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면 갑자기 인생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살아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연체가 되는 바람에 끝까지 못 읽고 반납하게 됐다.
저자의 이력이 매우 특이하다.
장제스의 군관학교 출신으로 버마 전선까지 나가서 싸웠고 예편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을 전전하다가 40이 넘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역사학을 전공한 후 뉴욕주립대 교수로 퇴직했다.
퇴직 후 활발하게 중국 역사 서적을 편찬하고 있다고 한다.
40이면 자기 분야에서 업적을 이룰 나이인데 그 때서야 전직 군인이 전혀 새로운 분야로 뛰어 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이 놀라운 만학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보통 한 나라의 역사를 개괄하는 이런 종류의 통사는 지나친 압축과 생략으로 맥이 빠지기 쉽다.
그런데 저자는 거시사라는 단어에 걸맞게 전체적인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을 택해 600페이지 분량의 저술이 하나의 주제로 수렵되는 효과를 거둔다.
궁극적인 주제는 중국의 자본주의 이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 실린 비판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중국 역사를 조망했다.
영국이 도시국가로 변형되는 과정이 수백년 걸렸듯 비록 중국은 수천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제는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전제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완벽하게 이행했고 그 체질개선의 과정을 흥미로운 필체로 기술한다.
특히 송나라의 상업주의가 자본주의로의 변화를 가져올만큼 활발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매우 날카롭다.
사실 이 주장은 한국 학자의 책에서도 읽은 바 있다.
왜 왕안석의 그 놀라운 개혁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에서 오히려 국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책에서 잘 분석한다.
화폐만 유통하고 돈만 빌려 주면 끝이 아니라, 금융업이나 대부업, 관련 법규 등등 제반 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에나 볼 듯한 여러 상업 육성 정책을 폈으니 실패나 혼란은 예정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왕안석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개 현령으로 있을 때 성공을 거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범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전역으로 확대시키기에는 정치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복잡한 중국 역사도 자주 접하다 보니 각각의 독립된 대상으로 인지가 된다.
송나라의 경우 그림을 잘 그렸다는 휘종이나 왕안석를 등용한 신종,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세울 때 인용된 철종 등이 하나의 인물로 다가온다.
삼국지에서 봤던 후한의 황제들도 누가 누군지 좀 알 것 같다.
당나라의 태종이나 현종, 측천무후 등도 어느 시대를 살았는지 대강 윤곽이 잡힌다.
이래서 독서는 즐거운 일이다.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니까.

책을 더욱 빛나게 해 주는 것은 역자의 꼼꼼한 각주다.
대강 뜻만 설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관련 지식을 성실하게 설명해 준다.
번역도 퍽 매끄럽다.
특히 저자가 미국에서 활동하다 보니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데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교하기 때문에 훨씬 이해도 빠르고 재밌었다.
이를테면 측천무후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비교하는 식이다.
구체적인 비교는 아니지만, 예시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이런 비교사적 작업은 저자처럼 양쪽 문화권에서 충분히 오래 산 학자들이 하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국 결과론에 기대어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서양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성공했고 중국은 실패했다.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한계다.
어떤 역사서도 인과론을 설명할 때 결과에 맞춰 과거를 해석한다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수 천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과거의 영광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함이 안타깝다.
언젠가는 그 위대한 민족의 저력을 발휘할 날이 오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은 중국을 얼마나 낙후시켰던가!
레이 황의 다른 저서도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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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의 만남 -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
제리 벤틀리 지음, 김병화 옮김 / 학고재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책을 만난 기분이 든다.
반납 기일이 지나서 못 읽고 갖다 줄 뻔 했는데, 어찌어찌 시간을 내서 읽게 됐다.
요 근래 독서에 대한 욕구가 시들해져 빌려 놓고도 그냥 반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좋은 책을 두 권이나 읽어서 기쁘다.
사실 이 책은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다.
1992년도에 쓰여진 책이니 벌써 20년 가까이 됐을 뿐더러,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것도 2006년이니 신간은 아니다.
도서관에조차 구입이 안 된 걸 보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운데 다행히 희망도서로 구입해 줬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분량도 250페이지가 약간 넘고 내용도 체계적이며 쉬운 문장으로 쓰여져 술술 읽을 수 있다.
내 경우는 관련 지식을 찾아 보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하나의 전체적인 개념으로 정리되는 기분이다.

보통 문명의 교류라고 하면 콜럼버스의 대항해 이후를 생각한다.
15세기가 되서야 비로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고 본격적인 교역이 시작됐다고 본다.
저자는 교역의 역사가 고대로부터 존재했고 그 범위는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입증한다.
아메리카가 신대륙으로 불리는 이유는 비단 서구적인 시각 때문만이 아니라, 그 교역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세아니아나 아메리카가 독자적인 발전을 한데 비해 (상당히 느린 속도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즉 구대륙은 고대로부터 이미 활발한 교역을 했고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러므로 이미 구대륙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됐다고 본다.
책에서는 기술이나 문명의 전파 보다는 문화적인 것, 즉 종교를 주소재로 설명한다.
따지고 보면 종교의 전파야 말로 문명 교류의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극동의 일본에까지 전해져 국교가 된 걸 보면 고대 세계의 문명 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의 전파 역시 마찬가지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일상을 지배했고 기독교 역시 마니교나 네스토리우스파와 같은 변형종교로써, 마태오 리치가 중국 땅에 발을 딛기 한참 전부터 당 제국에 교리를 설파했다.
단순히 변경지대에서 호기심 어린 이국적 종교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세계 종교가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활발한 교역의 명백한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알파벳이나 한자의 전파는 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 같다.
베링 해협의 육교가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먼 땅을 걸어서 아메리카까지 넘어가고 이미 신석기 시대때 통나무를 만들어 오세아니아 대륙까지 건너갔을 정도니 과연 인간의 이동 욕구는 놀랍다.

저자는 새로운 문명이 타 문화권에 전파되어 이식되는 힘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분석한다.
사실 이 책이 훌륭한 것도 바로 이 동기를 분석했다는데 있다.
왜 사람들은 낯선 이방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정치적,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로 상인들을 통해 전파되는 새로운 문화는 지배 엘리트 계층에 의해 수용되고 하층민들의 모방 욕구에 따라 널리 전파된다.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이득이 되는 문화를 받아들인다.
당연히 상인들이 전해주는 문화는 선진적인 경우일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자발적인 제휴로써, 선진 문화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것이 지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므로 받아들인다.
삼국 시대 때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것 등이 이런 예가 될 것이다.
혹은 우리가 미국 문화를 모방하는 것, 특히 뉴욕 문화를 동경하는 것도 비슷한 예가 될 것 같다.
엘리트 계층은 선진 문화를 먼저 수용함으로써 피지배 계층에 대해 우월 의식을 공고히 한다.
둘째 강압적인 복종이 있다.
몽골이나 제국 시대 때의 유럽 등을 들 수 있다.
혹은 이슬람의 성전 등도 여기에 해당한다.
종교 박해나 탄압 등이 생기고 저항이 극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존속을 유지시킬 힘을 제공받지 못하는 이상 지배층의 문화를 내면화 시키고 만다.
셋째 소수 집단의 동화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전파된 마니교인데, 기독교의 발상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본류와의 교류가 끊기고 특별한 사회적 이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공동체가 와해되고 만다.
자연스럽게 다수파에 섞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유럽 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한국 역시 거대한 중국 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적절한 교류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지켜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사대외교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세계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절충주의가 필수다.
가끔 개신교에서 가톨릭의 성인 숭배를 극렬하게 비판하는 것을 보는데, 2천년에 걸친 기독교의 긴 역사를 전면 부정하는 피상적인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종교든지 오랜 기간 동안 순수성을 유지할 수는 없다.
만약 기독교가 이교도와 타협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사실은 예수 탄생일이 아니라 이교도의 축제일이었으므로 기념하지 않겠다는 어느 교파의 주장을 듣고서 문득 드는 생각이, 그렇다면 개천절은 왜 쉬는가?
단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근거로 10월 3일에 나라를 건국했다는 걸 믿냔 말이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토착 신앙과의 절충을 시도했고 성공한 종교는 보다 많은 문화권에 퍼져 나간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제사 등을 문화권의 차이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였으나, 그 후 교황의 잘못된 판단으로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제사를 우상숭배로 금지하면서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던가?
현재 가톨릭은 제사를 조상에 대한 기념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의 박해 때 제사 문제로 죽어간 그 엄청난 교인들은 얼마나 무가치한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단지 해석의 차이로 말이다.
하여튼 종교의 기본적인 교조나 핵심 가치는 보존되어 하겠으나, 근본주의식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가끔을 무섭기까지 한 순혈주의는 오히려 종교의 범위를 축소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기독교가 비판에 직면한 것도 근본주의적인 편협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외에도 권력과 결탁해 마치 교회에 나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방법의 하나로 인식되는 어처구니 없는 분위기도 한국에서는 한 몫 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좀 더 넓은 시각으로 고대사를 바라봤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역시 정통 역사학자의 책은 논리정연하고 지나친 비약이 없어서 읽을 때 마음이 참 편하다.
논리의 비약, 무리한 확대 해석이야 말로 아마추어 사학자 혹은 재야 사학자라는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널리 소개가 되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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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현대 화가들 -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다카시나 슈지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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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 전부터 읽으려고 찜해 놓은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됐다.
원글은 1969년에 일본의 미술 잡지에 1년간 연재된 아주 오래된 글이고, 책은 2005년에 출간됐으니 신간은 아니다.
희망도서로 구입해 준 도서관에 감사드린다.

다카시나 슈지의 책은, <명화를 보는 눈> 과 <예술가와 패트런> 을 읽은 바 있다.
이 책까지 포함해 세 권 모두 평이하고 쉬운 언어로 미술사에 대해 잘 조망해 주고 있다.
그야말로 미술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쉬운 입문서 역할을 한다.
일본의 국립 서양 미술관 관장이었다는데 지나치게 어렵거나 전문적이지 않고 글을 비교적 쉽게 쓰기 때문에 읽기 편하다.
또 번역자의 말대로 책에 나온 그림을 가능하면 다 실어주려고 애쓴 출판사의 공로도 책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아쉬운 점은 작품의 원어 병기가 없어 인터넷에서 찾으려고 할 때 애를 먹었다.
사실 전부 유럽 작가들이라 영어 표기 역시 원어는 아니겠지만 하여튼 일관된 명칭 표기가 없어 다른 곳에서 같은 작품을 찾기가 어려웠다.

현대 미술은 언제나 어렵고 다소 괴상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자주 접하면서 조금씩 그 편견이 깨지는 느낌을 받는다.
뭔가 느낌이 온다고 해야 할까?
지난 번 칸딘스키전 때 직접 그 화려하고 역동적인 색체의 미학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책을 통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했을 때 작품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브란쿠시의 그 유명한 <공간 속의 새> 역시 처음 볼 때는 대체 이게 왜 새냐, 이런 식의 추상 조각이면 아무거나 만들어 놓고 이름만 붙이면 되겠다, 이런 반발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책을 보면서 그의 조각 철학을 이해하게 됐다.
저자의 설명대로, 브란쿠시는 정지해 있는 새를 표현하고 싶은 게 아니라, 움직이는 새, 날아오르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고기를 조각할 때 사람들은 생생한 비늘까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물살을 가르고 헤엄쳐 가는 그 역동적인 모습을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브란쿠시는 죽은 물고기를 똑같이 조각하는 대신, 물 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그 느낌을 추상적으로 조각한다.
또 그는 바라보고 감탄하는 조각품 대신, 만지면서 기뻐할 수 있는 촉각적인 느낌도 중요시 한다.
나중에는 맹인을 위한 조각이라는 부제까지 달았다고 한다.
촉감으로 감상하는 조각이라, 정말 멋진 발상이지 않은가?
굉장히 잘 생긴, 정말 예술가처럼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생긴 그의 사진을 보면서 루마니아의 농민 출신이라는, 그래서 언제나 혼자 작업하고 혼자 모든 과정을 직접 수행해 낸다는 투박하고 건실한 이미지가 맞아 떨어져 더욱 관심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매끈한 그 조각상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에밀 놀데나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도 책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놀데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네모난 가면을 쓴 남자를 그린다는 화가로 잘못 알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지를 의미한다는 아웃벡에 가면 그 그림이 있는데 대체 누구와 착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놀데의 <트리오>도 색감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빨강, 노랑, 파랑의 강렬한 원색 대비가 정말 형태는 아무 의미도 없구나, 색체만으로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이런 감탄을 유발하게 만든다.
키리코의 그 기묘한 광장의 조각상 그림도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된다.
단단한 형태로 분명하게 사물을 표현하면서도 정작 전체적인 분위기는 기묘하고 몽환적으로 표현한 키리코는, 마치 물주머니 모양으로 흐느적 거리는 달리의 초현실주의와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그가 즐겨 그리던 이탈리아의 궁전에 아드리아네의 조각상도 있고 바나나도 있고 놀이 지는 어두운 풍경도 있다.
기차도 달린다.
그 노란색의 색체가 어울어지면서 뭔가 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저녁놀이 질 무렵, 아직 어둠이 깔리기 전 오후 햇살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을 때 기묘해지는 그런 느낌처럼 말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될 결심을 했다는 이브 탕기나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등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는 바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현대 화가로는 콜라주 작품으로 대표되는 다다이스트 슈비터스와, 오르피즘으로 대표되는 피카비아가 있다.
둘 다 생전 처음 듣는 화가다.
사실 콜라주는 이미 회화라고 하기엔 어떤 선을 넘어버린 기분이 들어 크게 관심이 없다.
더더군다나 파괴를 위한 파괴라는 수식어에 딱 들어맞는 다다이스트라니!
음악과 색의 조화를 꾀한 피카비아는 이번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화가다.
말 붙이기 좋아하는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이라는 조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음악의 명수 오르헤우스에서 비롯됐다는데 정말 그 느낌을 잘 표현한다.
나는 라파엘로나 다비드처럼 대상을 명확하게 그린 고전주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칸딘스키 그림을 보면서 내 취향이 형태보다는 오히려 색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흐를 좋아하는 것도 그 강렬한 노랑과 녹색의 원색이 주는 포스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색으로 느낌을 표현한 오르피즘의 화가 피카비아가 무척 마음에 든다.
실제로 보면 더욱 감동할 것 같다.
특히 3m에 달하는 <우드니>는 더욱 그렇다.
뉴욕으로 가는 배 안에서 발레리나의 춤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퐁피두 센터에 있다는데, 대체 나는 거기 가서 뭘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기억에 전혀 없다.
넝마같은 옷 전시해 놓은 작품 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오르피슴의 다른 화가인 들로네의 그림도 무척 마음에 든다.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화가들을 열 두 명으로 국한시키고 특히 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덕분에 짜임새 있는 책이 된 것 같다.
그림 소개도 훌륭하고 현대 회화에 문을 연 화가들의 예술관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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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심리학 - 진정한 행복 만들기
마틴 셀리그만 지음, 김인자 옮김 / 물푸레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칙센트미하이의 <Flow>가 더 나은 것 같다.
긍정심리학의 원조라고 하는데, 자기계발서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책은 좀 더 학문적이고 원칙적이다.
<Flow> 만큼의 감동이 없다.
새겨 들을 만한 문구는, 대표강점을 살리라는 충고였다.
대략 15가지 정도로 나누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지적 호기심이 충족됐을 때 가장 기쁘고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전날 당직을 서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 후 도서관을 찾았을 때 책 내용이 마음에 꽂히면 뭔가 가슴에서 꽉 차 오르는 충만감을 느끼게 된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런 지적 만족감을 추구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저자가 일시적인 쾌락과 지속적인 행복을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재밌는 영화를 봤을 때 등 순간적으로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쾌락의 감정이다.
반면 자기절제나 인내심, 용기, 사랑 등은 지속적인 행복감으로 금방 질리는 쾌락과 달리 꾸준하게 유지되고 감정을 고양시킨다.
확실히 쾌락은 쉽게 사라진다.
크리스피크림의 오리지널 글레이드를 한 개 먹었을 때는 그 달콤함이 입 안에 퍼지면서 황홀하기까지 한데 두 개째 들어가면 질리기 시작하면서 세 개째 먹으면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영화를 봤을 때도 그렇다.
영화가 막 끝났을 때는 온 몸이 감동의 물결로 전율하는데, 몇 시간 지나면 금방 잊혀지고 다시 봤을 때는 시들한 경우가 많다.
반면 직장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올라 부서원들을 지휘한다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룬다거나 어떤 작업을 끈기있게 수행해 냈을 때 드는 기분은 보상도 확실하고 영속적일 뿐더러 그 후의 인생에 큰 자신감을 불러 넣어주고 근본적으로 내 태도와 사고방식을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시킨다.
작은 성공들이 모여, 즉 훌륭하게 해냈다는 성공의 기분들이 모여 점점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표강점들을 키워 지속적인 행복을 찾도록 노력하자.

아이 양육에 있어 무엇보다 칭찬이 중요한 방식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체벌은 이제 구닥다리 양육방식이 된 것 같다.
오히려 아이와 거래하라는 현실적인 충고가 마음에 든다.
그렇지만 자주 써먹어서는 안 되고 보상과 동기가 확실할 때 극약처방으로 써야 한다.
매일 밥을 먹이기 위해 장난감을 사주는 것 등과 같은 일상적인 일에 써서는 안 된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런 양육에 관한 부분도 관심이 많이 간다.

지하철에서 대충 읽은 책이라 깊이있게 보지는 못했지만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내 생활에 적용시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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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유령 - 아웃케이스 없음
밀로스 포만 감독, 나탈리 포트만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제목이 마음에 들어 보게 됐다.
사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모르겠다.
굉장히 독특한 영화임은 분명하다.
초반에는 살짝 지루했지만 곧 집중해서 보게 됐다.
결말이 인상적이고 여운이 남았다.
나탈리 포트만이란 여배우는 이름만 들었지 실제 영화에서 본 건 처음인데 정말 연기를 잘 한다.
로렌조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잘 그려냈다.
마지막 사형 장면, 그리고 그의 시체가 달구지에 실려 골목길을 지나가는 장면은 영화의 끝마무리로 훌륭했다.
역동의 시대를 살아간 이들, 문득 스페인의 역사가 한 많은 한국인의 역사처럼 구구절절하게 느껴지고 <스페인사>를 빨리 읽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고야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인데, 그 번득이는 감각과 필력이 인상적이다.
스페인과 고야는 분리해서 생각하기 힘들 만큼 고야는 스페인 그 자체인 것 같다.
고야의 그림에 대해서는 큰 언급은 없었지만, 고야라는 위대한 화가와 혁명의 시대를 잘 버무려 놨다.
종교재판에 관해서는, 이미 기독교라는 것에 대해 신앙과는 별개로 회의가 들 만큼 들었기 때문에 더 분노하고 말 것도 없는 상태라 담담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한 그 끔찍한 고문과 억압의 시대, 권력과 밀착된 교회 조직의 무자비함, 교조주의, 정말 종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인가?
종교가 개인 차원에서 국한되지 않고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끼칠 때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의 종교적 억압과 통치도 함께 혐오한다.
자백과 심문, 고문을 통해 신의 자비를 구하다니, 너무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더 언급할 가치조차 못 느낀다.
정말 우리의 구세주 주님은, 어떤 세상을 원하시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지만, 종교의 이런 만행을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져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나라나 마냥 행복하고 순탄할 수 만은 없음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특별히 한국이라 해서 역동의 세월을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도 어찌 보면 패배주의일 수 있다.
스페인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기독교의 그 어두운 역사에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기회가 되면 스페인을 방문해 보고 싶다.
인상적인 영화였고 더불어 스페인 회화에 대한 관심도 많이 생겼다.
영화가 주는 두 시간의 즐거움을 만끽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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