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1 기담문학 고딕총서 5
워싱턴 어빙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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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게 된 책.
네이버 까페의 여행 동아리에서 추천을 받았다.
워싱턴 어빙이라면 슬리피 할로우의 원작자로도 유명하다.
19세기 미국의 에세이스트 혹은 저널리스트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고딕 총서라는 전집이 특이하다.
서양 옛날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해야 할까?
내 취향과는 좀 맞지 않아 약간 지루하기도 했다.
막연히 생각하기로는, 알함브라의 역사와 유적에 관한 인문학적 보고서 형식을 기대했는데 주로 무어인들과 관련된 전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알함브라에서 몇 달 머물면서 워싱턴 어빙이 전해 들은 옛 전설들, 꼭 천일야화 같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이 옛 궁전을 사랑했는지 저자의 애정이 잘 녹아난다.
막상 스페인 가서 알함브라를 구경했는데 서양 건축 양식과 전혀 다른 이슬람 양식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많이 들어 왔기 때문에 약간 질린 느낌이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곳은 없구나 하는 약간의 반발심도 생겼다.
앙코르와트를 갔을 때도 가기 전에 찬사의 말을 너무 많이 들어 막상 가서 보니 약간은 시큰둥 했던 그런 비슷한 느낌?
책에서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던 열 두 사자가 조각된 분수대는 아쉽게도 공사 중이라 볼 수가 없었다.
관광객은 정말 많았다.
동양인은 드물고 주로 유럽과 미국 관광객들이었다.
스페인은 서양 내에서도 유명한 관광지 같다.
가난한 사람들의 꿈은 언제나 부유함, 마술, 이를테면 복권의 당첨과도 같은 환상이 주를 이룬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스페인 민중들은 쫓겨난 무어인이 남겼을지 모를 보물에 대해 끝없이 상상한다.
애절한 느낌도 들고 그들의 소박한 소망이 이뤄질 날이 올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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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 - 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92
자닌 바티클 지음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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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스페인에 간다.
너무 흥분되고 기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0여 년 전, 파릇파릇한 대학생 때 유럽 여행을 갔었다.
그 때만 해도 우리 과는 여름방학이 겨우 3주에 불과했다.
그것도 기말고사 재시에 걸리지 않는 학생의 경우만 3주를 다 누릴 수 있었고 심지어 재시, 삼시 보다가 여름방학 없이 2학기 개강하는 불운한 학우들도 있었으니, 나로서는 큰 결심을 하고 3주간의 배낭여행을 떠난 셈이다.
재시 발표가 나기도 전에 마지막 과목을 치루고 바로 인천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탄 까닭에 혹시나 재시 걸리지 않았나 유럽에서도 가끔 조마조마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무사히 진급을 했다...
하여튼 당시 트렌드는 3주 일정의 호텔팩은 이베리아 반도는 못 가는 스케쥴이었다.
이베리아 반도까지 내려가려면 25일 일정이 많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못 가고 말았는데 미술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프라도 미술관이 눈에 아른거려 늘 아쉬웠다.
그런데 드디어 신혼여행으로 스페인을 가게 된 것이다.
사실 신랑은 나보다 더 빡빡한 결혼 휴가 스케쥴 때문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많이 미안하기도 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까운 동남아 휴양지로 갔으면 얼마나 편했겠는가.
그러나 active 한 wife를 둔 죄로 피곤한 신랑을 이끌고 스페인까지 날아가게 됐으나 분명히 다녀오면 신랑도 만족하리라 믿어 의심지 않는다^^ 

하여튼 내가 스페인에 가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프라도 미술관을 관람하기 위해서인지라 적어도 하루는 온전히 미술관에서 보낼 생각이다.
아쉽게도 월요일은 프라도 미술관이 휴관일이고 화요일은 소피아 미술관이 휴관일이라 월, 화를 마드리드에서 머물 예정인 우리는 일단 프라도 미술관에 투자하기로 했다.
스페인 미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벨라스케스와 고야일 것이다.
엘 그레코나 수르바란, 무리요 등도 있고 현대 화가로는 피카소와 달리, 미로 등도 있겠으나 스페인의 대표 화가라면 당연히 앞의 두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벨라스케스에 대한 관심은 사실 화가 자신보다는 그를 몹시도 존경했던 마네를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역으로 관심이 생긴 경우다.
언젠가 화가들이 뽑은 최고의 그림으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뽑혔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지나친 유명세 때문인지 오히려 무덤덤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네의 책에서 언급된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17세기의 바로크 스타일과는 다른 쓱쓱 문지르는 듯한 거친 필체나 빛과 어둠의 선명한 대비, 특히 인물의 얼굴 위에 떨어지는 밝은 빛의 선명한 명암 대비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화가가 사랑했던 펠리페 4세의 공주 마르가리타의 초상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문의 특성인 긴 주걱턱을 잘 포착한 화가의 주군 펠리페 4세의 초상화는 또 얼마나 독창적인지!
저자의 말대로 그 유명했던 후원인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으나, 화가의 그림 속에 남아 겨우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마르가리타 공주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명언이 왜 나오게 됐는지를 피부로 느끼는 바다. 

그가 그린 <브레다 성의 함락>도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다.
저자는 이 그림에서 눈여겨 봐야 할 포인트를 잘 짚어 준다.
사실 얼핏 봤을 때는 그냥 그런 승전 기념식인가 보다 했는데 인물들의 표정을 클로즈업 해보니, 네덜란드 반란군에게 승리한 에스파냐의 장군 스피놀라의 자비로운 표정이 잘 잡혀 있다.
반란군 대장은 적군 에스파냐의 승리를 깨끗히 인정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성의 열쇠를 바친다.
그 열쇠를 받아든 스피놀라 장군은 기사로서 예의를 지키며 관대한 표정으로 적의 사령관을 어루만져 준다.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살육전이 아니라 기사들의 명예를 건 정의로운 귀족들의 대결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도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다.
어쩐지 잔혹하고 동정심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강팍한 느낌의 인물이지만, 벨라스케스의 붓질에서 그 남자만이 지닌 매력이 느껴진다.
적어도 사람의 개성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사진은 초상화의 적수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대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 단순히 인물의 얼굴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적 특성을 날카롭게 캐치한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이 그림은 20세기에 와서 베이컨이 변형시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책은 벨라스케스의 작품 세계 보다는 일종의 짧은 전기처럼 구성되어 그의 일생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위대한 화가가 당시 화단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게 좀 의외다.
펠리페 4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말년에는 기사 작위까기 받았으나, 당시만 해도 인상파의 선구자 격인 벨라스케스의 화법 보다는 티치아노 식의 깔끔하고 선명한 화풍이 더 선호됐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을 외교관 입장으로 방문한 루벤스는 천재의 솜씨를 대번에 알아 보고 칭찬에 마지 않았음을 루벤스 전기에서 읽은 바 있다.
벨라스케스 역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등 베네치아 거장들의 작품들을 모사하고 많이 구입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스승이자 장인인 파체코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겨우 스물 네 살의 어린 나이에 벌써 펠리페 4세의 궁정에 입성한다.
그 후로 그는 승승장구해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왕실의 재정은 바닥이 나서 말년에는 끊임없이 정부에게 밀린 연금을 지불해 달라는 청원을 하곤 했다.
2주 만에 제자와 아내, 그리고 벨라스케스 자신이 연달아 숨을 거둔 것으로 보아 저자는 전염병을 의심하고 있다.
1599년에 출생해 1660년에 사망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광해군과 인조 시대 인물이고 정선보다 더 앞세대 사람이다.
이번에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벨라스케스 그림을 마음껏 감상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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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0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황의 저 표정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치스러운 반지와 날카로운 눈빛의 교황이라니, 하고 싶은 말을 꼭 하고야 마는 화가의 그림이지요.

marine 2010-05-14 14:23   좋아요 0 | URL
프라도 미술관에서 직접 벨라스케스 그림을 보니 더더욱 좋아하게 됐어요. 고야보다 더 좋은 방을 차지하고 있더라구요.
 
구운몽도 -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키워드 한국문화 3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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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구운몽을 무척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많아 <사씨남정기> 보다 더 복잡하고 마음에 확 와 닿지는 않았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구운몽도라면 중앙박물관에서 병풍으로 구경한 적이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민화의 형태로 남아 있는 구운몽도를 분석한 책인데 분량이 적고 내용도 평이해 금방 읽을 수 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니 구운몽을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조가 이 소설을 재밌게 읽고 나서, 문장이 출중해 볼 만 하다고 평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서포 김만중의 작품이니 대화가 오죽 격조 있었겠는가?
대부분의 소설들이 작가 미상이고 유명한 홍길동전마저 작가가 의심되는 실정이고 보면, 저자의 말대로 구운몽의 작가가 확실히 전해 오는 것은 매우 기록할 만한 일 같다.
김만중은 막연히 유복자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호란 때 피란가다 죽은 게 아니라, 화약 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일등으로 급제한 촉망받는 신예였고 할아버지가 이조참판이었으며, 증조부가 예학의 대가 김장생이다.
외가 또한 외증조부가 선조의 부마였으니 외증조모가 바로 선조의 고명딸 정명공주였던 것이다.
외5대조는 임진란 때 영의정을 역임한 윤두수니 외가 역시 당대 명문이었다.
이런 집안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김만중의 조카, 곧 형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비로 뽑힐 수 있었을 것이다.
유복자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다른 것도 아니고 오랑캐와 싸우다 순절했으니 과부가 된 윤씨 부인이 이를 악물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는 말이 과연 실감난다.
김만중의 효성은 유명하여 유배지에서 어머니가 적적하실까 봐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구운몽의 환상적인 서사 구조를 생각하면, 또 사씨남정기의 흥미진진한 처첩대결을 떠올려 보면, 단지 근엄한 유학자가 아니라 창작에도 빼어난 능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조선 시대 선비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상당한 교양인들이었던 것 같다.
관리들이 기본적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문인들이었고 김정희나 강세황처럼 그림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김만중이나 허균처럼 소설 창작에도 솜씨가 있었던 걸 보면, 산업화 되기 전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문인관료라는 상당히 이상적인 인간상을 구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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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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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을 먼저 구입하고 하권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됐는데, 도서관에는 2006년도에 출간된 상하 합본이 있었다.
처음 상권을 봤을 때만 해도 상하로 나눠질만큼 내용이 길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합본된 책을 보니 500페이지가 미처 못되는 분량으로 충분히 한 권으로 출간될 수 있는 분량이었다.
꼭 상하로 분책을 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가격은 한 권으로 출간됐을 당시가 13000원이었는데 두 권으로 분책된 후 각각 9800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하나의 소설은 가능하면 한 권으로 출간해 주는 게 독자들을 위해서도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권에서는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와 독자 제인 갈런드의 입장에서 기술됐다.
스트라이버트 부분은 아무래도 비평가의 입장이다 보니 문학에 대해 논하는 이론적인 부분이 다소 딱딱하고 쉽게 공감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독자인 갈런드 부인 편은 편집자 이본 마멜 편처럼 주로 사건의 전개를 다루는 서사적 구조라 훨씬 쉽게 읽혔다.
작가와 비평가는 남자, 편집자와 독자는 여자라는 어쩐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고상한 것과 생활적인 것 등의 이분법이 자꾸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트라이버트가 최악의 미국 작가로 지목한 펄 벅, 헤밍웨이, 스타인벡, 싱클레어 루이스는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이다.
펄 벅과 헤밍웨이의 경우는 문학적 성과에 비해 과도하게 찬사를 받았고, 심지어 펄 벅의 경우 노벨 문학상 수상이 부끄러운 경우로 지목된 칼럼도 보긴 했다.
펄 벅의 <대지>는 청소년 세계문학전집에 실려 있어 굉장히 감동하면서 봤던 책인데 줄거리 위주로 너무 쉽게 쓰여져서인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나 <에덴의 동쪽> 은 언젠가 꼭 읽어 봐야지 벼르던 책이고 싱클레어 루이스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칼이 최고의 작가로 선정한 사람 중 두 사람은 모르겠고 나머지 허먼 멜빌과 포크너는 알고 있다.
<백경>과 <음향과 분노> 역시 읽고 싶은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해럴드 블룸의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 바지만 역시 기본 상식이 되는 원전을 먼저 읽어야 논쟁과 토론이 가능하다.
일단 읽어봐야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할 게 아닌가.
문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자극이 됐다. 

스승인 데블런과 제자 칼의 특징은 굉장히 논쟁적이고 사람들의 반발을 사는 민감한 사안들을 피해 가지 않고 일부러 대중에게 노출시켜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민감하지만 중요한 주제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하는 자신감이 돋보이고 본인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런 공격적인 자세는 이슈거리가 되기에 충분하고 슈퍼스타로 떠오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칼 역시 미국 최고의 작가, 최악의 작가를 선정해 대중들이 참여한 토론회장에서 공표하므로써 전국적인 스타가 된다.
최고의 작가는 누구나 자랑스럽게 밝힐 수 있지만, 최악의 작가를 공개적으로 언급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체면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더욱 말이다.
칼은 같은 지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루카스 요더의 글쓰기 방식을 못마땅해 한다.
에즈라 파운드를 숭배하고 대중적인 것 대신 고급 독자를 겨냥하는 칼에게, 평이하고 안이한 방식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요더는 문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매우 성실한 작가이고, 네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무엇보다 칼의 책을 출판해 주는 키네틱 출판사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다.
더군다가 칼이 재직하고 있는 메클랜버그 대학에 거액을 기부했다.
인간관계가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당한 명성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비평가로써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실 나는 왜 요더에 대한 칼의 공격적인 비판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소설의 분위기가 흘러 가는지 잘 모르겠다.
진정한 비평가라면 자신의 기준에 합당치 않다면 소신껏 비판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내가 너무 순진하게 문학동네를 보고 있는 건가?
어쩐지 미국은 그런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제일 충격적인 반전은 역시 칼의 동성애였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동성애가 일반적이지 않아 주인공을 돕는 동성 친구는 단순히 우정일 뿐이지 둘 사이가 발전될 거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국 소설을 보면,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동성 친구의 존재는 꼭 이런 식으로 연인 관계를 형성한다.
데블런 교수가 어린 제자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외국을 여행할 수 있게금 돈을 마련해 줬을 때만 해도 설마했는데, 직접 그리스로 날아가 결국 그들은 한 침대에 눕고 만다.
동성애가 우리보다는 훨씬 일반화된 느낌이다.
맨 마지막 장에서 이본 마멜이 칼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데 과연 그녀는 칼의 성향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양성애자도 있다고 하니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
데블런과 칼의 문학에 대한 고급 대화는 성적 친밀감과는 별도로 무척 이상적으로 보였다.
특히 데블런이 그리스 연극들을 보여 주면서 그리스 문학의 정수를 맛보게 하자 칼이 아트레우스 가계의 비극을 하나의 연표로 만들어 학생들 지도에 활용하는 예는 굉장히 신선했다.
역시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학의 영원한 원천인 것 같다.
데블런 교수가 죽고 칼의 촉망받는 제자 티모시 툴이 등장했을 때 혹시 제자와도? 이런 추측을 했는데 특별한 애정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모시가 살해당하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살인 사건이야말로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이고 클라이막스 같다.
루카스 요더의 입을 빌려, 애플버터가 돈 때문에 이웃을 살해하게 방치한 무심한 독일인 가정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너무 짧게 묘사되서 그런지 크게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어쨌든 요더는 그렌즐러 8부작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지만, 이웃 청년 애플버터의 무지막지한 살인을 계기로 칼 스트라이버트와 티모시 툴이 추구했던 혁신적인 글쓰기에 돌입한다.
역시 그는 성실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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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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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은 책이다.
결혼 준비하랴, 논문 쓰랴 나름 바빴던 관계로 요새 통 책을 못 읽고 있다.
시간이 없다기 보다는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편하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책은 M양이 선물한 건데 지하철에서 혹은 자기 전 침대에서 짬짬이 읽었다.
소설의 묘미는 바로 이런 잠깐의 여유 시간에 읽는 게 아닐까 싶다.
제목이 특이해 예전부터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었다.
독특하게도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 이 네 사람의 관점에서 기술을 했다.
상권만 읽은 상태라 아직 비평가와 독자 편은 못 읽었는데 내가 독자이기 때문인지 독자의 관점에서 본 소설이 제일 기대된다.
현대 소설을 읽으면 오래된 고전과는 다르게 현실의 묘사나 심리분석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래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 같은데, 고전소설 보다 더 묘사에 정성을 쏟는 느낌이다.  

루카스 요더와 베노 레트너의 극명한 대비.
두 사람의 가운데 편집자로 끼어 있는 이본 마멜.
내가 여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설가 보다는 독자의 입장이기 때문인지, 요더 보다는 이본 쪽이 훨씬 더 와 닿았다.
더 서사적이기도 해서 읽기 쉬운 면도 있었다.
근면성실한 노동자와도 같은 루카스 요더는 첫 네 작품은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들어선다.
그 후 네 작품은 연속으로 히트를 치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다.
반면 번득이는 재치와 분석력, 놀라운 언변을 가진 베노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지성을 한 편의 완성된 글로 풀어내지 못하고 루카스의 성공을 질투하면서 결국은 식칼로 목을 찔러 죽고 만다.
베노의 자살은 서술 초기부터 여기저기 암시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파국으로 끝날 줄 알고 있었다.
어쩐지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소피의 선택> 의 상대역을 보는 느낌이었다.
우리 속담으로 표현하자면,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해야 하나? 
부유한 베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확신 때문에 진득하게 글쓰기에 몰두하지 못하고 무위도식 한다.
편집자인 아내 이본이 퇴근했을 때 쇼파에 어질어진 신문의 낱말 맞추기 조각들과 술에 취해 잠든 남편의 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이본은 그녀의 삼촌이 경계했던 여인상, 방탕한 남자의 구원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본 마멜, 혹은 셜리 마멜스타인의 성공기는 일견 감동스러운 부분이 있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딸로 태어나 겨우 대학 1학년 중퇴 후 출판사의 비서로 취직해 밑바닥부터 정상의 편집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노력과 열정은 어쩐지 미국이 기회의 땅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요더의 작품이 네 편 씩이나 연달아 실패를 거듭하는데도 끝까지 그를 후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놀라운 지성과 번뜩이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는 마치 재앙과도 같았던 베노와의 사랑.
아마도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배경 같은데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같지 않은 채 십 여 년 째 동거하는 관계가 용인되는 미국 사회가 부럽기도 했다.  
루카스 요더와 아내 엠마 역시 아이를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그렌즐러 8부작이 바로 자식이라고 생각한다.
결혼과 자식을 개인의 자유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의 너그러움이 부럽다.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소설이다.
비평가와 독자의 입장은 또 어떠한지 궁금하다.
펜실베니아로 이주한 독일인 제세례파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나라 대하소설 <토지>나 <아리랑> 등을 보는 느낌이었다.
같은 문화권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정서와 공감 같은 것들.
결국 모국어로 쓰여진 소설만이 올바로 100% 이해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루카스 요더가 보여주는 독일계 조상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감동적이었다.
더불어 아미쉬와 메노파가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생겨난 재세례파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소득이다.
단추를 달 것인지 말 것인지, 멜빵을 맬 것인지 말 것인지 등을 두고 형제간의 의를 끊고 갈라서는 이들의 모습에서, 18세기 조선의 예송논쟁을 떠올렸고 어떤 종교나 학문이든 인간의 삶을 잡아먹는 교조주의는 배척해야 마땅하며 의식과 관념에 대한 집착은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문득 <토지>를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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