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1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사람 책과는 아무래도 안 맞는 모양이다.
<나를 부르는 숲>도 간신히 읽었는데 이 책도 결국 1/3 만 읽고 포기했다.
유머러스 하고 위트있는 문장이 돋보이긴 한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몰이이 안 된다.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몽땅 다 읽으려고 했는데 그냥 다 포기했다.
뻔한 해외 체류기 말로 진짜 감각있는 에세이스트의 여행기를 기대했는데 도저히 나와 맞지가 않는다.
닉 혼비의 <피버 피치> 읽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다.
간간히 재밌으면서도 몰입이 안 된다. 

아내를 만나게 된 과정이 짧게 묘사됐지만 인상적이었다.
병원에 잡역부로 취직을 하고 거기서 만난 간호사와 6개월 만에 결혼하다니, 정말 한 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영국인 아내와 미국인 남편.
같은 언어를 쓰지만 문화적 차이도 상당할 것 같은데 아내 이야기는 너무 짧아 아쉬웠다.
장모님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어색함과 당혹감도 무척 재밌게 읽었다.
영국에서 장장 20년을 넘게 살았으니 영국 이야기를 쓸 만도 하다.
영국 국민이 공산주의를 했으면 정말 잘 해냈을 거란 말에 푹 하고 웃음이 났다.
아직까지도 착실하게 여왕을 떠받들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complain 이 별로 없는 민족 같기도 하다.
다이애나비가 환하게 웃으며 자기 차를 막은 세발자전거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 그 다음부터는 남들이 왕세자빈 얘기를 하면 죄다 무시했다는 말도 무척 재밌었다.
아마 그런 매력 때문에 여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영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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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18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악 저 표지, 저 표지! 정말 저 표지 좀 어떻게 좀 하고 싶었더랬습니다. 그리고 발칙한 영국산책이라니, 대체 뭐가 발칙한지 궁금할 지경이에요. 편집자들에게 `당신 눈엔 어떤 점이 발칙했습니까?'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책이야 내용만 좋으면 그만인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내용까지도 번역이 괴상하다는 점이에요. 원문을 읽어보면 오역이 상당하다는 편집계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빌 브라이슨이 딱하다는 생각까지.

marine 2009-09-1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와,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네요. 뭔가 어색하고 술술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을 했는데 번역의 문제였군요...
 
원림 중국문화 1
러우칭씨 지음, 한민영 외 옮김 / 대가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책이 벌써 품절이라니...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없어지는 것도 참 빠른 것 같다.
홍보를 안 하면 좋은 책들은 독자의 눈길 한 번 못 주고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그나마 이런 인터넷 서점의 리뷰란이라도 있어 잊혀진 좋은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이 책은 경기도 관내 도서관의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빌린 첫 책이다.
전국적인 유통망이 있는 책바다의 경우, 5천원의 택배비를 내야 하는데 경기도 내의 도서관끼리 빌려 주는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은 아직은 무료다.
이런 책처럼 서점에서 품절된 경우 소장 도서관을 검색해 가까운 도서관으로 배달해 주는 상호대차 서비스는 정말 훌륭하다.
앞으로 종종 이용할 생각이다.
특히 낙후된 지역의 작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중국 문화에 관심이 생긴 건 순전히 이번 여름 휴가 때 갔던 북경 여행 때문이다.
몇 년 전 휴가 때 일본 여행을 다녀온 후 일본에 대해 급관심이 생긴 것처럼 이번에도 북경 여행 후 중국이 너무너무 궁금해졌다.
어떤 분들은 중국이 지저분하고 볼 게 없는 싸구려 여행지라고도 하는데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로써는 유럽이나 일본 등에 비해 값은 매우 저렴하면서도 볼거리는 풍부한 중국이 여행지로 최적처럼 느껴진다.
딱 하나 안 좋았던 건 화장실이 아직도 수세식이라는 거.
이것만 빼면 이번 북경 여행은 정말 환상적이었고 다음에는 천하절경이라과 하는 항주와 소주 등지를 가보고 싶고 또 기회가 된다면 티벳으로 가는 중앙아시아도 가 보고 싶다.
하여튼 중국 여행 후 이화원이나 자금성 등에 대해 관심이 막 생겨 중국 문화 관련 서적들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알라디너의 서재에서 이 책을 소개받고 막연히 중국식 정원이나 건축물 아닐까 생각하고 읽게 됐다.
園林 은 뒷뜰 개념인 정원과는 좀 다른데 일단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정원이 잔디를 깍고 조경을 하는 등 인공적이라면 원림은 자연 환경을 이용해 건축물 등을 배치하여 그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다.
풍경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회랑을 만들어 산책하면서 주변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모양을 낸 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樂山樂水 라는 말이 왠 뜬구름 같은 소리인가 했더니 중국 사람들이 자연 감상을 자기 수양의 덕목으로까지 생각할 만큼 중요시 했다는 의미라는 걸 알았다.
그러므로 모든 원림에는 당연히 산과 호수가 있어야 한다.
가산을 만들 때는 흙으로 쌓거나 (토산) 돌로 쌓는다 (석산)
호수는 보통 1池3山 이라 하여 하나의 호수에 세 개의 인공섬을 만들어 전설적인 신선들의 산인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표현한다. 

중국의 원림 전통은 고대 은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 되었다.
국토가 어마어마 했던 만큼 자연의 절경도 엄청났을 것이고 자연히 풍경 좋은 곳에 담을 둘러 주거지와 정원을 만들었을 것이다.
언젠가 소쇄원에 가서 정원이라더니 왠 땅이 이렇게 넓나 싶어 깜짝 놀랜 적이 있다.
담양의 소쇄원도 일종의 원림인 것 같다.
이 원림에서 시와 산수화와 글씨가 나왔다.
그러므로 원림은 중국 문화의 자양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개인의 원림도 경제력이 풍부하고 경치가 좋았던 항주나 소주의 경우 규모가 엄청나고 훌륭한데 역시 압권은 황제의 원림이다.
사실 이화원의 경우는, 서태후의 별장으로 알고 갔지만 워낙 규모가 커서 또다른 궁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이 이화원이 건륭제의 원림이었던 것이다.
곤명호 앞에 서서 멀리 보이는 만수산을 바라 보는 것도 장관이지만,  온갖 고사와 이야기들로 꾸며진 긴 화랑을 산책하는 게 너무 좋았다.
서태후가 비를 맞지 않고 전각을 이동하기 위해 지었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이 회랑은 원림의 건축 요소 중 하나다.
대부분 직랑 보다는 곡랑으로 지었다고 한다.
정말 중국인들은 자연을 운치있게 감상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고안해 낸 것 같다.
방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도 창을 훤히 열고 보는 게 아니라 창에 격자 무늬를 수놓은 누창이나 예쁜 모양으로 구멍을 낸 공창 등을 통해 색다르게 즐겼다.
동양 정신은 자연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관조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사진으로 유명한 승덕의 피서산장은 무려 5백만평이 넘는 대지로, 중국 최고의 원림이다.
강희제 때부터 짓기 시작해 건륭제가 완성하기까지 무려 87년이 걸렸다.
이 곳이 바로 연암 박지원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갔던 열하다.
만리장성 너머에서 목초지를 키우고 군사 훈련을 하기 위해 행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희제는 4남 옹정제에게 원림을 선물했는데 이게 바로 원명원이다.
황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장춘원과 기춘원을 합하여 원명원의 규모를 넓혔다.
이 엄청난 규모의 원명원은 불행히도 의화단 운동 후 서양 군대가 북경을 장악하면서 군인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결국 조상의 문화재가 어떤 대접을 받느냐는 오늘날 후손들의 처지에 달린 것 같다.
해군 증강을 위해 영국으로부터 수백만 냥을 빌려 그 돈으로 자신의 회갑연을 기념하기 위해 이화원 증축에 써 버린 서태후 같은 어처구니 없는 여자가 최고의 권력을 틀어 쥐고 있을 때니 어쩌겠는가.
청나라는 중원을 정복한 후 역대 왕조와는 다르게 새로 궁전을 짓지 않고 기존의 자금성과 원림 등을 이어서 사용했다.
처음으로 지은 원림인 창춘원은 명의 청화원 터였다고 한다.
이 창춘원은 산이 높고 반대쪽의 원명원은 호수가 많은 평지라 산과 호수를 동시에 갖고 싶었던 건륭제는 두 원림 사이에 옹산과 서호가 있는 장소를 골라 청의원을 짓는다.
이게 바로 중국 관광 코스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이화원이다.
중국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건륭제는 무려 89세를 사는데 강남을 너무나 사랑해 무려 여섯 번이나 순시를 갔고 특히 항주의 서호를 북경의 원림에 옮기려고 애썼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화려한 중국의 원림을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인구는 많고 생산성은 낮은데 전란은 끊이지 않아 끔찍한 기아와 병고의 연속이었다는 역사책의 설명은 한 쪽 면만을 본 게 아닌가 싶다. 
중국 역사책을 읽으면 학정에 시달리고 절대 권력자 황제의 말 한 마디에 수천 명이 죽는 끔찍한 전제주의적 분위기가 풍겨 불행한 느낌이 드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엄청난 문화를 향유했던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은 내 생각보다 훨씬 높았을 것 같다.
문제는 일부 계층에게 국한됐다는 거지만 고대 세계로 갈수록 자연을 통제하지 못하고 기계 대신 사람이 식량을 생산해 내야 했으니 어느 나라나 농민의 삶은 다 비슷했을 거다.
이렇게 화려한 정원을 음풍농월 하면서 즐겼을 귀족들과,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로 끔찍한 기아에 허덕였을 백성이라니, 참 비극적인 대조가 아닐 수 없다.

칼라 사진이 많아 보는 즐거움이 있고 중국 학자가 쓴 글이라 전문성도 있다.
무엇보다 책이 너무 예쁘다.
중국의 정원 문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
아쉬운 점은 책에 나온 장소들을 본문 내용에 맞게 다 소개해 줬더라면 훨씬 더 많이 즐길 수 있었을텐데 가격 문제 때문에 소략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 들어 보는 장소를 아무리 멋진 미사여구로 설명을 해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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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2 (반양장) - 고독의 나날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 너무 재밌다.
2권은 1권 보다 더 재밌다.
내가 잘 몰랐던 화가들, 이를테면 최북이나 심사정, 이인상 등의 그림을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특히 심사정은 정형적인 남종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리는 다소 고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그림들을 접하니, 이거야 말로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동양화의 매력은 서양화처럼 정교한 묘사와 화려한 색채에 있는 게 아니라 먹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아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먹의 농담만으로 약간 심심하다면 담채로 한 두 가지 색을 가미한다면 눈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그런 의미로 남종 문인화는 동양화의 멋과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김홍도의 맹호도처럼 서양화의 데생 못지 않게 정말 호랑이의 털 하나하나가 솟구칠 것처럼 잘 그리는 화가도 있지만 대부분은 붓으로 사물을 입체감 있게 묘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수묵화의 매력은 그런 정교하고 입체적인, 원근법적인 접근 보다는 구도를 넓게 잡아 자연의 풍경을 화선지에 옮겨 아련한 느낌을 주는 것, 정말 이거야 말로 여백의 미가 아닐까 싶다.
현재 심사정은 색을 참 잘 쓴다.
책에서도 그의 명작이라고 극찬한 딱다구리를 보면, 어쩜 그렇게 붉은 색을 잘 썼는지 아! 하고 탄성이 나왔다.
개인 소장이라고 하는데 이걸 갖고 계신 분은 정말 눈이 행복할 것 같다.
고목에 앉아 있는 딱다구리의 묘사도 일품이라 과연 초충도를 특히 잘 그렸다는 말이 실감난다. 

현재 심사정의 삶은 명분론이 우세했던 조선 시대를 살기에는 너무 불운했을 것 같다.
증조부 심지원만 해도 인조반정 때 1등 공신에 책봉되고 그 아들인 심익현이 효종의 둘째 따님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청평위에 봉해졌으니 당대의 명가다.
그런데 심지원의 4남이자 심사정의 직계 할아버지인 심익창의 과거부정 사건으로 도덕성을 최우선시 하는 조선 사회에서 패륜가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과거 부정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아마도 그것은 19세기 말 조선 왕조가 무너질 무렵에나 가능했던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 일로 심사정의 조부는 무려 10년 씩이나 귀양을 갔다.
이런 몰락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너무 과했을까?
불행히도 그는 귀양에서 돌아온 후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 시해 사건에 연루된다.
원래가 소론이었고 이 일을 획책한 김일경과 내시 박상검이 모두 가까운 사이라 그만 함께 모의를 했다고 한다.
당연히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김일경과 함께 처형됐다.
인조반정 1등 공신 자제의 몰락이 참으로 쏜살같다.
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과거부정에 왕 시해 사건이라니 그 타격이 얼마나 컸을까!
그 후손인 심사정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물론, 후에 세조 어진 모사에 감동으로 뽑혀 생애 첫 벼슬자리를 얻었으나 역적의 자식이 감히 어진에 손을 댈 수 없다 하여 한 달 만에 파직됐다고 한다.
같이 뽑혔던 관아재 조영석은 사대부를 모욕한다 하여 거부하다가 옥에 갇히기까지 했는데 심사정의 처지로는 감히 거부하고 말 것도 없이 감지덕지 받아들였을 것이고 그것도 벼슬이라고 주변의 손가락질에 다시 떨궈져 나갔으니,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성격에 얼마나 그 상처가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저자의 표현대로 애수가 깃들어 있고 고요한 가운데 쓸쓸함이 묻어난다.
연하게 색을 가미한 담채화를 보면 짙은 서정성이 묻어 난다.
퍽 점잖고 가냘픈 지식인이었을 것 같다.
최북처럼 세상이 나를 인정하든 말든 호탕한 기개로 내 갈 길 간다고 큰소리 칠 성격도 못 되고, 역적의 자식으로 손가락질 받으니 관아재 조영석처럼 선비의 품위 운운하면서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필 자식복도 없어 사촌 형님의 아들을 입양시킨다.
그렇게 힘든 가운데 이처럼 단아하고 깔끔한 그림들을 많이 남겼으니 그래도 한 세상 헛살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이 분의 화풍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기회가 되면 이 분의 그림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다. 

다음 장에 나온 화가는 최북이다.
솔직히 최북은 기행만 유명했지 그림은 뭐 볼 거 있냐, 이렇게 약간은 무시했었다.
그의 출신이 사대부나 화원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강압적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니까 스스로 자기 눈을 찔러 버렸다는 식의 자극적인 일화만 유명해 왠지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유명세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그림을 접하니 이게 왠일인가, 이 분의 그림도 완전 내 스타일이다.
나는 수묵화 중에서도 옅은 담채가 들어간 문인화풍을 좋아하는데 이 분 역시 심사정처럼 먹의 농담과 색의 가미를 잘 하셨다.
그 색감이 너무나 마음에 들고 특히 눈바람 몰아치는 겨울에 추위를 이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대자연 아래 그린 <풍설귀인도>나 그에 반대되는 하경산수화 <여름날의 낚시>는 정말 그 날씨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색감이 너무나 아름답다.
사대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기인으로 떠돌았던 이력과는 다르게 최북은 속화나 진경산수화 보다는 오히려 문인화를 잘 그렸다고 하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 하다.
저자는 최북의 그림이 워낙 들쑥날쑥 해 명작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 좋은 그림만 소개해서 그런지 책에 실린 그림들은 죄다 마음을 흔든다.
의외로 그림은 화가의 인생과는 달리 파격적이지 않고 단아하고 얌전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최북은 중인 출신으로 양반이 아니다 뿐이지 천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대접을 못 받고 살았나 모르겠다.
이인상도 서출 집안이고 화원들도 중인이 아닌가.
워낙 파격적으로 인생을 살아서 인정을 못 받은 걸까?
아니면 전문적인 화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 통신사 일행에도 끼었던 걸 보면 나름 당대에 유명했을 것 같은데 혹시 지나치게 자극적인 일화만 떠도는 건 아닐까?
하여튼 가족관계도 불분명 하고 추운 겨울날 성 밑에서 얼어 죽었다고 하니 그 삶이 참으로 애잔하다.
추정하기로는 75세 정도 살았다고 하니, 천수는 누린 것 같다. 

다음에 나오는 이인상은 솔직히 감상 포인트를 잘 모르겠다.
나 같은 평범한 독자들의 볼멘 소리를 의식해서인지 저자는 이인상의 문인화가 추구하는 바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진경산수화는 정선, 속화는 김홍도, 문인화는 바로 이인상이라 할 만큼 이인상의 그림은 속기가 없고 그 절개가 빼어나다는데 이걸 즐길 줄 알려면 그림 보는 눈이 보통은 넘어야 한단다.
그러니 이제 겨우 동양화에 맛을 들인 내 수준으로는 아직은 즐길 수준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소나무 그림은 빼어난 자태가 눈길을 확 끈다.
특히 화면 정중앙을 가로지르면서 뻗어 있는 기상이 과연 문인화의 대가답다.
사실 책에서 설명하는 俗氣 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막연히 품격이 없고 똑같이만 베끼려는 전형적인 화원풍의 그림을 말하는 건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자극적인 그림은 아무래도 백자를 사랑하던 선비 취향에는 맞지 않을 것 같다.
만약 진하게 채색되고 정교하게 묘사된 서양화를 보여 준다면 이야말로 정신이 결여된 속물스러운 그림이라고 평했을 것 같다.
왜 조선 후기에 백자가 유행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저자가 예로 든 것처럼 문인화는 점잖은 백자와 너무 잘 어울린다.
사실 나는 우봉 조희룡의 매화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데 (특히 고궁박물관에서 본 매화 병풍도는 최고였다) 김정희가 조희룡의 화풍을 두고 잘 그리나 격조가 부족하고 俗氣 가 많다고 해서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능호관 이인상은 당대 명문이었던 전주 이씨 밀성군파로 청에 끌려갔던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다.
숭명배청이 기치를 올리던 시절, 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써서 심양으로 끌려갔던 이경여의 자손이니 왕세제 시해 미수 사건으로 처형된 역적의 자손인 심사정과는 처지가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인상은 남인이 들어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완고하고 성품이 추상 같았다고 한다.
지금 보면 지나칠 정도로 편협하고 당파에 함몰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시대정신이었던 당대 현실에 비춰 보자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선비의 자존심을 꺽지 않았던 그 기개는 높히 살 만 하다.
寫實보다는 寫意를 표현하고자 했던 문인화가들.
대상의 정확한 묘사보다는 그 안에 담고자 하는 뜻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동양화.
러시아 이콘화가 원근법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그려진 이유가 있듯, 또 이집트 벽화들이 신체 비례 대신 고답적인 비율을 택한 것처럼, 우리 동양화도 서양화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진짜 참맛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심사정이 최북의 담채화는 동양화에 무지한 서양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인상의 시 중 너무 마음에 드는 시구가 있어 노트에 옮겨 적었다.
夢寢亦淸 (몽침역청) 꿈에도 또다시 맑을지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한 후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오직 책에만 몰두하고 살겠다는 시의 마지막구절이다.
이인상은 집안의 배경이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증조부 이민계가 백강 이경여의 서자였다.
한 번 서얼이면 자손대대로 서얼이라는 끔찍한 족쇄가 발목을 잡아 중앙 관계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집권 노론측은 서얼허통 방향으로 나아갔고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덕에 이인상은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사실 노론하면 왠지 서얼허통 같은 진취적인 정책은 무조건 반대했을 것 같은데 저자에 따르면 서얼 진출을 허용하는 게 노론의 당론이었다고 한다.
그 덕에 이인상 뿐 아니라 그 숙부도 벼슬을 했다.
그렇긴 해도 이인상처럼 대쪽 같은 골수 노론 선비가 신분의 제약 때문에 하급 관리로 머물면서 뜻을 다 펼치지 못했으니 울분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간다.
몸도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다고 한다.
작자 미상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체구도 작으시고 단아한 인상이라 꼬장꼬장한 느낌은 없었다.
역시 그림을 그리는 예인이라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주역을 한 괘씩 열 번을 읽었다고 한다.
독서가 끝나면 시를 읊고 손수 지은 정자 주변을 산책하고 또 흥이 나면 그림을 그리고.
이런 고상한 독서인의 삶이야 말로 내가 바래 마지 않던 바로 그 삶이 아닌가.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대신 이런 교양인의 삶을 살았으니, 좋게 보면 조선 양반들의 문화적 감수성이냐 취향이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이 간다.
아마 나라에서도 이런 유학자이자 문화인으로서의 사대부를 지향했기 때문에 군역도 면제해 주소 온갖 특전을 베푼 게 아닐까 싶다.
사대부가 나라의 근간이라는 말이 농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매우 잔인한 말로 들렸는데 일견 이해가는 면도 있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시를 지어 가난을 참아 온 빈처의 헌신에 고마움을 표한다.
밥을 굶어도 내 책을 내다 팔지 않고 불쏘시개로 쓰지 않았던 당신에게 늘 감사했다는 시구를 대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찡했다.
왠지 첩도 안 들였을 것 같고 지고지순 하게 아내를 사랑하셨을 것 같다. 

마지막은 가히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라 일컫어지는 단원 김홍도다.
사실 김홍도 하면 씨름이나 서당 같은 풍속화 밖에 몰랐다.
내가 이 분 그림에 눈을 뜬 것은 오주석의 책을 보면서다.
단원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 보니 정말 구도가 자연스럽고 역동적인 상황을 절묘하게 잘 포착했다.
그런데 좀 더 들어가 봤더니 풍속화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장르에 다 능했다.
과연 천재화가란 말이 허명이 아니다.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렸는데 30 대 때 그린 군선도를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리는 솜씨가 정말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화원 일을 하면서도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이미 21세에 영조의 진연 그림 제작에 참여했고 29세 때는 어진화사가 된다.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워 일찌기 도화서에 들어갔는데 정조와는 세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그림은 김홍도에게 맡기라 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강세황은 제자이면서 예술적 동반자로써 단원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여 그림마다 찬을 하고 그 가치를 높히 평가했다.
저자의 말대로 두 사람의 인연이 너무나 보기 좋다.
서양처럼 미술계가 좀 더 상업적으로 활성화 됐더라면 김홍도의 명성은 국제적이지 않았을까? 

표지에 실린 그림은 단원의 자화상으로 생각되고 있다.
생황과 퉁소를 잘 부르고 화가였던 걸 생각하면 꽤 감각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다.
어진화사에 참여한 공으로 연풍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정조가 죽고 난 후 아들 월사금을 못 낼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미술 시장이 상업적으로 활성화 되지 않았으니 당대 최고의 화가도 가난에 시달려야 했던 모양이다.
60세에 다시 도화서에 들어가 차비대령화원이 되고 녹취재까지 시기마다 봤다는 게 저자의 표현처럼 제대로 대우를 못 받은 느낌이 들어 왠지 쓸쓸하다.
그 정도 실력에 그 정도 나이면 최고의 원로로 후배들에게 대접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해야 마땅한데 회갑이 다 되서도 여전히 도화서에서 시험을 치고 있어야 하는 당시 화단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개별적인 작품보다 화가에 초점을 맞춰 그림의 변천사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무척 알찬 시간이었다.
유홍준씨가 쓴 김정희 평전도 읽어 볼 생각이다.
더 많은 기록들이 발굴되어 이 위대한 화가들의 명성이 보다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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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9-09-1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마린님 제목이... ㅋㅋ
 
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다른 책을 고르려다가 자꾸 눈에 밟혀 집어든 책인데 결과적으로 만족스럽다.
안휘준씨의 <한국 미술의 美>를 읽을 때처럼 문장이 고풍스럽고 전문성이 녹아 있으며 우리 화가들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앞의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안휘준이라는 사람이 누군가 했는데 유홍준씨의 지도 교수였다는 걸로 봐서 꽤 나이가 있고 이 분야에서는 대표적인 학자로 존중받는 것 같다.
2권은 혹시 1권에 실망할까 봐 일단 읽어 보고 빌리려고 같이 안 빌렸는데 뜻밖에 너무 재밌어 2권을 빌리러 갔더니 그새 누가 대출해 가버렸다.
아쉽지만 며칠 기다려야지. 

여러 점의 그림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딱 네 명의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어 책의 밀도가 높다.
저자는 총 여덟 명의 화가들을 10년에 걸쳐 역사비평에 연재했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이 놀랍고 연재물이라고 보기에는 완결성이 뛰어나다.
특히 책의 1/3을 차지하는 겸재 정선 편은 저자가 공을 들인 만큼 화가의 높은 격조와 뛰어난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도판이 작아 큰 산 밑의 선비나 나귀 같은 작은 형상들이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도 전체를 보여줄 때 보다, 클로즈 업 하여 부분을 확대시켜 놓으니 그 생생한 붓맛이 훨씬 더 실감나게 느껴졌다.
진품을 보지 못하는 이상, 또 설사 본다 해도 잠깐이니 기왕이면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확대해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첫 등장인물은 인조 시대 화가인 연담 김명국이다.
사실 이 분의 그림은 달마도 밖에 몰라서 대체 왜 유명한지 의아했었다.
그런데 여기 소개된 <심산행려도>나 <설중귀려도>를 보니 과연 신필이구나, 무릎을 탁 쳤다.
눈 오는 산 속에 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의 모습은 비록 큰 산에 가려 아주 작게 그려졌지만 그 필선이 자못 정교하여 거대한 자연 속의 인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그는 취기가 있어야 그림을 그리고 꼼꼼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일필휘지로 단번에 쓱 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도를 보인다기 보다는, 천재성이 돋보이고 奇格이 느껴진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 일행에 두 번이나 참여할 정도로 일본에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일본인이 달마도 같은 속필화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나도 들은 것 같다.
또 분청사기에도 열광한다는데 왠지 둘 다 비슷한 느낌이 든다.
도화서의 화원이었고 전설만 많을 뿐 실제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은 유명한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다.
이 분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고, 처외증조부가 이수광이며, 성호 이익과 그 형 이우가 친구이고, 다산 정약용이 외증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약용의 전기에서 윤두서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윤두서의 그림으로는 그 자화상이 매우 유명하다.
수염 한 올 한 올을 꼼꼼히 그린 걸 보면 과연 전신을 그리는 최고의 초상화가라는 생각이 들고, 그 형형한 눈빛을 보면 얼마나 기개와 자부심이 높았을지 성격됨도 짐작이 간다.
잠깐 생애를 훑어 보면 15세의 나이에 혼인하여 18세에 첫 아들을 두고 아내와 사별한 후 다시 장가들었는데 평생 9남 3녀를 뒀을 만큼 부인과 사이도 좋고, 다복했다.
아들을 이렇게 많이 뒀으니 당시로서는 정말 큰 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산 윤선도가 해남으로 유배된 후 남인 계열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진사 합격 후 평생 벼슬길이 막혔고 겨우 48세에 졸하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불행한 삶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48세에 열 두 아이의 아버지라니, 좀 놀랍기는 하다.
15세에 장가든 걸 보면 2차 성징이 시작하자마자 곧 결혼을 했던 모양이다.
그 아들 중 윤덕희가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나물 캐는 여인>과 같은 비슷한 주제의 그림을 남겼다. 

윤두수의 또다른 명작으로는 친구 심득경의 초상화가 있다.
이 그림은 전문 화원들의 천편일률적인 초상화와 달라 개성적이고 신선했다.
일반적인 초상화가 채색을 진하게 하여 좀 부담스럽다면, 심득경의 초상화는 은은한 맛이 있고 담백하다.
정말 전문화원과 선비화가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말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는데 솔직히 내가 보기엔 데생 실력이 썩 좋지는 않다.
말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해 관념적인 그림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역동적인 그림을 시도했다는 점은 알겠지만 먹의 한계라고 할까? 서양화가들의 놀라운 묘사력에는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말의 움직임이 어색하고 비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수묵화의 멋은 정밀한 묘사보다는 아련한 분위기와 잡힐 듯 말 듯한 정서에 있다고 생각한다.
청록산수화 중 하나인 낙마도가 나오는데 다른 책에서 이에 관한 중국 고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단지 유머러스 하다고만 되어 있어 관련 고사를 모르는 건지 그냥 넘어간 건지 의아하다.
자긍심이 높아 주문을 받았던 겸재와는 달리 평생 몇 점 그리지 않았고 대작보다는 인물 표정을 주로 묘사하는 소품에 능했다고 한다.
또 백성들의 삶에도 관심이 많아 실제적인 학문을 추구하고 그들을 직접 관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저자는 이런 공재의 노력이 다음 세대의 진경산수화를 낳았다고 평한다.
요켠대 숙종대의 이런 문화적 바탕 위에서 영정조대의 문예부흥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관아재 조영석이다.
이 분의 그림은 얼마 전에 다녀온 경기도립박물관에서 봤다.
형 조영복의 초상화였는데 엷은 분홍색으로 도포를 칠하고, 얼굴 표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잡아내어 일반적인 초상화와 다르다 싶었는데 이 작가가 바로 조영석이었다.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처럼 조영석의 초상화도 전문화원들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르다.
또 이 초상화는 손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보통 손을 생략하는데 자연스럽게 무릎에 놓여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
열 네 살에 부모를 잃고 평생 의지했던 맏형 조영복이 신임사화로 유배가 있을 때 직접 찾아 뵙고 그린 초상화라고 한다.
유배지에서 그린 초상화이니 무척이나 애틋했을 것 같고 형제지간에 우애도 깊이 배어 있을 것 같다.
이 조영석네 집안은 노론의 명문으로 조부대부터 김상헌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 손자인 김창협에게 다시 아들이 배우는 등 노론 거족 안동 김씨와 인연이 깊다.
조영석은 김창협의 처남인 이희조에게 배웠는데 마침 부모가 일찍 죽은 조카가 있어 역시 고아가 된 제자와 결혼시켰다.
그 역시 공재처럼 15세에 혼인하였다.
그의 친구로는 시로 유명한 사천 이병연이 있고, 그림으로 유명한 10세 연상의 겸재 정선이 있다.
이들의 교유는 평생을 두고 예술적 빛을 발하였다.
기록이 없는 겸재의 경우, 그나마 조영석의 찬문이나 애도문 등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관아재는 워낙 인물화를 잘 그려, 형 조영복의 초상화를 직접 본 영조가 감탄하여 그를 어진화사로 지목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양반 사회에서 그림이란 환쟁이나 그리는 매우 천한 기예였기 때문에 선비가 붓을 잡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라 여겨졌다.
겸재의 경우 주문까지 받아 그림을 그렸으나 (그래서 중인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고) 명문 노론 거족인 관아재로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임금이 직접 명하는 일이니 못 이기는 척 그 재주를 발하면 좋았으련만, 왕명을 어겨가면서까지 거부하여 파직됐다.
왕이 위급할 때 양반도 약방문을 지을 수 있지 않냐는 말에, 그림 그리는 일은 위급한 일도 아닐 뿐더러, 약방문은 지을 수 있으되 직접 붓을 쥐는 것은 임금의 치질을 핥으라는 것과 같다고까지 했으니, 그의 거부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예술이 이처럼 천시받을 수 밖에 없었던 조선 시대 현실이 안타깝고, 재능있는 선비화가들도 전문적인 화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문인화에서 멈췄어야 함이 아쉽다.
배우지 않고 독학으로 이만큼의 성취를 얻은 걸 보면 타고난 화가임이 분명한데 좁은 문인화의 폭에 안주해야 했던 현실이 안타깝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났더래도 충분히 서양 화가들과 대적이 되지 않았을까?
대과에 급제하지 못해 평생 외관 말직으로 떠돌았으나 말년에는 당상관까지 올랐다고 한다. 

마지막은 겸재 정선이다.
이 분의 위대함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번에 많은 그림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정말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를 꼽는다면 단원 김홍도와 함께 이 분이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사실 인물화는 썩 잘 그린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 분의 장기는 바로 산수화에 있다.
특히 말년에 그린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그 대담한 구성과 웅활한 필선에 전율하게 된다.
정말 최고의 명작답다.
특히 바위 그림이 예술이다.
양감과 날카로운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런 진경산수화가 숭명배청 분위기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을 받들지 않게 된다.
이제 중원 대륙에 중화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에서 중화사상을 이어가자.
이른바 소중화주의 때문에 중국의 모방 풍조를 버리고 우리 것에 눈을 뜬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분위기가 민족주의와는 다른 양상임을 설명한다.
내 민족의 것을 사랑하고 자부심이 높아졌다기 보다는, 국제정세에 눈이 어두워 망해가는 명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나, 어쨌든 이제 중국 대신 우리 자신의 것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게 됐다.
확실히 화보를 보고 베낀 그림은 엇비슷하고 활기가 부족하다.
대신 직접 풍경을 보고 그린 그림은 생생한 현장감이 있다.
금강산을 그린 금강전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한강변을 그린 <경고명승첩>이나 임진강변을 그린 <연강임술첩> 등은 그 풍경이 정말로 생생하다.
특히 <연강임술첩>은 경기도립박물관에서 임진강 특별전을 할 때 사진으로나마 감상을 하여 더욱 반가웠다.
경기 관찰사 홍경보가 삭령을 순시한 후 연천으로 가기 위해 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웅연에 도착했는데, 이 때가 마침 임술년 시월 보름이나 소동파가 뱃놀이 하면서 읊은 <후적벽부>를 따라 하려고 시로 유명한 연천군수 신유한을 불러 문장을 짓게 하고, 그림은 양천현령인 정선에게 맡겼다.
과연 양반의 품격있는 놀이문화답다. 

겸재는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연줄을 통해 김창집의 빽으로 벼슬길에 오른 만큼, 큰 직책은 못 맡고 외지를 떠돌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비록 명예직이나 당상관에 올라 삼대가 추증되는 영광을 누린다.
현재 심사정이 그의 제자다.
70이 되어서는 벼슬을 내놓고 백악 밑에 인곡정사라는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 관아재와 사천 이병연 등과 교류하면서 말년의 예술혼을 불사른다.
<박연폭포>와 같은 힘이 넘치는 대작이 80이 넘어 완성됐으니 과연 이 화가의 정력이 놀랍다.
그는 84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뜬다.
손자 정황이 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중국과 일본, 베트남 등을 포함하여 동양권에서 수묵화로 우열을 가린다면 과연 우리 화가들의 작품은 몇 점이나 들어갈까?
조선 화단에만 그칠 게 아니라 한자 문화권 전체를 대상으로 품격있는 그림을 가린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
지역 안배 이런 거 말고, 정말 역대 화가들끼리 진검승부를 겨뤄 봤으면 좋겠다.
겸재 정선이라면 중국 유명 화가들의 명성과도 당당히 겨룰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에는 이 책에서 많이 인용된 남태응의 <청죽화사>가 실려 있다.
당대의 화가를 논하는 책으로 냉철한 지적이 간담 서늘하다.
김명국과 윤두서, 이징을 비교한 화론에서는 이징을 가차없이 비판하여 김명국과 윤두서가 더욱 돋보였다.
2권에도 네 명의 화가들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내가 좋아하는 표암 강세황은 없다.
그렇지만 단원 김홍도가 포진하고 있으니 어서 빨리 읽어봐야겠다.
이제 우리나라도 먹고 살만해졌으니 우리 전통 문화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우리 옛 화가들의 걸작들이 새롭게 평가받길 바란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사상에도 이용되지 않고 (이를테면 민족주의, "우리 것이 최고여' 주의) 작품 그 자체만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화에 지식이 좀 생기면 중국화와 일본화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다.
마침 중앙박물관에서 겸재 정선展이 열리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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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아몬드꽃 표지) - 그림과 편지로 읽는 고독한 예술가의 초상
빈센트 반 고흐 지음, H. 안나 수 엮음, 이창실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한 때 고흐는 너무 흔한 화가가 돼버려 좋아하는 화가 이름으로 꼽기가 좀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 유명하달까?
왠지 좋아하는 책 이름 물어볼 때 베스트셀러 대답하는 그런 평범한 독자가 된 것 같아, 좀 더 있어 보이려면, 그림에 대해 좀 안다 싶은 인상을 주려면 고흐보다는 차라리 에드워드 호퍼요, 이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보면서 고흐는 아무리 많이 언급되고 대중에게 노출되도 여전히 너무나 매혹적인 화가이고 그 그림은 절대로 질릴 수 없는 명작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도판이 정말 너무 섬세하다.
이렇게 큰 도판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그림마다 어쩜 그렇게 감정이 절절이 배어 나오는지, 나도 모르게 도판을 쓰다듬었다.
표지로 실린 아몬드꽃도 좋고, 오베르 교회의 그 코발트색 색감도 너무 아름답고, 론 강 위로 쏟아지는 별이 빛나는 밤도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보라색 붓꽃이 피어있는 들판, 밤의 카페 테라스, 까마귀가 날아가는 밀밭...
아, 모든 게 정말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나는 유난히 색채에 민감해서 고흐가 노란색과 파란색, 초록색 등의 원색을 두터운 붓질로 캔버스를 메꿔 가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신은 색채를 추구하고 그 색으로 인물의 표정과 기품을 추구하며 여러 감정을 표현한다고 밝혔다.
고흐가 겨우 37세의 젊은 나이로 권총 자살한 후 테오 역시 그 해에 죽고 만다.
둘이 나이 차가 다섯 살 정도 나니까 테오는 그보다 훨씬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결혼한지 딱 1년 지났고 아들이 막 태어났을 때였다.
테오는 아파서 죽은 걸로 나오는데 무슨 병으로 젊은 사람이 갑자기 죽었는지 궁금하다.
고흐가 좋은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면 그의 삶이 권총 자살로 끝나지는 않았을까?
시엔이라는 매춘부 여자가 나오던데 그녀와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면 그는 좀 더 넉넉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당시 화단에 알려진 화가도 아니고 그림도 못 팔고 그저 동생에 보내 준 돈으로 연명하는 이 가난한 화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헌신적인 뮤즈는 진정 없었단 말인가?
피카소는 화단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젊은 뮤즈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것일까?
고흐의 강팍한 삶이 안타깝다.
오베르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회복되는 것 같더니 결국은 자살하고 만 불멸의 화가.
요즘처럼 정신병이 하나의 질병으로 인식되고 관리됐더라면 그는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모든 가정들이 다 부질없지만 사후에 이렇게도 높이 숭앙되는 화가가 그토록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동생 테오에게 600 여 통의 편지를 보낸 걸 보면 감수성도 무척이나 풍부했던 것 같다.
테오는 고흐의 후원자이고 예술적 동지였으며 유일한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다. 

언제쯤 고흐의 그림을 눈 앞에서 직접 볼 수 있을까?
지난 번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흐전은 소품 위주라 그림의 진짜 맛을 느끼기는 좀 어려웠다.
(그런데도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유럽과 미국을 돌면서 그 강렬한 색의 향연을 만끽하고 싶다.
역시 창의적인 게 훨씬 마음을 끈다.
들라크루아나 밀레를 모사한 그림보다는 자신의 그림이 훨씬 와 닿고,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했던 젊은 시절의 데생보다는 색으로 표현한 후기 그림이 더 마음에 든다.
처음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어두운 색조로 그리더니 프랑스로 이주하면서는 색이 점점 밝아지고 원색적으로 변하는데 그의 화풍 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하여튼 이 책, 도판이 너무 마음에 들어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우울할 때 가끔씩 꺼내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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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9-09-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죠. 다시 보는 듯 기억이나 색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marine 2009-09-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너무 훌륭해요. 이렇게 큰 도판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