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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 슈퍼 히어로를 읽는 미국의 시선
마크 웨이드 외 지음, 하윤숙 옮김 / 잠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저는 개인적으로 만화를 아주 좋아합니다. 남아수독오거서라고 하지만 저는 만화수독오거서 쯤 될 것 같군요. 자랑스럽다는 것은 아니고요(그렇다고 부끄럽다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렇게 읽은 만화의 대부분은 일본만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워낙 우리나라 코믹스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일본만화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제가 미국의 코믹스를 접하게 된 것은 소위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가 인기를 끌게 된 이후가 아니었나 합니다. 물론 수입 1세대라 할 수퍼맨, 배트맨도 열심히 보았지만 코믹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기 때문에, 2세대인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의 영화가 개봉된 이후부터 코믹스를 구해서 보기 시작했지요. 아무래도 일본 만화의 수혜를 받고 자라서인지 확실히 미국의 코믹스는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더군요. 일단 그림체나 채색, 퀄러티는 차치하더라도 만화의 주제 범위가 매우 다릅니다. 일본 코믹스는 매우 넓은 범주의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일괄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미국 코믹스는 철저히 히어로물에 집중되어 있더군요. 간혹 비주얼노블 류의 변종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히어로물이라는 범주에 포섭된다고 봐도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코믹스 히어로들은 대부분 매우 적극적이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며 낙천적인 동시에 파괴적입니다. 매우 미국적이지요. 흔히 DC와 마블사를 양대산맥으로 하여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제가 보기에 어느 쪽이든 미국인의 성향을 동전의 양면처럼 비추어낼 뿐 지향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저의 이런 인식은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접할 수 있는 미국 코믹스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적극적으로 원서를 구해다가 읽어갈 정도의 마니아는 아니기 때문에 유행하는 소수의 코믹스만 접해본 것이 사실이니까요. 일본 만화에 질리기도 했던지라 미국 코믹스에 보다 깊이 빠져보고 싶은데 그럴만한 계기가 부족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흥미를 유발할만한 동인이 없었달까요..
왜 이리 장황하게 개인적 이야기를 하느냐면 제가 이 책에 기대했던 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 이 제목을 접하는 순간 저는 이 책이 다양한 슈퍼 히어로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에 담긴 미국적 정서에 대해 흥미있게 성찰하는 책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자는 어느 정도 긍정되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실망해버렸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좋은 평가를 못하겠다는 이야기지요^^; 이 책에서 다루는 히어로들은 슈퍼맨, 배트맨, 왓치맨, 엑스맨, 판타스틱 포, 헐크 등입니다. 눈치 채셨지만 모두 영화화된 히어로들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히어로들은 코믹스 속의 히어로가 아니라 영화 속의 히어로였던 것이지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하실 수 있겠지만 코믹스를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 속의 히어로상이 코믹스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제 입장에서는 이 책의 분석에 대해 공감할 수 없는 면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제가 알지 못하는 히어로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었다면 히어로물에 낯선 분들께는 오히려 실망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이 책의 서술이 히어로물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의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적 정서에 대해서 충분히 드러내주는가 하면 이것도 다소 미흡한 면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히어로를 소재로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혹은 신학을 풀어내고 있는데요, 물론 이들이 서양 철학의 원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위에 충분히 미국적인 색깔을 칠해주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히어로라는 소재에 충분히 버무려내지 못하고 철학개론 시간에 배웠을 입문적 내용들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래서야 굳이 히어로라는 소재를 사용한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특수한-혹은 사람들이 특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소재를 사용한다면 주제의식도 다소간 특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조금 난해하더라도 특화된 내용과 깊이를 담아내지 않으면 안될텐데 대중에의 접근성을 중시해서인지 이 책은 밋밋한 접근법을 택하는 선에서 그쳐버린 것이지요. 비슷한 경향을 가졌다고 할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라는 책의 전략과 비교해보았을 때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이상은 제 '주관적'인 견해고요,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책은 히어로물에 익숙치 않은 사람에게 히어로물을 보는 미국인의 시각을 무난하게 소개해내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히어로물을 통해 미국을 읽어내는 책이라기 보다는 미국인의 입장으로 히어로물을 읽어내는 책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인식론보다는 윤리론을 많이 다루어내고 있는데요,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모아 묶어냈기 때문에 재미나 논지전개의 수준에 있어서 다소 기복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반부의 글보다는 후반부의 글들이 좀 더 흥미로웠는데요, 몇몇은 미국적 위트가 듬뿍 담겨 있어서 유쾌하게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보기에 괜찮은 책이지요.
첨언하자면 불황이 계속됨에도 점점 더 다양한 책을 출간하는 출판계의 발전이 엿보여 반가웠고요, 다소 마이너하게 보이는 이와 같은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공들여 책을 내준 출판사측의 노력이 기뻤습니다. 신생 출판사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발간 예정작들을 보니 다소간 도전적인 작품들로 보이더군요. 점점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차기작들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