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중국문화 16
천팅여우 지음, 최지선 옮김 / 대가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워낙 글씨를 못쓰기  때문에 워드 프로세서가 개발된 게 너무 고마운 사람으로써 서예는 단순한 붓글씨가 아니라 일종의 예술로 느껴진다.
예로부터 서예는 글을 전달하기 위한 문자 이상의 의미를 넘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글씨 자체를 즐기는 예술의 하나로 인지되어 왔고 심지어 이 책에서는 모든 과학 분야의 기본 언어와도 같은 수학으로 비유한다.
서예는 모든 예술 분야의 수학과도 같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좋은지는 모르겠다.
특히 행서나 초서 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너무 흘려 쓰기 때문에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게 잘 된 건지, 뭘 감상하라는 건지 포인트도 못 잡겠다.
다만 해서 같은 경우 부드럽게 쓰여진 조맹부체는 참 예쁘다, 유하다는 느낌은 든다.
<조선 왕실의 묵향> 이라는 우리나라 서예책에서 문종의 글씨가 정말 유려하고 둥글둥글한 느낌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었다.
반대로 수양대군은 같은 조맹부체라도 힘이 있고 반듯반듯 해서 정말 그 사람의 성격과 기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 수준을 넘어가면 사실 나에게는 언어 유희로 밖에는 안 들린다.
저자는 서예의 미학적 의의를 추상성에 뒀는데 충분히 이해되는 바다.
다만 서양의 추상주의 미술 같은 경우는, 형태가 주는 의미 보다는 색감에서 오는 감흥이 크기 때문에 먹의 통일된 검정색 대신 쓰여진 형태에서 미의식을 찾는 서예와는 감상 포인트가 좀 다르지 않나 싶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대체 뭘 즐기라는 건지, 심지어 글씨체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몰랐는데 찬찬히 짚어주니까 약간은 이해가 된다.
아마 내가 직접 붓글씨를 써 봐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몇 번 써 본 게 전부인 나로써는,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그 진짜 미학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때도 정말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작게 쓰는 펜글씨도 잘 못 쓰는데 큰 붓을 들고 정자체로 화선지에 쓰는 붓글씨는 생각만 해도 어렵다.
워낙 글씨를 못 쓰기 때문에 서예는 감히 엄두가 안 난다.
다만 동양만의 독특한 예술 분야인 서예를 지금보다 더 잘 감상할 수 있는 눈이 길러지길 바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중국의 한자는 참으로 놀랍다.
저자의 설명대로 비슷한 시기에 생긴 이집트 문자나 수메르 문자, 마야 문자 등이 전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중국의 한자는 실생활에서 쓰이고 심지어 예술로까지 승화되었다.
갑골문에서 시작해 오늘날 중국 대륙을 넘어 동아시아에까지 전파된 한자의 위대함에 새삼 놀란다.
뒷부분에 한국과 일본의 서예 전통이 첨부되어 무척 반가웠다.
말로만 듣던 신라의 김생은 중국에까지 이름이 퍼질 정도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書聖 으로 일컫어지는 왕희지의 어릴 적 스승이 위부인이라는 여성이었다는 점이 신기하다.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 역시 서예의 대가였는데 심지어 아버지 보다 자기 글씨가 낫다고 자신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보통 유교적 효 개념 때문에 아무리 잘해도 부모보다 자신을 낮추기 마련인데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만 하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 역시 글씨를 무척 잘 썼다고 한다.
당 태종 이세민도 명필이었다는 걸 보면 역시 영웅호걸들은 재주도 남다르다. 
각주에 보면 측천무후는 고종의 아내로써 지위이기 때문에 15년 간이나 황제위에 오른 이력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무측천, 측천여황이라 칭한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국명을 바꾸고 명실상부한 황제가 됐으니 정당한 명칭으로 불러 주는 게 맞을 것 같다.
얼굴도 예쁘고 글씨도 잘 쓰고 배포도 컸으니 과연 고종이 아버지의 후궁이었으나 황후로 맞은 이유를 알겠다. 

약간 현학적인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서예라는 예술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감이 잡히는 기분이다.
책을 많이 읽기 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붓글씨를 써 보고 작품을 많이 감상해야 눈이 좀 떠질 것 같다.
수천 년 전의 문자가 현대 사회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그 문화를 지켜온 중국 문명의 유구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감탄하는 바다.
오늘날 미국 위주로 세계화가 이루어져 학문이든 예술이든 일단 미국으로 건너가 그 문화를 흡수해 오면 가장 앞서가는 사람으로 대접받듯, 그 옛날 다른 세계와의 교류가 일체 없던 시절 중국 문화에 대한 선망과 동경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가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사대주의 사상을 접하면 괜시리 주체적이지 못한 것 같아 화도 나고 우리 역사에서도 유난히 중국을 대등하게 보려고 많은 시도를 하지만, 당시 관점에서 중국이 얼마나 거대하고 압도적이었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그 엄청난 문명 속에 함몰되지 않고 우리만의 독자성을 오늘날까지 지켜왔다는 사실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동북공정 때문에 중국과 껄끄러운 관계지만 대국으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해 패권주의를 버리고 보다 큰 동양 문화적 틀에서 타 문화를 감싸안는 넉넉함을 보이길 기대한다.
중국 문화를 소개하는 이 시리즈는 가능하면 다 읽어 볼 생각이다.
책 분량도 많지 않고 사진이 많아 보기 편하고 무엇보다 중국 학자들이 직접 쓴 책이라 전문성 면에서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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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세계사 -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 지구적 이슈와 쟁점들 르몽드 세계사 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 권지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래전부터 읽어야지 벼르고만 있다가 드디어 집어 들었다.
일전에 봤던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과 비슷한 포맷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세계 문제에 관심이 많은 건지 그 쪽 책만 번역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지도와 간단한 본문이 결합되어 시각적으로 읽기 좋다.
다만 내가 지도와 도표에 워낙 약하기 때문에 아주 몰입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 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정말 세계는 넓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세계화라고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세계는 중국과 일본, 미국 정도인 것 같다.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이 갈수록 약해지는 지금, 대한민국도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시야를 좀 더 넓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미국이 특별히 한국을 우호적인 국가로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 반미 감정도 악화되는 이 마당에 세계화 하면 미국화로 착각하는 지금 분위기도 반전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중국도 다른 아시아 국가나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튼 미국 일변도에서 좀 벗어나야 한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중국, 일본과의 협력 관계 정립도 매우 중요할 것 같고.
현재 같은 반일 감정 혹은 동북공정, 혐한 분위기는 3개국 모두에게 전혀 득이 될 것 같지 않다. 

첫 장에 언급된 지구온난화는 일단 화석연료 배출에 의한 일종의 환경오염이라는 학설에 대해서는 나는 반대한다.
그러므로 생산성이 매우 낮은 대체에너지 확산이라는 해결책에도 반대하고 그렇다면 차라리 온실가스 배출이 아예 없는 원자력 발전의 비율을 높이자는 쪽에 찬성할 것이다.
한국은 6대 원자력 생산국에 든다고 한다.
자국내 원자력 비율이 가장 큰 곳은 프랑스로, 무려 75%를 원자력으로 충당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 원자력이 핵무기에도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인데 핵폐기물 처리와 함께 핵무기 확산은 해결해야 할 숙제다.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 오히려 한민족이 핵을 갖게 됐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는 실정이니, 이런 식으로 핵무기를 자국 방위력 확장으로 인식한다면 핵전쟁이라는 공포도 커질 것 같다.
대한민국은 물 부족 국가라는 TV 광고에 대해 아니다, 음모론이다, 이런 네티즌 의견도 몇 번 봤는데 이 책에 따르면 물 부족 국가 맞다.
해수의 담수화 기술이 아직은 요원한 시점에서 수도 산업의 민영화가 가격 상승에 따른 소비 감소를 기대할 수 있는 방안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의 물 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으니 이래저래 쉬운 문제가 없다.
에너지 부족에 대해서도 원유 값을 올리면 극빈국에서는 기본적인 수요량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므로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원자재 값의 하락이 원료를 수출하는 극빈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측면도 있다.
특히 선진국의 농업 보조금이 3세계의 농산물 수출 경쟁력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다.
이 농업 보조금은 다른 책에서도 폐지되야 한다는 비판을 읽은 적이 있는데 과연 관세 폐지하고 보조금 없애면 분신 자살하겠다고 시위하는 자국 농민들의 불만은 어떻게 잠재울 것인지.
문득 드는 생각이, 선진국의 인구 감소가 심각한 이 마당에 이민이 활발해지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지 않을까 싶다.
아프리카나 아시아는 인구가 넘쳐나지만 먹고 살 길이 없고, 대신 선진국은 부는 충분한데 일할 노동력이 없으니 3세계에서 선진국으로 인구 이동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외치던 세계 평등, 빈곤 퇴치에 큰 일조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정작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갈수록 이민을 제한하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한국 역시 출산률이 심각하게 줄어들고 일선의 노동력이 부족한 실정이니 외국에 노동 시장 개방하는 걸 보다 적극적으로 실시해야지 않을까?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또 그래야 보다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미국의 인종차별만 비난했지 정작 한국 내의 인종차별은 무심한 편인데 이제 우리도 우리의 편견에 눈을 떠야 할 때다. 

산업폐기물을 3세계에서 처리한다는 말은 <W> 나 <지식e> 에서도 봤었다.
인도나 중국 노동자들이 낡은 전자제품들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카드뮴, 수은 등에 노출되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여튼 잘 살고 볼 일이다.
3세계에서는 의료 이용도 어려운 실정인데 잘 사는 나라 쓰레기 처리하다가 질병에 노출된다는 현실이 참 비참하고 서글프다.
대한민국도 6.25 등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오늘날 잘 사는 나라 대열에 합류하여 큰 소리 치고 있지만 떵떵거리는 만큼 어려운 나라에 대해서 원조를 늘려야 할 것이다.
아직도 국제 난민 돕고 아이들 후원한다고 하면 우리나라 고아나 돌봐라, 라는 식으로 어처구니 없는 비아냥이 돌아오는 속좁은 사회이고 보면 국가적인 차원의 3세계 원조 운운하면 다들 거품 물고 쓰러질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한민국은 전쟁 이후 국제 사회의 원조에 의해 경제 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할 게 아닌가.
아니면 잘난 척을 말든가.
여전히 아프리카 등에서는 기아나 빈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서구 사회가 18세기 이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오늘날의 부를 이룬 만큼 책임감을 갖고 세계의 빈곤 문제에 대해 보다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임해야 할 것이다.
NGO 마저 자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원 여부가 결정되는 게 현실이고 보면 미국식 민주주의의 확산이 과연 현지 사정에 얼마나 적합한지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나 어쨌든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단체가 후원을 빌미로 선교랍시고 종교를 퍼뜨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는 정말 의문이지만 하여튼 가만 있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이슬람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현재 원리주의의 문제점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문제는 이 원리주의가 이슬람에만 있는 게 아니라 미국 등지의 개신교 광신도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왜 부시 같은 근본주의자 성향의 인물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됐는지 모르겠다.
책에 지적한 바대로 에이즈 지원책이 낙태금지와 맞물려 있다는 것도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바마 당선 이후로는 미국 내 분위기가 좀 나아지려나?
미국이 유럽보다 경제적으로 앞서가긴 하지만 복지 정책 등에서 뒤지고 사회 분위기도 덜 진보적인 것은 어쩌면 이 놈의 기독교 근본주의에 원인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이라크 전쟁 같은 걸 지지하고 악의 축 운운하고 9.11 테러 같은 극단적인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이슬람 국가 같은 신정주의 체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광신도적 느낌이 든다. 

냉전이 해소된 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력한 억압 세력이 없어지니 잠들어 있던 각 지역의 분쟁들이 터져 나와 곳곳에서 내전이 터지고 있다.
전쟁 없는 시대가 없었던 걸 상기해 보면 오늘날의 내전도 비단 우리 시대만의 문제도 아니고, 세계평화 따위는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핵무기가 자국 방위력 향상이라고 믿는 민족주의 세력이 늘어나면 정말 무시무시한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이다.
기존의 전쟁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그 피해가 엄청날 것이다.
터졌다 하면 규모나 피해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클 것이므로 분쟁 완화를 위해 국제 사회의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또 무엇보다 빈곤 퇴치를 위해 전지구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지구촌이고 세계 경제가 하나의 단위로 묶여 있으니 문제점도 같이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실물 이익 보다 금융 이익이 훨씬 크다는데 있다는 역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쩌면 주식이나 펀드로 떼부자가 되고 땅값 상승으로 하룻밤 사이에 벼락부자가 되는 것과도 비슷한 현상일 것 같다.
실제적인 생산물을 내놓지 못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결과로 엄청난 이득을 획득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의 이 엄청난 간극도 결국 신자유주의가 확산될수록 자본주의가 고도화 될수록 계속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들 문제네 하면서도 정작 기득권을 갖고 있는 집단이 포기하려고 하지 않으니 앞으로의 인류 미래도 대책없이 낙관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다.
가끔 시민단체나 사회운동가들의 공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접하면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명분론자들로 느껴져 짜증이 나다가도, 그나마 이런 비판이나 자성의 목소리조차 없으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마구 달려갈 것 같아 의식있는 시민들의 자각이 더욱 필요함을 느낀다.
하여튼 모르면 당할 수 밖에 없으니 많이 배우고 이런 세계 문제나 경제에 대해서도 교육을 해야 한다.
왜 교육 문제가 당면한 심각한 현안인지 알 것 같다. 

여러가지 세계 문제점들에 대해 잘 설명된 좋은 책이고 다소 난잡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많이 나와 우리 사회의 건전한 대안이 되길 바란다.
국내에서는 <W>나 <지식e> 등이 출간됐는데 에피소드 식의 나열을 넘어서 보다 분석적이고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화, 지구촌 문제점 등이 많이 출간되길 기대한다.
그래야 좀 더 열린 사회가 되고 세계화란 것에 대해 발맞춰 나가지 않겠는가.
세계화가 곧 미국화라는 편견에서도 좀 벗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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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Goya - 고야가 말하는 고야의 삶과 예술 I, 시리즈 2
다크마어 페겔름 지음, 김영선 옮김 / 예경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일단 나에게는 어려웠다.
가끔 미술에 관한 번역책을 읽을 때 저자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이해가 잘 안 될 때가 있는데 이 책이 딱 그렇다.
적어도 미술에 관해서라면 국내 저자가 쓴 책이 더 와 닿는다.
이를테면 김광우씨 책처럼 말이다.
글 쓰는 스타일의 차이인지 아니면 내가 좀 전문적인 서적을 읽어서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며칠 전에 봤던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고흐 화집이 너무 좋아 역시 큰 도판으로 봐야겠구나, 싶어 평소 관심있던 고야의 화집을 골랐는데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도판은 훌륭하다.
역시 큼직큼직하게 확대되어 그림 감상하기는 좋았다.
하지만 본문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친절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좀 더 쉽게 써진 고야 관련 서적을 읽어봐야겠다. 

19세기 에스파냐의 분위기가 그래서인가?
미신적인 것, 종교재판, 자학적인 고행, 마녀사냥, 전제정치...
뭔가 음울하고 광기어린, 낙후된 무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투우 경기도 축제 같은 전통으로만 생각했는데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 왠지 이것도 살육을 통한 피의 분출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나의 편견일까? 아니면 정말 당시 사회가 그랬을까?
<고야의 유령>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이런 무시무시한 종교적 광기와 전근대적 관습이 성행하는 에스파냐의 사회상이 잘 드러난다.
정말 고야의 암울한 그림과 딱 어울린다.
특히 에칭 판화들이 무시무시하다.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무서운 느낌이 든다.
후반부로 갈수록 청력 상실이라는 장애가 더해져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고 더 무서워진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것, <날아다니는 마녀들> 같은 작품, 악령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들고 올라가는 장면인데 설명에는 미신에 대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보여 준다고 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엔 음침하고 무시무시해서 정말 이런 그림이 당시 유행이었다면 사회 분위기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동시대에 그려진 다른 작품들도 같이 공부해 보고 싶다.
엘 그레코의 그 기괴한 그림들이 에스파냐에서 그려진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옷을 입은 마야> <옷을 벗은 마야> <알바 공작부인> 같은 색감 좋은 초상화들이 좋다.
보기에 편안하다.
고야 역시 초상화가로써 이름을 날렸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특히 <오수나 공작의 가족> <마누엘 오소리오> 등의 초상화가 너무 마음에 든다.
18세기 말 정도 되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김홍도 등이 활동할 시기인데 먹으로 그린 한국의 초상화 전통과는 확실히 보는 관점이 매우 다름을 느낀다.
특히 한국의 전통 초상화는 손을 감춘 반면 서양의 초상화는 손의 묘사가 탁월하다.
입체적이고 정교한 느낌, 손에 만져질 듯한 자연스러운 색상들.
인물의 얼굴 묘사에 집중한 한국의 초상화와 매우 다른 느낌이다. 
또 김홍도나 정선 등이 흥겨운 풍속이나 수려한 자연 경관을 그린 것에 비해 고야의 작품들은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게 많아 비교가 된다.
피학적인 당시 기독교적 관습 때문일까?
어찌 보면 십자가상도 고통받는 죽기 직전의 모습이니 섬뜩한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같은 고전주의 작품이 감상하기에 참 편안하다.
어두운 배경 아래 고통받은 예수의 십자가상은 주제 자체로 보면 솔직히 매우 피학적이지만, 그 경건하고 정교한 인체 묘사가 탁월하다.
그런데 정작 고야는 이런 고전주의를 거부했다고 한다.
보다 앞서 가는 스타일이었던 것일까?
창조적으로 파격적이었던 화가.
어떤 평론가의 지적처럼 애스파냐의 옛 풍속을 기록하기 위해 태어난 화가.
<양산> 같은 그림에서 보여 준 화사한 색감이 정말 좋은데 어쩐지 고야 자신은 이런 그림은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렸을 것 같고 그 자신은 매우 음울하고 격정적인 그림을 선호했을 것 같다.
유럽 여행 때 에스파냐는 못 가봤던 게 무척 아쉽다.
기회가 되면 프라도 미술관에 꼭 가고 싶다.
고야에 관한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
누가 한국의 수묵화와 서양화 혹은 비슷한 시대의 동서양 화가들을 비교한 책을 써 줬으면 좋겠다.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서로 교류가 없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19세기만 해도 일본의 우키요에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조선의 산수화나 풍속화 등도 서양에 소개됐다면 혹은 서양화가 조선 화단에 전해졌다면 서로에게 의미있는 충격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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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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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본 정말 재밌는 영화.
초반에는 좀 지루한 느낌도 있었지만 경기 출전하는 장면부터는 정말 재밌었다.
우와, 하면서 감탄하고 봤다.
스키점프대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너무 잘 찍어 영화 보면서도 와~~ 이렇게 함성을 질렀다.
2시간 넘는 영화라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마지막에 엄마와 차헌태가 공항에서 만나는 장면은 솔직히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슈퍼마켓에서 차헌태가 물건을 집어 던지는 주인집 딸에게 영어 공부 똑바로 하라고 소리칠 때가 더 찡했다.
사실 영화 보기 전에는 하정우가 굉장히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스크린에서 보니까 멋지긴 한데 연기를 아주 썩 잘한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약간 어눌한 느낌이랄까?
설경구나 송강호 등의 연기를 볼 때 와, 진짜 잘 한다 이런 느낌은 없었다.
아직 신인이라서 그런가?
오히려 토크쇼 등에서 진지한 모습으로 얘기하는 그 스타일이 매력적이다.
김지석은 꽤 잘 생겼는데 너무 마른 것 같아 안타까웠고 영화에서 비중이 크지 않아 아쉬웠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출전하라는 불은 켜지고,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워 하는 장면이 클라이막스였다.
영어도 못하고 메달 따서 군대 안 가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대회에 참가한 이 어리숙한 시골 청년은, 시야가 흐릿한 위험한 상황에서 결국 질주하고 만다.
얼마나 고민스럽고 두려웠을까...
스키점프 하다가 경기 중에 목뼈 부러져 사망한 사고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었다.
힘이 없으니 조직위원회에 강력하게 항의도 못하는 비인기팀의 설움이 느껴져 정말 많이 울었다. 

스키 활강대가 어찌나 높은지 아래를 비춰 주는데 무서워서 혼났다.
저렇게 높은 곳에서 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용기인 것 같다.
하늘을 날 때 정말 새가 되는 기분일 것 같다.
스키를 탈 때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중심을 잘 잡아 속도를 죽이면서 서서히 내려오는 나로서는 폴대도 없이 거의 일직선으로 하강하는 이 스키점프가 보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난 절대로 못할 것 같다.
차헌태가 김지석 대신 출전하게 된 어린 동생에게 몸을 뒤로 실으면 절대 안 넘어진다, 무서워 할 것 없다 얘기하는 장면에서 너무 슬퍼서 막 울었다.
이제 겨우 열 네 살, 정신 연령은 더욱 떨어지는 소년에게 제대로 연습 한 번 못 해본 순진한 꼬마에게 그 높은 곳에서 질주하라고 가르치는 마음이 어땠을까 싶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깁스를 하고 동생 있는 곳으로 껑충껑충 뛰면서 달려오는 김지석.
귀머거리 할머니와 바보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군대에 갈 수 없는 김지석.
자신은 다리가 부러져 뛸래야 뛸 수가 없고 두려워 하는 어린 동생의 등을 밀 수 밖에 없는 형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는 정말 명장면이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군대에 갈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참 많은데 정작 잘 사는 사람은 빠지고 힘없고 빽없는 사람만 가는, 그리고 안 가는 것이 오히려 자랑이 되버린 대한민국 현실이 정말 서글프고 속상하다.
빨리 통일되서 아무도 안 갔으면 좋겠다.
군대를 안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 엄청난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선수들과, 희희낙낙 하며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에 나온 미국 선수들이 너무 극명하게 비교가 돼 정말 속상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슬픈 사연이 너무 많다. 

오랜만에 너무 재밌게 본 영화였고 스키점프라는 비인기 스포츠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금메달 따는 효자 종목 외에도 이렇게 재밌고 흥미진진한 스포츠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됐다.
동계 올림픽 열리면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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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풍경
윤난지 지음 / 한길아트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부터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왠지 어려워 보여 뒤로 미뤄 놨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내친 김에 읽게 됐다.
최근 들어 현대미술에 부쩍 관심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인상처럼 아주 쉽지는 않았다.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과 80년대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어떻게 다른지,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의 주제의식은 무엇인지 등을 찬찬히 짚어 준다.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룬 1부는 개념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마지막 챕터에 실린 구겐하임 미술관 편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미술관이 미술 사조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페기 구겐하임 개인의 안목과 후원이 잭슨 폴락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를 탄생시켰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대중화되기 이전의 추상주의를 비평가도 아닌 일개 개인이 막대한 돈을 들여 후원했던 걸 보면 (물로 뒤샹 등의 조언이 있었지만) 페기 구겐하임의 안목이나 취향이 참으로 날카롭고 시대를 앞서갈 만큼 진취적이었던 것 같다.
국가 주도의 후원보다 미술관이나 기업 비영리재단 등의 구매와 전시를 통한 후원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걸 보면 확실히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들이 예술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도 많았다.
이를테면 미술을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저항이자 이데올로기로 생각하자는 8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 비평가들의 주장은,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특권화된 엘리트 비평가들이 주도권을 잡아 대중을 이끄는 것일 뿐이고, 실제 미술 시장에서 부호들에 의해 이런 미술품들이 고가에 거래됨으로써 명성을 획득하고 미술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현실을 놓고 보면 자가당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르주아 계급의 작품 구매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작가주의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100만 달러에 거래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지극히 자본주의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주체성을 가지고 어떤 주의나 사조에 함몰되지 않고 나 자신의 욕구를 양식의 구애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점, 얌전하게 기존 체제의 가치관에 순응하지 않고 주류 가치관을 오히려 공격하는 것, 무엇보다 1세계 백인 남성 중심적 관점에서 3세계, 여성, 유색인종과 같은 주변 계층의 입장에 눈을 돌린다는 점 등에서 이러한 독립적, 비판적 흐름은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컨대, 근대 이전의 회화는 종교적이고 사회순응적이며 예쁘게 그려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했다.
대중들은 그저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른다, 높으신 분들의 말이 다 맞다, 나는 그림 볼 줄 모른다, 이런 자세로 수동적인 관람객이었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람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점, 가치 전복적이고 파격적이고 주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보다 열린 미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 가치 자체를 상실해 버리고 말을 위한 말이 된 것 같은 억지 평론은 오히려 대중과 미술을 떨어뜨려 놓는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책에 나온 작품들은 내 미적 감수성으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고, 저자의 해설도 너무 억지스럽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술이란 뭔가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대상이 아닌 서술을 택한, 작품이 속한 사회의 맥락을 중요시 한 오늘날의 현대 미술은 보편적인 미적 가치에 너무 위배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괴물시대>를 보면서 현대미술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생각할 꺼리를 주고 감정의 변화가 있었다.
막연하게 나는 현대미술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직접 눈으로 보니까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있기도 했다.
작가의 주제의식과 꼭 맞지 않더라도, 가이드의 해설과는 무관하게 그냥 나만의 감정변화가 있었다.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바도 심지어 작가의 죽음을 선언할 정도로 작가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관람객 각자의 열린 해석이라고 했으니 그런 면에서는 부담을 좀 벗어 버려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떤 양식으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든 조형미는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르난도 보테로가 소개됐는데 얼마 전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직접 갔다 와서 굉장히 반가웠다.
더이상 양식의 파괴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으로의 회귀도 하나의 선택으로 보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창의성의 신화를 깨부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입장에 보테로도 해당된다.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기존의 명작들을 자기만의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점이 신선하다 싶으면서도 뭔가 깊이가 없단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바로 그가 지향하는 키치적 감각이라고 한다.
강렬한 원색, 단순한 윤곽선, 매끈한 채색, 크기의 확대를 통한 양감 표현이 보테로 예술의 특징이다.
이런 키치적 느낌, 신선하면서도 가볍다는 느낌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보테로처럼 어떤 심상이라도 이끌어 내야 하는데 여기 소개된 설치미술 등은 뒤샹의 변기를 보듯 정말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직접 전시장에서 보면 또 다를까?
형상보다는 개념을, 오브제 보다는 아이디어를 선택한 포스트 모더니즘.
서사적 구조를 추구하더라도 미술의 기본은 보편적인 미적 감수성을 건들 수 있는 조형미에 있다는 생각을 아직까지는 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 보편성이라는 것 자체가 신화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를테면 내가 르네상스 그림들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고 그 문화에 익숙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미적 가치를 내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인정을 덜 받는 것은 서구식으로 세계화가 됐기 때문이란 얘기이기도 하다.
주체적인 관점은 좋은데 너무 나가다 보면 평가 자체가 불가능 하고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인 것으로 바뀌니 어쩌면 평론이라는 것 자체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순수 기하양식의 상징성과 기의를 깨트린 피터 핼리의 주장에 일견 동의하는 바다.
사진을 보니 핸섬하게 생겨 호감이 간다.
예일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평론가였다는 이력 때문인지 지적으로 보였다.
몬드리안이나 말례비치 등이 주장한 절대적 아름다움, 모든 불합리한 요소를 다 배제한 순수한 미의 원형인 기하학적 형태가 실은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의 공간인 병원, 학교, 관공서 등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므로 기하학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20세기 추상미술 서적들을 읽으면서 말례비치의 절대주의 주장에 정말 동의하기 힘들고 억지스럽다고 느꼈는데 이걸 지적해 주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핼리는 오히려 그러한 모조품으로서의 기하학을 이용해 신화를 깨트린다.
최소한의 조형을 이용한 미니멀리즘적 양식과, 팝아트의 키치적 감각을 더한 혼성미술이 바로 핼리 등이 추구하는 Neo-Geo 즉 모조추상이라고 한다.
일본 여성 작가로 마리코 모리가 소개됐는데 코스튬 플레이 하는 모습이 꼭 낸시 랭이 생각났다.
나는 이 여자를 도저히 예술가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내가 현대미술에 무지한 탓인가? 

작품의 해석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현대미술에 대해 개념을 잡을 수 있게 해 준 괜찮은 책이다.
벌써 나온지 10여 년이 흘렀으니 이 책도 아주 최신 경향은 아닌 셈이다.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좀 더 많이 읽어 보고 무엇보다 직접 전시회장에 가서 눈으로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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