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생활사 1 조선시대 생활사 1
한국고문서학회 지음 / 역사비평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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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서가를 뒤지다가 발견한 책이다.
고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생활사를 재현했다는 점에서 일단 믿음이 갔다.
여러 필자들이 나눠서 작업을 한 탓에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은 부족하지만 자료가 믿음직해서인지 신뢰가 갔다.
기왕이면 여태까지의 성과물을 가지고 한 두 사람의 필자가 전체를 조망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알라딘에서 검색을 해 봤더니 2권도 나왔다.
집집마다 전해져 오는 고문서들이 많이 번역되서 보다 구체적인 조선시대 일상이 재현되길 기대한다. 

여러 책에서 확인한 바지만, 아무래도 내가 여자이다 보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가 가장 궁금하다.
익히 알려진대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게 완전히 종속된 시기는 유교 규범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내제화된 18세기 무렵이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명나라가 망한 후 소중화 의식이 하늘을 찌르면서 삼종지도 등의 유교적 여성 덕목이 사회 전체에 퍼졌던 것 같다.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율곡 이이를 낳고 일곱 살 때까지 강릉에서 아이를 키웠다는 게 옛날에는 잘 믿기지 않았는데 이 때만 해도 임진왜란 전이니 남귀여가혼이라는 풍습이 남아 있을 때가 아닌가.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던 만큼 신부를 맞이하려면 사위가 처가에서 어느 정도 일을 해 줘야 했을 것이다.
김유정의 <봄봄>에 잘 묘사된 것처럼 말이다.
사위 역시 처가에서 첫 아이를 키울 동안 봉사하는 대신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었을 것 같다.
당연히 아들이 없더라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연 관계를 더 중시하여 딸의 자손인 외손자가 제사를 받들고 재산도 물려받았다.
아들이 없을 경우 문중에서 양자를 들이는 게 아니라, 직계 혈통인 외손자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니 어찌 보면 이게 훨씬 더 합리적이고 정리에도 맞다.
고려 시대만 해도 아들딸 구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족보에 기재하고 재산도 당연히 균등상속 됐으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적장자에게 모든 권한이 상속됐다.
이 점은 후기로 갈수록 재산 증식이 어려웠기 때문에 큰아들에게 밀어 줌으로써 보다 확실하게 부모가 공양받을 수 있었다는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에 나온 바대로 규범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또 바뀐 사회 환경에 문화나 예의범절도 적응해 나가야 하니 여성의 지위 역시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평등한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글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평민이나 노비층의 생활상도 흥미로웠다.
한문을 알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로써는 복잡다단한 법률이나 규범 등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고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더더욱 한글이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 같다.
한문을 아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기 때문에 양반층으로서는 굳이 한글을 보급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에게까지 문자를 깨우치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발상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혁명적일 뿐더러, 양반들과 특권을 다툴 필요가 없는, 양반이든 평민이든 다 내 백성이라고 생각한 절대 군주의 넓은 포용력이 느껴진다.
이두가 오랜 세월 동안 한문과 더불어 우리말과 한자의 조화를 도운 만큼 시간이 갈수록 한문화 되어 한글이 발명된 이후에도 굳이 한글로 대치될 필요없이 계속해서 한자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단순히 글자만 만들면 끝이 아니라 사용 환경을 조성하려면 많은 사회적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노비의 경우 一賤卽賤 이라는 법에 따라 한쪽만 천민이어도 자손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신분 내에서만 혼인을 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 점이 이해가 잘 안 갔다.
여종이 양반의 첩이 되는 경우 그 자식은 노비가 된다는 종모법 정도만 이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노비와 양민간의 결혼도 흔했다고 한다.
특히 권세있는 양반의 노비 같은 경우 혼인을 하면 자손이 곧 노비가 되서 재산이 증식하기 때문에 일반 양민과 결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내 혼인은 특권을 지켜야 하는 양반층에서만 폐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외의 계층은 반드시 족내혼을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노비와 결혼한 양민의 경우 주인집에 경제력을 의존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더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아 호적도 주인에게 편재되고 결과적으로 주인의 세력 범위를 넓히는데 이용됐다.
또 주인의 임의대로 처분됐기 때문에 한 가족을 이루고 살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임란 당시의 기록을 남긴 오희문의 쇄미록을 보면 70이 넘어서 죽은 여종 이야기가 나온다.
전란 중이라 주인집도 먹을 게 없어서 늙어가는 여종을 병구완 하기 힘든 게 당연했겠지만 식량 축내기 전에 빨리 죽어야 한다는 주인의 일기는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지 못한 당시 노비 계층의 비참함이 너무나 솔직하게 드러나 씁쓸했다.
70이 넘게 집에서 부렸던 노비의 죽음에 대한 상념이 애완견의 죽음보다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출을 못하고 종합자료실에서 읽은 책이라 꼼꼼하게 보지는 못했다.
2권은 정식으로 대출을 해서 제대로 읽어 보고 싶다.
더불어 느낀 점은 역시 한자에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틈틈히 책에 나온 한자들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기본적인 글자는 익히고 있지만 이런 옛 기록들을 보기에는 아직은 너무 일천하다.
책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한자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중국에서도 구어체를 글자로 쉽게 표현하기 위해 백화체를 쓴다고 하니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했던 조선시대 양반층의 문자 생활 수준은 정말 상당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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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 선생님들의 이유 있는 도서관 여행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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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나 디자인, 사진 등은 무척 잘 구성되어 있다.
특히 사진은 전문 사진 작가가 아닌, 함께 간 교사가 찍었다고 하는데 색감이나 구도 등이 참 괜찮다.
반면 글 수준은 아무래도 전공자도 아니고 직업적인 에세이스트도 아닌 만큼, 기대치에 많이 못 미치는 편이다.
특히 유럽 도서관의 시스템이나 운영 실태 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많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이건 차라리 유럽 도서관 기행, 혹은 그냥 여행기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도서관 사서들이 맘먹고 유럽 도서관 시찰을 한 거라 기대한다면 얻는 정보가 너무 피상적이고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정부에서 도서관 연수를 보낸 것도 아니고 개인들이 알음알음 얻은 정보로 자기 돈 들여서 여행간 것인만큼 고급 정보를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이다.
사서들이 직접 가서 본 유럽 도서관, 이런 식으로 홍보하기엔 내용이 너무 부실하다.
또 필자들의 문장력이나 주제에 대한 이해 정도도 상당히 피상적이라 기대에 못 미친다.
사진이 많이 실려 있어 30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한 시간 만에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것에 비하면 스웨덴 복지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냈던 <스웨덴 사회 복지의 실제>는 얼마나 전문적이고 훌륭한가!
그 책 역시 공무원 몇 명이 스웨덴 구청 등을 방문해 복지 정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견학한 기록인데 정부의 지원을 받아 협력 요청이 되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필자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기왕이면 도서관에 대해서도 유럽 도서관과 한국 도서관의 운영 실태를 비교 분석한 제대로 된 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책 내용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미국 도서관은 맥도널드 체인점 보다 더 많다고 한다.
숫자만 가지고는 인구나 국토 면적 등이 다르니 단순 비교가 어려울텐데, 맥도널드 체인점 보다 많다고 하니까 딱 감이 온다.
주위를 둘러보면 맥도널드 체인점은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
여기보다 많다면 이건 정말 많은 거다.
한 동에 하나씩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내가 거주하는 안산시에는 도서관이 다섯 군데 있고 있고 대부분의 도시도 비슷할 것 같다.
한 구에 하나 정도?
예전에 읽었던 <우리야스 도서관 이야기>에서도 일본 도서관 역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마다 하나씩 분포하도록 분관들을 많이 만든다고 들었다.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거리마다 도서관이 하나씩 있다면!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도서관의 열혈 애용자인 내 입장에서 보면 한국 도서관도 정말 많이 발전하고 있고, 서비스도 잘 되어 있다.
어지간한 신간은 거의 실시간으로 구입해 주고 장서 분량도 상당히 다양해서 원하는 책을 못 찾은 적은 거의 없다.
또 요즘에는 대출 가능 시간을 밤 10시까지 늘려서 직장인도 퇴근 후에 빌릴 수 있게끔 배려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도서관 수가 너무 부족하다는 점이다.
다른 책에서 본 것처럼 대학 도서관을 지역 주민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도서관은 책 읽는 곳이라기 보다는, 공부하는 독서실이다.
열람실이 시험 준비생들에게 점령당한지 오래다.
새벽부터 줄서기를 하지 않으면 열람실에서 책 읽기란 불가능하다.
다행히 요즘에는 종합자료실에서는 개인 공부를 금지하는 곳이 늘어서 적어도 자료실에서 만큼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과천에 있는 정보과학도서관의 경우는 아예 열람실을 없애고 외국 도서관처럼 종합자료실에서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쇼파 같은 편의시설들을 들여 놨다.
사진에서만 보던 환상적인 독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같은 취업 전쟁터에서 수험생들 보고 시험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결국은 도서관 수를 늘려서 공간을 확보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책에 나온 도서관 사진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단순히 책을 서가에 배치하는 게 아니라 마치 서점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는 욕구가 생기도록 진열해 놨다.
철제 책꽂이 등을 이용해 사방에서 전시된 책을 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도서관이 서점처럼 책의 배치나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쓴다면 이용객들이 훨씬 늘 것 같다.
또 독서공간도 지금처럼 단순히 책상과 의자만 있는 게 아니라 푹신한 소파나 독서등 같은 걸 구비해 놓으면 더 많은 사람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전문 사서들을 늘리는 것도 중요한 문제 같다. 
외국 도서관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부러웠던 게 바로 이 사서들의 역할이다.
우리나라 도서관에서 사서는 단순히 책을 빌려 주고 반납하는 단순 업무가 주를 이룬다.
아르바이트생이 해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수가 너무 부족해서 단순 대출 업무를 하기에도 바쁘다고 하는데 사서 인력들이 늘어나서 이용객이 원하는 주제를 말했을 때 추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사서들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자면, 책을 추천해 주기는 커녕, 책 이름과 대출 기호까지 말하고 찾아 달라고 해도 자리에 없으면 없는 거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책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학교 과제를 도서관에서 사서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다고 한다.
방과 후 학습이 학원이 아닌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내용은 미국 도서관 책에서 여러 번 봤었다.
이래서 선진국에는 학원이 한국처럼 기승을 부리지 않는 건가?
아이들이 학교가 파한 후 학원 대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또 도서관에서 얼마든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과제를 사서들의 도움을 받아 멋지게 해낼 수 있다면!
사교육 대신 공교육이 신뢰받을 수 있는 사회야 말로 진짜 경쟁력 있는 보다 평등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정보 이용의 공평성이야 말로 평등한 사회의 척도가 될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접근성이 향상되긴 했지만 고급 정보는 아무래도 책에서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이 시민들의 정보 이용 장소가 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국 도서관에 대한 책에서 아주 인상적인 예를 본 적이 있다.
9.11 테러가 났을 때 뉴욕 도서관에서는 다양한 기획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은 나날히 발전하고 있고 시민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에서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져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더 자주,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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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 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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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요즘의 화제는 두뇌인 것 같다.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 책들도 결론적으로는 인간의 의식 상태를 인문학적으로 탐구한 것이고 신경학이나 뇌과학에 관한 책도 많이 나온다.
21세기의 화두가 아닐까 싶다.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에릭 켄델의 자서전에서 라마찬드란이 언급된 걸 보고 이 책을 고르게 됐다.
기억이라는 이 놀라운 정신 활동이 추상적인 연역이 아닌, 세포 수준에서 완벽하게 설명되어짐을 보고 무척 흥분했고 인간의 두뇌로 그 관심이 확장되어 관련 서적을 읽어 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임상의인 만큼 올리버 색스처럼 특별한 사례를 들어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지, 켄델처럼 환원주의적으로 전체를 일관하는 일반론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 두뇌 연구는 타 분야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 켄델의 기억 연구처럼 모든 기능을 섬세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사례들로부터 일반론을 조심스럽게 추론하는 수준이라 가설이 많고 이 책 역시 사유실험이 많으며 저자 개인의 의견이 많이 담겨져 있다.
켄델의 책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학구적이고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객관적인 서술 위주였던 데 비해 이 책은 앞으로의 연구 방향이나 현재까지의 성과에 대해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루한 부분도 있었고 의문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뇌과학이 좀 더 발달한다면 내가 70대 노인이 될 때 쯤이면 두뇌의 여러 작용들, 특히 의식마저도 세포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정말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육체와 분리된 인간만의 특별한 비물질적 실체 영혼을 믿으며 죽고 나면 그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허구적인 교리를 믿고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종교적 심성은 측두엽에 배선된 일종의 본능이기 때문에 종교가 없어질 날은 아마 오지 않겠으나 두뇌 과학이 지금보다 더 많이 진보한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절대자와 피조물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까?
과학에 대해 알면 알수록, 특히 이런 신경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는 너무나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진부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그 능력과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얻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발 때문에 더더욱 과학과 배치되는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깊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지만.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읽고 나서 대뇌에 표상된 신체 이미지가 영원 불변하지 않고 변화가 생기면 48시간 내에 급격하게 수정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부러진 다리를 즉시 수술하고 최대한 빨리 운동을 시킨다고 한다.
고정된 상태로 시간이 오래 되면 대뇌는 금방 다리에 대한 생각을 잊어 버리고 없는 걸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다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 사지통이라는 게 있다.
워낙 신기한 현상이라 다른 책에서도 많이 언급이 됐었다.
솔직히 내 주변에서 접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실재적인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분명히 사지가 절단됐는데도 여전히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절단 부위 근처에 신경종 등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렇다면 환상사지통을 없애기 위해서 계속 그 위로 절단을 해 가야 할 것이다) 뇌의 배선 시스템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아다시피 뇌에는 신체의 여러 부분이 배선되어 있다.
입과 손, 특히 엄지는 크게, 발과 몸통 등은 작게 할당된 우스꽝스러운 머리 지도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팔이 잘리면 팔을 담당하던 영역은 기능을 못하니까 주변에 있던 얼굴 영역이 침범한다.
그래서 얼굴을 자극하면 팔이 아프게 된다는 이론이다.
저자는 실제 환자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얼굴의 특정 부위에 환자의 잘려진 손가락들이 배선되어 턱을 만지면 둘째 손가락이 아프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재밌는 것은 이들의 팔다리가 멀쩡한 상태에서 갑자기 잘려 나가는 게 아니라 서서히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에 절단을 하기 때문에 절단 직전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고 한다.
저자는 가짜 손을 이용해 환자의 환지통을 없애 줬는데 일반적인 치료법은 아닌 것 같고 여전히 설명을 요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애착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내 머리에서 저 사람이 나와 같다고 인지를 하면 즉 머리의 배선 시스템이 바뀌면 그의 고통이 실제로 내 고통처럼 느껴질만큼 신체가 반응한다.
허수아비 인형을 찌르는데 내가 통증을 느끼는 것도 다 이런 애착, 사랑 등의 감정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고대의 이런 저주들은 무슨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그 인형이 나와 같다는 것을 내가 눈으로 봐고 인지를 해야 바늘이 인형을 찌르면 내가 통증을 느낄 것이다.
만약 내가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즉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희빈처럼 몰래 한다면 당사자에게 아무 영향도 못 미치지 않겠는가.
내가 눈으로 보고 저 대상물이 나라고 머리에서 인식을 해야 감정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저주는 뇌 시스템과는 좀 다른 맥락이다.
심신 치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고전적 조건화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카린과 cyclophosphamide를 동시에 먹은 쥐는 부작용으로 구토를 한다.
쥐는 둘을 연관시켜 다음에는 사카린만 줘도 구토할까 봐 거부한다.
그런데 이 cyclophosphamide는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감염을 잘 일으킨다.
사카린만 먹어도 이미 머리 속 회로에 입력이 되어 있는 쥐의 면역 시스템은 기능이 저하되어 쉽게 감염된다.
사카린은 전혀 신체에 무해한데도 단지 기존의 경험 때문에 면역 시스템이 스스로 손상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설명하면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신에 의지한다거나 하면 즉 심리치료를 하면 면역력이 상승되어 병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논리대로 한다면 환자는 기존에 심리적 의존물과 면역 체계에 대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조건화가 일어날 것이다.
또 무엇보다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악성 종양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고 정말 이것이 그 효과를 인정받으려면 수많은 다른 환자들에게서도 똑같은 치유력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저자도 강조한 바지만 근본적으로는 심신치료가 약리작용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나 민간요법, 무슨 기 치료니 이런 것들이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지금처럼 개인적인 체험담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실험을 거쳐 그 객관성을 증명해야 할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섬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가 정립되야 할 것이다. 

역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의식이었다.
나는 늘 죽음이 두렵고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큰 고민거리였다.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그렇다면 잠자는 것은?
잘 때도 생각을 못하지 않는가.
혼수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의식이 없는데 즉 나를 스스로 인지할 수 없는데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죽은 후처럼 존재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죽음도 전생처럼 그저 의식이 사라지고 나면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그런 無의 상태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의식은 두뇌의 고급스런 작용 중 하나이고 생명이 다하면 즉 내 몸의 생명 활동이 멈추게 되면 마찬가지로 뇌의 기능도 정지되므로 의식 작용도 사라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워낙 근본적인 문제이므로 앞으로 더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하여튼 지금까지는 내가 나라는 인식을 가지려면 (그것이 곧 의식인데) 저자의 말대로 세 가지 조선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입력의 비가역성.
저자는 이 책에서 누누히 두뇌의 인지 기능이 절대적이고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이고 수많은 정보를 통합해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즉 내가 책을 보는 것도 단지 글씨가 내 머릿속에 투영되어 카메라처럼 인식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감각 정보들을 수용해 무려 30여 가지의 시각 영역들을 통과한 후 하나의 글씨로 인식하고 보게 된다.
이 때 한 번 인식이 되면 글씨가 될 수도 있고 지렁이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부터는 계속 글씨로 확실하게 인식을 하여 개체의 삶에 안정성을 기한다.
둘째 출력의 유연성.
이것은 일종의 자유의지와도 같은데 나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정보를 입수하여 판단한 후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저자는 그 반증으로 벌의 8자춤을 든다.
벌은 먹이 있는 곳을 알려 주기 위해 8자 춤을 추면서 이동하는데 벌에게 다른 선택을 할 능력이 없다.
오직 벌은 단 한가지 행동, 8자 춤만 출 수 있다.
벌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을 잡아먹는 끈끈이주걱 역시 무언가가 몸에 닿으면 일단 잎을 닫아 버린다.
끈끈기주걱은 닫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생존 본능에 의한 여러 생명체들의 행위는 의식 활동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단기 기억이 가능해야 한다.
어쩌면 기억이야 말로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일텐데 기억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정체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잃은 신경병 환자들의 예는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인격의 황폐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의식이란 혹은 자아란 수많은 정보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통합체를 만들려는 고도의 두뇌 기능이라 정의하겠고 육체가 죽는다면 마찬가지로 의식 기능도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아직까지는 창조주나 절대자에 대해 단정을 내릴 수 없으나 적어도 인간이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이고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기능을 갖는 비물질적인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구원을 얻어 영생을 산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변적인 얘기들이 많아 지루할 때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재밌게 읽었고 두뇌 과학이 좀 더 발전해 이 신비스러운 영역이 많이 알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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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4
질 네레 지음, 엄미정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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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 샵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화가들을 시리즈로 연이어 읽어 봐야겠다 마음 먹고 있던 차에 도서관에서 발견한 후 첫 타자로 마네를 골랐다.
가장 근대적인 화가, 도시적이고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며 무엇보다 색체 그 자체로 말하는 강렬한 평면성과 명암 대비의 일인자!
검은 색이 주는 놀라운 신비로움을 이렇게도 명확하게 보여주는 화가가 또 있을까.
마네는 정말로 딱 내 스타일의 화가다.
한가람 미술관에서 작년에 열렸던 인상파 展 에서 봤던 <피리부는 소년>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는다.
오르셰 미술관이 하필 휴관일일 때 파리에 가는 바람에 위대한 프랑스의 근대 화가들을 보지 못했던 게 그 때처럼 아쉬울 때가 또 있었을까. 

이 책은 프랑스인 큐레이터가 직접 쓴 책이라 그런지 막연한 찬양과 에피소드 대신 정말 작품 위주의 간결한 논평으로 구성됐다.
자잘한 에피소드 대신 정말 작품에 대한 해설을 위주로 설명하기 때문에 약간 현학적이라는 느낌도 들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으나 일단 분량이 워낙 짧기 때문에 집중해서 금방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아름답다.
덜 알려진 그림들도 많이 실려서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괜찮은 시리즈 같고 다른 관심있는 화가들도 읽어 봐야겠다.
한 가지 궁금했던 점은 마네와도 친했던 여류화가 베르트 모리조가 많은 구혼자를 물리치고 외젠 마네와 결혼했다는데 그녀는 정략적 결혼이라 여겨 불행했다고 한다.
이 깊고 그윽한 눈을 가진 우아한 여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테라스에서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는 그녀의 초상화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마네는 수정도 별로 하지 않고 한번에 쓱 붓 가는대로 그렸다는데 나중에 그의 제자가 된 에바 곤잘레스는 수백번을 고쳐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한다.
그는 말 잘 듣는 에바를 총애하여 베르트가 질투했다고 하는데 그림의 분위기로 봐서는 감히 베르트와는 비교가 안 된다.
크게 확대해서 본 그림 속의 베르트는 정말로 우수 가득한 눈망울을 가졌고 때이른 죽음과 연관되어 더욱 비극적이고 슬퍼 보인다.
나는 그녀의 초상화들이 정말 마음에 든다. 

 마네의 아버지는 직위가 높은 판사였고 어머니는 외교관 딸이었다고 한다.
성공한 부르주아 상류층 계급이었던 셈.
해군 학교를 가려고 했으나 낙방하는 바람에 재능을 보이던 미술로 돌아섰고 올랭피아 등으로 화단에 충격을 주면서 살롱에 입선하는 대신 원하지 않던 인상파의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당대의 댄디이자 멋쟁이 신사였다는 저자의 표현이 마네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다.
시골 풍경을 그리기 좋아했던 모네와는 달리 (이름도 비슷해 마네는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마네는 철저하게 도시인이었고 풍경은 그저 인물을 드러내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 인물 주변에 있는 정물화에 매우 공을 들여 또다른 미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에밀 졸라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함께 묘사한 방의 집기들은 놀랄 만큼 세밀하고 그가 정물화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중에는 모네에게 이끌려 아르장퇴유 같은 곳으로 장소를 옮겨 배를 타고 본격적으로 외광회화를 시작한다.
강렬한 태양빛에 반사된 새파란 바다색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직설적이고 천박했을 것 같지만 21세기의 관객에게는 가슴이 뛰는 색체의 美를 선사한다.
초기의 얌전한 인물화들도 좋지만 후기로 가면서 더욱 대담해진 색채 감각과 거친 붓질은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같은 명작을 남긴다.
그가 매독으로 다리를 절단한 후 그 해에 죽었다는 사실은 90 가까이 산 모네나 르느와르, 피카소, 마티즈 등에 비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명성을 얻으면서 주변에 여자가 많았다고 한다.
마네의 아내는 동생과 자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던 네덜란드인 과외 선생, 수잔 렌호프였는데 오랜 시간 동안 동거를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결혼했다는 얘기를 다른 책에서 봤었다.
무척 아름답고 착하고 교양있는 여인이었다는데 큰 아들이 사생아로 마네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고 한다.
그 아들이 등장하는 그림도 그가 입고 있는 검은 양복과 대비되어 무척 인상적이었다.
렌호프와의 결혼 얘기가 책에 안 나와 아쉬웠다.
얼마 전에 재밌게 읽었던 김광우씨의 모네와 마네를 비교한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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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서 - 노벨상을 수상한 위대한 천재 과학자 에릭 캔델의 삶을 통해 보는 뇌와 기억의 과학
에릭 R. 캔델 지음, 전대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재밌게 읽고 있는 책이다.
500페이지 정도 되는데 앞부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소설처럼 기술해서 정말 재밌게 읽었고 수정의 밤에 가해진 나치의 테러 부분에서는 눈시울을 붉혔다.
자서전과 전공 내용이 잘 어울어진 책이다.
2000년도에 기억의 과정을 세포 수준으로 밝혀 내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성과 문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는 워낙 유대인들이 큰 권력을 갖고 있고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유대인을 대단시 하고 부러워 하지만 유럽에서 유대인의 위상은 상당히 낮을 뿐더러 일종의 집단적인 시기 질투를 받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자의 표현대로 세계의 수도와도 같았던 최고의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던 빈의 시민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한 미치광이 독재자의 충동질에 놀아나 끔찍한 집단 폭력자로 바뀌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비교적 많은 기회를 주고 열려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신생 국가였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 대한 향수는 오늘날의 몰락과 비교되어 안타깝고 애잔했다.
또 우상시 했던 형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어려워진 가정 경제를 돕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인쇄공으로 진로를 바꾼 점도 엄청난 저자의 성공과 대비되어 무척이나 슬펐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장남 컴플렉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막내였던 저자는 쉬는 날 하루 없이 칫솔 공장과 좌판대에서 일한 부모와,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형의 희생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고, 뉴욕대에서 의학 공부를 마친다.
거기서 만난 드니스와 결혼하여 정신과 수련을 받는데 돈 보다는 지적 성취를 격려하는 아내의 후원에 힘입어 진료소를 여는 대신 실험실에 들어가 기억의 과정을 세포 수준에서 밝히는 연구에 돌입한다. 

마치 하나의 잘 쓰여진 자서전 같으면서도 중간 중간에 자신의 연구 과정과 성과를 생물학 교과서처럼 논리정연 하게 밝힌다.
어찌 보면 학습이란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하느냐의 문제인 만큼 나도 기억에 대해 관심이 많다.
특히 어빙하우스가 제시한 망각 곡선을 실제 학습에 이용해 효율성을 높힐 수 있을지 궁금하다.
간단히 말해서 시간차를 두고 반복할수록 장기 기억으로 저장이 된다는 논리인데 저자는 이것을 세포 수준에서 증명해 낸다.
단순히 그럴 것이다라고 관념적으로 추론하는 게 아니라 에너지 대사 과정을 분자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듯 단기 기억이 어떻게 장기 기억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이온 채널과 cAMP 등의 분자를 가지고 설명한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상당히 지루하고 조금은 어려웠다.
맨 처음 시작 단계에서 이온 채널이나 활동 전위 같은 얘기는 학교 다닐 때 워낙 많이 들었던 얘기라 쉽게 이해가 갔는데 기억이라는 세부적인 단계로 들어가니 상당히 복잡하고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았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단기 기억은 시냅스의 세기가 증가하는 것이고 장기 기억은 구조 변화가 생겨 시냅스 말단이 늘어나는 것이다.
또 이 때 늘어난 말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CPEB라는 단백질이 prion처럼 DNA의 전사가 없이도 혼자서 자가증식을 한다.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바뀔 때 신호가 되는 전달 물질이 바로 serotonin 이다.
한 권의 교과서를 읽는 것처럼 논리정연하게 쓰여진 기억의 과정을 읽으면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오랜 관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고 인간이 영혼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는 것도 그저 인간 위주의 자아도취에 불과함을 느꼈다.
정말 생물학에 대해 더 많은 진보가 이뤄진다면 기억을 강화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질을 집어 넣는 시술도 이뤄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머리 좋아지는 약이라고 ADHD 때 쓰는 dopamin을 먹이는 강남 엄마들도 있다고 하는데 당뇨 환자에게 인슐린을 투여하듯 모든 기억의 메커니즘이 밝혀져서 실제로 우리가 학습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인슐인 얘기가 잠깐 나오는데 요즘처럼 대량 생산이 가능한 이유는, DNA 재조합 기술의 발달 덕분이다.
인슐린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박테리아처럼 분열이 빠른 균류의 핵에 끼워 넣고 배양하면 무한한 양의 인슐린을 얻을 수 있다.
정말 놀라운 생명공학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워낙 인슐린이 보편화 되서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소름끼칠 정도로 대단한 혁명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몸에서 만들어 내는 호르몬을 인간이 직접 생산해 낸다는 말인가?
이렇게 최첨단의 과학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신을 찾고 정신이나 관념 운운하면서 음양오행설, 기 같은 말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게 통한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칼 세이건이 한탄한 대로 우리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너무나 많이 누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현대의 과학 연구가 한 사람의 독자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함을 새삼 느낀 것이, 책에 굉장히 많은 동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노벨상을 받은 사람도 많아 미국이 얼마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 과학적 발전이 단지 알고자 하는 욕구, 궁금해 하는 호기심 같은 순수한 동기 뿐 아니라, 동료 집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남보다 잘나고 싶은 욕망 등이 합쳐져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수한 집단에 속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자극받는 것은 창의적인 연구 수행에 필수인 것 같다.
때이른 죽음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절절히 묻어난다.
천상 과학자일 수 밖에 없는 저자의 우직함과 성실함도 잘 묘사되어 있다. 

기억이 단순히 외우는 어떤 과정이 아니라 뇌에서 일어나는 정교한 작업 시스템임을 새롭게 배웠고 내 학습에 적용해 보고 싶다.
노벨상에 대한 목마름이 워낙 큰 사회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반작용으로 거부감마저 들었는데 역시 세계적인 석학이나 대가는 일반인과는 다른 위대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다.
더불어 워낙 글을 잘 써서 과학자란 단순히 실험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 결과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문주의자 못지 않게 글 솜씨가 훌륭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너무 재밌게 보고 있어서 다음에 노벨상 관련 서적을 추가로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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