 속에서 준코는 법을 대신한 새로운 집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준코를 뒤쫓는 형사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지고 있으며,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준코의 집행을 지켜보고 있는 ’가디언’들은 준코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방화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형사 치카코는 마키하라 형사의 어린 시절 기억을 전해듣게 되고 그들은 ’염력 방화 능력’에 대해 서서히 접근하게 된다.
형사 마키하라는 어린 시절, 동생이 불타서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미안합니다.태워버려서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했던 여자 아이를 떠올린다.
반면, 준코는 어린시절 불태웠던 아이, 옆에서 울고 있던 소년의 꿈을 꾸게 된다. 

준코는 법이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살인을 하고 있다.
죄인 뿐만 아니라, 죄인을 죽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 조차도...
동생이 죽은 건 슬프지만, 준코가 살인지가 되는 건 싫다던 다다 가즈키와의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의무라 여기는 준코의 모습은 이미 죄인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범인을 처형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는 준코는 과연 ’선’의 편인가?
그들이 범인이기에 앞서, 사람을 죽이는 준코는 그럼 ’악’의 편이라고 할 수 있는건가?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해지지 않는다.
죽어마땅하다고 생각되는 그들이 준코의 능력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준코에게 ’정의’의 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어떤 합리화 속에서도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책 속에는 또다른 염력을 가진 ’가오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등장한다. 자신의 화를 염력으로 표출하는 아이.
어쩌면 그 아이는 준코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범인에 대한 분노, 범인을 잡아내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염력으로 표출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염화 능력이 스스로 조절되어 가지 못하고 있는 증거는 아닐지 싶다.
몇년 전 끝내 찾아내지 못했던 마지막 범인 한명을 죽이고 도망가는 준코의 마지막 모습은 스스로도 정당화 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는 아닐런지...


읽는내내 흥미로웠다. 준코의 편에 서고 싶었다.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그들이 미성년자라고 해도...) 죄인을 법 대신 처형했던 준코 편에 서고 싶었으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듯한 준코의 모습과 ’죄인’과 ’죄인 곁에 있던 인물’ 들조차 처형하는 준코의 모습은 그녀를 점점 죄인으로 몰아가게 한다.

준코와 형사의 행보가 펼쳐질 것이 예상되는 2편이 기대된다. 저자는 과연 준코를 ’선’ 혹은 ’악’ 어느 쪽으로 결말을 지어내었을까?
준코를 바짝 뒤쫓는 치카코는 과연 준코에게 어떤 결말을 지어줄 것인가?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의 한 사람인 나는 준코에게 어떤 결말을 줄 것인가? 

2편 준코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사진출처: '크로스파이어1' 책표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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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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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 [올드보이]의 반전은 실로 놀라왔다. 주인공 최민식과 딸 강혜정은 최면에 의한 기억의 조작이라는 놀라운 결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악의 추억>에서 그 놀라운 반전을 다시금 보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 그리고 사랑과 증오 등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표출할 것인가에 대해 내면에서는 전쟁이 치뤄지고 있다. 
그러나, 내게 상처와 아픔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악과 증오와 위선으로 표출 될 것이다. 선보다는 악은 늘 강하게 존재하고 있기때문에...

’웃는 시체’ 
발견된 시체들은 웃는 모습이였다. 그들에게 죽음이 살아있는 것보다 더 낫다는 의미였을까? 그것은 죽은 자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살인자의 의도였을까?
처음 발견된 시체는 공개된 케이블카에서 발견되었고, 죽은 여인은 웃고 있었다.

22년전 바위섬들을 연결하여 거대한 토목사업이 시작되었고, 안개가 자욱한 뉴아일랜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안개...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 그리고 웃는 시체.
살인자가 중심축이 되어 거대한 연쇄살인고리가 이어졌고, 그 용의선장에 7년전 크리스 매코이의 총에 맞아 죽은 데니스 코헨이 올라왔다.
크리스 매코이...그는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유능한 형사였으나, 7년 전 데니스 코헨을 총으로 쏜 후, 죽어가는 코헨의 총에 머리를 맞아 3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지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후에는 피나는 재활치료를 거쳐 경찰서로 돌아왔지만, 끊어지고 지워진 기억은 그에게 적지않은 상처를 주었다. 기억되는 부분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고 있었다.

정직중이던 크로스 매코이는 수사팀과의 동행과 심리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사건에 투입되었고, 범죄심리와 상담학을 공부한 라일라 스펜서를 만나게 된다.

"이 도시는 두 얼굴을 지녔어요.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어둠 속에서 죄를 짓고 사람을 죽이지만 안개가 사라지면 해협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보이죠. 눈부신 미녀와 흉악한 야수. 어떤 쪽이 이 도시의 진짜 모습일까요?" (본문 114p)

안개, 왼손잡이, 퍼즐, 마약, 그리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면성이 범인을 쫓아가는 핵심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은 상처받은 기억을 지녔으니까. 상처는 악의가 되지. 상처가 클수록 악의도 커져. 학대받은 아이들, 폭행당한 여자들, 버림받은 청소년들. 그들은 희생자지만 더러운 악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야. 그들은 자신이 당한 고통과 상처를 통해 악의를 키워나가지. 우리가 쫓는 살인자들이 그런 놈들이야.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악의와 증오 그리고 폭력의 유전자를 심어둔 자들." (본문 167p)

이것이 악에 대한 추억인 것이다. 악을 행하고 있는 그들의 오랜 추억 속에는 상처받은 아픔이 있었고, 그 아픔은 악으로 표출된다. 그들은 ’악’ 이기도 하지만, ’악’에 의한 희생물이기도 하다. 
상처에 의한 분노와 증오를 키우는 것, 바로 자신의 고통을 남을 향해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악 속에는 누구나 상처받은 추억이 존재한다. 살인에 의한 피해자에게도, 범인을 쫓고 있는 매코이에게도, 그리고 심리 상담을 하고 있는 라일라에게 조차도 상처가 있다. 그 표출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가 사건의 실마리가 된다. 

어둡고 칙칙한 침니랜드와 화려한 뉴아일랜드 두 도시의 대조는 마치 인간의 양면성을 표현한 배경처럼 여겨진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만들어 내는 <악의 추억>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스릴러 물이다.
선보다 악이 앞서는, 진실보다는 거짓을 만들어내는, 사랑보다는 증오를 더 키워내는 인간의 심리는 ’나’를 위주로 움직여진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해요.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모르지요." (본문 243p)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위한 위로가 악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범인의 죽음 그러나, 다시 표출되는 범인의 모습.
표면적인 범인이 과연 범인인가? 그가 범인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역시 바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추억에 의한 ’악’이였던 것이라 생각해 본다. 
좀 모호하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인간의 심리에 대해 다루어지는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좀 난해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사건을 이끌어가는 내용은 강한 흡입력을 통해서 나를 빨아들였고,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강한 캐릭터는 충분한 재미를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일까? 라는 물음을 꺼내게 한다.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것들만이 진실을 감춘 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나 조차도 모르는 내가 문득 두렵다고 생각드는 것은 정녕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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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약이 엄마
백희나 글.그림 / Storybowl(스토리보울) / 2011년 12월
구판절판


신간이 출간되면 관심을 갖게 되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바로 <<삐약이 엄마>>의 작가 백희나이다. 몇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구름빵>으로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뒤이어 출간된 <달 샤베트><어제 저녁> 역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삐약이 엄마>>를 읽다보니, 스테디셀러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동화책 <마당을 나온 암탉>이 떠오른다. 오리를 키우는 암탉 잎싹의 가슴 뭉클한 모성애와 가족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이 동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영화화되면서 더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삐약이 엄마>>는 유아/어린이를 대상으로 그 눈높이에 맞추어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제 입양은 우리에게 꽤 가까이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현 우리사회는 다양한 구성원을 가진 가족의 형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다문화가족을 비롯해 이혼의 급증으로 인해 편부모가족의 형태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인식의 수준이 높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우리 뿌리 깊숙이 남아있는 그들을 향한 곱지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바로보곤 한다. 우리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혈연으로 이어져있고, 아빠 엄마 그리고 자녀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극히 정상적인 가족 구성원을 갖추고 있다면 '가족'이라고 붙힐 수 있다는 착각. 그러나 가족은 이런 정상적인 구성원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더이상 가족이라 할 수 없다. 혈연이 아닐지라도, 인종이 다른 다문화 가족이라 하더라도, 편부모 가족이라 하더라도 가족은 '사랑'으로 연결되어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삐약이 엄마>>는 바로 '가족'이 가지고 있는 진짜 이름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었다.

'니양이'는 뚱뚱하고 먹을 것을 욕심내는 성격에, 작고 약한 동물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는 악명 높은 고양이다. 특히 갓 낳은 따스한 달걀은 니양이가 좋아하는 간식이다. 달걀로 저글링을 하고, 한 쪽눈을 게슴치레 뜬 니양이의 포스는 실로 대단하다.

어느 봄날 아침, 니양이는 암탈들은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없는 닭장에서 탐스럽고 예쁜 달걀을 발견하게 된다.
윽~ 예쁜 달걀을 한 입에 날름 꿀꺽~하다니...볼이 미여질 듯한 니양이의 얼굴을 보라. 정말 심술궂고 못됐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가뜩이나 뚱뚱한 니양이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도대체 니양이의 뱃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 배가 아픈 니양이는 똥이 마려워 화장실로 달려갔지만, 니양이의 뱃속에서 나온 것은 똥이 아니라, 작고 노랗고 귀여운 병아리였다.

"내가 병아리를 낳았어!!!"

니양이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갓 태어난 병아리는 니양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니양이는 가슴이 뭉클해졌고, 병아리에게 '삐약이'라 부르며 니양이를 보호했다. 그러자 악명 높은 '니양이'라는 이름 대신 '삐약이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심술궂은 고양이와 연약하디 연약한 병아리가 가족을 이룬 모습이 너무도 이상하게 보일게다. 더군다나 달걀을 좋아하던 고양이가 아닌가! 그러나 이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었고, 당당하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가족'이란,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해도 '사랑'이라는 끈으로 충분히 이름붙혀질 수 있다. 악명 높은 니양이를 '삐약이 엄마'로 불러주는 닭들을 보면서, 우리도 그들과 같은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성해본다.
짧은 글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의미는 너무도 거대했다.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선입견과 편견은 본의 아니게 아이들에게 전달되어지고 하는데, <<삐약이 엄마>>와 같은 그림책은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 커진다. 화려한 색감이 없고, 풍성한 그림도 없지만 삽화가 가지고 있는 효과도 굉장하다.

흑백으로 그려진 니양이의 표정은 코믹하면서도 세심하게 그 특징이 잘 드러나있는데, 삽화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어진다. 그동안 저자 백희나는 좋은 그림책을 통해서 어린이와 만나왔는데, 개인적으로 이 그림책이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이 되었다.

(사진출처: '삐약이 엄마'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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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은 어디 있을까? 그림책은 내 친구 31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논장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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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로 표현한 표지 삽화가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표지를 넘기자, 표지 뒷면에는 표지의 바느질을 한 천의 뒷면이 담겨져 있다. 바느질을 한 천의 앞뒤 모습을 책 표지를 이용해 표현하고 있는게다.
말끔하고 예쁘게 보이는 표지 앞면과 달리, 표지 뒷면은 매듭을 지은 실로 지저분해보인다.
바느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삽화일 것이다. 번지르르한 앞과 달리 바느질의 마무리가 된 안은 늘 지저분하고 예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학교 가는 길><마음의 집>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세 작품 모두 이처럼 독특한 삽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은 독특함 속에서 공감을 형성하고 있어 마음에 와 닿는다.

<마음의 집>에서 저자는 '마음'을 주제로 상당히 심오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우리 딸은 어디 있을까?>>에서도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에 대한 난해한 주제로 이야기한다. 아주 짧은 글에, 반복적인 내용이 담긴 이야기이기에 읽기에 부담없는 간결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겨진 주제는 상당히 어렵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쉽게 이해하고 읽을수도 있지만, 마지막 삽화에서 그리 쉽게 단정지을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짧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폴란드 전역에 있는, 서유럽에서 온 헌 옷을 파는 가게들에서 사 모은 천을 이용해서 바느질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의 바느질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손으로 했으니까요.
엉성한 부분도 실이 풀어진 곳도 있고, 바느질 뒷면도 그대로 보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 뒷면에는 삐뚤빼뚤한 실 자국이나 튀어나온 매듭 같은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본성은 완벽하지 않고 어떤 일이나 마무리는 힘든 법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는 남들에게 보여 주는 앞면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 中)

이 책의 화자는 딸을 소개하고 있다. 동물의 특성에 빗대어 딸을 소개한 글을 읽으며 발랄한 한 소녀를 떠올려본다.
새처럼 즐겁다가 물개처럼 슬프고,
토끼처럼 얌전하다가 악어처럼 거칠기도 하며,
미어캣처럼 조심스럽다가 나무늘보처럼 태평스럽기도 하다.

물고기처럼 조용하다가 수탉처럼 시끄럽기도 하고,
뱀처럼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아기 새처럼 연약하기도 하다.
때로는 사자같기도 하고 때로는 아기 양같기도 하고,
돌고래처럼 친절하다가 늑대처럼 사납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변덕쟁이처럼 이랬다 저랬다 정말 하루에도 몇번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있다. 그런데 비단 아이들만 이러는 것은 결코 아닐게다. 아이 입장에서 바라보는 엄마의 내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를게 없다. 어떤 날은 아이의 실수를 보고도 쿨하게 넘어가지만, 어떤 날은 작은 실수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아이를 다그치고 나무란다.
인간이란 이렇게 완벽하지 않으며,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동전의 앞뒷면처럼, 바느질의 안감과 겉감처럼 양면성을 보인다. 어린시절부터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고 교육을 받고, 그렇게 살기위해 다들 노력하고 있지만 인간이란 그렇게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나 단점을 지니게 마련인가보다.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이 가진 양면성을 바느질을 이용해 천의 앞뒷면을 보여주는 삽화와 서로 상반되는 동물들을 통해서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저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이해 쉽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그저 인간의 본성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잘 표현한 작품이구나....라고 단순히 생각하려 할 찰나, 마지막 페이지는 또다른 생각으로 넘어간다.

우리 딸은

나에게 이 모든 것이에요. (본문 中)

휠체어에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
순간 '장애'를 다른 시각으로 보아왔던 나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화자의 딸도, 내 아이들처럼 이렇게 똑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진 우리와 다를바 없다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있었던 게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은 '평범한 우리네와 다르다'라는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누구나 단점을 지니게 마련인 우리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가진 단점과 소녀가 가진 단점이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화자에게 소녀는 모든 것이며, 내 아이들도 내게는 모든 것이다.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던 그건 상관없다. 내 아이기에 내 모든 것이 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들인데, 여태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다.

<<우리 딸은 어디 있을까?>>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좀 난해한 작품이긴 하지만, 아이들 관점에서 표현된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걸로도 많은 것을 얻게 되는 작품이며, 어른들에게는 그동안 가졌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서, 겉으로 보여지는 나와 감춰진 나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며, 장애가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처럼 특별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흔히 볼 수 있는 바느질한 천의 앞뒤에서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삽화는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글이지만, 내게는 너무도 큰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사진출처: '우리 딸은 어디 있을까?'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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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wjdal 2022-09-1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목화밭 회원님들 감사해요,
우리딸 보고싶다.추석 왕만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