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 1 히스토리아 문디 6
윌리엄 맥닐 지음, 김우영 옮김 / 이산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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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 예쁘다
원래는 한 권이었을 것 같은데, 분량이 좀 많아지긴 하겠지만 꼭 두 권으로 분책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1970년대에 초판이 나왔다고 하니, 벌써 40년이 된 책이다.
역사라는 게 원래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니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의의가 퇴색되는 건 아니겠지만, 하여튼 이 책 역시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매우 현대적인 시각을 자랑한다.
특히 지도를 손으로 그려낸 앞 표지는 정말 마음에 든다.
표지 디자인을 한국에서 새로 했는지 아니면 원래 미국판에도 이렇게 되어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그가 쓴 <전염병의 역사>도 퍽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 역시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인류의 첫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집트와 인더스 강 유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술한 부분이 무척 유용했다.
<히스토리카 세계사> 를 읽을 때만 해도 솔직히 메소포타미아 지역 역사는 감이 잘 안 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위대한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 제국의 조형물은 부조로 새겨진 벽을 아예 통째로 뜯어온 대영박물관에서 처음 접했다.
그 때만 해도 너무나 웅장하고 이국적이라 대체 이건 뭐야 , 정말 낯설다, 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워낙 사전 지식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 다시 본다면 감회가 새로울텐데...
그 외에 서양의 고대나 중세,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비교적 익숙해서 그런지 쉽게 읽혀졌다.

일본의 경우는 고대 발전상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따로 한 챕터를 할애하여 설명했다.
확실히 일본은 극동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세계인에게 확실히 하나의 독립된 문명을 지닌 독자적인 나라로 깊이 각인된 모양이다.
일본인을 우습게 보는 건 한국인 뿐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한반도는 물론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기는 했으나 중국의 거대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속국으로 간주됐다는 문장에서, 과거 한국의 역사적 위치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저자가 유난히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부분이었다.
일본처럼 서양의 위협에 효율적으로 그리고 혁신적으로 대응한 나라는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 를 읽으면서 느낀 바지만, 혁명을 일으킨 메이지 유신 세력들, 그러니까 일본 지도층의 지도력과 미래를 보는 혜안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여러가지 상황적인 이점도 분명히 있었겠으나, 하여튼 구한말 조선의 구태의연한 유림이나 고종과 민비를 위시한 집권층의 무능함과 극명하게 대비되지 않을 수 없다.

 

유목민의 침략을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점이 특이했다.
유목민이라면 그저 몽골이나 바이킹처럼 농경사회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국지적인 사건 정도로 생각했는데, 단순히 한 지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문화를 이룩하고 땅에 정착해서 사는 농경민과, 스텝 지역을 방랑하면서 사는 공격적인 전사 집단인 유목민의 대립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자주 언급되는 스텝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시베리아나 몽골 지역 부근은 확실한데 어디까지를 포함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원전 1700년 무렵, 전차가 처음으로 도입된 후 유목민들의 공격이 시작됐고 메소포타미아는 분열된다.
재밌는 것은, 전설상의 중국 첫 왕조인 하나라를 멸망시킨 은나라가 바로 이 전차 부족이라고 추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은 역시 외부에서 유입된 이민족일 수 있다는 얘기다.
독자적이라고 생각했던 이집트나 인더스 문명, 심지어 중국의 황허 문명까지도 수메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유목민에 의해 도입된 전차나 기마병 같은 혁신적인 도구들이 전 세계의 전쟁 판도를 바꾸었다는 점이 신기하다.
결국 고대 세계도 완전히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오래 전부터 (어쩌면 인류의 발달 초기부터) 꾸준히 교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완전히 고립된 사회는 대항해가 시작될때까지도 구석기 시대의 수렵 채집민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양이 동양을 앞지른 이유도 (특히 위대한 중국의 몰락은 더더군다나!) 끊임없이 교역을 하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여 있는 물은 썩는다는 말이 세계사에도 딱 들어맞는다.

 

보통 세계사를 한 권으로 개관하려면 지나치게 생략되고 중요한 사건 위주로만 가다 보니 서사력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남경태의 <종횡무진 세계사> 가 재미있으면서도 생략이 너무 많아 아쉬웠다) 이 책은 응집력을 유지하면서 밀도있게 세계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아마 그런 힘이 40년의 시간을 버티게 했을 것이다.
특히 뒷부분의 참고 도서 소개는 비록 영어책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더 알고 싶은 독자에게 길잡이가 된다고 해야 하나?
이런 걸 보면 한국인 저자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번역서는 역시 한계가 있다.
역량있는 인문학 저서들이 많이 발간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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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2011-12-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은 초판이 1967년에 출간되었지만 계속 개정을 해왔고, 한국어판은 1999년판을 저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표지는 한국에서 새로 그리고 디자인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Art Travel 1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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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씨  책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손이 잘 안 가서 이제서야 읽게 됐다.
뭐랄까, 처음에는 너무 신선하고 흥미진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약발이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런 실망감이 싫어 최근에 나오는 책들은 선뜻 손이 안 갔다.
비단 소설가 같은 작가 뿐 아니라, 이런 필자들도 기력이 소진됐다거나, 재탕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좋아하는 작가에게 실망하는 게 싫어서 일부러 기피할 때가 있다.
그래도 러시아 미술은 워낙 생소한 분야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결국은 읽게 됐다.
서문을 보면, 푸슈킨 미술관이나 에르미타슈 미술관의 작품은 주로 서유럽 그림들이라 가능하면 소개를 자제하고, 러시아 미술만을 전시하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나 러시아 미술관 쪽을 주로 소개한다고 했다.
사실 내가 관심있는 분야는 러시아 화가들이 그린 그림보다는, 에르미타슈에 소장된 세계적인 걸작을 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뜻 흥미가 안 당겨서 집중도가 떨어졌다.
특히 이콘화 같은 경우는, 러시아인의 신앙심과 민족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런 중세 스타일의 평면적인 그림은 워낙 관심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마 일랴 레핀의 그림을 보면서부터일 거다) 러시아 그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유럽 회화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어쩐지 민중주의 같은 느낌의 강렬하고 투박한 그림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차르의 압제가 워낙 심하고, 넓은 영토를 전제적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던 나라의 특수 상황 때문이었을까?
그림을 보면서, 공산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힘겹게 썰매를 끌고 있는 (마치 개처럼!) 어린 소년들이라던가, 무거운 배를 끌고 가는 어부들의 초라한 모습, 또 성자의 유골함을 들고 가는 행렬에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애를 쓰는 불구 등의 모습에서 가슴 한쪽이 시리는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고 서글프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들의 비루한 삶...
이런 농노들의 삶을 좌시할 수 없었던 인텔리겐차들이 브나로드 운동이나 황제 암살, 폭탄 테러 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일종의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이상하게도 러시아나 스페인 역사는,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서글프고 고단한 느낌을 준다.

제일 관심있게 본 화가는 일랴 레핀이었다.
사실 이 사람 이름은 이 책에서 처음 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상화 그림 중 하나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무스 초상이다.
단지 인물을 모사한데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 개성 같은 내면의 품성을 드러내주는 초상화는 관람자에게 묘한 흥분을 준다.
이것이 사진과 다른, 회화가 갖는 매력일 것이다.
일랴 레핀이 그린,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를 보면, 한스 홀바인의 그 정교한 붓터치와는 또다르게 쓱쓱 그린 느낌인데, 인물이 갖는 성격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바로 옆에 니콜라이 2세의 실제 사진도 실렸는데 흑백이라 그런지 몰라도 초상화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었다.
그림 속의 니콜라이 2세는 퍽 말랐고, 피의 일요일을 부른 전제 군주라기 보다는,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청년으로 보인다.
전제 군주라면, 헨리 8세처럼 딱 벌어진 체격을 갖거나 혹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펠리페 4세처럼 매우 오만해 보이는 (한 마디로 재수없는) 인상이 대부분인데, 일랴 레핀의 그림 속에 있는 니콜라이 4세는 그런 전형적인 군주상에서 매우 벗어나 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좀 우습겠지만, 이런 남자라면 연애해 보고 싶을 것 같다.
이런 유약해 보이는 군주가 대체 어떻게 그 많은 농노들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혁명에 의해 쫓겨난 후 사살됐으니 죄값에 적당한 최후라 하겠다.
일랴 레핀이 그린 말년의 톨스토이도 그가 가진 평등한 공동체라는 사상을 실천하는 위대한 성인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러시아는 특히 초상화가 발달했다고 하는데, 러시아 최고의 문호라는 푸슈킨도 퍽 매력적이었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 화학의 아버지라는 라부아지에의 초상화를 보고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
유명인을 그림으로 만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러시아의 풍경화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아마 워낙 거대한 자연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하면 소나무듯이, 러시아 하면 곧게 뻗은 자작나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자작나무는 서양 소설에서 자주 봤던 나무다.
사실 직접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생긴지는 모르겠으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풍경으로 볼 때 느끼는 이미지는 있다.
눈 덮힌 설원이라던가, 자작나무 숲, 혹은 온통 파랗게 물든 여름의 초원 등을 보면, 오히려 러시아야 말로 영국이나 이탈리아 보다 훨씬 더 풍경화가 발달할 수 있는 고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흐가 프로방스가 아닌 러시아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러시아의 현대 미술은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다.
아직까지 나에게 추상 미술은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한다.
몬드리안의 사각형 그림이라던가 칸딘스키의 비구상 그림들은 그냥 그저 그렇다.
다만 샤갈의 유명한 그림, <마을 위에서> 라는 그림은 퍽 신비롭고 눈길을 끌었다.
이래서 유명한 그림은 다른가 보다.
누가 봐도 감동을 주니 말이다.
1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유대인들을 몽땅 한 마을로 몰아 넣었는데 역시 유대인이었던 샤갈은 그런 외부 상황에 구속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와 마을 위를 날아가는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어쩌면 끔찍한 전쟁 풍경이나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관객의 마음을 시리게 하는 승화된 그림일지도 모른다.
고통 속에서 꿈꾸는 희망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된다면 러시아 미술관을 방문해 보고 싶다.
에르미타슈 미술관과 푸슈킨 미술관, 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등을 꼭 가 보고 싶다.
예전에는 러시아 미술에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이래서 독서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준다고 했던가...
문득 드는 생각이 우리나라 미술도 외국 작가들에 의해 많이 소개되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매력을 느끼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단지 풍경이나 문화재 소개에 그치지 않고 (특히 무슨 겨울연가 여행이니 하는 이런 유치하고 한시적인 이벤트성 홍보 말고) 한국의 미술을 소개하는 기회를 많이 만들면 좋겠다.
분명히 서양 미술과는 또다른 매력을 느끼게 할 것이다.
나 역시 리움 미술관을 둘러 본 후, 우리 전통 산수화와 풍속도 등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고 보면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의 위상을 높힐 뿐 아니라, 그 문화권의 특성과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훌륭한 아이콘인 것 같다.
제발 월드컵에서 몇 등 했다 같은 이벤트성 문구로 한국의 위상을 평가하지 말고, 미술 같은 쪽에 좀 더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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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회복지의 실제
박승희 외 지음 / 양서원(박철용)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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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숫자만 잔뜩 나열한 책에 질려서 꾸벅꾸벅 졸면서 대충 읽었다.
내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다.
이런 실제적인 자료집이 아니라, 스웨덴 사회복지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더불어, 우리나라 복지 정책에 대한 대안을 원했다.
너무 대충 읽은 것 같아 바로 재독을 했는데, 두 번째 읽을 때 이 책의 진가가 드러났다.
나는 여기 나온대로 복지 수당을 죄다 계산해 봤고, 한 술 더 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삼촌네 가족의 경우까지 대입해 봤다.
이 책은 단순히 주장만 나열한 책이 아니다.
몇 %의 세금을 제하는지, 아동 한 명당 얼마의 수당을 받는지, 이혼했을 경우 양육비 지급은 얼마인지 등등을 매우 세밀하게 자료로써 제시한다.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후기에도 나오지만, 이렇게 퍼다 주고도 경제가 돌아간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제일 대표적인 예로 가정주부의 연금을 들 수 있다.
한 번도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전업주부마저도, 65세가 되면 대략 90 만원 정도의 연금을 받는다. (세금 제한 액수)
그것도 부부가 각각 따로 받는다.
직장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90만원씩이나 매달 지급이 된다면 다른 경우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러니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손 벌릴 필요가 없고, 자식 역시 부모 봉양을 위해 따로 지출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노인 부양 문제는 전적으로 자식들에게 달려 있다.
특히 직장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할머니들의 경우, 자식이 아니면 돈 나올 구석이 전혀 없다.
이러니 자식이 부모를 버릴 경우, 말 그대로 굶어 죽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노인 연금 지급 문제는 재정 마련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스웨덴은 나라가 한국보다 대략 2배 이상 넓고 인구는 천 만이 채 못되는데도, 이 나라 역시 주택 공급이 아주 원활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전세 개념은 아예 없고, 15평 아파트의 임대료가 70여 만원 정도로,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
성인 1인의 최저 생활비는 대략 40여 만원 정도로 책정되어 있다.
만약 할머니 한 사람이 혼자 산다면, 주거비와 최저 생계비를 합하면 110여 만원이 든다.
받는 연금은 90만원이니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할까?
놀랍게도 마이너스 부분은 공적 부조로 해결한다.
사회보장청에서 연금을 지급하고, 부족한 부분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메꿔 준다.
20만원이 지자체에서 매달 추가로 나오는 것이다.
이러니 노인들은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다.
아파서 간병인이 필요한 경우도 생활도우미가 파견되어 실제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목욕, 청소, 식사준비는 물론이고, 가정간호사가 와서 노인을 돌본다.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돈은 최고 30만원을 넘지 않고, 추가로 들어가는 비용은 전액 지자체에서 지불한다.
너무 놀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일을 전혀 하지 않았고, 재산이 한 푼도 없어도, 심지어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아프다 할지라도 충분히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복지 정책이 얼마나 앞서 나가는지 눈으로 확인한 기분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독거노인들의 간병 서비스는 자원봉사에 의존하고 있다.
사설업체에 도우미를 맡기고, 노인들이 업체를 선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서비스 경쟁이 이뤄진다고 하니, 가히 복지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아동 수당도 보통이 아니다.
아동 1인당 15만원 정도가 매달 지급되고, 추가로 주택수당까지 나온다.
이혼했을 경우는, 1인당 17만원을 양육하지 않은 부모에게 받아준다.
이 혜택은 입양아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상의료에다가 무상교육, 거기다가 아동 수당과 주택 수당까지 나오니, 스웨덴에서 입양이 활발한 이유를 알겠다.
임심을 했을 경우는 임신 휴가 60일이 주어지고, 50일까지는 소득의 80%를 받을 수 있다.
난 이게 출산 휴가인 줄 알았다.
실제로 우리 부서의 출산 휴가는 두 달이다.
그런데 이 60일 중 토요일, 일요일은 제외된다.
순수하게 근무한 날로 따져서 60일이란 얘기다.
그러므로 실제 쉴 수 있는 날은 석달 가까이 된다.
출산을 하고 나면 출산휴가 혹은 부모휴가가 무려 480일이나 주어진다.
이 중 60일은 의무적으로 아버지가 써야 한다.
부모의 공동육아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안이라고 한다.
아이가 8세가 될 때까지 부모는 480일을 나눠서 쓸 수 있고, 이 중 390일은 소득의 80%가 보장된다.
이 때도 마찬가지로 주말이 빠진 순수 근무날수만 포함된 것이므로, 실제로는 대략 1년 6개월을 급여를 받으며 쉴 수가 있다.
정말 환상적이지 않은가?
아기가 1살이 되면 보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학교 들어가기 전 6세까지는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는데 이 때 드는 돈은 1명당 17만원이고, 이것도 아무리 아이가 많아도 34만원을 넘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추가 비용은 국가에서 내준다.
그러니 출산 후 1년 동안 휴직하면서 아이를 키우고, 1년 후부터는 어린이집에 보내면 된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방과 후 보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스웨덴 노인들이 손자 키우기에서 해방된 이유가 있다.
이 정도 육아 시스템에다가 의료와 교육까지 무료라면 적어도 돈 때문에 아이 못 낳는다는 말은 안 나올 것 같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게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처럼 출산과 양육은 전적으로 개인 책임으로 맡겨진 나라에서는 많이 낳을래도 돈과 시간이 없어서 낳을 수가 없다.

장애아에 대한 복지도 환상적이다.
장애 정도에 따라 적게는 몇 십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까지 지급이 되고, 만약 가족이 돌보고 있다면 구청에서 가족에게 도우미 수당을 준다.
혼자 사는 장애인인 경우, 수발을 들 도우미와 간호사가 방문하여 돌본다.
도우미의 개인 부담금은 노인의 경우처럼 대략 20만원 안쪽이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공적 부조로 해결된다.
후기에 보면 스웨덴의 장애인정책이 부록으로 나오는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스톡홀름을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시민에게 접근성이 가장 좋은 도시로 만들자는 취지 아래, 수많은 복지 시설을 제공한다.
그래서 스톡홀름에 장애인들이 가장 많다고 한다.
다른 사람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특별한 지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선언은, 장애인의 권리를 정확히 보여 준다.
다양성이 자산이라는 선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장애인에 대한 동정의 수준을 넘어서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도록 지원과 서비스를 아끼지 않는 스웨덴의 복지 수준에 정말 감탄했다.
전적으로 가족 책임인 한국과 너무 비교되어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왜 스웨덴은 자살율이 높은가?
2007년 자살율과 비교해 봤을 때 높은 쪽은 오히려 한국이다.
스웨덴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한국은 남자 성인 1000명당 33명이라는 엄청난 자살율을 자랑한다.
대부분 생활고일 것이다.
특히 IMF 이후 빚 때문에 자살한 중년들이 꽤 있을 것이다.
스웨덴은 현재 19명 수준이고 과거 30명을 넘었던 것에 비해 많이 줄어들고 있다.
저자는 이 비밀을, 복지 서비스에서 찾는다.
단순히 소득보장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복지 서비스 (수발과 간병, 간호 등) 를 늘림으로써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게 자살률 감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지적할 것은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만족감이다.
개인주의 사회이다 보니, 스웨덴은 삼대가 모여 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사회에서 노인의 복지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노인들은 독립해서 살고, 한국처럼 가족간의 유대감이 강하지 않다.
노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모든 부양의 책임을 가족에게 맡겨 버리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는 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건 복지 시스템이 잘 되서가 아니라, 서구 사회의 전통적인 개인주의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하여튼 이 나라도 공동체의 유대감 높이기에 대해 고민을 좀 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막연한 주장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는 삼촌네 가족이 생각나 많이 쓸쓸했었다.
삼촌의 경우, 이혼했고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으며 직장이 없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책에 나온대로 최저생활비와 주거비를 계산해 보니 대략 130만원 정도는 든다.
이 생활비는 친척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주고 있다.
국가에서 나오는 돈은 하나도 없다.
스웨덴 복지 모델에 대입해 보면, 할머니가 받을 노인 연금과 사촌동생의 아동수당, 편부모 양육비, 주택 수당 등을 합하면 130만원은 충분히 받는다.
만약 삼촌이 실업 급여를 받는다면 이 가족은 누구에게 손 벌이지 않아도 자립할 수 있다.
스웨덴의 실업 급여는 300일까지, 소득의 80%가 나오고 이 때도 토, 일은 제외라 실제로는 1년 정도 된다.
만약 300일 안에 취업이 안 되면 추가로 300일이 더 할당되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부터는 공적부조에서 최저 생계비를 지원한다.
복지국가는 국가가 최저생활을 보장해 주고, 한국 같은 나라는 가족 공동체가 그 부담을 떠맡는다.
미국처럼 개인주의가 매우 발달하면서도 복지제도가 떨어지는 곳에서는 아마 홈리스나 부랑자로 전락할 것이다.
한국 역시 가족 공동체가 튼튼하지 못한 실직자는, 낙오자로 사회에서 배제될 것이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저자는 스웨덴 복지 정책의 근원을, 노사 협력에서 찾는다.
언젠가 다른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는데, 스웨덴은 노조와 회사의 협력이 매우 잘 된 국가라고 한다.
그 때는 막연히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제시된 자료를 읽어 보니 과연 보통 협조 시스템이 아니다.
생산직 노동자는 노조 등록율이 82%에 이르고, 사무직 노동자도 75%에 달한다.
심지어 의사나 교수 같은 전문직도 노조가 결성되서 조합원 수가 5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스웨덴 인구가 900만명이니 전문직 노조 조합원이 50만명이라면 보통 숫자가 아니다.
이들의 조합율이 높은 이유는, 한국처럼 대기업 위주로 결성된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 비정규직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고 이런 단결력과 응집력 덕분에 1932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69년에 걸쳐 사회민주당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진정한 노동자의 대표 단체답다.
저자는 복지제도의 힘을, 바로 사민당의 장기 집권으로 봤다.
복지 제도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힘, 정권의 의지만 있다면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동의해 준다면 얼마든지 실행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은 가난한데 복지 제도의 정착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스웨덴의 세금은 대략 20% 정도 된다고 한다.
많이 내더라도 따로 노후나 아플 때를 대비할 필요가 없고 의료와 교육까지 무상이며 양육비까지 지원된다면, 그리고 실제로 내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세금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퍼주면서도 1인당 GNP는 무려 4만 달러에 달한다.
저자는 한국이 사교육비와 내 집 마련에 너무 많은 정력과 재화를 낭비하기 때문에 복지 시스템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사교육비야 뭐, 더 말 하는 게 입 아플 정도로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이고, 물론 인재 양성과 높은 교육열에 힘입어 한국 사회가 발전한 것도 있지만, 하여튼 학벌사회 대한민국이 얼마나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는 누구나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스웨덴의 경우 대학 진학율은 35%에 불과하고, 졸업 후 30년 동안 80%가 대학에 간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선택한 대학에 의해 평생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 하다가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해 천천히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스웨덴이다.
그러니 사교육비라는 말 자체가 없을 수 밖에.
국가에서 대학 등록금 (대학원까지 지원된다)이 나오니, 돈 없어서 대학 못 간다는 말은 있을 수도 없고, 언제든지 직장 그만두고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부럽다는 말 밖에는 안 나온다.

주택 문제의 경우, 스웨덴은 절반 이상이 임대 주택이라고 한다.
임대료를 내는 것이 집을 사는 것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집을 굳이 사려고 하지 않고, 집값 역시 투기의 대상으로 이용되지 못하게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1가구 1주택 기조를 유지하면서, 임대 주택에는 실제로 거주해야 하고 세를 놓을 경우는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한다.
빚을 내서라도 일단 집부터 장만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집값만 보고 있으면 땡인 대한민국과 매우 비교되는 사회다.
스웨덴의 인구 밀도가 워낙 낮아서 공간 문제에 있어 여유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해 봤다.
전세 제도는 아예 없는 것 같고, 임대료에 관리비나 난방비, 전기세 등도 포함된다고 하는데 한국에 비해 아주 싸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집을 사는 게 굳이 큰 이익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무리해서 집 사느라 돈을 모을 필요가 없으니 임대료 내면서 사는 게 훨씬 편할 것 같다.
학생들의 경우, 18~29세까지 주택 수당이 지급되기 때문에 독립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의 거주지 확보를 위해 주택 수당을 지급하는 그 배려가 놀랍다.
한국도 내 집 마련에 대한 부담감만 줄어든다면 훨씬 사회가 안정적일 것 같다.
정부의 특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200페이지 불과한 얇은 책이지만 훌륭한 내용과 성실한 자료 수집이 돋보이는 멋진 책이다.
이런 실제적인 자료들이 많이 나와 한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 주면 좋겠다.
외국 사회를 소개하는 책 중에서 제일 짜증나는 게, 유학생 와이프들의 신변잡기식 책이다.
이 사람들은 신문이나 방송도 제대로 안 보는지, 그 나라의 정책이나 제도 같은 데는 아무 언급도 없고 그저 살기 좋은 사회 어쩌고 하면서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글을 책으로 써 내는 걸 보면 한심하다.
전문적인 책들이 많이 나와 여러 사회들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성실한 책을 써 준 집필진들에게 감사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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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8-01-0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템의 차이가 엄청난 것 같죠. 그에 비해 우리는 교육,육아,주택,노후까지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교통사고라도 나면, 인생 끝인 구석기 시대같은 곳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개인은 그 무한 경쟁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시스템을 만드는데 그리 돈이 많이 드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로 인한 여유와 안정감과 서로에 대한 신뢰는 글자 그대로 경쟁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후가 그리 걱정이 되지 않는데 왜 아둥바둥 직장에 연연할 이유도 없죠. 하고 싶은 공부도... 백에 한가지라도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가장 나쁘고 서로를 멀리하게 하는 시스템만 도입하는 지금을 보면 어이가 없고 안타깝습니다. 이어지는 각박한 삶이, 눈에 점점 불을 켜고, 냉대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만드시길......

이잘코군 2008-01-07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린님 정말 책 열심히세요. ^^ 올리시는 리뷰마다 눈독들이고 있습니다. 최근 쾌도난마 한국경제 를 읽었는데, 스웨덴 모델에 관심이 가던 차였어요. 오늘 한국일보에도 스웨덴 모델이 소개됐었고.

marine 2008-01-07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마당님, 긴 답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분명 우리 모두는 복지 사회를 원하고 있는데 대체 왜 전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요?
민노당이 집권하면 좀 나아지려나, 이런 생각도 해 봤답니다

아프락사스님, 반가워요. 작년에는 100권 좀 넘게 읽었는데 올해는 분발해서 150권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이고, 또 하나님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인 것 같아요^^

zlzo 2013-06-12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송한데 이글 비공개로부탁드립니다.. 과제 시즌인데;; 죄다 이걸 붙여오네요;;
 
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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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퍽 달랐다.
제목이 주는 뉘앙스로 봤을 때, 인간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그런 류의 주장인 줄 알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의해 지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났듯, 진화론에 의해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그런 류의 과학 에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나는 굴드의 책을 처음 접했는데, 확실히 이 사람은 스스로 고백했듯, 사회주의적인 신념이 있는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나 칼 세이건 등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사회에 보다 관심이 많고 과학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 같은 게 있다고 해야 할까?
과학이 실재적인 팩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충분히 찾아질 수 있다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문화와 계급에 의해 영향을 받고 발전 방향 역시 그 과학이 속한 사회와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식의 고백은 자칫하면, 과학 역시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굴드는 퍽 신중하게 진술을 한다.
나 역시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우주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생학이나 골상학 같은 황당무계한 이론들도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맹위를 떨쳤다는 걸 사실을 접하고 보면, 굴드의 말마따나 오히려 우리가 절대적인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자만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히 더 관심을 쏟는 분야가 정해져 있고 과학자 역시 편견을 갖는 제한된 능력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자신이 편견을 가질 수 있음을 끊임없이 인정함으로써 자료의 선정과 계측에 보다 신중할 수 있다는 굴드의 지적도 일리가 있다.
과학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학자는, 질투와 시기심과 명예욕과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과학과 과학자를 구분하는, 어찌 보면 인간의 한계를 실토하는 그런 솔직한 자세가 신선하게 와 닿는다.
그러나 이 말은, 황우석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과학은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는 조국이 있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말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책의 주제는 범주화와 서열화로 압축될 수 있다.
솔직히 나는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어이없는 이론들이 사회를 지배했다는 사실에 더 놀랬다.
흑인이 가장 열등한 인종이고, 코카서스 인종이 가장 우수하며, 그러한 서열화는 두개골 용량이나 길이 측정 등으로 지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등할수록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에 침팬지의 두상과 아프리카인의 두상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기술됐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인터넷 상에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이 생각난다.
그 사람 말이, 흑인이 미학적으로 못생기고 열등한 것은 사실 아니냐는 것이다.
이 개명천지한 21세기에도 이런 주장이 서스럼 없이 통용되는 걸 보면,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에 흑인을 백인과 똑같이 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 같다.
범주화는 많은 오류를 낳는다.
이를테면 나는 여자고, 유색인종이고, 전라도 사람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사회에서 나를 규정하는 척도가 된다
내가 실제로 그 범주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간주되느냐 아니냐가 문제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자와 완전히 똑같고 다만 관습과 교육에 의해 여자로 키워진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굴드의 말마따나,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고 우리들의 유전학적 차이는 구분하기 매우 힘들 정도로 미세하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이야 말로 인간이라는 종이, 동질한 집단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훌륭한 학설이 아닌가 싶다.
인류가 멸망하고 오직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원시 부족만 살아 남는다 해도, 그들은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대부분을 충분히 후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문화적 진보와 생물학적 진보가 다르다는 굴드의 지적은 매우 통찰력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겨우 5천 여년 가지고는 어떤 변화도 관찰될 수 없다고 한다.
반면, 문화적 진화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의해 진행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습득한 지식과 행동양식을 후손에게 학습을 통해 전수시키고, 모방과 반복을 통해 우리는 문화를 건설해 나간다.
우리가 흔히 유전적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인종별 혹은 집단별 특징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이러한 문화적 진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구분이야말로, 인류의 기원과 특성을 밝히는 생물학이 함부로 기득권자들에게 이용되는 위험을 막을 방패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도킨스의 밈이라는 개념도 문화적 진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문화권에서 보이는 인간의 특성이 유전자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윌슨 등이 이러한 사회생물학을 지지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공격성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굴드는 오히려, 행동의 유연성을 인간의 본성으로 지적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공격적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평화적으로 행동하는 것, 즉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지능의 가장 큰 특징인 유연성이라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의 주장은 가끔 모든 것이 유전자에 내제되어 있다는 말인가, 하는 허무주의와 변화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얘기인가, 하는 절망감을 느끼게 할 때가 있는데, 적용의 범위와 한계가 학자들에 따라 차이가 많은 모양이다.
제일 의아했던 것이 나는 아이를 굳이 원하지 않는데 이런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느냐는 문제였다.
굴드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동성애자의 성향이 인간의 풀 속에서 계속 유지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가 낳은 아이들을 돌봄으로써 그 집단의 생존률을 높히는 역할을 한다.
그들의 손에 자란 아이들은 동성애자의 유전 코드를 복사함으로써 동성애 성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자손의 번식에 대해서는 특별한 욕구가 없는데, 이것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굴드는 재치있는 문장을 잘 구사한다.
기본적으로 문장력이 괜찮은 편이며, 무엇보다 위트가 있어서 좋다.
번역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톡톡 튀는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무척 즐거웠다.
기본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되려면 문장력도 훌륭해야 하는 것 같다.
세이건이 수사적인 문장을 많이 구사하는 데 비해, 굴드는 재치있는 문장이 많다.
도킨스는 비꼬는 식으로, 정면 공격을 잘한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수사를 늘어 놓는 창조론자들이나 유사과학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정면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읽을 때 시원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즐거운 책을 쓸 수 있는 과학자가 겨우 60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세이건도 그렇지만, 60이라는 나이는 21세기에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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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행동 - 21세기 민주주의, 거인과 싸우다
에이프릴 카터 지음, 조효제 옮김 / 교양인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 책을 신청한 후 받아 봤을 때 두께 때문에 깜짝 놀랬다.
5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었다.
더군다나 하드 커버였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감이 더 컸다.
어쩐지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며칠을 미루다가 반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밀려 드디어 오늘 다 읽었다.
전체적인 내용은 대의민주주의제를 보완하기 위해 파업이나 불매 운동, 시위, 점거, 항의 같은 비합법적인 집단 행동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과,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논의들이 들어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왜 민주주의를 해치는지, 혹은 어떤 점에서 나쁜지는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겠냐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점이 나로서는 아쉽다.
오히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 더 자세히 나온 것 같다.
신자유주의가 경제 발전에 정말로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실제로 자본가들의 배만 채울 뿐 일반 대중에게 돌아올 이익은 하나도 없는지 등등에 관한 분석적인 책을 읽어 보고 싶다.
나로서는 고용 기회 확대와 기술 혁신, 자본주의 경쟁 체계가 주는 생산성 확대 등을 장점으로 꼽는 현재의 주류 경제 시스템을 극렬하게 반대할 만한 확고한 지식이 아직 부족하다.
빈부 격차 확대와 비정규직 노동자 증가 등과 같은 문제점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작용할지는 좀 더 공부를 한 다음에 결론을 내릴 작정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대의명분이 현실을 압도할 수는 없으며, 그 명분이라는 것도 실체를 까발리기 전에는 오해될 여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화려한 휴가" 에 대한 감상평을 읽다가 깜짝 놀랜 적이 있다.
5.18 하면 당연히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불순분자들의 무장봉기 혹은 내란 시도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명의 게시판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영화에서도 묘사된 바지만,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해 군인에게 발포한 것은 분명하다.
책에서는 이럴 경우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학문적으로 고민한다.
직접행동은, 토론과 같은 합리적인 과정을 통한 의사표현이 어려울 경우,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세를 과시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의감에 기초하여 공동체가 바람직한 시민상을 구현한다고 인정한다면, 일부 폭력적인 행위도 (즉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는) 직접행동으로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폭력은 오히려 국가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혼란을 초래하며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배제되야 하지만, 특별한 경우, 이를테면 광주 민주화 항쟁처럼 계엄군이 시민에게 발포한 경우라면 항의의 표시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적 약자일 경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한 방법으로는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에, 좀 더 넓은 의미의 집단행동이 용인될 수 있다고 했다.
심의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갈등 해결 방안인 토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에게 유리한 방식이고,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들에게는 심지어 영어 사용조차 어려우니, 거리로 나가 집단행동을 통해 투쟁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 통합 등은, 책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전 지구적 차원의 시민운동은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얼핏 보면 모순적이기도 한 것이,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해 국민국가 수준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야 한다고 하면서도, 환경 문제나 인권 등과 같은 세계시민권 옹호를 위한 연대 투쟁을 위해 국가의 경계가 느슨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소멸이나 강화가 분야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을까?
다국적 기업을 규제하기 위해 국민국가의 역할이 커진다면, 즉 국가 간 경계선이 강화된다면, 인권이나 사회정의, 환경 문제 같은 전 지구적 문제들도 어쩔 수 없이 각 국가의 허용 범위 내에서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롤스는 이 점을 강조해서, 보편적 인권의 적용을 확대하다 보면, 국가의 자율성을 침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서방 세계가 3세계에 인권 문제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 학교에서의 히잡 금지 문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공화주의적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행위를 금지시킨다.
공화국의 세속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쟁을 왈쩌의 저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무슬림들의 주장은, 기독교인이 십자가 목걸이를 한 것과 히잡 착용은 똑같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되는 목걸이 착용과,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심지어 어떤 나라에서는 죽을 수도 있는) 히잡 착용을 똑같이 비교하는 것은 맥락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주장이고, 종교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프랑스 정부의 금지 정책을 심정적으로 지지한다.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이 전적으로 자발적인 의사인지, 집안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왈쩌는 그의 저서에서, 공동체가 자손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권리와 (혹은 전수시킬 권리)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사실 어떤 권리가 우선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론 100% 개인의 선택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왈쩌는, 완벽한 개인주의자는 불가능한 개념이며, 대부분은 정체성 유지를 위해 어떤 집단에든 속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집단이 올바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책에 왈쩌는, 개인주의자 보다는 공화주의자로 분류된다.
더 나아가 전 지구적 시민권, 혹은 세계정부 같은 것은 실현불가능 하다고 봤다.
얼마 전에 인상깊게 읽었던 왈쩌가 거론되니 무척 반가웠다.

직접 행동의 좋은 점은, 거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자존감을 높힐 수 있으며, 정치적 교육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정치적 집단의 조직은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높여 준다.
또 그런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성숙한 민주 사회 시민으로 재탄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했던 동맹 휴학이 생각난다.
학교에 정당한 재정 지원을 요구하면서 몇 달 동안 수업 거부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 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마냥 무섭기만 하고 왠지 법을 어기는 것 같고 부당한 일을 하는 것 같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된다는 것을 그 때 알았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을텐데 말이다.

의사 파업도 생각난다.
의사라면 대표적인 기득권 집단인데 정부에 대항하여 파업을 일으킨 일로 국민의 지지는 커녕, 엄청난 비난과 분노를 샀다.
이 책에도 비슷한 예가 나온다.
이익 집단의 직접행동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소수민족이나 사회적 약자의 집단행동은 사회정의감이라는 정서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지는 반면, 의사파업처럼 기득권 세력의 집단행동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넓게 보자면 시민 한 사람으로서, 혹은 하나의 직업 집단으로서 부당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표현방식이니 시민 불복종이라는 개념으로 수용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탈리아에서도 의사파업를 했던 전적이 있다.

책에서는 정부나 국제기구에 대항하여 시위 등을 통해 성과를 얻어낸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시민이 자발적 정치 참여라는 의미에서 직접행동은 반드시 있어야 함은 동의하는 바이지만, 구체적인 맥락에서는 약간의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전보다는 훨씬 따뜻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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