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명화 편 청소년을 위한 교양 오딧세이 11
시아오링링 지음, 심정수 옮김 / 시그마북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서점에서 발견한 후 재미있을 것 같아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다.
처음에는 너무 흔한 그림들이라 설명도 거의 비슷하고 좀 지루할 것 같았는데, 이 책 나름의 장점이 있다.
일단 도판이 훌륭하고 그림 속의 인물을 꼼꼼하게 설명함으로써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전체 뿐 아니라 부분도 중요시 하는 장점이 있다.
"청소년을 위한 교양 오딧세이"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학생들을 상대로 쉽게 서술됐는데, 치명적인 단점은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화가의 생존연대도 잘못 됐고, 그림과 제목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있다.
또 화가의 성향이나 그림 방식 등을 대충 뭉개고 넘어가려는 경향도 보인다.
그림 자체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꼼꼼한 편인데 전체적인 서술은 다소 부정확하고 정밀하지 못해 아쉽다.
그렇지만 한 번에 쭉 읽기는 편하다.

익히 알고 있는 화가들이고 잘 알려진 그림이지만 책으로 보니 또 새롭고 감동적이다.
특히 게인즈버러가 그린 <푸른 옷을 입은 소년> 은 정말 매혹적이다.
어쩜 이렇게 파란색 질감을 잘 표현했는지...
초상화의 대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훌륭한 솜씨다.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도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가히 당대 사교계를 호령하던 여성답고 그녀의 장밋빛 피부를 기막히게 표현해 낸 다비드에게 감탄하는 바다.
부셰의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 정적이고 명상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렘브란트 그림도 다시 보니 경건한 느낌이 들 정도로 빛의 깊이가 깊다.
특히 다윗의 하프 소리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사울 왕의 모습은 얼마나 처연하던지!
지나치에 화려하다고만 생각했던 와토의 그림도 패트 갈랑트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정말 화가들은 위대하고 훌륭하다.
이 충만하고 고양된 감정을 이끌어내는 화가들의 예술혼과 솜씨에 늘 감탄하는 바다.
이제 유럽 미술관에 가면 감상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유럽으로 날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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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클래식 - 초보 클래식 매니아를 위한 클래식 입문서, 증보판
이헌석 지음 / 돋을새김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그야말로 초심자들이 부담없이 접하기에 좋은 책이다.
딱히 저자가 글솜씨가 좋다거나 곡 설명이 훌륭하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클래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이런저런 좋은 곡들과 명반을 추천받을 수 있어서 나름 유용할 것 같다.

사실 나는 듣는 건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귀로 듣는 것 보다는 눈으로 보는 게, 더 정확히는 읽는 게 훨씬 좋다.
내가 음악을 듣는 건, 음악 자체가 듣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주변 소음이 짜증날 때 그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꽂는 편이다.
특히 버스 탔을 때 기사들이 무식하게 라디오 볼륨 높힐 때가 제일 짜증난다.
지하철 탔는데 옆사람의 시시콜콜한 대화 내용을 생중계 해서 들을 때도 기분이 정말 나빠진다.
도서관에 갔는데 중고생들이 떠들 때 그 때 클래식을 듣는 편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어떤 곡을 듣다 보면 기분이 고양되고 갑자기 울컥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벅차 오르는 그런 느낌이 좋아서 음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아직은 곡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음반까지 골라가면서 들을 형편은 못 된다.

작곡가 별로 중요 음악들을 죽 나열한 방식은, 일견 지루하면서도 나름 유용했다.
역시 베토벤과 모짜르트는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뒷쪽에 현대 음악에도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새로운 곡 소개를 받을 수 있어 좋았다.
명반 설명하는 건 죄다 최고다, 훌륭하다 이런 식이라 약간 지루했지만 연주자들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되서 소득이 있다.
요즘은 CDP도 무거워서 안 갖고 다니다 보니 음악 파일로 찾게 되는 것 같다.
클래식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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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속의 미술관 - 불후의 화가 70인의 캔버스
쉬즈룽 지음, 황선영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서점에서 발견하고 표지가 예뻐서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다.
작가가 전문적으로 미술을 평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유기고가)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비교적 성실하게 잘 풀어간다.
글도 지나치게 어렵거나 또 너무 대중영합적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의 이주헌씨 정도 수준으로 글을 썼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글에 언급된 도판은 거의 다 실려 있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유파별로 정리하는 방식이 새로울 것은 없으나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 미술까지 쭉 한 번에 훑어주니 개념이 잡히는 기분이다.
르네상스 3대 천재라고 하는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피렌체파라고 묶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에 대비되는 베네치아 화파는 동시대 사람들인데 나는 라파엘로 다음 시대 사조로 이해하고 있었다.
티치아노가 무려 90세 가까이 산 걸 보면 르네상스인으로써 참 대단하다.
내가 좋아하는 루벤스는, 공방 시스템을 통해 하도 많은 그림을 양산해 서명한 것만 3000점이 넘는 바람에 미술 시장에서 그 값이 낮게 책정됐다고 한다.
그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구도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루벤스 다음에 등장하는 렘브란트의 명상적이고 차분한 그림도 이제는 무척 마음에 든다.
예전에는 너무 가라앉지 않았나 싶어서 관심이 덜 갔었다.
이 책에서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화가는 상징주의의 대표인 귀스타브 모로다.
신화나 성경을 주제로 한 모로의 상상력 넘치는 그림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
떠돌아다니는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베르테 모리조가 인상주의 전시회에 작품을 출전시켰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고 그녀의 새로운 그림도 여러 점 알게 돼서 기쁘다.
미술 사조에 대한 책은, 몰랐던 그림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전반적으로 쉽고 재밌게, 그러면서도 기본적인 수준은 유지하는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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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화사 깊이 읽기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1
서양사학자 13인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마음에 든다.
열 세 가지 사건을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술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2008년에 나온 책인데, 마지막 히잡 사건처럼 2004년 당시 결론으로 끝낸 점이나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이 2006년 현재 상태로 마무리 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현대사, 특히 정치 부분은 2008년 현재의 상황까지 언급해 줘야 시의성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맨 첫 장의 그리스 민족 기원설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이집트인이 바로 조상이라는 주장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들이 많아 꽤 열심히 읽었는데, 저자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저자는 트로이 함락 시기나 그리스인 이주 시기를 십 년의 오차 범위에서 정확히 잡는데, 과연 저자가 근거로 드는 문헌들을 100% 신뢰할 수 있냐는 문제가 생긴다.
내가 다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저자의 주장을, 학계에 통용되는 정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자의 책인,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보면 모세의 출애굽은 실제 사건이 아니다.
이집트로의 이민 물결은 특정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됐고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고고학적 발굴은 람세스 2세 치하의 대규모 탈출은 불가능 했다는 걸 입증한다.
핑컬스타인에 따르면 기원전 13세기의 이집트 탈출 사건은, 출애굽기가 쓰여질 당시인 기원전 7세기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므로 당연히 성경에 나온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일 수 없다.
그런데 <서양문화사 깊이 읽기> 의 저자는, 단지 성경에 나온 단 한 구절을 가지고 막연히 람세스 2세 때 출애굽이 일어났다고 전제한 후 논의를 펼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이집트를 지배한 힉소스인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대인과 페니키아인이 되었고 그리스로 가서 미케네인이 됐다는 것이다.
고고학자인 핑컬스타인은 성경의 기록을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지 않은 점을 들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성경을 일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비단 성경 뿐이 아니라 헤로도토스나 기타 전해 내려오는 역사서들의 기록을 전부 인정하는 입장이다.
나로서는 그리스인의 기원이 이집트인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우면서도,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해, 즉 문헌 증거만 들이대는 것 같아 아직은 의심스러운 입장이다.
저자는 의심하는 쪽을 단순히 동양기원설을 거부하는 서양중심주의자들의 협소한 소견으로 치부하는데 동의하기 힘들다.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성경 왜곡의 역사> 에서도 스파르타와 유대인이 형제라는 주장을, 믿을 수 없는, 당시 날조된 전설로 치부했는데 저자는 같은 힉소스인의 자손이므로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앞의 책에서는 스파르타와 유대인이 형제라는 마카오베서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한데 비해, 이 책의 저자는 마카오베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논의에 더 많은 근거가, 특히 고고학적인 발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맨 마지막에 실린 히잡 사건은, 뉴스위크 같은 데서 얼핏 본 기억이 난다.
1989년도 사건이라니, 상당히 옛날 얘기인데 2008년 현재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궁금하다.
종교적 상징물을 공공장소에서 착용할 수 없다는 정교분리원칙에 대하여, 왜 십자가 목걸이는 되고 히잡은 안 되는지 묻는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로, 심지어는 종교적 의미가 퇴색된 악세사리화 돼버린 십자가 목걸이와, 안 쓰면 처벌받는 히잡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좀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이슬람 여학생들이 히잡을 자유의지에 의해 착용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슬람 국가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에 대해서도 처벌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적, 종교적 비난도 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관용에 대하여> 라는 책을 보면, 이슬람 가정에서 여학생들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고 학교에서는 금지하기 때문에 이것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보기 보다는, 국가과 특정 집단 사이의 힘겨루기로 이해한다.
이슬람 공동체가 강요하는 것을 국가가 금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여학생들은 히잡을 벗을 자유, 즉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이나, 어쨌든 특정성에게만 강요되는 종교적 제약은 (특히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위반했을 경우 강력한 처벌 기제가 존재하는 한) 철폐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스탈린 시대를 분석한 글도 흥미로웠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곧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비슷한 의미라는 관점이 놀랍다.
나는 단순히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정권 유지를 위해, 마치 박정희처럼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미치광이 독재자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와 학살 기간이 너무나 컸다.
나치가 유대인을 공직에서 몰아내고 사유재산을 압수함으로써 대신 독일 시민계급은 그 이익을 분배받았다.
마찬가지로 스탈린이 농촌과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뺏은 재산을 프롤레타리아 전문가 계층이 나눠 가졌다.
서구로부터 자본을 빌릴 수 없었던 스탈린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을 집단농장화 시킴으로써 생산 기반을 마련한다.
쫓겨난 부르주아 전문가들 대신, 계급성을 띤 노동자들을 대학에 보내 프롤레타리아 전문가 집단을 양성한다.
숙청된 반동분자들은 당시 미개척지인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져 개발 노동력으로 착취당한다.
이것이 소련의 놀라운 산업화 비결이었던 걸 보면 숙청의 범위나 시베리아 수용소 규모가 독재 체제 유지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롤레타리아 전문가들은 소비에트 귀족이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등극한다.
능력보다 계급성, 즉 당에 무조건 찬성하는 충성심을 우선시 하는 특권층의 성장은 결국 소련 몰락의 중요 원인이 된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면 결국 몰락하고 만다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민주주의의 동력임을 새삼 확인했다.

서양의 결투 전통이 단순히 낭만적인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실은 국가 권력을 배제한 사적 해결책이었음도 새롭게 깨달았다.
중세 시대 생겨난 결투는, 두 사람이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수준이 아니라, 양측의 소규모 전쟁을 방불케 했다.
무력에 의한 사적 해결, 이것이 결투의 본모습이다.
절대주의가 들어섬으로써 국가는 공권력으로 귀족 계급의 사적 해결 방법을 억압한다.
오직 국가만이 처벌할 수 있다는 점을 천명하면서 결투 금지령을 내리고 어길 경우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심지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마녀사냥에서도 보이는데, 중세에는 마을 공동체에서 자체적으로 이단자를 억압했던 것에 비해 절대주의가 들어서면서부터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여져 학살 수준의 끔찍한 희생자들을 양산했다.
결투 전통을 보면 서양의 귀족 계급은 조선의 양반 계층과는 다르게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전사 계급이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재밌게 본 책이다.
여러 사람이 쓴 글인데도 통일성을 저해하지 않고 비교적 유기적으로 연결된 점이나 저자들의 글솜씨가 고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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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일단 책이 얇고 가벼워서 좋다.
항상 가방에는 무거운 책 때문에 가방 모양이 변형될 정도였는데 간만에 정말 가볍게 한 권 넣고 나갔다.
제목이 약간 도발적인데, 100%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양서만 읽는다 해도 말이다.
이 책에 소개된 다른 책의 주인공의 계산에 따르면, 어떤 도서관의 책을 전부 읽으려면 만 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나처럼 1년에 300권을 읽는다 해도 평생 만 권을 읽기 힘들 것이다.
책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은 계속 쌓여만 가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클래식 매니아들이 더 나은 것 같다.
적어도 현대 음악은 신간처럼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좋은 책만 선별해서 읽는 대신, 안 읽은 책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버리고 과감하게 "읽은 척" 하라고 한다.
다소 뻔뻔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인데, 꼭 책을 읽은 사람만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책이 주는 사회적인 맥락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는 책이 있고 관련 내용을 방송이나 다른 책에서나 주어 들었다면 아는 척을 해도 되고, 실제로 읽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장미의 이름> 을 든다.
수사관 기욤은 맹인 수도사 호르헤에게 자기가 읽지도 않은 금서의 내용을 줄줄 말한다.
주변 맥락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이 발라진 금서를 열지 않아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저자가 <장미의 이름> 줄거리를 죄다 까발린 것은, 이런 종류의 추리소설에서는 일종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줄거리와 시사하는 바를 인지하고 있으면 <장미의 이름> 이 화제에 올랐을 때 아는 척을 해도 된다.
고전을 요약해 주는 다이제스티브도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대체 누가 그 많은, 또 어려운 고전들을 일일이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읽을 수 있냐느 말이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어거지다고 생각했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쨌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책의 양은 한정되어 있고 엄격하게 책을 읽었을 때만 논쟁에 끼여 들 수 있다면, 요즘 같은 바쁜 세상에 책은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자꾸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만 해도 고전의 생명력은 충분히 유지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중의 수준은 한계가 있고,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 해도 모든 "위대한"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반드시 읽은 책에 대해서만 양심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책은 우리 삶에서 더욱 유리될지도 모르겠다.

창의력의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저자는 열심히 책을 읽는 독서가는 절대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미친듯이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서평가가 될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독서가인 다치바나도 르포 작가이지만, 본격 문학의 작가는 아니다.
남의 글에 지나치게 탐독하면 정작 자신의 독창성은 발전시키지 못한다는 말은, 충분히 가능한 지적이다.
책에 소개된 발레리라는 사람은 아예 남의 책은 읽지를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작가 지망생은 자신의 문체 확립에 애를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평범한 독자이고, 가능하면 많은 책들을 읽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위안이 됐던 까닭은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육체의 한계, 시간의 한계 때문에 넘쳐나는 이 지식의 향연을 완벽하게 만끽할 수 없다.
또 어떤 책이든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에 읽었다고 해서 내가 그 책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읽는 것에 대한 기준을 조금 더 완화시키고 책에 대해 부담없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싶다.
나는 쓰는 것보다 읽는 게 훨씬 좋기 때문에 작가로 나설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읽겠지만, 특정 책을 읽지 못했닥 해서 내 독서수준이 부족한가 싶은 이런 죄책감은 이제 갖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위대한 고전은, 가능하면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좋겠고 나도 읽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책과 내가 직접 읽은 책은 분명히 다르고 일종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읽는 책, 내가 느끼는 책, 서평가나 주변 맥락에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읽고 싶다.
또 완벽하게 읽겠다는 강박관념도 버리겠다.
재미없으면 던져 버리자.
좋은 책이면 나중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
책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숙제 같은 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지적이고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즐거운 행위다.

 

 

며칠 후 뒷쪽을 다시 읽어 보니, 내가 앞의 내용을 건성건성 읽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는 것은, 교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해 볼 계기를 얻기 위함이다, 가 바로 이 책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나다운 나를 발견하는 길의 하나가 바로 독서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만 권의 책을 읽기 보다 한 권의 책을 쓰라는 식의 주장은, 형편없는 글의 출판이라는 점에서 나는 매우 부정적으로 보지만 다른 의미로 본다면 글쓰기야 말로 어쩌면 독서 그 자체 보다 한 단계 위의 창의적인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일견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 내가 가치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식의 상대적인 평가를 중요시 한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면서 말이다.
마치 뒤샹이 소변기를 갖다 놓고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다수가 훌륭하다고 (특히 수준높은 지식인들이) 평가한 것은, 대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절대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상대성의 범위가 너무 넓어지면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혼란의 상태가 되고 이것은 실제적인 가치물을 생산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
그렇지만 남의 평가에 너무 주눅들지 말고 나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가 틀렸으면 어떻게 하나, 저자의 생각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이런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좀 더 과감해져야 한다.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 를 나는 재미없게 읽었는데 리뷰들이 너무 좋아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참 껄끄러웠다.
그런데 이제 보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책이든, 심지어 그 책을 쓴 저자마저도 그 책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책을 쓸 때의 저자와 출판 후의 저자는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100% 같은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비평가들이 분석해 놓은 걸 보면 정말 저자가 저런 의도로 썼을까 의심스러울 때가 많은데, 저자들 역시 자기 자신의 당시 의도를 헷갈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손을 떠난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는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심지어 읽지 않은 사람조차 당당하게 책에 대한 자기 의견을 밝히라고 종용하는 판인데, 읽은 사람이 뭘 두려워 하겠는가?
한 문화의 공통된 심상인 집단적 도서관과, 각자의 개인이 느끼는 내면적 도서관 속에서 한 권의 책은 특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저자는 하나의 예로써 티브 족이 이해하는 햄릿을 든다.
미국의 인류학자가 티브 족에게 햄릿의 줄거리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인간의 보편성 때문에 그들이 자신과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티브 족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일단 햄릿의 죽은 아버지가 나타난다는 것부터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에게 유령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또 햄릿의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냐고 묻는다.
여자 혼자서 어떻게 밭매기를 할 수 있냐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햄릿 어머니의 부도덕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가치관이나 문화적 개념들이 없다면 전혀 다른 독법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 역시 16세기 영국의 극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이해하는 것 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냐가 더 중요하며 심지어 내용을 직접 읽지 않아도 쟁점이 되는 상황들만 파악한다면, 즉 책이 주는 주변 맥락만 이해한다면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충 귀동냥으로 듣는다면) 얼마든지 그 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내면의 도서관, 그리고 집단의 도서관, 굉장히 창의적인 발상 같다.
결국 인간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는 존재이고, 좀 더 세분화 시키자면 나라는 개체의 특성을 지닌 매우 개성적인 존재다.
뻔뻔할수록 더욱 자기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가 센 사람이 자신이 변화되는 대신 남을 변화시키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개성을 죽이고 집단에 동화되는 걸 매우 중요시 하는데, 확실히 서양은 개성의 발화를 가치있게 여기는 느낌이다.
하여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나라는 사실은, 심지어 독서에서조차 통용되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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