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이야기 - 인간은 어떻게 7대양을 항해했을까? 아이필드 히스토리 History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이덕열 옮김 / 아이필드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반 룬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인류 이야기> 같은 시리즈는 꼭 읽어 보고 싶었다.
일단 <배 이야기>부터 집었는데 절반 정도 만족한 것 같다.
이 사람은 전문가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잘 하는 저널리스트 같다.
글을 참 잘 쓴다.
번역을 했는데도 그 문장이 아름다워 특히 소리내서 읽으면 더욱 빛이 난다.
반면 내용 자체는 아주 전문적이지는 않다.
그냥 적당한 맛보기 정도?
교양서로서 나쁘지는 않지만 지식 보다는 주변 이야기에 치중하는 느낌도 피할 수는 없다.

배는 내가 제일 모르는 분야 중 하나다.
여기 나오는 선상함, 순양함, 호위함 같은 용어도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았건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용골이니 흘수니 하는 전문적인 용어는 아예 포기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봐도 무슨 얘기인 줄 모르겠다.
차라리 당시 선원들의 삶이 훨씬 흥미로웠다.
선원의 낭만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19세기의 선실은 곧 고문실과 다름없었다.
<타이타닉>에 보면 증기 엔진에 석탄을 떼는 인부들이 나오는데 화려한 1등석 손님들의 모습과 너무 비교돼서 비참한 느낌이 더 강했다.
좀 오버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 책을 보니 딱 그 모습이었을 것 같다.
3등석 손님보다 더 비참한, 정말 사회 최하층민이 바로 선원이 됐다고 한다.
가끔 선원들의 이상한 미신이나 관습을 보면 너무 유치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 책을 보면서 이해가 됐다.
인간이 바다를 정복하고 제대로 된 항해를 한지는 불과 몇 십년 사이다.
파도에 몸을 의지한채 그저 하늘에 맡기는 불안전한 항해를 수천년 동안 해 오면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이해가 갔다.
예수님의 형상을 그려 놓으면 채찍이 피해 간다는 미신을 다른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아, 정말 그렇게라도 믿고 싶었을 그 가엾은 선원들의 심정이 이해됐다.
배의 규율은 너무나 혹독해 정말 사소한 실수라도 무자비한 채찍질이 되기 일쑤였다.
특히 상급자에게 대든다거나 하는 항명이 있으면 그 선원은 보트에 태워져 전 함대를 돌면서 채찍질을 당해 보통 다 돌기 전에 숨을 거둔다고 한다.
이 부분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하던지 몸서리가 처졌다.
아무리 현대의 삶이 각박하다느니 어쩌고 해도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 과거보다는 훨씬 살기 좋아진 것 같다.
선원들이 겪었던 그 비참한 생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 기술을 발달시킨 인간의 호기심과 탐험욕과 대비된다.
선상 반란이 왜 자주 일어났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너무나 비참한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그린 삽화가 책을 예쁘게 만든다.
이 사람은 참 재주가 많았던 것 같다.
즐겁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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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일곱 계단
에드워드 멘델슨 지음, 김정미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막연히 제목만 듣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논하는 책인줄 알았다.
제목이 좀 지루하지만 내용은 상당히 괜찮다.
보통 왠만한 책은 도서관에 있기 마련인데 이 책은 어지간히 홍보가 안 됐는지 비치가 안 됐길래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아마 신문이나 알라딘 서재 어딘가에서 리뷰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알라딘 서재의 도움을 참 많이 받는다.
서점에 가서 직접 책을 고르는 것도 즐겁지만 그보다는 알라딘 서평에서 좋은 책들을 많이 발견한다.
특히 나와 취향은 좀 다르지만 수준있는 책들을 많이 알게 해 주는 나귀님!
댓글 다는 걸 일종의 태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예 댓글 차단을 하는 바람에 직접적으로 표현은 못하지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은 끝까지 못 읽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반납일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시간이 부족해도 억지로 읽게 되는 강제성이 있어서 좋으면서도 바쁜 나머지 대충 읽게 되는 폐단이 있다.
하여튼 시간이 부족해 내가 읽은 책인 브론테 자매들의 소설 부분만 봤다.
<제인 에어>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소설인데 어떤 평론가가 대중소설에 지나지 않다는 식으로 비하를 했길래 속상했다.
특히 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기쁘게도 <제인 에어>를 <폭풍의 언덕> 보다 훌륭하게 평가했다!
사실 나는 책을 읽고 평가하는데 있어 평론가나 독자 다수에 의해 좌우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모든 독서는 제각각 자기만의 방식이 있으며 평가받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본격적인 문학 평론이야 다른 문제겠지만 적어도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수가 환영하는 책이라도 내가 별로라고 느끼면 과감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참 지루하고 재미없게 읽은 책이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도 마찬가지.
그런데 서평란에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 감상문 올리기가 참 민망하고 혹시 내가 오독을 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작가 자신마저도 자기 책에 대한 생각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한다.
모든 독서는 매우 개인적인 일이라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지극히 개인의 문제이므로 백 명이 읽으면 백 개의 감상이 존재하고 언제 읽느냐에 따라 같은 독자마저도 느낌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게 바로 독서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단 고전이라고 인정받는 책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읽어 보려고 애쓰는 편이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다는 것은 절대로 섣불리 비난할 수 없으며 나름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이 책은 <폭풍의 언덕> 과 <제인 에어> 에 대해 새로운 분석을 내놓는다.
나는 <제인 에어>를 정말 너무너무 재밌게 읽은 데 반해, <폭풍의 언덕>은 매우 힘들게 읽었다.
도대체 그 기묘한 캐릭터들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제인 에어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캐릭터인데 캐서린과 히드클리프는 주변에 있으면 피하고 싶은 인물들이다.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고 격정에 싸인 두 인물, 남을 전혀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광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 두 사람은 정말 위험하다.
저자는 이 둘의 캐릭터를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는 인물들로 봤다.
너는 곧 나의 일부다, 나와 같다는 표현에서 나는 문득 <사랑과 야망>의 미자와 태준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격정적인 성격의 캐서린은 미자와 비슷하다.
태준이 재혼을 하려고 하면서도 미자에게 소리치기를, 내가 어떻게 널 버리겠느냐, 나는 평생 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면 너는 곧 나니까, 라고 말한다.
그 때는 좀 괴변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 딴 여자와 재혼하면서 미자에게 나는 영원히 너에게 속해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얘긴가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 장면이 이해됐다.
태준의 심정이 이해됐다.
너는 곧 나다, 너와 나는 서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해도 영원이 서로에게 속해 있다.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이 그랬다.
둘의 성향은 너무나도 비슷하고 서로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육체관계를 갖는다 해도 여전히 두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저자는 이들이 섹스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육체적 합일이야 말로 어쩌면 별 게 아닐지 모른다.
정신적인 일치감, 서로에 대한 강한 구속력, 둘은 그래서 각자의 배우자에 대해서 별로 질투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과 매우 구분된다.
나는 에밀리 브론테가 추구했던 그 합일성, 일체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김수현 작가가 이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건 아닌지 궁금하다.

반면 <제인 에어>는 평등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제인의 그 독립적인 성향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자존감을 지키고 물질이나 사랑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참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이 소설을 평등한 개인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가난한 가정교사 제인은 부유한 로체스터에게 비록 사랑으로 만났지만 예속될 수 있었다.
그녀는 단호히 아내가 있는 로체스터를 떠난다.
나중에 제인은 부자가 되고 로체스터는 아내 버사의 방화로 아내와 재산을 모두 잃고 심지어 한쪽 팔과 눈마저 잃는다.
그제서야 제인은 당신과 내가 평등하게 만나 사랑을 할 수 있게 됐음을 감사하고 그와 행복하게 결혼한다.
19세기 여성의 소설이란 걸 감안하면 정말 놀라울 만큼 독립적이고 자립적이지 않은가?

소설의 의미를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의 의미를 밝힌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시도가 돋보이고 인간의 희노애락을 자연스럽게 이애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정독하고 싶고 책에 소개된 다른 소설들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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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한의학 ,보약이 있다구요! 그게뭔데요!! - 닥터지바고의 건강이야기
남복동 지음 / 아이올리브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제목부터가 참 마음에 안 든다.
이렇게 길게 지으면 기억하기도 어렵다.
좀 더 강렬하고 인상적인 제목 짓기가 그렇게 힘든가?
시도는 좋았으나 내용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예전에 한의학의 허실에 대해 자세히 분석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 역시 저자의 필력 부족으로 내용에 비해 포장이 너무 형편없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좀 더 필력을 갖춘 전문가가 나서 줬음 좋겠다.
박경철씨처럼 글솜씨가 있는 사람들이 이 쪽 연구를 해서 책을 내면 참 좋을텐데 아마 그 분은 주식이나 기타 다른 책 쓰느라 한의학까지 연구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취지 자체는 공감한다.
의료일원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다.
일본처럼 한의학이 하나의 접근 방법으로 인정되어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가 전공을 선택할 때 내과나 외과처럼 한의학을 선택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
제일 인상깊었던 구절은 인식의 패러다임에 갇혀 사실을 외면한다는 인용문이었다.
관념적인 생각, 낡은 패러다임, 사고론, 생각 체계 등등 정신적인 이론이나 논리 때문에 실제적인 현상과 사실을 왜곡시켜 해석하고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이를테면 4체액설 등이 그렇다.
현대의학에서는 누구도 그리스 로마 시대에 나왔던 4체액설이나 4원소설 등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의학에서는 사상체질이나 기 같은 얘기를 한다.
의학이 철학일 수 있을까?
의학은 데이터와 실험, 검증 등을 통해 입증되야 하는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한의학의 접근 방법, 이를테면 침이나 부항, 생약 같은 치료법에 대해 환자를 보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내세우는 체질이니 기가 허하다느니 음양오행설이니 하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얘기들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한의학과 의학이 서로 대립 관계가 되어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것도 국민 건강 측면에서 보면 정말 엄청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안타깝고 개선되야 할 중요한 문제다.
저자의 표현대로 의약분업 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의료일원화가 아닐까 싶다.
한의사들 역시 대체의학이나 민간요법 등을 한의학 안에 포함시키길 거부한다.
아마 대체의학이나 전통의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한의사들의 검증 요구 조건이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의학계에서 한의학에 요구하는 데이터나 검증 절차도 한의사들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기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의학은 서양의학이건 동양의학이건 전통의학이건 간에 환자의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유지하며 인체의 기본적인 작동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확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입증하는 과정, 실제적은 치료율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누구는 어디서 효험을 봤더더라, 이런 식의 카더라 통신은 정통의학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한의학에 대한 비방이 아니라, 의료일원화를 외치는 저자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저자의 필력이 딸려서 대체 이 중요한 문제에 동의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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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zibago 2008-12-05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충고에 감사말씀 올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해복하시길 빌며

앞으로도 좋은 충고의 말씀 잘 세기겠습니다.
 
오늘의 한걸음이 1년 후 나를 바꾼다
로버트 마우어 지음, 김우열 옮김 / 더난출판사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One small step,  참 적절하고 좋은 전략이다.
자기변화란 작심3일이라는 단어가 말해 주듯 참 어렵고 힘든 숙제인데 변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우리의 방어 시스템을 어떻게 무력화 시킬 것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앤서니 라빈스 같은 자기계발 전문가들의 과장이나 지나친 확신이 없어서 읽기가 편했다.
그동안의 관습에 익숙해진 우리의 몸과 머리는 가능하면 기존의 습관대로 하려고 애쓴다.
또 좋은 습관이란 원래 오래 지속시키기 힘든 법이다.
운동 중독자들도 있다지만 사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게 게으르고자 하는 본성보다 강하다면 왜 다이어트 산업이 저렇게 열풍이며, 날씬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겠는가?
퇴근 후에는 쇼파에 걸터앉아 포테이토를 먹으면서 스포츠 중계나 드라마를 보면서 쉬는 게, 헬스 클럽 가서 1시간씩 뛰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본성에 걸맞는다.
이걸 바꾸려고 하니 당연히 저항감이 생기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저항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1시간씩 뛸 게 아니라 단지 런닝머신에 발만 딛어라.
오늘은 1분, 내일은 2분, 이런 식으로 절대 실패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변화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여기에 딱 들어 맞는다.
일단 시작을 하면 관성의 힘으로 그 쪽으로 방향을 틀게 마련이다.
거창한 변화는 당연히 몸의 저항을 일으킨다.
모든 자기계발서들이 다 마찬가지인데 지나친 변화 보다는 조금씩 지속적으로 계속 하는 게 성공의 열쇠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낙숫물에 돌 깨진다는 말처럼 지속성이다.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저자는 갑자기 변하는 것을 혁신이라고 표현했다.
갑작스러운 혁명은 성공했을 때는 이득이 엄청나지만 실패했을 경우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실패의 위험이 적은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자.
작은 성공들이 쌓이면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책 분량도 작고 내용도 무리없이 실천해 볼만한 내용들이라 유익했다.
다만 제목을 좀 더 인상적으로 지었다면 홍보가 잘 됐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차라리 여기 나온 구절을 그대로 인용해 "One small step" 이라고 했더라면 더 주목을 끌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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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그리스도교 - 천년 동안 지속된 문화의 뿌리 즐거운 지식여행 17
G. R. 에번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예경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정말 좋은 책이다.
사진도 훌륭하고 내용도 깊이가 있고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닌, 기독교의 기본 개념을 참 잘 설명해 준다.
의외로 책이 얇아서 깜짝 놀랬다.
이렇게 작고 가벼운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창해 ABC 시리즈나, 시공총서 등은 사진과 도판이 많고 가벼운 문고판 형식이라는 장점이 있으면서도 내용이나 편집에 있어 산만함을 피하기 어려운데 이 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 챕터들이 유기적으로 참 잘 엮어져 있다.
다른 시리즈도 읽어 보고 싶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란 생활과 문화, 지성 등에 있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 일종의 세계화와 같았다고 한다.
오늘날 유럽이 EU 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기독교라는 정서적 공감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치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이 유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혹은 중동 국가들이 이슬람교라는 정서적 토대가 있는 것처럼 유럽을 묶은 것도 바로 그리스 로마 유산과 기독교였던 것 같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약간의 유치한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중세인들이 품고 있었던 천국이나 신, 혹은 구원, 지옥 등의 개념은 민간 신앙이나 기복 신앙 등과 별 다를 바가 없고 그들이 상상하던 천국과 지옥은 절에 가면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 속의 그것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내가 믿는 종교기 때문에, 또 상대적으로 발전한 서구의 종교라는 선입견 때문에 뭔가 고차원적인 종교라고 생각했는데 기원을 따지고 들면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 온 보편적인 심성에서 기원한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종교의 속성은 결국 다 비슷비슷한 게 아닐까?
인간에게는 종교적 본능이 있다더니, 과연 절대자를 숭배하고 복을 기원하고 내세의 안락한 삶을 꿈꾸는 것은 어떤 민족이나 종교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기독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힘들어진다.
정말로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인지 내세의 부활이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저 우리의 관념 속에 만들어진 상상력의 소산은 아닌지 혼란스럽다.
이성적으로는 종교란 그저 문화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일상 생활에서 두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절대자를 찾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약하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나는 리처드 도킨스나 칼 세이건처럼 종교 자체를 부정하게 될 가능성이 다분한데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신에 대한 숭배감이나 기원하는 마음 때문에 아직까지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책 편집도 잘 됐고 내용도 훌륭하고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인데 홍보가 별로 안 된 것 같아 안타깝다.
심지어 도서관에도 없어서 내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게 됐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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