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 정신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종교개혁의 투사 즐거운 지식여행 20
그레이엄 톰린 지음, 이은재 옮김 / 예경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루터에 대한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일종의 혁명아 같다는 이미지와 함께, 독일 농민 전쟁이 있었을 때, 그들을 때려 잡으라고 선동했다는 에피소드가 겹치면서 좀 위선적인 사람으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루터에 대한 비교적 공정하고 호의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유도한다.
이게 전기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루터교는 일종의 국가 교회주의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좀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루터교가 복음주의 신학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모든 개신교의 기본이 되며,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다는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근본주의의 원류인 셈이니, 여전히 루터교는 현대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95개조 반박문을 잘 읽어 보면 처음부터 종교개혁이라는 거창한 주제로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천박한 논리로 면죄부를 파는 추기경의 행태였고 그것이 오히려 교황의 권위를 손상시킬까 봐 염려됐다.
루터 뿐 아니라 당시 학식과 믿음이 있던 성직자라면 누구라도 독일 지역에서 판매되는 면죄부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교황이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일개 수도사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게 괘씸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사고를 하는 대신, 교회의 쇄신을 단행했다면 가톨릭은 분열하지 않았을까?
교회의 분열은 다양성의 확보, 믿음과 해석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해 보이면서도 왠지 슬퍼 보인다.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을 거의 마리아 숭배교 정도로 격하시켜 보고 있고 타 종교는 그나마 전도의 대상으로나 보지, 가톨릭은 거의 이단시 하는 분위기다.
가톨릭을 비난하는 개신교 역시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이제 해석의 자유가 넘치다 못해 상대의 믿음은 무조건 틀렸다는 교만으로까지 발전했다.
교황의 권위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킨 루터의 가장 위대한 실패는, 교회 대신 권위의 원천으로 제시한 성경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믿겠다는 바로 오늘날의 근본주의의 발흥이 아닌가 싶다.

문자에 집착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인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루터와 츠빙글리는 성체설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
츠빙글리는 성만찬 때 "이것은 내 피와 살이다" 라고 한 부분에 대해 단지 상징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반면 가톨릭과 루터는 정말로 예수의 살과 피를 신도들이 먹는다고 생각한다.
츠빙글리는 가톨릭과 루터교가 인육을 먹는 집단이라고 비난한다.
가톨릭은 혹시라도 예수의 피로 변한 포도주를 무식한 신자들이 흘리기라도 할까 봐 아예 포도주는 주지도 않고 빵만 입에 넣어 줬다고 한다.
본질을 놓치고 오직 글자에만 집착하는 기독교의 이런 행태는, 파고 들면 들수록 더욱 우스꽝스러운 꼴만 반복한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성체가 진짜 살과 피로 변하느냐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킬 만큼 중요한 문제일까?
상복을 몇 달 입어야 할까를 두고 정치투쟁을 벌였던 과거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보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나는 비록 현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루터의 깊은 신앙심에는 어느 정도 감동받았다.
옳든 그르든 (사실 그런 판단조차 가능한 것이지 모르겠으나) 어떤 대상에 일생을 바쳐 몰입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삶을 진지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왠지 기품이 느껴진다.
또 어떤 의미로든 교황이라는 거대한 권위로부터 신앙을 해방시킨 점은 역사적으로도 크게 평가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중세인치고는 63세라는 비교적 긴 수명을 누린 루터는 아마도 대단히 열정적이고 부지런하며 경건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보다 점잖고 온화했던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꺼려했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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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문화와 사회사 교양 교양인 시리즈 9
다이아나 크레인 지음, 서미석 옮김 / 한길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생각보다 좀 어려웠다.
번역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문장이 매끄럽지 않고 직역한 흔적이 너무 많이 난다.
읽을 때마다 복문이 너무 많아 굉장히 힘들었다.
내용 자체도 패션이라는 키워드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사회적이다.
쉽게 봤는데 꽤 어렵게 읽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충분히 괜찮다.
주제도 비교적 명확하게 잘 쓰여 있고 유기적인 연결성, 통일성도 돋보인다.

19세기에 의상은 신분을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장치였다.
워낙 값이 비싸니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아니면 격식에 맞는 의복을 갖춰 입지 못했을 것이다.
농부들 같은 경우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이나 드레스를 평생 일이 있을 때마다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부의 양복은 대부분 검은색이었는데 결혼식과 장례식에 두루두루 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딸에게 웨딩 드레스를 물려준다는 말이 이해된다.
지방에 사는 농민층은 돈이 되더라도 중류 계급의 흉내를 많이 내지는 못했다.
일단 교통이 불편하고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중산층의 옷차림을 접해 보지도 못했고 또 규범에 맞게 갖춰 입지 않으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시도하느니 차라리 자기 계급에 맞는 옷차림을 선호했다.
반면 도시의 기술 노동자들은 주로 귀족이나 중산층을 서비스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접하다 보니 의상에 많은 투자를 했다.
사회적인 위신 때문에 무리해서 의상에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연히 여성들은 한정된 자산 때문에 옷에 거의 투자할 수가 없었다.
옷은 여자가 많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반대되는 현상이 참 재밌다.
돈이 적으니 일단 가장의 체면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
외출복이나 새옷은 남편이 사고, 아내는 주로 남편의 헌옷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은 공적인 자리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옷이 계급 표시에서 개성의 표출로 변한 것은 기성복의 등장 이후다.
저자의 말대로 20세기에 더 이상 옷은 신분이나 계급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옷값은 너무 싸졌기 때문에 누구나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충분히 많은 옷을 살 수 있다.
오히려 옷은 계급 보다 연령층으로 나눠졌다.
젊은이의 스타일을 장년층에서 따라 하려고 하고, 이들이 따라 하면 젊은이들은  또 새로운 스타일로 갈아 타고, 이런 식의 순환이 이뤄진다.
과거 계급 시대에는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에 상류층 패션을 중산층 이하에서 흉내냈다면, 소비자 시대에는 연령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또 하위 문화, 즉 스트리스 패션이 상류층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옷 외에는 자신을 표현할 수단이 없는 하위층은 (이를테면 직업이나 가문이나 학벌, 집, 자동차 등 돈과 노력이 많이 드는 상징물이 없는 노동자 계층) 과감한 패션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특히 이런 하위 문화는 록 음악이나 힙합 등과 연결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된다.
상류층이 격식에 맞는 보수적인 옷차림을 선호한다면 하위층은 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옷차림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종 이들의 패션은 신선한 아이디어로 상류층에 침투한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패션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오트 쿠튀르는 대기업화 되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소기업들은 자본이 없어 몰락하고 있는 추세다.
재밌는 건 패션 대기업들이 옷으로 부를 쌓는 게 아니라, 라이센스를 빌려 주고 얻는 로얄티나, 가방, 향수 같은 보조 제품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다.
왜 보그 같은 유명한 잡지에 옷이 잘 보이게 사진을 찍는 대신, 이미지 광고로 일관하는지 알게 됐다.
그들이 파는 것은 옷이 아니다.
명품, 고급패션이라는 이미지를 팔아 돈을 번다.
그러므로 옷 자체를 광고하던 1960년대 이전과는 달리, 기업들은 이제 옷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도발적인 포즈와 동성애적인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광고를 찍는다.
또 명성을 쌓아야 라이센스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패션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시도를 한다.
젖꼭지를 드러낸 옷이나 비닐 망사로 된 옷 같은, 대체 저걸 누가 입을까 싶은 옷들이 패션쇼에 나오는 것도 간단히 말해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젊은 디자이너가 안정적으로 고객을 상대하는 보수층 속으로 끼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가 장인 대신 전위 예술가가 된 것에 대해 저자는 노골적으로 까대지는 않지만 옷 판매 전략의 일종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패션쇼의 과감한 시도는 다양성의 확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지적을 잊지 않는다.

프랑스 디자이너는 상류층의 일원이 되서 예술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얻고 고객과 같은 위치에 있으려고 애쓴다.
소비자이자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샤넬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디자이너 스스로 예술가가 될 수는 없으므로 예술의 후원자라는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샤넬 시대까지만 해도 디자이너들은 노동자 계급의 양제사, 재봉사들이었으나 60년대 이후 디자이너는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택하는 직업으로 격상됐다.
반면 미국은 랠프 로렌처럼 허구적이나 사람들이 동경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낸 뒤 수많은 카달로그를 찍어 유포하는 방식을 택한다.
일종의 이미지 광고 전략일텐데, 마치 내가 그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꼭 카달로그 속의 삶을 살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영국은 왕실이 패션을 주도하다 보니 디자이너들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혁신이 부족하다.
계급차가 심한 사회이니 만큼 진로가 막힌 노동자 계층 중 재기발랄한 젊은이들이 스트리트 패션을 주도하게 된다.
이들은 과감하게 전위적인 의상을 디자인하고 스스로 중고 의상점을 운영함으로써 어떤 제품이 잘 나가는지를 확인한다.
영국은 귀족 문화도 있지만 노동자 문화도 분명히 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들은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예술-장인 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반해, 스스로를 전위적인 예술가 집단이라고 격상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변명의 구실로 삼을 수 있다고 한다.

옷이 정체성의 표현이 된 것은 옷값이 싸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 같은 19세기 시대 배경의 영화를 보면 온갖 격식을 차리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여자나 남자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 자본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특히 재밌는 것은 여자들이 바지를 입게 될 때까지의 투쟁이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여자의 바지 착용이 법적으로 금지됐다고 한다.
자전거 타기가 유행하면서, 또 해변에서 수영을 하기 위해 상류층에서 암묵적으로 일시적으로 바지 착용이 허용된 반면, 노동자 계층에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바지를 입어 왔다.
여자 광부들도 있었으니 노동자 계층에서는 사회적인 용인과는 별개로 바지를 입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성별의 표현을 불분명하게 하는 옷차림을 금지시켰다.
마치 장발을 단속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에도 여성처럼 치장한 남자는 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또 여전히 치마는 남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금기되어 있다.
옷차림이 전적으로 개인화 되는 것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옷은 단지 입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나 복식 문화가 보여주는 수많은 사회적 의의를 인식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문득 메트로폴리탄의 복식 전시관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것은 미국 사람의 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구 사회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역시 번역은 출판 문화 진흥에 한계가 있다.
한국인 필자들이 이런 사회 분석학적인 책을 다양한 주제로 많이 써 주면 좋겠다.
이제 서구 시대극을 볼 때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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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프레스(영상1차할인) (Express)
영상프라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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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어를 못하니 익스프레스라는 뜻이 뭘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 채 영화를 봤다.
아마도 안 쉬고 계속 달리는 특급 열차를 뜻하는 것 같다.
비교적 재밌게 봤다.
적어도 지루해서 졸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영화 시간도 90분 정도로 비교적 짧은 편이다.
서양 영화의 장점은 다양한 연령층의 배우들이 활동한다는 넓은 스펙트럼에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라가 넓어서 그런가?
진 핵크만은 이름이 낯익어 유명한 배우 같기는 한데, 영화 속에서는 적어도 50대는 되보이는 중년이지만 멋지게 배역을 소화해 낸다.

첫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여주인공 캐롤은 변호사와 소개팅을 하게 된다.
맞선 자리에게 둘은 호감을 느끼고 얘기를 잘 풀어나가려는데 웨이터가 전화해 달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핸드폰이 보편화 되기 전 80년대라 그런 것 같다.
하여튼 변호사는 중요한 전화라며 양해를 구하고 잠깐 호텔방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여자 보고 같이 올라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 캐롤은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 사이 욕실에 들어가 화장을 손보는데...
방문객이 찾아온다.
전화를 달라고 했던 사람, 바로 변호사의 고객인 마피아 두목과 부하였다.
알고 봤더니 남자는 고객의 돈을 몰래 챙기다가 들킨 것이다.
남자는 울면서 갚겠다고 맹세하고 마피아는 용서해 준다.
안도하는 남자는 마피아를 배웅한다.
막 문을 열려던 마피가가 갑자기 뒤를 돌더니 "미안하네" 라고 말한다.
순간 옆에 있던 부하가 변호사에게 총을 갈긴다.
욕실을 나오려다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만 캐롤, 숨이 멎은 듯 굳어 있다.

정말 스릴있는 살해 장면이었다.
긴장감 최고였고 영화의 뒷부분은 첫 장면의 긴박감에 미치지 못한다.
우연히 살해 현장을 목격한 캐롤은 쫓기는 입장이 된다.
그녀의 증언을 받아 마피아 두독 리오를 기소하려는 검사가 바로 진 핵크만이다.
검사는 그녀가 숨어 있는 캐나다로 날아가는데 그만 미행을 당하는 바람에 둘은 기차 안에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킬러 둘이 두 사람을 쫓는다.
기차 객실 사이에서의 숨막히는 도주.
사실 아주 실감나게 그려지진 않는다.
특히 두 사람이 기차 지붕으로 올라가 싸우는 장면은 좀 어설펐다.
역시 특수 효과 보다는 스토리나 심리 묘사가 훨씬 긴장감을 주는 것 같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악당들을 물리치고 캐롤은 무사히 증언을 하게 돼 검사는 리오를 살인죄로 기소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진 핵크만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악당들이 검사를 돈으로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미국 검사들도 변호사에 비해 박봉인 것 같다.
물론 권력이 있겠지만.
하여튼 검사는 악당들의 유혹에 웃음으로 대처하면서 난 돈은 못 벌지만 너같은 놈들 감옥에 보내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강철중의 순화된 캐릭터 같다.
그 장면이 아주 리얼하고 속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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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 '수학사랑' 박영훈 선생의 수학사 특강
박영훈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2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비교적 얇은 두께의 책이다.
안에 실린 삽화도 신선하고 책 내용도 어렵지 않다.
수학이 주는 의미에 대해 비교적 쉽게 잘 풀어 쓴 것 같다.
무엇보다 그리스에서 비례를 중시하는 수학과 예술이 번성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저자의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이 아쉽다.
수학의 원조는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이기 때문에 사실 서양은 동양의 학문적 성과 때문에 발전한 것이므로 동양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초보적인 논리를 편다.
또 기독교가 과학을 억압해서, 종교개혁 전까지는 과학이 발달할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편견일 뿐, 얼마 전에 읽은 <사회 법 체계로 본 근대 과학사 강의> 에서는 신학이 이성의 힘을 강조함으로써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심지어 그 책에서는 중국이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근대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고까지 말한다.
책을 쓸 때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하다.
재밌게 책을 읽다가도 가끔 초보적인 저자의 감정적 주장을 접할 때면 솔직히 약간 짜증스러웠다.
뭐랄까,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는 괜찮지만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독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좀 더 공부를 하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또 로마 문화를 그리스 문화에 비해 단지 실용성만 강조한 것이므로 문화로써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 것도 매우 극단적으로 들렸다.
콜로세움은 그저 검투사들이 사자와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장소에 불과하므로 비례의 미를 자랑하는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형편없다는 식의 감정적 논리는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그리스 문화의 위대함과 로마 문명의 위대함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세계가 퇴보하고 오직 전쟁을 통한 영토 확보에만 주력해 이룩한 문화적 유산이 없다는 식의 발언은 매우 단편적이고 편견에 차 있다.
역시 앞에서 언급한 <근대 과학사 강의>를 펴 보면, 로마법이 법 정신의 얼마나 큰 진보인지 자세하게 나와 있고, 오늘날 서구의 보편평등한 법 정신이 로바법에서 나왔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점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수학적 얘기는 괜찮았다.
사실 수학은 지겹고 어려운 학문이라고만 알고 있어서, 대학교 때 교양으로 미적분학을 들은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학책은 펼쳐 본 적이 없다.
대체 어디다 써먹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한 때는 이 어려운 학문을 꼭 모든 고등학생들이 배워야 할까 회의적일 때도 있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수학은 과학을 설명하는 기본 언어라는 걸 알게 됐고 수학이야 말로 과학과 더불어 모든 인류에게 보편타당한 위대한 학문임을 인정했지만, 그 가치를 아는 것과 즐기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책을 읽어도 솔직히 수학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이 안 잡힌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기호화 공식은 최소화시키고 그리스 수학이 발전한 역사에 대해 주로 서술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문학 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수학이 사물을 추상화 시킨 이성의 학문이라는 건 분명히 알겠다.
그리스들이 추구하는 것은 조화와 비례로 대표되는 균형미였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수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리스의 건축과 조각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일 독특했던 관점은 그리스인들의 신에 대한 관념이었다.
저자는 그리스어로 신이 주어가 아니고 술어임을 강조한다.
신이 어찌어찌 했다가 아니라, 어떠어떠한 상황이 바로 신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신은 인간의 모든 추상적 감정과 속성들을 의인화 시킨다.
전쟁은 아레스가 되고 사랑은 아프로디테로 표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기독교의 신처럼 믿는다는 개념이 없었고 신들을 일상의 생활로 이해했다.
그래서 기독교처럼 유일신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 속성을 가진 여러 신들을 믿었다기 보다는, 인간사의 많은 추상적 개념을 신으로 의인화시켰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 되어지는 힘,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스인들은 대체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영웅이 신의 장난에 의해 비참하게 죽는 비극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서야 좀 알 것 같다.
비극이야 말로 어쩌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세상의 우연을 표현한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이 세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문이 세상 모든 것을 죄다 관찰하고 연구하는 게 아니라, 학자가 의문을 갖고 문제를 제기할 때 비로소 선택적으로 관찰하게 됨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일단 세상의 근원에 대해 궁금해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를 해결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문제 제기를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리스에서 세상은 원자로 이뤄졌다는 대담한 발상까지 나왔는지, 또 수 천년 전의 그리스 문화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의 수학은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에 불과했다.
그것은 세심한 관찰에 의한 직관적 이해였다.
반면 그리스의 수학은 근본적인 것, 원리적인 것을 찾는 연역적 추론이다.
변치 않는 어떤 것, 즉 공리를 이용해 명제를 증명하는 것, 수학이 비로소 현상의 집합을 뛰어넘어 사물의 속성으로 추상화 되는 순간이었다.

재밌게 읽은 책이고 수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수학은 나에게는 어려운 학문 같다.
나는 오히려 과학 쪽이 훨씬 재밌고 그 중에서도 생물학, 더 세분해서는 의학이 가장 재밌다.
그런 걸 보면 직업을 잘 선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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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세계의 아틀라스 - 지도로 보는 세계의 미래 책과함께 아틀라스 2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외 지음, 안수연 옮김 / 책과함께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전작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도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 역시 괜찮다.
일단 큼직한 판형이 마음에 든다.
가지고 다니기는 불편하지만, 지도를 보기에는 아주 적합한 것 같다.
보통 지도나 사진이 주가 되는 책은, 설명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주제를 한정시켜 범위를 좁게 한 대신 압축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느낌이다.
어쩜 이렇게도 예쁜 지도책을 만들었을까?
<지도로 보는 한국사> 나 <아틀라스 한국사> 같은 책들도 지도가 많이 실리긴 했지만 이건 수준이 다른 것 같다.
아마도 이 출판사에서 지도를 만드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저자의 시각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 책의 주제는 환경보호론과 세계화 반대, 뭐 이 정도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도 덕분에 세계 정세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막연하게 캘리포니아 하면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의 서부 도시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지도를 보니 멕시코 국경과 딱 붙어 있어 히스패닉계가 최대라는 말이 실감났다.
역시 눈으로 직접 봐야 이해가 빠르다.
발칸 반도의 내정 양상도 자주 보니까 이제 각 나라들이 하나의 실체로써 다가오고, 리히텐슈타인 같은 소국들도 지도로 보니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감이 잡힌다.
여전히 이 책에서도 북한은 위험 인자로 등장해서 씁쓸했다.
또 일본이 얼마나 막강한 나라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정말 한국인만 일본을 우습게 아는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일본에 대한 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한국이 일본과 대등해져야 없어질 것 같다.

나처럼 공간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런 입체적인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끼는 바지만 프랑스는 과거 식민지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확실히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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