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해전사 - 7년 전쟁, 바다에서 거둔 승리의 기록
이민웅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현직 해군이 임진왜란 중 해전만을 분석한 글이다.
논문을 수정해서 썼기 때문에 출처도 분명하고 비약이 많지 않아 읽기 편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은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지나치게 영웅시 되어 오히려 전쟁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이순신은 미화시키기 않아도 충분히 뛰어난 위인이고 매력적이며 무엇보다 인간적이기 그지 없는 인물이다.
오히려 이순신의 성인화 작업이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감소시키고 박제화 된 위인으로 격하시킨다는 느낌마저 든다.

앞서 읽은 <이순신의 두 얼굴>이라는 책에서는, 이순신의 실각을 그의 판단착오로 봤다.
반간계에 정부가 속았다기 보다는,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기회를 놓친 이순신을 정부가 경질한 것으로 판단했다.
어쨌든 가토가 도해하여 정유재란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 전에 이순신이 광해군의 과거 시험을 거부했다거나, 왜영 방화 사건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오해를 산 일 등 전쟁 중 군부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조정 분위기가 있었음을 중요하게 다뤘다.
반면 이 책에서는 널리 알려진 평가대로 조선 정부가 일본의 반간계에 당했다고 판단한다.
그 근거로 일본 측에서 발간된 임진란 관련 서적에서 반간계의 성공을 거론했다는 점을 든다.
어떤 게 진실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중요한 점은, 어쨌든 전쟁 중에 가장 뛰어난 업적을 거두고 있던 최고 지휘자를 경질한 것은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선조의 완전한 패착이었고 그 결과가 참담한 조선 수군의 전멸인 칠천량 해전으로 나타났으니, 이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의 위대함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다.
비단 이 책 뿐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등을 봐도 그렇고 실제 난중일기를 읽어 봐도 이순신은 꽤나 강직하고 자기확신이 강하며 주관이 뚜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꼿꼿한 조선 선비의 면모가 무장의 강인함과 더불어 유감없이 발휘되는 느낌이다.
결정을 내릴 때는 최대한 신중하게, 한 번 내린 결정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밀고 나가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정치력은 부족했기 때문에 난중이 아니었다면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명량해전을 분석한 글이 흥미로웠다.
물밑에 철쇠를 걸었다는 의견은 전설로 치부하고 그보다는 협수로를 이용한 작전과, 일본의 큰 함대인 아다케 대신 규모가 작은 세키부네만 상대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제 전쟁에 참가한 전선은 총 133척, 뒷쪽에 늘어선 배까지 합하면 300여 척인데 명량이 워낙 해협이 좁고 물살이 가팔랐기 때문에 칠천량 해전과는 달리 큰 군선인 아다케가 투입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순신은 판옥선 열 세 척으로 해협을 가로막고서 일본군을 맞아 세키부네 31척을 분멸하는 전과를 올린다.
극도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지형을 이용하여 믿기 어려운 승리를 거둔 그의 지략이 돋보이는 해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정부에서는 교전 자체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순신에게 해전을 포기하고 육군을 도와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그 유명한 상소,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다는 상소를 올리고 군사들에게도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고 격려한다.
그 용기와 기개, 배짱이 놀라울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는 또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 자만심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실제로 이순신은 군기를 엄격하게 잡는다.
조선 수군은 백성들이 기피하는 천역이었는데 전염병에 기아까지 겹치자 도망자가 속출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한 것도 도망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탈영병은 전부 처형함으로써 군기를 잡고 부족한 병력은 친족에게라도 군역을 지움으로써 반드시 채워 넣었다.
또 기아가 속출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휴전 기간 내내 군선을 목표량 만큼 만들어 냈고 실제 그 목표를 달성한 곳은 그가 지휘한 전라좌수영 뿐이었다고 한다.
무서운 집념과 엄격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런 지휘자였기 때문에 그의 군영으로 백성들이 모여 들어 명량 해전 때 군민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특히 안정적인 식량 확보를 위해 둔전을 성공적으로 경영함으로써 오직 수군만이 군량 공급을 할 수 있어 감찰하러 나온 이원익이 탄복했다고 하니, 과연 명장이 아닐 수 없다.

원균과의 불화는 이 책에도 자세히 나온다.
아마도 그는 신중하고 엄격한 이순신과는 반대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기생을 불러 들여 물의를 일으키고 부하들에게도 잔혹했으며 신의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을 보여 선조의 신임을 얻는다.
그는 윤두수 등과 인척 관계였다고 한다.
꼿꼿한 선비 타입인 이순신과는 반대되는, 전형적인 무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그런 단순하고 우직한 점이 선조로 하여금, 복잡다단한 이순신 보다 더 상대하기 쉽고 편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영웅적인 면모를 보인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부족한 점이 큰데 여러 정황을 보더라도 선조는 전쟁을 이끌 지도자감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신뢰했던 원균에게 지휘권을 맡겨 놓고서도 현지의 판단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수군 진격을 명령한 점은, 결국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이어져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고 만다.
저자는 일선 지휘자의 판단을 무시한 조정의 지휘 계통 혼란도 중요한 패전의 원인으로 꼽는다.
한마디로 정부는 조선 수군의 전반적인 상황을 너무 낙관한 통에 이순신에게도 그렇고 원균에게도 무조건적인 수군 단독 저지를 주장했던 것이다.
반면 일선에서 전선을 책임진 지휘관들은 이순신 뿐 아니라 원균마저도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막기는 역부족이므로 육군과 함께 싸울 것을 주장하지만, 이순신은 실각하고 원균은 빨리 나가지 않는다고 도원수 권율에게 끌려가 곤장을 맞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무신을 우대하지 않는 조선의 전통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타고난 무인들이었던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가 지략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한 가지 간과했던 점은 일본 역시 수군이 주력 부대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근대 이전에 해전이 주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이 육지를 코 앞에 둔 해안가에서 벌어진 해전이기도 하다.
일본은 해적질의 역사가 깊어서 얼핏 생각하면 수군도 강력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작고 빠른 배를 타고 돌진해 상대의 배에 올라타 일대일 격파를 벌이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큰 군선인 판옥선과 화포에 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오히려 조선 수군은 일본 해적들의 오랜 침략 때문에 군선을 만들고 화포를 개발해 왔다.
태종 때 거북선이 개발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군을 보급선으로 이용했는데 이순신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겨 육지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맞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참전한 국제전이었고 이순신이라는 영웅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연구가 더 활발하게 전개되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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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클래식 - 교양인을 위한 클래식 음악 감상
이동활 지음 / 두리미디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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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은 많지만, 가볍게 일독할 수 있는 책이다.
먼저 읽은 책,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나> 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살짝 지루하기도 했지만 다시 확인한다는 장점도 있었다.
이래서 겹치는 독서가 좋다.
<유럽 클래식 산책>은 서점에서 대충 훑어 보기만 했는데 그 책의 저자라고 한다.
원래 성악을 전공한 사람인데 칼럼니스트로 돌아선 모양이다.
글쓰는 수준은 평이하다.
박종호씨의 글에 비하면 문체도 평범하고 특별한 개성이 있는 건 아닌데 무난하게 읽을 만 하다.
비문이 없는 편이라 읽기 편했다.

좋은 곡을 많이 소개받았다.
듣고 싶은 곡을 뽑아 보니 대충 60여곡 정도 된다.
클래식을 감상해 보고 싶어도 뭐가 좋은 곡인지 알 수가 없어 다양하게 듣기가 어려웠는데 책에서 소개받은 곡들을 위주로 먼저 들어볼 생각이다.
특히 근현대 음악은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해설을 곁들이니 좀 더 친숙하게 쉽게 다가오는 기분이다.
교향곡도 좋은데 서너 명이서 연주한느 실내악도 참 듣기 편하고 좋은 것 같다.
마지막에 저자의 충고대로 그냥 막 듣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시대 배경도 알고 곡의 구성도 알면 더 많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박물관이나 유적지 관람할 때 아무 것도 모르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림처럼 음악은 굳이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감동스럽고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제일 유익했던 충고는 연주회나 dvd를 볼 때 지휘자를 유심히 보라는 말이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서도 느낀 바지만, 지휘자의 연주 스타일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연주 내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지휘자를 보는 것도 영상으로 접하는 음악의 즐거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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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 이야기 - DNA와 진화의 확고한 증거들
션 B. 캐럴 지음, 김명주 옮김 / 지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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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의 저자가 쓴 책.
유전학 교수라고 한다.
앞의 책도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올라와 있는데 기회가 안 돼서 못 읽었다.
이 책으로 미루어 보아, 이보디보 역시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아무래도 내 수준은 마이클 셔머의 <왜 다윈이 중요한가> 가 적당한 것 같다.
불행히도 말이다.
나는 대학에서 유전학을 배웠고 지금도 학문적으로는 아니지만 임상에서 그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당연히 유전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조금만 깊이 들어가는 책을 읽게 되면, 내 지식의 깊이가 상당히 얕다는 것을 깨닫고 허걱 놀라고 만다.
유전학, 생화학, 세포학 이런 기초 과목들을 분명히 대학에서 수료했는데도 왜 이런 대중 교양서가 어려운 것일까?
이런 걸 보면 의사들 중 상당수가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창조론을 믿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제 Mr. suh 가 나사의 연구원이 교회에서 진화론의 허구와 창조론에 대해 간증했다고 하던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당연히 진화론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쟁이 붙으면 세세한 부분까지 자신있게 증거를 제시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월리스 같은 위대한 학자 역시 지구가 둥글다는 너무나 명확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미친 놈과 싸우다가 홧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일화가 있는 만큼 평범한 내가 논쟁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크게 우울해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즉 논쟁주의자들은 누구와 붙어도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들은 사실 대신 신념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진화에 대해 가장 많이 오해되는 부분은 자연선택이 무작위적이며 돌연변이가 해롭다는 것이다.
지적인 설계자가 없다면 결코 지금의 최적 조건으로 형상화 되기 어렵다는 것.
흔히 바람이 불어 보잉기가 저절로 조립될 수 없다는 비유를 쓴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자연의 선택압이야 말로 종의 변이에 관여하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이고 그 기전이 바로 돌연변이다.
인간의 게놈은 70억개쯤 되는데 176개의 비율로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개체이고, 심지어 쌍둥이도 동일하지 않다.
중요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 (이를테면 분화를 결정하는 도구 유전자) 들은 돌연변이로부터 보존되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아미노산이 여러 개의 코돈으로 암호화 되어 있다.
유전자 중복이 종의 항상성을 유지시킨다.
자연의 선택압은 종간의 변이를 일으키는 변수로 작용한다.
돌연변이가 자연 환경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면 그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가 번식하여 자신의 돌연변이를 간직한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런 말을 했다.
아메바에 비해서 인간이 더 우월한 존재인가?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인가?
우리는 진화의 정점에 선 종인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명제이므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 도킨스가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전학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진화는 결코 진보나 개선을 위한 메커니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생명의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측면에서는 좀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하여튼 모든 생명체는 더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 환경에 맞는 존재만 멸종을 피하고 생존해 나간다.
저자는 모든 유전자가 현재의 환경에 적합하게 작용하므로 결코 앞으로의 변화를 위해 미리 예비해서 만들어 놓을 수 없고,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의도를 지닌 지적 설계자는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진화론을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무신론의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종교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종교는 지동설도 이겨냈고 우주선이나 달 탐사도 이겨냈다.
진화론 역시 결국에는 사실이기 때문에 종교가 포용할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이야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거부할 경우 종교의 기반 자체를 흔들어 버릴 것이므로 결국에는 적당히 교리에 변형시켜 수용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집단은 아마 유타주에 있다는 아미쉬들처럼 시대를 거부한 소수파로 동정을 사겠지.
내 생전에 그 꼴을 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이로프랙틱, 즉 척추교정을 하는 사람들이 예방접종을 거부한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예방접종을 거부하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어 어렸을 때 가볍게 앓고 지나갈 수 있는 홍역이 성인이 되서 걸리는 바람에 치명적인 합병증을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미국은 이른바 대안의료라는 것들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우리나라 역시 한의학이나 동종요법, 허브 치료 등등의 대안의료가 있긴 하지만 범국민적으로 예방접종을 거부하자는 식의 주도권을 잡지는 못하는데 미국은 역시 모든 방면에서 다양한 운동이 있는 나라다.
척추교정은 막연히 구부정한 허리를 바르게 펴 주는 일종의 물리치료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근본적으로 모든 병의 원인이 신경에서 비롯되므로 신경이 지나가는 척추를 바르게 해 주면 신경이 눌리지 않아 병이 회복된다는 게 기본 개념이라고 한다.
병의 세균설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현대의학에 대치된다.
이 점은 한의학과도 비슷하다.
미생물에 의한 감염설이야 말로 현대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병인론인데 한의학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하여튼 이데올로기 혹은 철학, 몸의 내제된 생명력, 자기치유력, 정신력 이런 것들이 과학적 사실들과 싸울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게 참 한심스럽다.
책에 인용된 루리 파스퇴르의 말처럼, 상상력은 실험의 결과들에 의해 입증될 때만 비로소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되지 않겠는가?
지식은 인류의 유산이라고 했는데 특정 종파나 집단의 이기심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에 배척되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
유전자학이 농업이나 제약학, 심지어 친자 감별, 범죄자 식별에까지 이용되고 있는 21세기에도 이 모양이니,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이가 얼마나 엄청난 권력과 싸워야 했을지 조금은 실감이 난다.

마지막에 나온 환경 오염과 남획에 대한 우려는 그런 것들이 강력한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생명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멸종으로 이끈다는 설명을 듣고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난다.
자연은 정화력을 가졌기 때문에 곧 회복될 거라는 막연한 위로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을 정도로 생태계 파괴는 심각한 수준인 것 같다.
적어도 야생동물 밀렵이나 어류 남획 등에 대해서는 전 지구적인 합의가 필요한 시점임이 분명하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이야기라고 정말 비장한 제목을 붙였는데 역시 학자가 쓴 글이다 보니 당위성이나 반박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유전학 내용을 설명한 부분이 대다수를 이루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나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쓴 이보디보도 읽어 보고 마이클 셔며의 <왜 다윈이 중요한가>도 다시 봐야겠다.
첨언하자면, 한 번 읽어서 100% 이해할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는 것 같다.
내 경우는 한 번에 자세히 정독하는 것 보다는 틈틈히 반복해서 보는 쪽이 훨씬 기억에 오래 남고 읽기도 편하다.
비슷한 주제의 책을 여러 권 읽는 것이, 한 권의 책을 정독하는 것보다 덜 지루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어려운 책도 억지로 읽을 때가 많은데 선택 독서와 반복 독서를 하는 쪽으로 바꿔 보려고 한다.

방금 재독을 끝마쳤다.
첫번째 독서 때 미진했던 부분들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배경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다시 읽으니 비교적 쉽고 평이하게 써진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역시 내가 너무 게으르게 접근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진화란 결국 돌연변이라는 기회, 그것을 전달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자연선택, 그리고 그 변이가 개체군에 확산되기까지 걸리는 긴 시간, 이 세 가지의 조합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제 지적 설계자 대신 자연선택을 종의 다양성의 근원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돌연변이는 분명히 무작위적이나, 그 변이를 다음 세대로 전달시킬지 말지는 절대로 무작위적이지 않다.
오히려 해로운 변이는 제거하고 이로운 변이만 보존하는 방식으로 자연선택은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진화를 조정한다.
고세균과 인간의 공통 유전자의 존재야 말로 결국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진화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잡히는 느낌이 들고 읽다가 포기한 다른 책들 (진화하는 진화론, 생명 최초의 30억년) 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정말 다윈은 코페르니쿠스 이후로 가장 혁명적이고 위대한 발상의 전환을 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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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 - 바이올리니스트 최은규의 음악 이야기 01
최은규 지음 / 마티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보는 가벼운 책.
200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짧은 분량의 책이다.
빨리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두꺼운 책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속도전을 치르게 된다.
보다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자꾸 다음 페이지로 나를 내모는 것 같다.
이번 책은 그런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국내 필자가 쓴 책이라 번역문의 어색함도 없고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정서가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보면 결국 국내 필자층이 두꺼워져야 비로소 출판 문화가 부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 면접 시험 기다리면서 앞부분을 읽고, 오늘 마저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교향곡에 관한 책, 나는 웅장한 게 좋다.
특히 합창 교향곡처럼 수십명의 사람들이 뿜어내는 합창곡이 좋다.
숭고하고 웅장한 것, 마음을 뒤흔드는 그런 격렬한 형식이 좋다.
교향곡이야 말로 나같은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 형식인 것 같다.

늘 들어서 아는 익숙한 작곡가들이 나온다.
바흐를 시작으로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브람스, 그리고 말러까지.
아마도 말러를 현대 음악의 시조쯤으로 보는 것 같다.
사실 말러나 브루크너, 베를리오즈 같은 작곡가들의 교향곡은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됨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꼭 졸게 된다.
아직 내 수준으로는 모짜르트나 베토벤 같은 고전주의의 전형적인 곡들이 듣기 편하다.
그렇지만 책을 통해 글로써 자주 접하다 보니 다시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솔직히 책에 나온 교향곡의 편성이나 주제 등에 대해서는 대충 읽고 넘어갔다.
그저 듣기에 좋다, 나쁘다 이 정도 밖에는 음악을 평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에 형식에 관한 자세한 이론은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그렇지만 자꾸 책을 읽다 보면 음악에 대해 궁금해지고 듣고 싶은 욕구가 생기며 또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에 노출되다 보면 대충 이런 의미구나, 하는 감이 생기기 때문에 나름 유익하다.

얼마 전에 본 <베토벤 바이러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드라마의 파급 효과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계기이기도 한 것이, 전에는 지휘자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김명민의 그 탁월한 연기를 보면서 이제는 지휘자나 작곡가에 대해 유심히 보게 된다.
또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본다.
단지 귀로 음악을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 음악을 만들어 내는 연주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자유분방한 리스트, 엄격한 브람스, 귀가 멀었는데도 내면의 예술적 충동을 악보에 쏟아낸 열정적인 베토벤, 천재 지휘자이기도 했던 말러 등등 그들의 모습이 단지 위대한 작곡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상으로 다가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드라마 속의 강마에와 비교해 보는 것이다.
훨씬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마치 고구려 사극이 유행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 역시 스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미술계의 스타 피카소나 고흐처럼 음악계에도 무수한 얘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바그너나 당대의 스타 리스트처럼 스타가 있어야 인구에 회자되고 그들을 trigger 로 삼아 더 많은 이들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비평가들 역시 때로는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들이 작품을 비평함으로써 미학이 완성되고 예술은 한 단계 높은 위치로 격상된다.
작품이 비평에 함몰되서는 안 되겠으나 비평가들 역시 예술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요즘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나 새로운 고민에 빠졌었다.
천천히 자세히 읽으려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지리하게 독서 시간이 늘어나 나중에는 지치게 되고, 또 빨리 읽으려다 보면 대충 넘어가 뭔가 미진한 느낌이 남고, 균형점을 어디다 둬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다른 분야도 그렇겠지만 독서 역시 침체기가 있고 도약기가 있는 것 같다.
초벌 읽기를 하고 다시 관심있는 분야만 재독하는 것을 이 책에 적용해 보고 싶다.
분량이 적기 때문에 가능할 것 같다.

교향곡의 역사와 발전에 대해 쉽게 설명한 비교적 무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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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광선 (프리미어 신년 할인)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독특하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는 영화다.
여름날 풍경을 잡아낸 연출 기법은 퍽 신선하고 인상적이었으나 줄거리가 너무 빈약하다.
마치 <여자, 정혜>를 보는 기분??
주인공 델핀으로 나온 여배우 마리 리비에르는 날씬하고 매력적이다.
프랑스 휴가가 무려 4주나 되나니, 다시 한 번 놀라는 바다.
한국의 아가씨였다면 델핀처럼 이런 우울한 휴가 기분을 내보려고 해도 휴가가 워낙 짧아 곧 마음 정리하고 직장에 복귀해야 할 것이다.

델핀은 휴가 직전에 남자 친구로부터 함께 떠날 수 없음을 통고받는다.
우리로 치자면 마치 크리스마스 이브를 혼자 보내야 하는 상황?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겨우 하루에 불과하지, 프랑스의 여름 휴가는 무려 4주나 된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남들 다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하는 끔찍함!
델핀은 열심히 친구를 찾으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마음의 외로움과 소외감은 커질 뿐이다.
델핀의 사교 스타일을 보면 의미없는 농담을 지껄이기 보다는 뭔가 진지한 대화를 원하고 일회적인 만남 보다는 서로 통하는 이상형을 추구하기 때문에 바캉스 한 철 보내는 애인을 쉽게 만들 수가 없다.
반면 그녀의 친구들은 이른바 헌팅도 잘 하고 처음 본 남자들과도 서스럼 없이 대화를 나눈다.
델핀은 좀 피곤한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델핀을 보면서 마치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나도 처음 본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편이고, 시시껄렁한 농담들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주 친한 친구들이 아니면 굳이 모임에 나가지 않는 편이다.
당연히 바캉스 한 철 애인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녀와 대비되는 스웨덴 아가씨가 나오는데 세상에, 수영복은 입고 수영하냐고 놀라면서 묻는다.
아니 그럼 벗고 하라고?
그녀는 가슴을 환히 드러내고 다닌다.
오히려 가슴을 동여맨 델핀에게 그렇게 태우면 자국 남지 않냐면서 의아해 한다.
 이 아가씨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해변가에서 만난 남자들과 금방 사귄다.
델핀은 사교에 소극적이고 깊이 있는 만남을 원하는 아가씨라 어쩔 수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클 수 밖에 없는데 또 혼자 있는 것을 지루해 한다.
필연적으로 그녀의 여름 휴가는 우울해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델핀이라면 나는 오히려 그런 시간들을 편안하게 귀중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가 아닌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널려 있는 도시인데 대체 왜 외로워 한단 말인가?
물론 때로 소외감이 들고 친구가 그리운 때가 있다.
특히 남들 다 떠나는 휴가철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혼자 있어야 하는 때도 살다 보면 분명히 있다.
자신을 더욱 소외감으로 내모는 델핀이 안쓰러웠다.
녹색광선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드디어 새로운 사랑이 시작하는 걸로 영화는 끝난다.
<남과 여> 의 느낌과도 좀 비슷하다.
프랑스 영화는 확실히 할리우드와는 다른 영화의 공식이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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