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투 리브 (1disc) - 할인행사
프랑소와 오종 감독, 잔느 모로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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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에 찍은 프랑스 영화는 오랜만에 본 것 같다.
역시 최근 영화라 그런지 풍경이나 촬영 기법 등이 상당히 세련됐다.
프랑스 영화는 70,80 년대 오래된 영화만 봐서 항상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이번 영화는 일단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 풍경을, 사진작가인 주인공이 디카로 열심히 찍는다.
남자 주인공으로 나온 멜빌 푸포는 검은 고수머리가 무척 잘 어울리는 남자다.
나중에 머리를 죄다 밀어 버리는데, 꽃미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기분이다.
동성애자 애인으로 나온 크리스티앙이라는 배우도 정말 게이인 것처럼 예쁘게 생겼다.
게이 역시 같은 남자지만 남성적인 역할과 여성적인 역할이 나누어져 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실감이 난다.

동성애를 이처럼 리얼하게 그린 영화는 처음 봤다.
실제 섹스 장면을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원래 남녀간의 섹스도 노골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불편해 하는 사람인지라, 동성애자의 섹스 장면은 상당히 껄끄러웠다.
왜 같은 성끼리 끌리는 것일까?
동성애자에 대한 특별한 편견은 없다.
성적 기호일 따름이니까.
남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도 그저 여자와 남자처럼, 그냥 여러 사랑의 방식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에서 허용해 주면 그 때부터는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잡는다.

내가 석 달 안에 죽는다면?
나는 물론 아무리 가능성이 적어도 모든 치료를 다 수용할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로맹은, 치료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가족간의 소외를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소통의 부재, 혹은 현대 사회의 소외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혼자 고통을 삼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할머니에게만은, 같이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라 동병상련을 느껴 말기암임을 고백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의 공포, 그것도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공포...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자를 제공하는 장면은, 과연 현실성이 있는 건지 살짝 의문스러웠다.
무정자증인 남편은 아내가 다른 남자의 정자를 받아들여 임신하는 것을 허락한다.
심지어 그 남자와의 섹스에 동참하여 세 사람이 함께 즐긴다.
너무 기묘해서 보기 불편했다.
정말 이런 걸 받아들일 남자가 있을까?
성적으로 자유로운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약간 혼란스러운 대목이었다.

내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면 나는 제일 먼저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작성해서 도서관에서 살 것 같다.
그런데 영화에서 간과하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고통도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주인공이 평소에 못해봤던 걸 실컷 하는 걸로 나오는데, 실제로 가까이에서 환자들을 지켜 보면 너무나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간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어쩌면 책을 읽을 만큼의 에너지도 없을지 모른다.
심리적인 저항감도 무시하기 힘들 것 같다.
로맹 역시 우울증 때문에 너무나 괴로워 한다.
왜 나만?
하필이면 내가?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갑자기 오싹해져 온다.
더군다나 독신으로 혼자 늙을 경우, 죽음을 혼자 견뎌내야 하는데,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왜 사람들이 힘들어도 가정을 이뤄 함께 모여 사는지 알 것 같다.
감정적으로 기댈 사람을 찾는 것이다.

로맹 역시 혼자 해변가를 찾아가 해수욕을 하고 햇빛을 쬐지만, 그가 아프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친구끼리 함께 경험을 나누는 것은 풍요로워 보인다.
물론 사람끼리의 갈등 관계도 무시하긴 힘들지만 하여튼 혼자는 감정의 증폭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에 겹다.
인상적으로 본 프랑스 영화였고 무엇보다 풍경이 아름다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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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0-01-26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환자가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드리는 모습을 충격저일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물론 로맹처럼 맞이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어색하지도, 비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사실성과 절제미, 생각의 깊이가 허리우드 영화와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프랑소와오종의작품중에서도 아떤 의미에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북경의 55일 - [초특가판]
스카이시네마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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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때 주말의 명화 시간에 엄마 아빠랑 같이 봤던 영화다.
너무너무 재밌고 긴장감 넘치게 봤던 기억이 생생한데 DVD로 다시 보게 됐다.
역시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생각만큼 스펙타클 하지는 않았다.
특시 얼마 전 사망한 찰스 해스턴은 너무 와일드 하게 생겨서, 그닥 호감이 안 간다.
오히려 같이 출연한 여배우 에바 가드너의 우아함이 한껏 빛났다.
영국 공사 역할을 맡은 데이빗 니븐도 성격파 배우로써 상당히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서태후나 기타 중국 장관들은 영어를 써서 그런지 실제 중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일제 시대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어 쓰는 일본인으로 분장하는 것도 저렇게 어색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다.
남작 부인과 중국 장군 사이의 로맨스는 과거형으로 잠깐 언급하고 끝나서 아쉽다.
뭔가 발전시켜 볼만한 스토리가 있었을텐데 말이다.
허망하게도 과일과 마취약을 구하러 간 남작 부인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찰스 해스턴의 반응이 너무 태평해, 좀 깨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정성스런 간호를 받은 병사가 분노한 것처럼, 실상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부하의 혼혈아 딸인 테레사와 소령의 따뜻한 관계가 더 돋보인다.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다 달라는 테레사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떠나는 행렬에서 돌아와 그녀를 말에 태우고 돌아가는 모습은 영화의 압권이었다.
어차피 혼혈아는 중국에서도 소외를 받을 것이니, 차라리 미국으로 가는 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 생각된다.

일본이 열강 속에 끼여 의화단과 같이 싸웠다는 점은, 새삼 일본의 당시 국력이 어땠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대체 일본의 근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그렇게도 짧은 시간 동안에 그렇게도 엄청나게 말이다.
제일 감동스런 부분은, 북경을 사수하며 고군분투 하던 연합군에게, 각 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했을 때의 모습이다.
아무리 국가나 민족을 초월하는 세계 시민주의가 발달한다 해도 여전히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가장 큰 테두리는 국가임을 새삼 느꼈다.
나도 모르는 애국심이 불끈 솟는 기분이었다.
다른 나라는 죄다 지원군을 보냈는데 우리나라만 국력이 약해서 군사를 못 보낸다면 얼마나 비통하고 안타까울 것인가!
어쩌면 식민 치하 조선인들이 느꼈을 비분강개와 자괴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각 대사관의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화단 운동은, 청나라 입장에서 보면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자는 운동이니, 옛날처럼 맘 편하게 연합군을 응원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서태후를 비롯한 궁중 실력자들에게는 분노가 치밀었다.
특히 그 긴 손톱 보호대를 보면 짜증이 확 치밀었다.
대외적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자국민을 억압하고 온갖 권위를 갖는 무능력하지만 잔인한 독재자들!
대체 <연인 서태후> 라는 어처구니 없는 책은 왜 나온 걸까?
구한말의 고종 역시 그렇지만, 외세가 잘못해서 나라를 뺏긴 게 아니라, 위정자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나라를 뺏긴 거란 사실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
서태후는 너무나 뻔뻔한 할망구로 나와, 보면서 자꾸 화가 났다.

의외로 영화는 싱거웠다.
긴박한 대립 장면도 별로 없고 극적인 순간도 거의 없고 그냥 밋밋하게 그려진다.
그 점이 오히려 요즘 영화와 다르게 담백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오버하지 않아서 편한 점이 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생각하며 재밌게 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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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 [할인행사]
비또리오 드 시카 감독, 제니퍼 존스 출연 / 스카이시네마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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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왜 제목이 종착역인지 모르겠다.
영어 제목이 "terminal station" 인 걸 보면 대충 맞게 해석한 것 같기는 한데, 그닥 내용과 어울리지는 않는다.
캐서린 햅번이 나온 "여정" 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내용이나 주제가 거의 비슷하다.
물론 <종착역> 이 흑백이라 훨씬 고풍스럽고 무엇보다 여주인공인 제니퍼 존스가 훨씬 더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캐서린 헵번은 좀 거칠고 씩씩한 이미지라면, 제니퍼 존스는 너무나 우아하고 잉그리드 버그만처럼 50년대의 고전적인 미인으로 생겼다.
그녀가 입고 있는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긴 투피스나, 짧은 파마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조그마한 모자, 그리고 팔에 걸친 작은 핸드백 등이 흑백 필름과 함께 그녀를 완벽한 고전 미인으로 만들어준다.
<터미널>에서 캐서린 제타 존스를 보고 정말 완벽한 미녀라고 생각했는데, 제니퍼 존스 역시 최근 본 여주인공들 중에서 탁월한 미녀에 속한다.
반면 상대역인 몽고메리 클리프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망울이 매우 깊어 입체적으로 잘 생기긴 했는데, 키가 너무 작다.
제니퍼 존스와 거의 비슷한 크기라 얼굴만 볼 때가 훨씬 멋진 것 같다.

로마로 여행 온 마리아는, (Mery를 이탈리아어로 부르면 마리아가 되는 모양이다) 이탈리아 대학 교수인 지오바니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이미 남편과 딸이 있는 유부녀!
장난처럼 시작한 커피 한 잔이 어느새 사랑으로 발전하고 죄책감을 느낀 마리아는 몰래 미국으로 떠나려고 한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로마역으로 나온 마리아, 그러나 지오바니는 눈치를 채고 달려오고 두 사람은 첫 기차를 보내고 실랑이를 하면서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늦게 찾아 온 사랑을 따라 나서야 할까, 괴롭더라도 가정을 지켜야 할까?
미숙아로 태어난 딸 캐시가 마음에 걸려 하자 지오바니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캐시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했단 말이오? 난 언제나 당신과 캐시와 내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꿈을 꾸었다오"
한국에서도 여자의 딸까지 받아들이려는 총각이 있을까?
너무 사랑하니까 그 여자의 딸도 예뻐 보이는 심정, 이해가 된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꽤나 마초로 알려졌는데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내를 때릴 수도 있다고 공공연 하게 말하고, 실제로 마리아가 같이 가기를 거부하자 그녀의 뺨을 때리고 돌아선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남자의 권위가 훨씬 강하다면서 당신네 미국 여자들은 너무 드세다고 촌평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반적인 얘기일 뿐이고,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단단하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에서 메릴 스트립이 클린튼 이스트우드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도덕적 이유에서라기 보다는, 어차피 새 생활을 하더라도 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라는 회의적인 태도에서였다는 평론을 읽은 적이 있다.
<여정>에서도 캐서린 헵번은 여행지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를 사랑하지만 결국 미국으로 혼자 떠나고 만다.
새로운 삶에 대한 불안감, 혹은 하룻밤의 꿈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종착역>에서는 일회적인 사랑 보다는, 도덕적 의무감에 초점을 맞춘다.
지오바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마리아, 그러나 미국에 남아 있는 남편과 딸을 배반할 수 없는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남자를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어떤 게 옳은 태도인지 모르겠다.
선택은 언제나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을 치루기 마련이니까.
결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반드시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50년대 영화로서는 최상의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또 인간이 결코 감정에만 충실한 동물은 아님을 보여준다.

이상한 점은, 빈 열차에서 두 사람이 키스를 하다가 들켜 경찰서로 연행된 장면이다.
대체 왜 이게 불법인지 모르겠다.
극적인 사건으로 끼워 넣은 것 같은데 왜 불법인 걸까?
서장은 유부녀인 마리아의 처지를 고려해 더이상 취조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주는 아량을 베푼다.
이탈리아 경찰이 너무 무섭게 나와 왠지 후진국 분위기를 풍긴다.
마리아가 얼마나 고상하고 착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1등석 휴게실이 다 차자, 3등석 휴게실로 가서 쉬는데 임신을 한 부인이 쓰러지려고 한다.
인상이 나빠서 소매치기범인가 했는데 마리아는 그녀와 아이들을 데리고 의무실로 가서 도와주고 돈까지 주려고 한다.
밍크 코트를 걸치고 있는 것이나, 1등석을 이용하는 것 등을 봐도 그녀가 무척 부유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부인의 남편은 의무실로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돈을 받지 않는다.
마리아는 대신 아이들에게 초콜렛을 사 준다.
영국 광산에 일하러 갔다가 폐광 되는 바람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이 가엾은 부부는, 아내가 임신 중인데도 모텔비를 아끼려고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역 휴게실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부간의 격차나 빈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자연스럽게 삽입됐다.

<카사블랑카> 와도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다.
제니퍼 존스는 잉그리드 버그만 만큼 고혹적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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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scw 2021-08-2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 시대로부터 모든 길은 로마에서 끝나기 때문에 로마 역 이름이 termini(영어로 terminal)입니다. 그래서 그냥 역 이름을 제목으로 했는데 번역을 종착역이라고 직역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 이상의 도서관 4
아베 긴야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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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처음 접하는 소재는 낯설고 그닥 재미가 없다.
몰입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과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많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아 버린다.
이 책 역시 중세의 생활상이라는 다소 낯선 소재를 다루다 보니, 재밌게 읽을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읽다가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대충 한 번 읽은 다음 다시 반복해서 읽으니 어느 정도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독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배경시식이 아닐까 싶다.

유럽 영화를 보면 아침에 빵 사러 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저 사람들은 왜 주식인 빵을 집에서 만들어 먹지 않고 빵집으로 사러 가는 걸까, 가끔 궁금했었는데 이 책에서 해답을 발견했다.
빵 굽는 화덕를 설치하려면 상당한 돈이 들 뿐더러, 중세 이후 영주가 지정한 빵가게만 이용해야 하는 이른바 사용강제권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곡식을 찧는 것도 영주가 지정한 물레방앗간만 이용해야 했다.
집에서 수동 맷돌을 돌리거나 직접 빵을 구울 수도 있었지만 강제로 영주의 지정 가게를 이용함으로써 이중의 세금을 내는 격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집에서 절구로 곡식을 빻았고, 밥은 지금도 집에서 직접 해 먹는다.
아마 밥과 빵의 조리 과정의 차이일 수도 있겠는데 하여튼 문화의 차이가 새롭다.

중세의 특이한 점으로는 공중목욕탕이 있다.
로마 시대 욕탕은 귀족들의 향락 장소로 유명한데 중세의 욕탕은, 농민은 물론 빈민들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복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특히 귀족들은 연옥에 있을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이른바 목욕세를 유산으로 남겨 놓는다.
빈민들이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을 수 있게 돈을 지불함으로써 선행을 베풀어 자기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목욕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였는지 알 수 있다.
도제들도 목욕비를 따로 받아 일주일이 끝나는 날에 한 시간 정도 목욕탕 가는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한국 같은 경우는 공중 목욕탕이라는 시설 자체가 없었던 것 같은데, 현대에는 찜질방이나 사우나가 극성인데 비해, 유럽은 오히려 중세에 공중 목욕탕이 성행했을 뿐, 지금은 다같이 모여서 씻는 문화는 없는 걸로 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궁금하다.
중세에는 대형 빵화덕의 열기로 욕탕을 운영했다고 하는데, 기술의 차이는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한국인들 역시 욕탕 문화를 좋아하지만, 생활의 특성상 공중 목욕탕을 운영할 형편이 안 됐기 때문에 과거에는 못했고 현대에 와서 성행하는 건 아닐까 싶다.
중세 목욕탕이 쇠락한 것은, 곡물 가격이 떨어지면서 영주들이 공유지인 숲을 목초지로 바꾸면서 벌채에 돈을 지불해야 하면서부터다.
그동안은 숲에서 목재를 대는 것이 목욕탕 주인은 공짜였는데, 곡물 가격이 떨어지자 영주들이 숲을 점령하면서 벌채의 자유가 사라진 것이다.
목욕탕에서는 사혈 같은 민간 요법도 행해졌고, 여기서 갈라져 나온 것이 이발사였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머리와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이발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던 것에 비해, 유럽은 이발사의 전통도 길다.
목욕탕 주인은 이발이나 면도도 하고, 간단한 의술도 행했는데 이발사가 중세에 의사 노릇을 했다는 것도 여기서 같은 맥락이다.
재밌는 것은, 형리에게 고문을 받은 사람을 치료하다 보니, 형리와 마찬가지로 천민시 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 역시 귀족들에게 차별을 받으면서도 또 자기 아래에 천민 그룹을 형성해 무시하는 걸 보면 확실히 위계질서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모양이다.

중세 유럽의 생활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해 놨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그러고 보면 서양의 중세에 해당되는 신라나 고려 시대는 이 정도까지 세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요즘에는 학계에서도 일상사를 따로 연구하는 것 같은데 우리의 중세 시대 생활사도 많이 연구되었으면 좋겠다.
일본인이 쓴 서양 중세 생활사라는 점이 특이하다.
같은 시대를 한국과 유럽 식으로 비교해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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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 프라하의 봄 - [할인행사]
필립 카우프만 외 감독, 톰 헐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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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엄마랑 이 영화를 보다가, 첫 장면부터 여자가 벗는 바람에 꺼 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내가 봤던 충격적인 장면은, 병원에서 의사가 간호사에게 보여 달라고 하자 여자가 가운을 열었더니만 알몸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중학교 때였던가 그랬는데 속옷을 안 입고 다닌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 대체 "프라하의 봄" 이란 제목과 이런 야한 장면들이 어떻게 연관이 있는 건지 무척 궁금했다.
"프라하의 봄" 이라면 체코의 독립운동일텐데, 저 바람둥이 의사가 독립투사가 된다는 얘기인가? 싶었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다.
그냥 자유주의 운동은 배경으로 삽입된 것 같다.
주인공들의 삶을 뒤흔드는 인생의 큰 사건 정도로 소개될 뿐이지 주인공들이 투사가 된다거나, 이를테면 "화려한 휴가" 처럼 민주화 운동 자체가 주제로 쓰인 건 아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번역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다.
번역자가 멋대로 갖다 붙인 제목이 아닐까?
"프라하의 봄" 이 상징하는 의미와 내용은 너무 다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카데미 상을 받은 "나의 왼발" 에서 정박아 역할을 어찌나 잘 소화해 냈는지 지금까지도 약간 떨어지는 장애인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오늘 보니 정말 잘 생긴 미남 배우다.
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일텐데, 전혀 촌스럽지 않고 키도 훤칠하게 크고 얼굴에 세련미가 넘쳐 흐른다.
더불어 줄리아 비노쉬도 정말 예쁘게 생겼다.
피부가 얼마나 뽀얗고 예쁜지 옆에 가서 만져 보고 싶을 정도다.
키가 큰 루이스에 비해, 조그맣고 가녀린 줄리아 비노쉬는 마치 애기처럼 보인다.
미성년자처럼도 보인다.
프랑스 여자들은 키가 작은 편이라는 게 실감난다.
그리고 그녀의 영어 발음은 역시 외국인이라 그런지 약간 촌스럽고 부자연스럽다.
"웨이러" 를 "웨이터" 하고 정확하게 발음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여튼 이 여배우 정말 작고 아름답게 생겼다.

사실 영화는 좀 지루했다.
세 시간에 걸친 긴 영화다.
화면은 정말 아름답다.
카메라 감독이 기막히게 잘 찍은 것 같다.
특히 프라하에 소련군의 탱크가 들어 왔을 때 시위대들이 탱크에 올라가 항의하는 장면은, 중국의 천안문 사태에서도 본 것 같고, 5.18 민주화 항쟁 때도 본 것처럼 너무 익숙하다.
주인공들을 그 시위대에 삽입시켜 흑백으로 처리한 부분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살짝 흘렀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게 처절하고 가슴아픈 것 같다.
다행히 사진을 찍는 테레사가 잡혀 가거나 고문 당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5.18 을 다룬 영화에서 보면 구타와 고문이 너무나 일상적이라 국가 폭력은 언제나 끔찍하게만 인식됐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거의 없어 정말로 소련군이 야만적인 행위를 했는지조차 쉽게 각인되지 않는다.

토마스의 바람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가 사비나 대신 얌전한 테레사를 선택한 것은, 물론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똑같이 바람둥이인 사비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토마스가 여자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완고한 가부장주의자는 아니다.
나는 테레사의 말처럼, 사랑과 섹스가 어떻게 별개일 수 있는지, 섹스가 단지 플레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말처럼, 삶이 그렇게 가벼운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토마스는 작고 여린 테레사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자신의 플레이도 멈출 수는 없다.
부부 사이의 정절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그러나 무척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이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여 할까?
결국 테레사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토마스를 떠나 난장판이 된 프라하로 돌아간다.
그녀를 사랑하는 토마스도 혼자 버려진 것을 못 견뎌 되돌아 가지만, 전에 발표했던 반공주의 기고문이 문제가 되어 여권을 뺏기고 만다.
그 때부터 토마스의 사회적 몰락이 시작된다.

토마스는 반공주의 사상 철회서에 사인하는 걸 거부해서 병원에서 쫓겨난다.
결국에는 갈 데가 없자 시골 마을에 농사지으러 들어간다.
그는 공산주의나 외세의 억압을 혐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 투사도 아니다.
그는 정말로 엘리트 외과 의사에서 시골 농부로 전락한 것을 기꺼이 즐거워 하며 받아들인 걸까?
시골로 내려온 후 테레사는 바람 필 상대가 없어 자신에게 충실한 토마스와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
일견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정말로 토마스는 행복한 걸까?
저 불안한 행복은 얼마나 유지될까?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어처구니 없게도 비오는 날 트럭을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결국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 버릴 일시적인 행복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테레사는 술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산다.
둘이 처음 만나는 날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었던 인연으로, 테레사는 안나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하자, 생긴 건 꼭 수컷 같다면서 안나의 남편인 키레닌으로 붙이기로 한다.
한국의 보신 문화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수도 있지만, 아이가 없던 이 부부는 키레닌을 마치 자식처럼 돌본다.
테레사의 고백대로 언제나 어렵고 불안하던 당신보다 오히려 키레닌을 더 편하게 사랑했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암으로 키레닌은 안락사 하고 만다.
그들을 묻으러 가던 날, 테레사는 계속 속삭인다.
이제 편안해질거야, 아름다운 세상으로 갈 거야...
똘이 생각이 자꾸 나서 마음이 아팠던 대목이다.

사비나와 테레사는 마치 동성애라고 즐기는 것처럼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결국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카메라 앞에서 벗겨놓고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카메라가 곧 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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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pie 2008-04-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대로 [프라하의 봄]은 번역되면서 붙은 제목이 맞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프라하의 봄]은, 요즘은 원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소설입니다. 이 영화 원제도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입니다. '프라하의 봄' 이야기라기보다 그 때를 배경으로 한 '어떤 사람들' 의 이야기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

tereza 2010-10-30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귓가에 테레사가 "토마쉬"하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테레사로 분한 '줄리엣 비노쉬'가 정말 예쁘게 예쁘게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원작을 한반 읽어보시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는 한 개인의 삶이 역사, 세계, 국가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영향받고 영향주는지를 재치있게 쓰고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사건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체코출신의 밀란 쿤데라는 정말 지적인 작가더군요. 아무래도 영화와 책은 매체 자체가 다르므로 책을 영화화하는 것은 책을 먼저 접한 사람에게는 이래저래 부족한 것이 많이 보이지만 저는 영화는 영화대로, 책은 책대로 정말 좋았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책제목으로는 아주 멋지지만 영화 제목으로는 관객들에게 어필하기가 힘들 것 같기에 '프라하의 봄'이라고 지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원작을 한번 읽어보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민음사 우리말 번역본도 보시고, 영어원서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