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의 역사
앨버트 후라니 지음, 김정명.홍미정 옮김 / 심산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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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을 받아 보고 두께에 일단 기가 질렸다.
800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이라 계속 미뤄 왔는데 막상 읽어 보니 상당히 쉽게 쓰여 있고 이슬람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쭉 기술해 이야기책 읽듯 편하게 넘길 수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어서인지 아주 생소하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역시 독서의 가장 중요한 힘은 배경지식과 호기심인 것 같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주석을 매우 성실하게 달아 놔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번역도 무척 매끄럽다. 

이슬람 하면 막연히 동질된 세계라고 인식했는데 발전 과정을 살펴 보니 상당히 이질적인 세계가 이슬람교라는 종교적 테두리 안에서 정체성을 갖고 모인 다양한 집단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Maghreb 이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는 서아프리카 등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를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동안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등으로 뻗어갔고 이 오스만 제국이 19세기 들어 유럽 열강에 먹히면서 북아프리카 지역은 아프리카 내에서 더욱 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됐다.
이 책이 두꺼워진 이유가 단순히 역사적 사건만을 나열한 게 아니라 이슬람교의 교리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수피즘은 당시 유행하던 동방 정교회의 수도원 제도 등에 영향을 받은 신비주의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크게 보면 이슬람은 정통 율법주의인 순니파와 수피즘에 영향을 받은 쉬아파로 나뉠 수 있는데 수피즘은 춤과 음악, 시 낭송, 집회 등을 통해 알라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일종의 영지주의라 할 수 있겠다.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도 없는 절대자와의 정신적 일치를 위해 몰아지경의 세계로 가려는 인간의 종교성에 항상 놀라곤 한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겠지만 어떤 의미로 보면, 종교인들이 느끼는 희열은 집단 환상에 의해 스스로 창조해 내는 상상의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알라라는 절대자와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무슬림들의 욕구는 하나님을 찾는 기독교와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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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혁명 - 자유와 평등을 향하여, 쿤타 킨테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정상환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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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서관 반납 일자에 쫓겨 한 번에 다 못 읽고 나눠서 읽은지라 연속성이 끊긴 책이다.
한국인이 쓴 미국 흑인 민권 운동사라는 다소 특이한 주제의 책이다.
대의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모든 인류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명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미국 사회의 흑인 지위라든가 권리 등에 대해서는 사실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워낙 나와 관계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피부로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인권의 발전이라는 큰 명제에서 생각해 보면 노예로 끌려 온 흑인들의 권리 쟁취 과정은 확실히 타문화권인 나 같은 독자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고 아마도 저자 역시 외국인이면서도 그런 의미로 책을 쓰지 않았을까 싶다.
법률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현직 검사라는 신분에 맞게 흑인 권리 획득의 법률적 해석과 과정을 상세히 기술해 도움이 됐다.
오바마의 당선이 흑인 사회에서는 엄청난 진보로 평가되고 있는 만큼, 향후 흑인들의 지위 변화가 궁금해진다.
단 한 명의 개인적 출세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지는 약간은 회의적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도 할 수 있다, 혹은 우리도 열등하지 않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젊은이들이 폭력 문화에 기대어 학업을 일찍 마친다거나 아시아계 이민자들과는 달리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생활보조금에 의존하는 흑인 미혼모다 많다, 도덕적으로 더 각성해야 한다는 식의 교훈적 충고는 약간 거북스럽기도 했다.
결국은 시스템의 문제인데 윤리적 차원의 당위성 강조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노예제로부터 시작해 2010년도의 오바마 당선까지 과정을 시간적으로 쉽게 기술한 책이고, 흑인 민권 운동사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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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 - 목소리의 그림은 문자가 당신에게 말을 걸다
스티븐 로져 피셔 지음, 박수철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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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좀 지루하기도 하고 어려웠다.
주제는 무척 흥미로운데 구체적인 사항으로 들어가면 음운론 같은 어려운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자 서문에 나온 것처럼 가벼운 예습거리로 읽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읽다가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모르는 단어나 개념이 나오면 검색하면서 재독했더니 조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쭉 읽었어야 하는데 조금씩 끊어 읽다 보니 아무래도 연속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렵고 지루한 책은, 내 배경지식이 적기 때문에 개념이 익숙치 않아 흥미가 떨어지게 된다.
이런 책의 경우, 비슷한 주제의 좀 더 쉬운 책을 읽은 다음에 다시 읽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읽으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 한 권에 담겨진 지식은 참으로 광범위 하고 넓은 것 같다.
단 한 번의 가벼운 일독으로 책에 담긴 전체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인 이런 정보를 제공하는 인문학 서적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정확한 이해 보다는 대략적인 느낌의 스케치를 하는 듯 하다.
본격적으로 전문가의 길로 들어설 것도 아니니 그나마 약간의 개요라도 그릴 수 있는 게 어디냐 하는 심정으로 읽곤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개념은 모든 문자는 창조가 아니라 차용과 변형이라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소리를 시각적인 기호로 표기한다는 문자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수메르 문자에서 시작됐고 지구상의 모든 문자는 바로 이 수메르 문자의 차용과 변형이라고 여긴다.
흔히 독립적인 창조로 알려져 온 한자나 중앙 아메리카의 문자마저도 기본 아이디어는 기존의 문자 사회에서 빌려온 것으로 생각한다.
중앙 아메리카의 경우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한자와의 여러 유사성을 고려할 때 한자에서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중국의 한자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의 원리가 건너 왔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상나라 때의 갑골문은 이미 완벽한 문자의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기억 부호에서 음성을 기록하는 완전한 문자로의 진행 과정이 없는 이상, 고립된 지역의 전혀 새로운 창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중국 학자들은 반발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한글 역시 불교 경전을 통해 인도의 문자체계를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개발한 것으로 본다.
언젠가 TV에서 일본의 신대문자나 인도의 어떤 글자 체계와 한글이 매우 닮은 꼴이라 세종대왕이 그런 문자들을 참조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보고 베꼈다 이런 식의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여러 문자 체계에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와 한글을 창제했다는 입장이다.
심지어 고대 중국의 한자와 중앙 아메리카의 마야 문자 등도 다른 곳에서 건너 온 것으로 보는 이상, 한글 역시 인류의 전혀 새로운 창조물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 전에는 한글이라는 발명품이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워 한국인이야 말로 엄청난 창의력을 가진 민족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사회에서 조장하기도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각 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기호로 표기하기 적합한 문자를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해 왔고, 한글 같은 자민족의 문자 대신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것이, 문자를 발명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알파벳의 변용과 차용을 통해 충분히 자국어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간단히 말해 라틴 알파벳의 확산은 다양한 언어를 표기하기에 적당할 만큼 알파벳의 유연성과 가변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컴퓨터의 보급으로 알파벳은 더욱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 심지어 오랜 문자 전통을 지닌 중국마저도 병음표기법을 통해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다.
영어의 확산이 단순히 영미 국가들의 국력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적어도 알파벳의 확산은, 멀리 수메르 문자에서 시작된 표음문자의 아이디어를 통해 이집트의 표어문자가 원형을 확립했고 시나이 원문자와 페니키가 알파벳 등을 통해 그리스와 로마로 전해지면서 가다듬게 된 놀라운 가소성과 안정성 덕분임을 이해하게 됐다.
그러니 단순히 알파벳을 서양 문화의 확산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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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서유기 - 중국 역사학자가 파헤친 1400여 년 전 진짜 서유기!
첸원중 지음, 임홍빈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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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서관에서 처음 받아 보고 두께에 살짝 기가 질렸던 책이다. 
660페이지의 두꺼운 책은 근래 들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계속 못 읽고 있다가 오늘이 반납 마감일이라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읽었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쉬워서 한 번에 쭉 읽게 됐다.
역시 TV 방송물을 책으로 옮겨서인지 내용이 상당히 평이하다.
마치 TV 속의 이미지를 글로 설명한다고 해야 할까?
약간 중언부언 하는 점도 없지 않아 조금 더 압축해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현장이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다소 불만스러운 점을 먼저 말하자면, 현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방대한 책을 쓰다 보니 너무 이상화시켜 정말 그랬을까?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구글을 검색하면서 읽었는데 신동아에 기고된 어떤 글에 따르면 현장이 당 태종의 지원 아래 서역 기행을 떠났기 때문에 대당서역기에 여러 나라의 정보들이 자세히 기록됐다고 되어 있었다.
마치 한 무제 때의 장건이나 명의 영락제 때 정화처럼 말이다.
그런 거창한 국가적 지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쨌든 완전히 순수하게 불경만을 구하러 간 건 아니었다는 뉘앙스였다.
이 책의 여러 정황 증거들로 봐서는 정말 개인적인 바램 때문에 중앙 아시아를 넘어 인도로 간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대로 현장 개인의 힘으로 인도와 중국 간의 교역과 외교 관계가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서역 경영에 관심이 많던 당 태종이 19년을 서역에서 보내고 온 현장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게 아닐까 싶다.
책에서는 모든 게 다 현장의 높은 학식과 고결한 인품 때문에 온 인도 국왕들과 당 태종까지 감복해 두 지역간의 사절이 오고가고 대승불교가 전 인도에 퍼졌다는 식으로 너무 미화시켜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당시 중국과 인도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교류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온 승려라는 이유로 대우를 받을 만큼 대당제국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개인 자격으로 외국에서 온 유학생에 불과한 스님이 서역의 여러 왕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 가지 반성했던 것은 내가 불교에 대해 너무 무식했다는 점이다.
막연히 불교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는 자기 수양의 종교가 아닐까,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비하면 교리가 약하고 미신적 요소가 많은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정말 그야말로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책에 소개된 수많은 불교 이론과 경전, 고승들에 대해 읽으면서 새삼 불교 사상에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역시 개창자인 붓다가 인도 사람인 만큼 인도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서유기의 손오공이라는 캐릭터만 해도 인도의 유명한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원숭이 하누만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저팔계의 팔계는 승려로 출가하기 전의 사미나 거사 같은 사람들이 받는 여덟 가지의 계율이라고 한다.
현장은 미륵불을 추종하는 유식종의 창설자인데 이 유식론을 배우기 위해 날란다 서원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지식이 얕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론이라고 한다.
불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 

현장은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하고 유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유교 경전에도 소양이 있어 인도의 불경 번역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
그는 흔히 동진의 구마라습에 비교된다.
이 분 역시 불경의 한화 작업에 큰 업적을 남기신 인도의 승려인데 유교적 교육은 받지 못해 비교적 쉬운 말로 번역했는데 현장이 이런 약점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는 태종의 명으로 대당서역기를 쓰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인도에서 돌아온 40대 후반부터 20여 년 동안 불경 번역에 매달여 2000 여 권에 달하는 엄청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한가지 슬픈 에피소드는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가 당 황실의 공주와 사통하는 바람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현장은 중국의 도덕경 같은 것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 인도에 전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그의 산스크리트어 번역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장이 사막을 건너 북인도까지 이르렀던 여정을 살펴 보면 상당 부분은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 구역이다.
거기에 수많은 나라들이 존재했음을 대당서역기를 통해 알게 됐다.
얼마 전에 위구르족과 한족의 유혈 충돌도 있었는데 위구르 민족에게는 아픈 역사라는 생각도 든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금방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상당 시간 동안 여러 왕국에서 신봉되고 경전과 여러 교리들이 완성됐음을 알게 됐다.
이슬람 세력이 몰려 오면서 점점 밖으로 쫓겨 가게 됐으나 고타마 싯다르타의 열반 이후 유명한 아쇼카 왕이나 카나슈카 왕 치세에 구전되던 부처님의 말씀이 하나의 경전으로 정착하면서 안정화를 거친다.
현장이 유학했던 날란다 사원은 유명한 학승들이 유학하던 곳으로 이슬람의 침입 후 폐허가 됐으나 1980년대에 대당서역기를 토대로 중국의 지원 아래 현장을 발굴하여 복원했다는 미담도 전하고 있다.
저자는 그만큼 대당서역기가 믿을 만한 자료임을 강조한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명칭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본다는 표현이 비유적이면 몰라도 말이 안 되긴 하다.
소리를 들어야지 어떻게 본단 말인가?
예전에도 의문을 품었던 부분이다.
그런데 현장의 책에 왜 이런 오해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자유자재로 본다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로써 관자재보살이라 번역해야 맞다.
그런데 두 단어가 합성되는 과정에서 최초 번역한 사람이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세상의 소리를 본다도 해석하는 바람에 관세음보살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원뜻을 살려 관자재보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발음이 좀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관세음 보다는 관자재보살이 훨씬 이치에 맞는 표현 같다.
또 현장은 인도라는 말의 어원을, 산스크리트어로 달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후대 승려는 다른 책에서 이것은 현장이 좋은 뜻으로 해석한 것이고 원래 인도를 가리키는 인디카라는 말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말의 어원을 추적한다는 게 무척 흥미롭다. 

분량에 비해 너무 쉽고 재밌게 읽은 책이다.
항상 모호하기만 했던 서역의 이미지가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오고 불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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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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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 표지가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책을 조심스레 넘기며 읽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꽤 방대한 분량인데 소설이라 그런지 쉽게 술술 넘어갔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봐야지 벼르고만 있었는데 역시 이번 터키 여행 때 비행기 안에서 읽게 됐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는 꽤나 좋은 독서 장소다.
흔들림이 없고 조용하니까 집중도 잘 된다. 

막연히 인권에 대한 책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 보니 <호밀밭의 파수꾼>과 매우 유사한 필체였고 저자도 이 작품 하나를 쓰고 절필했다고 한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일곱 살의 여자아이 눈으로 본 세상의 편견, 인종차별, 불의에 관한 내용인데 화자가 일곱 살이라 그런지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다.
심오한 개념보다는 직설적인 어법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진정한 영웅은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의 변호사인데 아내가 일찍 죽어 어린 젬과 스카웃 남매를 키우고 있다.
흑인 가정부 칼퍼니아가 집안 살림을 맡아 한다.
시대적 배경은 흑인 차별이 한창 심했던 1930년대의 남부 앨라배마 주.
변호사 하면 어쩐지 소송 일삼으면서 돈이나 버는 악덕 이미지가 강해서 전반부에서는 애티커스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애티커스가 보여주는 그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심지어 흑인의 애인이라는 (동성애자 의미) 모욕적인 언사까지 들으면서도 마을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끝까지 흑인 톰 로빈슨을 변호한다.
어떤 면에서는 흑인이라고 차별하고 폭행하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비난하고 대립할 수 있는데도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한계를 이해하는 애티커스의 포용력이 놀랍다.
그는 매우 조화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티커스의 인격은 듀보스 할머니라는 괴팍한 노인네에 대한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애티커스가 흑인의 강간 사건을 맡게 되자 마을에는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쫙 퍼지고 옆집에 사는 듀보스 할머니는 애티커스의 아들 젬에게 아버지 욕을 한다.
그러나 애티커스는 화가 나서 할머니의 꽃밭을 망쳐 버린 젬을 타이르면서 사과하라고 시킨다.
할머니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고 지금도 통증을 잊기 위해 몰핀 주사를 맞을 만큼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약자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감쌀 줄 아는 놀라운 포용력을 보인다.
그리고 몰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고통을 참는 할머니를 위해 아들에게 매일 책을 읽어 주도록 시킨다.
자신에게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자신을 욕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한 달씩이나 아들을 그 집으로 보내 침상을 지키게 한다는 것, 과연 보통 인격으로 가능한 일일까?
강간 사건의 변호도 그렇지만 이 에피소드에서도 애티커스의 놀라운 인격과 포용력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톰 로빈슨은 스물 다섯의 흑인으로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마을의 허드렛일을 해 준다.
마을에는 밥 이웰 일가가 외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데 술주정뱅이에 최하층 백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아이들을 때리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큰 딸 마옐라는 가끔 톰에게 집안일을 거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톰은 이웃과 전혀 교류가 없는 거의 갇혀지내는 이 불쌍한 백인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봉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이 아가씨는 욕정이 발동해 톰을 집으로 끌어 들여 자신의 몸을 더듬게 한다.
두려움에 떨던 톰은 도망가려 하고 그것을 발견한 아버지 밥이 달려와 딸을 폭행한 후 톰을 강간범으로 기소한다.
이 사건의 국선 변호사로 애티커스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된다.
흑인은 백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백인이 버스에 타면 자리도 양보해야 하던 시절이니 (그것도 미국의 최남부 앨라배마 주) 마을 사람들은 밥 이웰이 평소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흑인이 백인을 강간했다고 분노한다.
결과는 사형!
아마 오늘날의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약자인 여자 쪽의 말에 더 무게가 실릴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역차별이 될 수도 있는 문제 같다.
심지어 재판 중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톰을 폭행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감옥으로 몰려 오고 그 곳을 지키던 애티커스까지도 폭행당할 위협에 놓인다.
화자 스카웃은 겨우 7~8세의 어린 나이로 이러한 처지에 빠진 아버지를 목격한다.
그런데도 아버지 애티커스는 마을 사람들의 무지함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돌아갔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근본이 나쁜 사람은 없다, 그들의 마음 속에도 연민과 동정의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 역시 인종차별이나 근거없는 대중의 편견에 분노하고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을 이렇게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변호사는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인지 모르겠다. 

마옐라는 뻔뻔하게도 자신이 유혹해 놓고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 놓고서도, 톰을 강간범으로 고소하고 그에게 맞았다고 주장한다.
톰은 외롭게 갇혀 지내는 마옐라에게 유일한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겨우 열 아홉 살 밖에 안 된, 어찌 보면 사회의 최하층민인 (흑인을 제외하고) 약자인데도 어찌나 뻔뻔하고 역겨운지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 아버지 밥 이웰은 워낙 형편없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더 분노하고 말 것도 없었다.
미국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흑인들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최하층의 백인들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모든 울분과 분노를 가장 아랫계층인 흑인에게 쏟아 붓는다.
그들의 유일한 자긍심은 바로 피부색이 희다는 단 한 가지!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온 서구 사회가 아직도 반성하고 용서를 비는 입장이면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 온 흑인 차별에 대해서는 어쩌면 저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지, 정의나 평등은 과연 기득권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배심원들에게 톰은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확정을 받는다.
항소를 준비하던 중 톰은 기다리라는 애티커스를 믿지 못하고 탈옥하려다 경비병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이미 톰이 죽었는데도 밥 이웰은 원한을 품고 홀로 남은 세 아이의 어머니인 톰의 아내를 괴롭히고 심지어 애티커스의 아들 젬과 스카웃을 공격해 팔을 부러뜨리기까지 한다.
이 때 남매를 도와 준 사람이 바로 마을의 또다른 이방인 부 래들리.
그도 역시 백인인데 미치광이란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감금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고 평생 갇혀 산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도 온갖 소문을 만들어 내고 악인이자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사실 밥 이웰은 공공연히 애티커스를 죽이겠다고 설치고 다녔으나 실제로 어른인 애티커스 앞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힘이 약한 아이들을 죽이려고 노렸던 것이다.
얼마나 비겁하고 못난 놈인가.
직접 본인에게는 덤비지도 못하고 약자인 아이들을 뒤에서 노리다니.
결국 그는 댓가를 치뤄 아이들을 죽이려고 한 그 칼에 자신이 찔려 허무하게 죽고 만다.
그런데도 애티커스는 혹시 다투는 와중에 아들 젬이 밥 이웰을 찌른 건 아닌지 조사하려고 한다.
아들이 뒤에서 살인자라는 수근거림을 듣고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목격자인 부 래들리가 있고, 보안관의 강력한 변론에 힘입어 사건은 종결된다. 
마을의 기피 인물이었던 부 래들리도 사실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선량한 인물이었음이 밝혀진다.
가엾은 희생양 톰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1930년대의 상황에서 그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 가지 또 특기할 만한 것은, 말괄량이 스카웃이 단지 얌전하고 바느질을 잘 하는 겉모습만의 숙녀가 아니라 활발하게 뛰어놀고 거칠게 자랄지라도 편견이 없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진정한 숙녀로 커가는 과정이다.
고모 알렉산드라는 엄마 없이 자란 스카웃이 남자처럼 함부로 자란다고 오빠 애티커스에게 잔소리를 하고 직접 스카웃을 감독하려고 든다.
그러나 진짜 숙녀는 겉모양만 얌전한 게 아니다.
그거야 말로 속물적인 게 아닌가.
진짜 숙녀는 아버지 애티커스가 보여준 것처럼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편견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게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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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2010-08-2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의 제국 - 소설로 읽는 아메리카의 초상' 김욱동 교수님 강좌
http://blog.daum.net/pangloss/6940330

영탁 2010-09-0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절한 자상한 독후감 감사드립니다.
책을 사놓고.외국어로된)..읽지못해서...
덕분에 이제는 제대로 읽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