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에도 비슷한 논조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명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기 때문에 환경을 빌미로 3세계의 공업화를 막는 것은 절대 반대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일정 수준의 경제력에 도달해야 비로소 환경 보호를 시작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기아 문제는 좀 더 많은 기부를 하고 NGO 들이 노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해방되는 분명한 가시적 성과가 있기 때문에 지지하지만, 내가 지구 온난화에 대해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것은 이 책에 나온대로 정말로 화석연료의 사용이 기후 변동을 일으켜 해안선을 상승시키고 빙하를 녹게 하며 야생 동물을 멸종시키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논쟁할 만한 근거를 완벽하게 갖추진 못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환경 보호라는 명분 때문에 3세계의 산업 발전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거야 말로 정말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닐까 싶다.
유기농법을 쓰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줄어들고 60억이나 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개간지가 필요하다.
개간지의 확충은 야생 동물의 터전을 뺏고 삼림을 계속 줄인다.
살충제와 화학비료, 관개농법, 심지어 유전자 변형 작물들이 전 세계의 기아를 해결해 왔음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특정 명분을 위해 명백한 이득을 별 거 아닌 것으로, 혹은 잃어버린 것을 지나치게 확대시켜 과장하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농약 안 친 유기농이 훨씬 비싸고 (정말 유기농인지 어디까지를 유기농법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호하지만) 부자들만 사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 봐도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의 극단적인 주장은 회의적인 눈으로 봐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간단하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현재의 지구 온난화는 대략 1500년의 주기를 가지고 변하는 자연적인 기온 상승이며, 더 중요한 것은 지구가 따뜻해지면 한랭기 보다 생물이 번성하기가 더 낫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얼어 죽는 사람이 더워 죽는 사람보다 많다는 얘기다.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식물들의 광합성도 훨씬 쉬워지고 농작물의 생육 가능 위도도 올라간다.
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의 범위도 커진다.
가뭄은 비단 온난기에만 오는 게 아니라 한랭기 때도 잦으며 오히려 소빙하기 때 날씨가 추워지면서 강수량이 부족해 가뭄으로 대흉년이 왔고 추워서 집단으로 모여 있다 보면 페스트 같은 전염병도 창궐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로마나 고대 중국의 번영은 1500년 전의 온난화 덕택이고, 중세 온난화 이후 소빙하기 때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고 마야인들도 도시를 버리고 정글로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미국이 교토 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온실효과 이론의 헛점 때문임을 이해하겠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기후 변화는 태양의 흑점 변화 등에 좌우된다.
많이 비치면 기온이 올라가고 적게 비치면 우주 광선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막이 줄어들기 때문에 구름층 형성이 많아져 기온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날씨 변화를 아직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걸 보면, 미래의 기후가 어떻게 바뀔지를 너무 앞서서 내다보는 것도 크게 신뢰가 안 가기는 한다.
저자는 기후 변화 모델 자체가 엄청난 변수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환경론자들은 이산화탄소 배출 때문에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자고 하지만 정작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또 반대한다.
풍력이나 태양력 같은 대체 에너지는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고 엄청난 돈이 들 뿐더러 현대의 편리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생산해 내지도 못한다.
저자의 직접적인 표현대로 지구 보호를 위해 이틀에 한 번씩만 차를 타자고 하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과소비를 줄이는 것과 기술 발전으로 인한 편리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또 환경 보호를 위해 유해한 배기가스 등을 줄이는 것과 화석연료 사용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온실가스 이론 때문에 기후학자들이 엄청난 연구 기금을 타내고 있고 해양학자들은 반대로 온난화로 인해 해류 변동이 생기면 급격한 한랭화가 올 것이니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달라고 요구한다고 지적한다.
환경단체와 언론 역시 이 명분을 위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발언권을 높이고 많은 자금을 운영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에서 읽은 바대로 자선단체들은 성과를 명백하게 보여 줘야 한다.
환경단체 역시 가시적인 성과를 시민들 앞에 보여 줘야 하고 제약을 가했을 경우 반대로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볼 수 있는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막연한 공포를 조장해서는 안 되고 정말 과학자들이 공개적인 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냉정하게 따져서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100% 다 좋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환경단체들은 전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좀 더 귀기울여야 하고, 확실치 않은 미래의 일에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야 한다.
정말 지구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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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음악 기행 - 유럽 문화 예술 기행 4
귄터 엥글러 지음, 이수영 옮김 / 백의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관의 좋은 점, 절판된 책도 얼마든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다는 점.
그런 거 생각하면 가능하면 많은 책들을 도서관에서 구매해 줘야 할 것 같다.
베스트셀러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책들이 생각보다 빨리 절판되는 걸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이 책도 벌써 절판이라니, 아쉽다.
어떤 분의 서재에서 리뷰를 읽고 고른 책인데 아쉽게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커버가 다 벗겨져 저 아름다운 표지 그림은 못 봤다.
왜 도서관 책들은 하나같이 표지를 벗겨 놓는 것일까?
책 판형은 정말 작고 예쁘다.
문고판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핸드백 속에 쏙 들어간다.
무척 잘 만든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용은 아주 흥미롭게 읽지 못했다.
일단 내가 워낙 음악 쪽에 문외한이고 오스트리아는 유럽 여행 때 잠깐 쇤부른 궁정 구경하고 온 게 전부라서 여기 나온 지명들이 어디 붙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에 대해, 혹은 음악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 본다면 정말 괜찮은 책이 될 것 같다.
사실 음악 기행문은 음악과 도시에 대해 사진 몇 장 실어 놓고 적당히 짬뽕해 놓은, 전문적이지 않은 어설픈 책이 되기 십상인데 적어도 이 책은 그런 면에서는 균형을 잘 취했다.
사실 빈은 합스부르크의 영광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중립국으로 전락한 조그만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이미지 때문에 파리나 런던 등에 비해 별 거 없는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지난 번에 노벨상 받은 에릭 킨델의 자서전을 읽고 빈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풍요로웠고 20세기 초에 세계의 문화 수도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됐다.
한 권의 책이 주는 영향력이 이렇게 큰지 새삼 느꼈던 부분이다.
더불어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 등으로 대표되는 표현주의의 산실이 또 빈이 아닌가.
빈의 영광과 몰락을 안타까워 하는 노과학자의 심정이 너무 절절하게 잘 배어 있어 나도 모르게 빈에 대해 애정을 품게 됐다.
이 책은 그 빈의 아름다운 역사가 음악과 어울어져 잘 드러나고 있다.
<모던 타임즈>도 읽어 볼 생각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서 살갑게 와 닿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화권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 같다.
마치 우리나라 예술계 동향을 외국인이 번역해서 읽을 때 지명이나 장소 등이 생소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문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주기 때문에 그 보편성과 초월성을 획득하는 것이리라.
여기 소개된 음악들을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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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 Black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블랙, 재밌다는 얘길 듣고 기대를 했는데 정말 실망시키지 않았다.  
시간이 안 맞아서 볼까 말까 하다가 봤는데 정말 보길 잘했다.
지난 번 <슬럼독 밀리어네어>도 정말 재밌었다.
헐리우드와는 다른 스타일, 빠른 전개, 강렬한 음악과 영상.
사실 인도 영화는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막연하게 수준이 낮아도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몇 편을 보고 나니까 정말 헐라우드 영화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무엇보다 영화와 음악의 어우러짐이 정말 환상적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음악을 어쩌면 그렇게 잘 표현했는지,  큰 극장에서 스테레오 빵빵 틀어 놓고 보는 맛이 났다.
실화라고 알려졌는데 알고 봤더니 헬렌 켈러와 앤 셜리번 선생의 이야기를 각색한 거라고 한다.
헬렌 켈러는 그냥 막연히 장애를 극복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단순히 대단하다, 이런 선에서 끝날 사람이 아니었다.
어둠의 세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깜깜한 블랙의 세계.
나처럼 활자 중독인 사람에게 볼 수 없다는 건 어떻게 상상을 해 볼 수 조차 없는 그런 세상일 것이다. 

미셸이 처음으로 단어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이건 정말 온 우주가 진동하고 광명이 찾아온 천지가 개벽한 날이었을 것이다.
입모양을 흉내내서 드디어 엄마와 아빠를 인식하고 발음했을 때 부모가 그녀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은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모성애는 정말 아무리 찬양을 해도 부족한 것 같다.
오직 장애아 딸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 배우의 연기도 정말 뛰어났다.
여태까지 인도 사람들에 대해 경제력이 낮다고 한 수 아래로 생각했던 점, 정말 후회한다.
영화를 통해 이렇게 문화적 편견이 수정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미셸이나 선생님 역을 맡은 배우는 인도 최고의 배우라는데 정말 연기 잘 한다.
그 선생님 역의 배우가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주인공이 싸인을 받으려고 했던 바로 그 배우라고 한다.
인도인들에게 영화배우의 위상은 대단하다고 한다. 

2시간에 걸친 상영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기승전결도 정말 잘 만들어졌고 최근에 안 졸고 본 드문 영화가 됐다.
어떤 영화평에서 이것보다 <오아시스>가 났다고 하는데 영화를 이끌어 가는 서사 구조의 힘은 오히려 <블랙>이 훨씬 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미셸이 했던 수화 연설은 정말 최고였다.
어둠에 함몰되지 않고 빛의 세계로, 지식의 세계로 세상과 대화하면서 신이 주신 삶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사는 그녀.
한 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미셸이 여자로서 사랑의 욕구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생과 제자의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네티즌 평을 보니 이 부분이 오버라고 지적한 사람들이 많던데, 장애아도 충분히 욕구를 느낄 수 있고 그 부분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건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별 결론없이 선생님이 떠나는 걸로 처리해서 아쉬웠다. 

또 하나 꼭 기록하고 싶은 것은 미셸 집의 그 엄청난 부유함이다.
저택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정말 감탄했다.
영화 내용과는 별개로 저렇게 크고 화려한 집을 가지려면 대체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하나 감이 안 잡힌다.
<어둠 속의 댄서> 라는 영화에서는 한 여공이 시력을 잃어가면서 그나마 있던 사회적 지위와 재산마저 다 뺏기는 처참한 과정이 그려진다.
미셸은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만 부모의 경제력 때문에 장애를 극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자신을 지켜 줄 완벽한 부모와 재산이 있다는 사실이 장애와는 별개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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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09-09-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을 보면서,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 집안이 부유하지 않았다면, 저런 헌신적인 선생님을 만날 기회조차 못 잡지

않았을까 해서....

marine 2009-09-0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일단 돈이 있어야 선생님을 모셔 오든지 말든지 하죠. 어쩔 수 없이 돈이 핵심이라는 거...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과 주제는 같은데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빈곤의 종말> 같은 경우 두께도 상당하고 책상에 앉아 정독했던 것에 비해 이 책은 지하철에서 정말 가볍게 읽었다.
의외로 어렵지 않고 소설처럼 한 번에 술술 넘어간다.
역시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도 다른 것 같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문화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마저 다 누리고 나면 이제는 슬슬 타인의 고통으로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기는 모양이다.
기부는 그저 개인의 선행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시민의 의무로 여겨질 수 있는 건지 미처 몰랐다.
우리나라도 연예인들 중심으로 슬슬 기부 문화가 표면에 드러나고 있지만 솔직히 아직까지는 과연 기부를 일종의 십일조처럼 의무로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연예인들의 기부를 이미지 관리로 여기고 몰래 할 것이지 알리고 한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다.
이 책에도 그런 비난의 색안경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이기적인데 왜 아무 댓가도 없이 남을 돕는단 말인가?
마치 미국이 가난한 나라에 상품을 강매하기 위해 조건을 걸어 놓고 (이를테면 미국 농산물만 수입하라던가, 수입하더라도 미국 배만 이용하라는 식으로) 원조를 하는 것처럼, 기부하는 사람들도 다 목적이 있고 실제적인 이익이 없다면 하다못해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도 하는 것이니 순수한 의미에서의 선행은 없다는 식이다.
이런 삐딱한 시선이 기부 문화 확산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은 이미 누누히 지적해 왔다.
지만원 같은 사람은 문근영이 기부하는 게 외할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거 숨기려고 한다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또 이런 사람도 있다.
아프리카 난민 구제할 돈 있으면 우리나라 애들이나 돌봐라.
정작 자기는 아프리카는 커녕 어디에도 기부라고는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선행은 스스로의 도덕적 양심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것을 자랑할 필요도 없고 또 안 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건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렇다는 거고, 저자의 지적처럼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부자들의 지나친 소비 행태는 일종의 도덕적 원칙이나 사회적 공감대 같은 기준에서 약간의 제재는 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몇 억씩 하는 요트를 사서 자랑하면 부러워 하기 보다는, 사회에서 얻은 부를 전혀 나눠 갖지 않는 이들의 이기심을 비난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에도 나온 말이지만 부자가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재산을 모으지는 못한다.
법률 서비스가 이뤄지고 사회간접자본이 형성되어 작은 돈으로 이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신용이 확립되어 굳이 내가 나서서 다 조사하지 않아도 안심하고 거래를 할 수 있고 혹시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 언제든지 법에 호소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다.
이런 여건을 사회가 만들어 준 만큼 거기서 큰 이득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사회에 내 놓아햐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적 환원이 법으로 제정된 게 바로 소득세나 상속세 같은 거고, 한 사회의 집단 내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게 바로 기부 문화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자들의 소비 행태를 무조건 부러워 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도덕적으로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부 문화가 인간의 당연한 도리로 인식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
기부 문화는 차치하고라도 적어도 과소비가 최고의 가치가 되지만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이질 것 같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그렇다.
책에도 누누히 나오지만 자기 아이를 최고로 키우기 위해 교육비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것이 반드시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여기 나온 기부자들은 자식의 생명과 굶주리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생명마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혹시 내 아이에게만 지나친 애정을 보이고 있지 않은지 괴로워 한다.
우리나라 엄마들이 이 책을 읽으면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뒤로 넘어갈 것이다.
세상에 내 아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딨냐면서 말이다.
대한민국 출산율이 아무리 정책적으로 지원을 해도 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교육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애 키우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하나만 낳은 거다.
정말 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려면 아예 낳지를 않을텐데 어떤 부부든 아이는 꼭 낳으려고 한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대를 잇는 걸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나라에서 왜 애를 딱 하나만 낳겠는가?
애들 교육비에 너무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잘 키우는 건 고사하고 남들만큼만 키우려고 해도 노후 대책을 못 만들 만큼 허리가 휜다.
나 혼자 돈 안들이고 공교육에 맡겨 키우려고 해도 환경이 나와 아이를 압박해 오니 시골 가서 공동체 만들고 대안 교육 하지 않는 이상 이 미친 사교육 열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아이들의 교육 환경에도 과소비 개념을 도입해서 자기 아이에게 최상의 교육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그 한계가 있어야 하고 지나칠 때는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
명품 열풍도 마찬가지다.
싸구려 백 들고 다니면 무시하고 연예인들이 몇 백씩 하는 가방 들고 나오면 열광하는 이 분위기가 바뀌어야 기부 문화가 확산될 수 있다.
저 연예인은 몇 백 하는 신발 신고 가방 들었다, 와 대단하다, 부럽다, 이게 아니라 쟤는 저렇게 돈을 많이 벌면서 어떻게 하나도 기부를 안 할 수가 있냐, 정말 뻔뻔하고 이기적이구나 이런 문화가 형성되야 남들 눈 무서워서라도 돈을 좀 낼 게 아닌가. 

책에는 대부호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부자들은 워낙 돈이 많으니까 수입의 10%는 써야 하고 대부호는 아니더라도 상위 1% 안에 낄 수 있는 사람들은 5%,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부자라면 (대충 상위 10% 내외) 1%는 기부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서는 내가 기부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는 이상 내 월급의 1%는 기부금으로 나간다고 한다.
마치 세금을 떼듯 말이다.
이슬람교에는 구빈세라는 게 있고 기독교인도 십일조를 하지 않은가.
10분의 1도 아니고 100분의 1인데 정말 우리 모두 좀 더 의무감을 가지고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책에도 나온 바지만 기부금을 받는 단체들은 반드시 어디에 이 돈이 들어가고 어떻게 쓰이는지 명확한 데이터를 보여 줘야 한다.
<히말라야 도서관>의 저자는 MS 출신인 만큼 모든 성과를 가시적으로 숫자를 이용해 보여준다.
만약 내가 기부한 10만원이 어떤 아프리카 아이의 교육비로 들어갔다고 알 수 있다면 나는 다음 달에도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10만원을 또 기부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도 나오지 않은가.
제목은 생각이 안 나는데 잭 니콜슨이 아내가 죽은 후 혼자 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아프리카 소녀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어떤 어린이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더 보람있게 돈을 쓰지는 못할 것 같다.
이런 책이 나올 정도면 미국에는 기부 문화가 상당한 공감대를 얻고 퍼져 있고 그래서 <히말라야 도서관>의 저자도 그저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함에도 단체를 설립하고 아시아 곳곳에 도서관과 학교를 지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제프리 삭스의 책을 읽고 절대빈곤은 나라도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노력하면 충분히 얼마든지 없앨 수 있는 과젱미을 배웠다. 
마치 우리가 천연두를 박멸한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가 시민의 의무이고, 내 가족, 우리나라 국민만이 내 이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 아이들까지도 내 공동체의 일원임을 배웠다.
그러므로 아프고 병들어 최저 생활마저 누리지 못하는 그들의 비참한 삶에 나도 일정 부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 내가 내는 돈은 너무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이런 작은 돈들이 모여 대부호들이 내는 엄청난 기부금과 합해져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단체에 어떻게 기부를 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무엇보다 소시민들의 기부금은 비록 작지만 여러 사람이 한다면 기부 문화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내가 가진 기술을 이용해 육체적으로 봉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책에는 이른 나이에 출산해 질과 항문 사이에 누공이 생긴 아프리카 여성들을 수술해 주는 산부인과 의사도 나오고, 눈을 수술해 주는 안과 의사도 나온다.
이런 일이라면 나도 큰 돈은 못 내더라도 내 기술을 이용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내가 공동체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
새삼 김장훈이나 신애라 같은 연예인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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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from 木筆 2009-09-01 14:27 
    >> 접힌 부분 펼치기 >>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피터싱어,1996, 세종서적 궁극적인 선택 ultimate choice  1. 윤리와 이기주의가 충돌할 때 우리는 궁극적인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선
 
 
 
박정근의 고고학 박물관 -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42가지 열쇠
박정근 지음 / 다른세상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확실히 나는 발굴 보다는 문헌 자료가 더 재밌다.
고고학은 막연히 상상할 때의 흥미로움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파고 들면 너무 어렵고 머리에서 쥐가 날 것 같다.
번역된 여러 고고학 책들도 재밌게 본 책이 거의 없고 이 책 역시 나에게는 상당히 지루했다.
아무래도 과학적인 분석 과정이 많이 들어가서 금방 지루하게 느끼는 것 같다.
300 페이지 남짓 되는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아주 전문적이지는 않다.
저자가 나름대로 구석기 시대를 상상하느라 구석기인의 일상 같은 챕터를 넣기도 했는데 역시 작가가 아닌 이상 상상력이나 묘사력은 매우 빈곤해서 차라리 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구석기인의 생활상을 소설로 알고 싶다면 차라리 이문열이 쓴 <들소>라는 단편을 권한다.
이게 훨씬 더 생생하고 구석기 시대 그리는데 도움이 된다. 

읽으면서 의문점이 몇 가지 들었다.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때는 언제인가?
저자에 따르면 중기 구석기 이전의 유물은 발굴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른 책에서는 연천 전곡리 유적이 유럽의 아슐리안 석기와 같다고 했던 것 같다.
아슐리안 석기는 전기 구석기 시대가 아닌가?
좀 더 알아봐야겠다.
또 저자는 한반도인의 도래 경로를 시베리아 쪽의 유목민 계통과, 남방 계통으로 나누는데 어떤 쪽에 더 무게가 실리는지 궁금하다.
그런데 마지막에 청동기 문화의 발달을 한반도 자체적인 자생 문화로 보지 못할 이유가 뭐냐는 식의 기술은 좀 황당했다.
어떤 문화든 상호교류를 통해서 발전하는 법이고 자생적으로 발생했다고 해서 더 창의적이고 위대하고 전해 받았다고 해서 열등한 것은 절대 아니다.
왜 맥락에 안 맞는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의 탄소연대법 주장을 신뢰하는 눈치인데 북한에 따르면 기원전 30세기, 그러니가 5000년 전의 청동기도 발견됐다고 한다.
그러면 정말 고조선의 건국 시기가 반 만 년 전?
너무 앞서가는 주장 같다.
미국 교과서에는 한반도의 역사 시대가 1세기 전후로 나온다는데 정작 우리들은 그 보다 5000년을 더 앞으로 잡고 있으니 격차가 커도 너무 크다.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의 강역을 나타내는 표지 유물이 되는지의 문제는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또 어찌 보면 고조선이라는 국가와 민족 자체가 고대에는 현대의 국가 개념과 전혀 달랐을 것이니 반드시 그들이 우리의 직계 자손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중국이 워낙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고구려를 지방 정권화 시키려고 하는 통에 우리 역시 너무 예민하게 고대사를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앞부분에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챕터는 개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은 호모 에렉투스 때부터인데 불씨를 얻게 되자 추위를 이기고 음식도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자 이들은 용감하게 아프리카를 빠져 나가 아시아로 건너 간다.
이들이 바로 자바 원인과 북경 원인들이다.
호미니드 족속이 왜 직립 보행을 하게 됐는지에 대한 여러 가설이 나오는데 요즘에는 환경 변화로 숲이 사라지고 초원이 확대되면서 우리 조상들도 어쩔 수 없이 나무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면 저자의 지적대로 구석기가 끝날 무렵 해빙기가 오고 해수면이 높아져 육지가 대륙붕으로 변하자 해양 생물들도 많아지고 자연히 어로 생활도 활발해졌을 것이다.
강수량이 많아지지 농사를 짓게 되고 인구가 늘기 시작했을 것이다.
또 거대한 털짐승들이 사라지고 사슴 등과 같은 날쌔고 조그만 짐승들이 숲에 나타나자 이들을 잡기 위해 둔탁한 무기 대신 날카롭게 갈아 만든 간석기로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신석기로의 변화는 해빙기라는 자연 요소가 결정적이었음을 지적한다. 

비교적 평이한 내용들이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고고학에 대해 좀 더 기초 지식을 쌓고 다른 책에 도전하고 싶다.
한반도의 시작에 대한 다른 사람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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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輝 2009-09-0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슐리앙은 중기가 맞을 겁니다. 아마도. 그나저나 이문열의『들소』라는 책 저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추천 감사드립니다. ^^ 혹시 인류학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제3의 침팬지』를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서평은 안 썼지만...읽어보면 좋아하실 것 같네요. ^^

marine 2009-09-0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제가 얼핏 봐서 착각했나 봐요. 제레드 다이아먼드 책이라면 <총균쇠>를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도 재밌을 것 같네요. 맞아요, 저 이 저자 무지하게 좋아해요. 제 취향을 벌써 파악하셨네요^^

marine 2009-09-1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요, 조유전씨가 쓴 한국사 미스테리에 보니 아슐리앙 석기는 150만 년 전부터 쓰인 석기이고, 전곡리의 유적은 루시를 발견한 클라크 등에 의해 27~30만 년 전 유적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걸 근거로 저자는 그 책에서 전기 구석기 유적이라고 했는데 혹시 학설이 바뀌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