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 : 투란도트
푸치니 외 / Warner Classics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요즘 오페라 보는 재미에 빠져 산다.
박종호씨 책을 읽으면서 오페라라는 것에 관심이 생겼는데 아무리 설명을 잘 해 줘도 좋은지 어떤지 감이 안 잡혀 직접 보러 다니기로 했다.
유명 오페라단의 내한 공연 같은 건 너무 비싸 엄두가 안 나고, 대신 국내 오페라단의 할인된 티켓을 단체구매 해서 보고 있다.
의외로 관심있는 분들이 많아서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 되어 있어 도움이 많이 된다.
역시 직접 공연장에 가서 보고 나면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가 안 가던 것들이 한번에 확 느껴진다.
특히 유명 아리아를 직접 극중에서 들을 때 기쁨이란! 
이번에도 투란도트 공연을 보면서 까페 후기에는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칼라프의 그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를 듣다가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손뼉을 막 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투란도트는 등장 인물들이 많아 합창이 웅장하다.
공연을 본 후 dvd가 마침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길래 대여해서 보게 됐다.
아마 DVD 를 먼저 봤으면 지난 번 카르멘 볼 때처럼 졸았을텐데, 공연을 보고 난 후의 감동이 합쳐져서인지 정말 재밌게 관람했다.
솔직히 지금은 누가 잘 부르고 못 부르고 이런 건 아직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페라 자체가 좋다, 나쁘다, 감동적이다, 아니다 이 정도의 기본적인 평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이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비극적이고 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지난 번 <라 보엠> 도 정말 재밌게 봤다.
푸치니의 팬이 될 것 같다.
얼음공주 투란도트의 사랑을 얻기 위한 칼라프의 목숨을 건 도전.
그리고 멀리서 그를 지켜보면서 사랑을 키운 류, 결국 그는 칼라프의 사랑을 위해서 죽고 만다.
오페라가 이렇게 섬세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줄 처음 알았다.
고문을 받다가 자기도 모르게 칼라프의 이름이 튀어나올까 봐 자진을 택한 류!
공연장에서도 류의 죽음이 너무 슬프고 애절했는데 영상물로 보니까 더욱 안타까웠다.
비록 다들 너무 뚱뚱해 처음에는 감정이입이 살짝 안 됐지만.
사랑을 위해서 죽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얼마나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을까?
공연을 보면서도 줄곧 류의 희생에 대해 생각했는데 dvd 보면서도 죽음으로 승화된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아들의 목숨을 건 도전을 지켜 보는 아버지 티무르의 연기나 노래도 정말 애절하고 안타까웠다.
당신을 불타 오르게 하는 얼음은 무엇이냐는 수수께끼의 답은 바로 투란도트, 당신이다! 라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영상물로 만들어진 만큼 굉장히 규모가 크고 무대 장치도 훌륭했다.
오페라는 뚱뚱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칼라프를 비롯해 투란도트 공주와 류 역시 다들 한 덩치 했다.
핑, 퐁, 팡 세 사람의 노래도 무척 흥겨웠다.
공연장에서는 이 세 사람 나올 때 졸았는데 DVD로 가까이 보니까 무척 유쾌한 장면이었다.
한국어 자막이 달린 dvd 가 의외로 많지 않아 좀 놀랬다.
익숙해지면 굳이 자막이 없어도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변역물이 좀 많이 나와서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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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나비처럼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대학원 수업이 연기됐는데 나만 모르고 청량리까지 꾸역꾸역 갔다가 허망하게 돌아오는 길에 본 영화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명동 CGV에서 극장 찾느라 헤매다가 정말 우여곡절 끝에 봤다.
디지털이라 그런가 화면이 생생하고 색감이 좋았다.
조승우와 수애의 모습도 무척 예쁘고.
그러나...
결정적으로 시나리오가 너무 약하다.
참, 어떻게 저런 걸 시나리오라고 썼을까 싶을 정도로 유치찬란하고 개연성도 없고 애틋한 러브 스토리도 없고 정말 실망스럽다.
조승우는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을 날리고 있지만, 대체 뭐가 아쉬워 이런 영화에 출연했는지 모르겠다 싶을 만큼 완성도가 떨어졌다.
민비로 나오는 수애는, 단아하고 고운 얼굴이 잘 어울리기 했지만, 영화 속에서 비중이 너무 작아 과연 주인공인가 싶을 정도다.
임오군란 때 민비를 업고 충주까지 달린 무장이 있는데, 이 사람과의 로맨스가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도 나온 바 있다.
아마도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마지막에 조승우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칼을 자신의 발에 박고 말뚝처럼 서 있는 장면은, 왕비를 지키려는 충성심과 애정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아무리 총을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모습이 코믹하기까지 했다.
이런 영화에 비하면 <쌍화점>은 오히려 완성도가 높은 영화다.
대원군으로 나온 천호진은 내가 좋아하는 배우라 스크린에서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맨날 유동근만 보다가 다른 사람이 연기하는 대원군을 보니, 신선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대원군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오 오는 장면은, 진짜 코메디 같았다.
예전에 <황후화> 볼 때 중국놈들, 진짜 뻥도 세다, 아무리 영화라 해도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어야지 싶었는데 우리가 딱 그 짝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충 그리면 영화가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을미사변 때 대원군의 수하가 처음에는 일본 앞잡이가 됐다가 무명이 궁전 앞을 홀로 지키고 있는 걸 보고, 칼 끝을 돌려 일본군에게 휘두르다 죽는 장면은 가슴이 절절했다.
민비가 시해당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나라 망하게 한 요부로 기록됐을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의 나이에 왕비의 몸으로 칼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비극적이다.
어쩌면 임오군란 때 잡혔더라도 성난 폭도들에게 그런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스캔들> 처럼 화려한 볼거리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순전히 컴퓨터 그래픽에만 의존하고 너무 돈을 안 썼다.
진정 재밌는 영화란 이렇게도 귀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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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3 - 러시아의 세기
브라이언 모이나한 지음, 애너벨 메럴로.세러 잭슨 사진편집, 김남섭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원래 사진 보다는 글을 더 좋아하는지라 이런 포토집은 썩 내키지가 않는다.
사진이 많으면 상대적으로 텍스트가 소홀해져 전체적인 글의 내용이 빈약해진다.
이 시리즈 중 처음에 나온 중국 편을 사 놓고도 선뜻 못 읽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사를 밝히는 드문 사진들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국이나 러시아, 독일처럼 현대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국가들의 사진이라는 점에서 한 번은 읽어야 할 것 같았다.
표지로 실린 저 스탈린의 가족 사진을 봐도 흥미가 솔솔 생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편은 아주 만족스럽다.
러시아의 20세기를 큼직큼직한 사진들과 충실한 본문으로 대강의 개요를 잡아준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저자 자신이 비유를 많이 써서인지 의미 전달이나 표현이 명확하지 않은 느낌이 많았다.
역주를 보니 영국 출신의 저널리스트라 하던데 기자 출신이라 어떤 현상을 정면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압축해서 우화 등을 통해 좋게 말하면 촌철살인 식으로 짧고 강한 표현을 쓰는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스탈린이 얼마나 나쁜 놈이고 소련 체제가 얼마나 크게 실패를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비꼬고 조롱한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역시나 번역하는 사람도 그 점을 지적했다.
결국 모든 것은 결과로 말하는 것인가.
스탈린의 잔인한 숙청은 피해망상자에, 히틀러 보다 더 나쁜 놈이라는 분노가 들끓면서도 너무 희화화 시키고 극적인 표현을 많이 써서 약간의 반동이 일기도 했다.
그 뒤를 잇는 흐루스쵸프나 브레주네프, 고르바쵸프, 옐친 등의 러시아 현대사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
특히 고르바쵸프 시대가 나오자 개혁, 개방으로 대표된 놀라운 소련의 변신, 혹은 거대한 연방의 해체, 몰락 등을 90년대부터 내가 직접 뉴스로 보고 들었던지라 더욱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소련이 무너지다니, 이른바 냉전 시대의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굉장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과의 군사 경쟁 때문에 실생활의 수요를 희생하여 군수품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딜레마.
계획경제가 그 거대한 나라를 제대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목표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 했을지도 모르겠다.
제정 시대로 아니고 이렇게 급변하는 최첨단 자본주의 시대에 말이다.
지금의 북한처럼 결국은 비효율적인 생산 시스템과 무리한 군수업체 투자가 거대 연방의 몰락을 가져왔고 형제애가 사라진 대신 각 지역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발흥하여 체첸이나 그루지야 등의 소요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마약이나 마피아, 포르노 산업 등의 어두운 분야가 활개를 치고 보드카에 불행한 삶을 맡기며 출산율과 평균수명은 계속 떨어져 가고 있다.
차라리 기강이 잡힌 스탈린 시대가 낫겠다는 푸념이 섬뜩하면서도 불행한 러시아의 현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기분이 든다. 

영화 <프라하의 봄>에서 보여준 동유럽의 반란이 브레주네프 시대였고, 파스테르나크가 노벨상을 거부하고 유리 가가린이 우주 비행에 성공한 것이 흐루시초프 시대였다는 것 등의 에피소드가 독서의 흥미를 돋웠다.
유리 가가린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의 내 감동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가가린의 성공은 부르주아 귀족 계급에 대한 노동자 층의 승리라고 묘사되어 있다.
이제 평범한 강철 공장의 노동자 아들도 최고의 교육을 받고 러시아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만큼 세상은 평등해졌다.
흐루스초프 시대의 특징은 잔인한 스탈린 시대의 숙청을 청산하고 공포로부터 해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뒤를 잇는 브레주네프는 당의 고위 간부들의 일상적인 부패, 특권 의식 등으로 대표된다.
흥청망청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시베리아 등지에서 개발된 금광과 석유 덕분이다.
국가의 발전 대신 또다른 특권층을 양산해 부패 공화국으로 전락한 소련의 몰락이 안타깝다.
뒤를 이은 고르바쵸프 역시 개혁과 개방을 통한 체질 개선을, 연방의 해체 없이 순탄하게 끌고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뉴스에서 고르비의 몰락을 듣고 정말 의아했는데 책에서 쿠데타와 그것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옐친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나온다.
그 후에 푸틴 시대는 실리지 않았다.
어쨌든 역자의 말대로 제정 러시아에서 시작된 20세기는 공산주의라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실험을 거쳐 결국은 실패로 끝났고 21세기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에 소련이 이룩한 평등이나 복지제도 등의 성과는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바지선을 끄는 인간 짐말이라 표현된 노동자들의 표정은, 정말로 레핀이 묘사한 딱 그 표정이었다.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 역시 신앙에 특별한 복종심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 러시아 민중의 모습을 너무도 잘 표현했다.
이런 위대한 그림들이 여전히 덜 알려지고 명성이 덜 한 걸 보면, 서방 세계에서도 러시아는 변방이라는 느낌이 든다.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생긴다.
러시아정교라는 독특한 신앙심과 사회주의 체체야 말로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필수 요소가 아닐까 싶다.
이 흥미로운 거대한 나라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보고 싶다.
다큐 포토 세계사의 다른 시리즈도 봐야겠다.
러시아 못지 않은 전제주의 국가 중국 편도 흥미롭고 히틀러의 나라 독일 편도 괜찮을 것 같다.
감자 대기근으로 대표되는 아일랜드 편도 뭔가 찡한 사연들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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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의 딸 Mr. Know 세계문학 3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중학교 때인가? 
소년소녀 주니어 세계명작전집에 있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굉장히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으며 제목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포로를 심문했는데 이미 그 전에 잡혀서 혀가 잘렸던 터에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 때는 그 장면이 꽤나 공포스러워 혀를 자르다니,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제대로 읽지 못해 늘 미진한 기분이었는데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예쁜 디자인과 가지고 다니기 쉬운 핸디형 사이즈로 출간되어 벼르고 있다가 읽게 됐다. 
이 책 역시 옆 도서관에서 상호대차 서비스를 이용해 이미 품절된 책이지만 빌릴 수 있었다. 
번역자가 얼마 전 재밌게 읽은 <러시아정교>의 저자 석영중씨라는 점이 더 믿음이 갔다.
처음에는 발음하기 힘든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입에 익숙치가 않아 속도가 안 났는데 금방 소설에 빠져 들어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성공할 것 같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다.
늘 놀라는 바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순조 시대 사람인데 대체 어쩜 이렇게 현대적인 구성과 문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춘향전 같은 우리 옛 소설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다. 
김만중이 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등을 보면 인물의 심리나 사건의 묘사 등이 뛰어나긴 하지만 어쨌든 고전 소설의 기본틀, 이를테면 권선징악적 구조나 상투적인 문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유럽 소설들을 읽으면 우리 옛 소설들에 비해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받는다.
심리 묘사라든가 사건의 전개, 플롯 같은 면에서 말이다. 

푸슈킨의 아름다운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과연 그녀를 위해 결투를 벌이다 죽을 만 하군, 고개를 끄덕일 만큼 굉장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뒷쪽에 실린 해설을 보니 나탈리아는 미모 외에는 별로 건질 게 없는, 낭비벽도 심하고 허영심이 많은, 거기다가 지참금마저 한 푼도 없는 빈털털이 아가씨였다고 한다.
나탈리아의 장모 역시 푸슈킨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지참금을 한 푼도 줄 수 없는 상황이라 달리 대안이 없어 시집을 보내고 사위와 갈등이 심각했다고 한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문호로 추앙받고 있는 푸슈킨의 비사들이 흥미롭다.
하여튼 이 소설은 굉장히 재밌는 이야기체 소설이다.
마치 재밌는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는 기분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것 같아 찾아 봐야겠다.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라뇨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지에서 주정뱅이 프랑스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먼 변방의 요새로 초급장교가 되어 떠난다.
그를 따라간 충실한 하인의 이름은 사벨리치.
어린 시절부터 그를 돌봐온 노인인데 이 사람은 뾰뜨르를 지키고 시중드는 것을 소명으로 생각한다.
황제가 지배하던 시절과 현대대중사회의 괴리감이 이런 데서 온다.
우리가 인권이나 자유, 시민의 권리, 애국심, 정의 등을 논할 때 그 당시 제정 러시아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신앙심 등을 이야기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란 바로 이런 점을 말하는 것 같다.
뾰뜨르에 대한 사벨리치의 복종과 절대적 헌신은 지극히 자발적이고, 복종이 곧 그 노인의 양심이자 가치관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개인에게도 이런 종류의 복종을 바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형의 가치, 이를테면 인권, 자유, 평등 이런 것들에 목숨을 바친다.
하여튼 이 노인네 캐릭터는 극의 긴장감을 완화시키면서 잔재미를 준다.
특히 주인을 아버님이라 부르는 장면은, 노예제도가 얼마나 강력하게 한 개인을 휘감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뾰뜨르는 벨로고르스끄 요새에 파견되어 그 곳 사령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딸, 마리야 이바노브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을 방해하는 인물은 그녀에게 대쉬했다가 차인 같은 장교, 쉬바브린.
뾰뜨르가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허락은 커녕 오히려 다른 부대로 떠나게 되었을 판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뿌가쵸프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요새로 쳐들어 온 것이다.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인 것 같다.
까자끄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인데 러시아 역사를 잘 몰라 그냥 짐작만 하고 넘어갔다.
나중에 역사책에서 보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레핀의 그림으로 다소 야만적이고 호전적으로 표현된 이 까자끄인들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하여튼 뾰뜨르는 요새로 발령받아 오던 중,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떤 안내자의 도움으로 헤쳐 나간 후 고마움의 표시로 털외투를 선물한 적이 있고 바로 그 인물이 후에 반란을 일으킨 뿌가쵸프였다.
뿌가쵸프는 요새를 점령한 직후 장교인 뾰뜨르를 교수형에 처하려고 했으나 눈밝은 하인 사벨리치가 뿌가쵸프를 알아채고 옛 인연을 기억해내 극적으로 살아난다.
흥미진진한 플롯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의 귀족이자 군인이며 또 기독교도인 뾰뜨르는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줬어도 반란자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변절자 쉬바브린과는 다르게 뾰뜨르는 여제 폐하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남자로 나온다.
마치 사벨리치가 그 주인인 뾰뜨르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처럼 말이다.
통 큰 뿌가쵸프는 죽이려면 단칼에, 살리려면 확실하게, 라는 평소 신조대로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뾰뜨르를 구해 주고 심지어 쉬바브린에게 납치된 마리야 이바노브나까지 그의 품으로 돌려 준다.
이런 부분들은 어쩐지 아기자기한하며 민속적인 느낌을 주고 그래서 소설이 무겁지 않고 흉악한 반란군 우두머리 뿌가쵸프에게도 동정심이 느껴진다.
또 한 가지 특이할 점은, 예카테리나 여제에 대한 러시아 귀족들이 절대적 복종이다.
비록 서구 역시 최근까지도 여성차별이 있어 왔고 여성은 집에만 있는 종속적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자 군주들이 (그것도 매우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걸 보면, 유교 사회의 남녀차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 러시아 귀족들이 러시아인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배우자인 독일인 황후를 여제로 옹립하게 됐는지 그 과정이 무척 궁금하다.
조선 사회에라면 정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데 말이다.
당나라의 측천무후만큼이나 대단한 철의 여인이 아니었을까? 

뾰뜨르는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마리야를 자신의 영지로 피난시키고 다시 여제의 군대로 돌아가 싸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반란이 진압된 후 뿌가쵸프와 한통속이었다는 쉬바브린의 증언에 따라 그는 스파이로 오인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뿌가쵸프에 의해 요새 사령관인 미노로프 대위 부부가 살해당하고 그들의 딸인 마리야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뿌가쵸프와 협상을 벌였던 사정은, 여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밝히지 못한다.
마리야는 직접 여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황궁으로 올라가고 우연히 만난 귀부인이 그녀의 진정서를 보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귀부인이 바로 여제였다.
물론 여제는 단번에 사건을 해결해 준다.
이 결말은 우연성에 기댄 고전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에 너무 싱겁게 일이 해결되어 (절대자의 등장) 좀 시시했지만 하여튼 그 과정까지 어찌나 흥미롭게 읽었던지 지하철에서 조금씩 읽는데 마치 일일연속극의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은 아마도 중간 이름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중간 이름까지 꼬박꼬박 언급해서 읽기가 어려웠다.  
이를테면 이반 꾸즈미치 미노로프 대위는 그냥 이반이 아니라 이반 꾸즈미치, 이렇게 불리고 주인공 역시 뾰뜨르 안드레이치 그리뇨프도 뾰뜨르 대신, 꼬박꼬박 뾰뜨르 안드레이치, 라고 불린다.
귀족만 그런건가 싶기도 한데 러시아 풍속이나 역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 

너무 흥미롭게 읽은 책이고 <미스터 노> 시리즈가 무척 마음에 든다.
다른 소설도 이 시리즈로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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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11-0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미스터 노 시리즈 책들 중 일부를 반값(?)에 팔던데, 품절이 왜 이렇게 많이 뜨는지 모르겠어요.ㅡ.ㅡ;;;

marine 2009-11-0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품절이 많아서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봐요. 상호대차 서비스, 정말 좋더라구요. 경기도내 도서관끼리 택배료도 안 받고 진짜 좋은 써비스인 듯.
 
내 사랑 내 곁에 - Closer to Heav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김명민 나온다고 해서 본 영화.
역시 내 스타일 아님.
<너는 내 운명>도 사실 별 감동이 없었는데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 그런지 느낌도 그저 그렇다.
홍보는 김명민 위주로 했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면 하지원이 주인공이다.
오히려 하지원의 연기력이 돋보이고 예쁘게 잘 그려진다.
김명민은 살 뺐다고 영화사에서 홍보 엄청 하던데 물론 빼기 힘들긴 했겠지만 영화 상에서 그렇게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감동 포인트를 잘 잡아 내지 못한 느낌이랄까?
김명민은 처음에 착한 역할은 그저 그렇다가 나중에 까칠해지면서 빛이 나는 느낌이었다.
배우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시나리오의 구조상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해바라기> 라는 안재욱 나오는 메디컬 드라마에서 신경외과 4년차 전공의가 루게릭 병 걸려서 병원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사귀던 간호사에게 병명을 숨기고 헤어지자고 말한 뒤 병원을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국으로 떠나 치료받는 걸로 나오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기막힌 스토리였나 싶다.
영화 속의 백종우 역시 변호사를 꿈꾸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는데 불치의 병에 걸려 결국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점점 몸이 굳어가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끔찍할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를 것 같다.
옆에 있어 주는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비참하고 그로써는 차라리 화를 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원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장례식장에서 만난 하지원에게 프로포즈까지 할 정도였으나 결국 그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에 절망하여 서서히 무너져 간다.
마지막까지 존엄성을 유지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결국 그는 혀를 깨물고 자살을 기도하고, 죽는 대신 인공호흡기를 단다.
그리고 결국은 뇌사 상태에 빠지고 사망한다.
당연한 병의 수순이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는, 마치 다큐멘터리와 같은 영화의 구조상 한계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운동기구에서 떨어져 췌장이 파열된 정말 운이 없는 열 살짜리 꼬마를 봤는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이 났다.
지금 건강한 것도 얼마나 큰 행운인가.
또 언제 병마의 불행이 우리에게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카리스마 있는 의사역의 김여진도 인상적이었다.
"박사님" 이라는 호칭은 좀 오버 같았다.
교수님이나 과장님 뭐 이 정도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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