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2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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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고려, 북진을 꿈꾸다> 때문에 다시 읽게 된 책이다.
막 출간됐을 때도 굉장히 재밌게 읽었는데 사실 상세한 전투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충 이런 전투가 중요했구나 하는 정도로 감만 잡았다고 할까?
다른 책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소략해서 읽다 보니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 재독하게 됐는데 역시 두 번째 읽으니 이해가 빠르고 무척 재밌었다. 
임용한씨는 참 글을 맛깔스럽게 잘 쓴다.
특히 현장답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게 장기인 듯 하다.
그의 일본 여행기도 무척 재밌게 읽었는데 고려 시대 전투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다. 

사실 고려시대 하면 아직 왕의 계보도 제대로 못 외울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사극으로 고려시대가 조명되면서 친숙한 등장인물들 때문에 역사책에서도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게 됐다.
이런 걸 보면 사극이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덜 알려진 시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특히 고려 초의 복잡한 왕위 계승과 외척 관계는 전혀 감이 안 잡혔는데 이번에 <천추태후>를 보면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잠깐 봤던 <제국의 아침>이나 <신돈> 같은 드라마도 당시 고려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천추태후>는 보다 말다 한 드라마라 성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국사인물열전>에서 다뤄진 천추태후를 보면, 한화정책을 추진한 성종이 전통문화를 억압하고 고려의 위상을 중국에 비해 낮추려 했기 때문에 관료와 신민들이 반발했고 그래서 후에 목종이 즉위하면서 천추태후가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해설했다.
대표적인 예로 팔관회 폐지나 관직과 복식 제도 정비 등을 중국식으로 바꾼 걸 들었다.
그 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이 책을 읽어 보면 PD 들의 이런 소견이 얼마나 단견인지 금방 드러난다.
저자는 흔히 호족 세력의 규합을 통해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다는 왕건의 혼인정책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는데, 사회안정이란 특권층의 양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왕건은 스물 아홉 명의 부인을 뒀고 덕분에 호족 세력을 일시적으로 규합했을지는 모르나 당장 그의 사후 왕권은 외척들에 의해 흔들렸고 혜종은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다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저자는 왕건의 혼인정책이 무장 출신으로 국가를 세운 창업 군주의 대표적 단견이라고 비판한다.
스물 아홉 명의 부인을 뒀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개인적인 욕망이었던 셈.
성종의 중국화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미 고려가 건국한지 백 여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지방관조차 제대로 파견을 못하고 국가 정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제도에 의해 운행되는 정상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과도기적인 상태였던 셈이다.
성종의 업적은 이런 국가를 행정적으로 안정시키고 지방에 그나마 12목을 세우고 대읍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조세를 거두고 지방행정을 장악하고 교육 기관을 건립하며 군사 제도를 정비했다.
말하자면 국가 제도의 기반을 닦은 셈인데 이런 과정에서 터져 나온 기득권층의 불만을, 단지 우리 것을 버리고 중국을 쫓아 사대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비판한다는 건 너무 짧은 소견이다.
이래서 TV 에서 보여 주는 역사 의식은 언제나 표면적이고 즉흥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11세기 북중국의 강자로 떠오른 거란의 침입은, 당시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엄청난 국난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1차 침입 때 소손녕은 본격적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출병했다기 보다는 중원 진출을 앞두고 후방을 다지기 위한 무력행사 수준이었기 때문에 서희와의 강화 회담이 성립되어 순순히 물러가게 된다.
당시 고려의 국경선은 청천강 이남이었기 때문에 거란의 국경선인 압록강부터 청천강까지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서희는 이 빈 공간에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여진족을 몰아내고 거란과의 화의를 다지겠다고 제안한다.
이 때 세워진 강동 6주의 성들은 후에 거란이 재침했을 때 훌륭한 방어막으로 작용한다.
시간이 흘러 고려는 다시 송과 외교를 재개하고 거란과의 관계는 악화된다.
연운 16주를 획득하고 송으로부터 엄청난 세폐를 받던 거란은 이번에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친정한다.
양규 등이 흥화진에서 버티자 이 곳을 우회하여 통주로 진격한다.
거란의 장점이 초원 유목민의 특징인 기동 작전이다.
굳이 성을 정복하려고 애쓰지 않고 과감하게 건너 뛰어 개경 쪽으로 진군해 버린 셈이다.
자칫 보급로가 끊길 위험이 있으나 거란군의 편제를 보면 기병 하나에 말 세 필과 보급 군사 둘이 붙어 시종하는 형상으로 보병처럼 자기 식량을 스스로 지고 가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훨씬 더 빠르게 진격할 수 있다.
통주성에는 성종의 친정 명분이었던 정란의 주인공 강조가 버티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한 번의 성공에 자만하여 수성을 포기하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성을 나와 공격하다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공격하는 양동 작접에 걸려 들어 천혜의 수비 요건을 갖춘 통주성 밖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끝까지 복속을 거부하고 처형당했던 걸 보면 강조가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나름대로 신념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통주성 전투에 승리한 거란군은 그 아래 곽주성으로 내려가 공격했으나 이 때 흥화진을 수비한 양규가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곽주로 내려와 동북면의 군사들과 합류하면서 막아낸다.
양규의 활약은 참으로 놀라운데 불행히도 거란군의 퇴각시 포로들을 구출하다가 전사하고 만다.
거란은 이번에도 곽주성을 포기하고 바로 서경으로 진격한다.
코앞에 있던 개경에서 정변으로 막 왕이 되어 떨고 있던 현종은 결국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는데 지방행정을 중앙에서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던 때라 곳곳에서 폭도들의 침입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의주까지 피난을 떠났던 임진왜란의 선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몽진길이었을 것이다.
왕이 떠나버린 개경을 점령하긴 했으나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된 중간기지 하나 만들지 못했던 거란군은 결국 고려 정부의 강화 제의를 받아들여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고려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완전히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고 계속 국지전이 국경 부근에서 지지부진하게 지속되면서 결국 소배압이 이끄는 3차 침입이 시도된다.
이 때도 강동 6주의 성을 모두 우회하여 직접 개경으로 진격하는데 이번에는 현종도 피난을 떠나지 않고 개경을 사수하고 그 과정에서 유명한 귀주대첩을 거두기도 한다.
무려 30여년에 걸친 지리한 싸움이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현종은 그 후 개경 방어를 위해 나성을 축조하고 거란은 허망하게도 몇 년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망하고 만다.
고려로서는 북방의 위협을 잘 이겨낸 셈이다.
12세기는 여진의 시대다.
한낱 부락에 지나지 않았던 여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고려를 위협하자 거란전의 교훈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고려 조정에서도 선수를 치게 된다.
1차 충돌 때의 패배를 교훈삼아 공격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전시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이를 주도한 것은 조선의 세조처럼 조카의 왕위를 뺏은 숙종인데 출전 직전 사망하고 아들인 예종이 2차 원정을 준비하게 된다.
이 때 윤관을 중심으로 한 원정군의 규모는 17만.
당시 고려로서는 총력을 기울인 대규모 군사 정벌이었을 것이다.
이 원정에서 승리하여 동북면에 9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하나 결국 지키지 못하고 4년만에 9성은 여진족에게 돌려 주고 만다.
역사책을 보면 전쟁에는 나가지도 않은 문신들이 조정에 앉아 9성을 환원하고 전쟁을 끝내자고 떠벌린다는 식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는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면 당시 고려로서는 이 동북면 지역을 제대로 지키기에는 희생이 너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조선의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가혹하게 주민이주정책을 실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국경선 부근을 완전히 행정 구역에 편입시켜 방어를 튼튼히 하고 농경민을 정착시킨다는 게 단시간에 이뤄질 수 있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록 애써 지은 9성을 돌려주긴 했으나 그 후 6년 만에 금을 건국하고 거란과 송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국력이 팽창했으나 고려를 다시 침입하지는 않았다.
당시 고려 조정의 원정이 헛되지 않았던 셈이다.
12세기의 평화는 이 때의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려 전기의 국가 존망을 흔들었던 두 번의 전쟁을 입체적으로 상세히 서술하여 당시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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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미국 미술관 - 문화저널리스트 박진현의
박진현 지음 / 예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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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서가에 꽂힌 걸 보고 즉흥적으로 읽게 된 책.
서구의 미술관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에 미술관 소개책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더군다나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미국 미술관이라니, 흥미가 생겨 당장 집어 들었다.
반갑게도 저자는 내 고향인 광주의 신문 기자였다.
지방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이런 책을 내는구나 하는 약간의 문화적 충격도 있었다.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기자라 더 반가웠다.
40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 사진이 많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미국 미술관 하면 뉴욕의 유명한 미술관들, 메트로폴리탄이나 MoMA 정도가 전부였는데 살펴 보니 도시마다 미술관들이 참 많다.
미술관이라는 제도 자체가 서양에서 시작해서인지 또 현재의 문화 흐름을 서양이 주도해서인지 미술관 문화는 아직 우리가 따라 갈 수 없는 것 같다.
제일 부러웠던 점은, 도시마다 대표 미술관이 있고 규모나 컬렉션의 질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와의 연계가 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저자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춰 지역사회의 문화 향유와 교육을 위해 미술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소개하는 글을 따로 실었다.
문화나 여가생활 하면 기껏해야 영화 보고 외식하고 헬스 클럽 가는 정도 생각하기 쉬운데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자연스러진다면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특히 은퇴한 노인들을 중심으로 엘더 호스텔 같은 프로그램을 운여하는 점이 부러웠다.
4박 5일 코스로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서 문화 강좌나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끔 중앙박물관에 가 보면 연세 지긋하신 노인 분들이 해설사로 자원봉사 하시기도 하고 큐레이터 강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노인들도 이제 손자 손녀 보는 노동에서 벗어나 은퇴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미국 미술관과 관련하여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억만장자들의 기부 문화다.
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측면에서 큰손들의 기부 문화를 칭찬했지만, 약간의 어두운 면도 보인다.
시민 사회에 받은 것을 돌려준다는 의미는 충분히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라는 게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엄청난 부를 한꺼번에 몰아주는 시스템이라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엄청난 돈을 순식간에 벌 수 있단 말일까?
탈세, 불법 합병 같은 걸 저지르면서 법의 수사망을 교묘히 빠져 나가다가 큰 돈을 모으면 나중에 사회 환원한다고 해서 끝은 아닌 것 같다.
일례로 삼성의 리움 미술관도 불법 비자금으로 작품 구입했다고 수사에 오르지 않았는가.
기부 문화와 기업의 투명성은 반드시 별개로 치부되야 한다.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는 미술품의 천문학적 액수를 보면 억소리가 나면서 대체 저런 엄청난 돈들이 어떻게 한 개인에게 쏠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스럽다. 

우리에게 덜 알려진 미국 미술관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기회가 되면 뉴욕으로 미술관 투어를 꼭 다녀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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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는 언제 치나요?
다니엘 호프 외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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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항상 가까이 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무엇보다 즐기고 싶지만 일종의 벽 같은 게 느껴지는 어려운 분야.
관심은 있는데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수준이 안 된다고 해야 할까?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분야다.
그렇지만 가끔 차를 타고 갈 때 듣게 되는 베토벤이나 모짜르트의 교향곡이 나오면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과 격정을 느낄 때가 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곡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클래식이 죽긴 왜 죽어, 이렇게 사람을 흥분시키는데 이러면서 터질 것 같은 격렬함을 혼자 삭일 때가 있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겠지?
책은 쉽다.
어떤 책이 됐든 호기심이 넘쳐 나고 신간이 나오면 그 즉시 읽어 줘야 할 것 같고, 힘들고 지칠 때 위로가 되고 하여튼 언제라도 내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만만한 매체다.
그런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미술보다 더 어렵고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금방 흥미를 잃고 나가 떨어진다.
그래서 직접 음악회에도 가 보고 MP3로 듣기도 하는데 역시 내가 가장 친숙한 분야, 책을 통해 음악을 알려는 시도를 자주 한다.
박종호씨처럼 매끄러운 문장으로 클래식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직업 연주자가 들려주는 무대 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실 아주 재밌지는 않았다.
콘서트에 문외한인 친구 부부를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회에 초대하여 감상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본 골자로 하여, 콘서트 관람 전 과정을 설명하는 식이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개인적인 감상이 많아 살짝 지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직접 연주하는 솔리스트로서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 있어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엄청나게 몰입해서 봤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수십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조율해야 하는 지휘자라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한 때는 지휘자가 무슨 필요가 있어, 이런 생각도 했는데 혼자 하는 연주가 아니니 전체를 이끌고 갈 리더는 분명히 필요하고 또 전반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리라.
이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솔리스트의 조화는 여러 번 연주해서 좋은 음만 뽑아 녹음한 CD 로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저자의 충고대로 콘서트홀에 가서 단 한 번 뿐인 바로 그 연주를 들을 때, 그 때 느끼는 감정은 집에서 듣는 CD와는 또다른 경험일 것 같다.
저자는 21세기에도 과연 클래식이 살아 있는 음악으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는데, 정답은 저자의 처방대로 콘서트가 보다 활성화 되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극장가는 것처럼 친구를 만나 가벼운 마음으로 음악회에 가는 것은 어려울까?
일단 클래식 자체가 갖는 예술적 수준이 벽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누구나 볼 수 있지만, 클래식은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정말 명곡은 누가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을 주지만 대체적으로 클래식은 대중문화 보다는 약간의 수준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즐거움은 진지한 즐거움이다, 라는 격언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클래식이 대중매체나 학교 교육 등을 통해 보다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저자도 지적한 바대로 비싼 입장료다.
아마 저자 역시 꽤 비싼 출연료를 받는 것 같은데, 플라시도 도밍고가 하소연 한 것처럼 헐리우드 스타들은 몇 백억을 버는데 그에 비하면 유명 음악가의 출연료는 문제삼을 만한 게 못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전 세계 수십 억이 단 한 번의 촬영으로 한꺼번에 즐길 수 있지만, 음악회는 기껏해야 수 천 명이 한 두 번 들을 수 있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음악회의 입장료가 아주 비싼 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는 유명 음악가가 내한하면 기본이 십 만원인 현실은 확실히 부담이 된다.
저자의 말대로 시즌 티켓을 구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꾸준히 음악회에 가는 계기도 되고 유명 연주회를 할인받을 수도 있으니까.
사실 저자 역시 스타 음악가들의 비싼 출연료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스타의 존재는 대중의 관심 환기라는 측면에서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니 너무 배아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항상 클래식은 멀게만 느껴졌는데 집에서나 길가다가 잠깐씩 들을 게 아니라 콘서트홀에 가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직접 체험해 보는 기회를 늘려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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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통찰 - 폄하와 찬사로 뒤바뀐 18인의 두 얼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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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전문가가 아닌 필자의 주장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전문가라면 한 분야에서 논문을 쓰고 연구하는 정도는 되야 할 것 같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근거를 밝히는 것,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도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곤 한다.
서점에서 이 책을 보고 기존의 평가와 다른 관점으로 역사적 인물을 되돌아 본다고 해서 흥미가 생겼는데 이 쪽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걱정을 했었다.
그렇지만 역사학과 출신이고 아주 엉터리는 아닐 거라 생각하고 읽게 됐는데 평가는 실망 쪽이다.
환단고기를 믿어야 한다고 내세우는 식은 아니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제일 위험한 것은 현대인의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인데, 사대주의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당시의 국제 질서를 인정한 현명한 외교 정책이었다까지는 좋지만, 한미 동맹을 주장하는 보수층이 바로 숭명반청을 주장하던 노론 집권세력과 똑같은 거다, 이런 식의 단순 비교는 진도를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흔드는 오늘날의 미국을, 이미 망해버린 17세기 노론 집권층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명나라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자존심을 지키려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야만족의 나라 청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미가 반청과 통하는 게 아닐까?
저자의 이런 현대주의적 관점은 연산군이나 정도전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정도전이 정말로 추구한 것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재상정치였고 그것은 힘없는 백성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가진 자들의 권력 추구, 즉 소수 귀족인 사대부들을 위한 정치였으니 정도전을 민중을 생각하는 개혁가로 볼 게 아니라는 식이다.
왕조 국가이자 전근대 사회였던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오늘날 민주주의나 서민정치에 합당한 의식을 가진 정치가가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원의 간섭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등으로 엉망이 되버린 고려 사회를 재정비하고 국가의 틀을 새롭게 갖춘 조선 개국자들의 시대적 역할은 오늘날 민주주의 관점으로 결코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산군은 또 어떤가.
그가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고 해서 과연 사대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민중의 편에 선 왕인가?
집권층을 억누르면 곧 백성을 위하는 왕이 되는 것인가?
연산군의 공포 정치는 아무리 좋은 쪽으로 해석해도 미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폭정을 일삼는 왕들이 많았고 저자의 말마따나 태종도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세조도 동생들과 조카를 다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연산군처럼 대책없이 사회 근간을 흔들지는 않았다.
그 보다 더 나쁜 왕들도 많다더라는 식으로 연산군의 폭정과 정책 실패를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광해군이 왕위를 빼앗긴 것은 유교적 명분론에 반하고 무리한 궁궐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게 더 와 닿는다.
광해군의 평가에서처럼 어쨌든 정권을 못 지키고 무너진 것은 명백한 실패가 아닌가. 

동의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장수왕이 중국에 사대정책을 취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점, 명성황후는 실세가 아니고 사실은 고종이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 이황이 실은 관료로서 야심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점, 정조 시대의 한계점 같은 것들이다.
장수왕이 북위와 남조 왕조들의 책봉을 받으려고 애쓰고 당시의 국제 질서를 인정했기 때문에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는, 후에 연개소문이 당과 충돌하는 바람에 결국은 망국까지 갔다는 평가와도 일정 부분 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성계가 여진족이었다느니, 강감찬의 귀주대첩 덕분에 거란과 고려, 송, 일본 등의 동북 아시아가 2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느니, 김대건이 실은 프랑스 제국주의자에게 이용을 당했던 거라느니 하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세거지인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함경도로 이주한 사건은 임용한씨의 <조선국왕이야기>를 통해 자세히 읽었다.
그 때도 이안사를 따라 170여 가구가 이주했다는 부분에서 약간의 의문을 품기는 했으나 당시 시대적 환경으로 이해를 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부분을 두고, 많은 가구가 주인을 따라 이주한 것이야 말로 이성계의 조상이 전주의 농경민 집단이 아니라 유목민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사료 비판이라는 이유로 실록에 나온 태조의 가계에 관한 부분을 완전히 거짓으로 치부하는 건 합리적이지가 않다.
또 이안사가 그렇게 큰 세력을 가졌다면 그깟 지방관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첩 문제로 다투다 집단 이주를 했겠냐고 하는데 이런 상황 논리야 말로 가장 위험한 논리 전개라고 생각한다.
그 지방관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정확히 밝히지도 않은 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다.
또 몽골이 국토를 유린하는 시대에 어떻게 그 많은 가구가 북쪽까지 전진했냐고 하는데 몽골이 1년 내내 전국을 지배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추측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이성계 집안이 함경도 부근의 여진족 출신이었다면 당시나 후대 기록에 일말의 의문이라고 남겨야 하는데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심지어 고려인들이 깔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 사대부들이 16세기가 될 때까지 산림에만 머물고 정치 참여를 거부했다느니,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도 제 문자를 갖는 유목민의 전통을 지키고 사대부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누르기 위해서였다느니 이런 논리적 비약이 심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김대건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앞잡이로 이용당하다 조선 정부에 처형당했다는 평가도 지나친 비약이다.
선교사들이 종교를 앞세워 포교에 나서면 군대가 뒤따라와 총칼을 들이대는 식의 식민 지배가 19세기에 자주 벌어진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선교사 개개인의 신앙적 포교 활동을 무조건 정치나 시대적 큰 관점으로만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과연 프랑스가 19세기 말의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병인양요를 일으켰다고 하지만 정말로 식민 지배의 야심이 있었다면 한 번 패했다고 그걸로 끝이겠는가.
김대건은 정치적 인물도 아니고 한국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순교자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 정부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을 꺽기 위해 천주교 박해를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과 논리의 비약이다.
유교의 교조주의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고 남인들에 대한 정치 공세로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 아닌가.
흥선대원군이 쇄국주의자로 낙인찍힌 큰 이유가 신미양요 때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오늘날 한국인이 짝사랑하는 미국을 물리쳤기 때문이라는 것도 정말 넌센스다.
저자의 반미적 관점을 역사적 인물의 평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명백한 시대 착오였고 미국이 아니라 어디를 물리쳤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시대를 잘못 읽은 정치가다.
인물 뒤집기는 이래서 항상 위험하다.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를 하려면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수많은 근거와 사료들을 준비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한 두 가지 정황적 추론으로만 기존의 평가를 무시하려고 한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저자의 논리 전개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어 약간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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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북진을 꿈꾸다 - 고구려 영토 회복의 꿈과 500년 고려전쟁사 KODEF 한국 전쟁사 2
정해은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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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쉽게 잘 쓰여진 책이다.
300 페이지 정도 되는데 4시간 좀 더 걸려서 읽었다.
상당히 빨리 본 셈이다.
각 전투의 상황들을 세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아 상세함은 떨어지지만 (임용한씨의 <전쟁과 역사> 시리즈가 훨씬 자세하다) 대신 고려 시대라는 긴 시기에서 외침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
고려라는 나라가 좀 더 가깝게 느껴지고 저자의 평가대로 중원 땅에서 유목민들이 흥기하여 어지럽던 시대에 이만큼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국가를 유지했던 고려인들을 결코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관점은, 거란의 침입 이후 요나라에 사대하고 심지어 한 수 아래로 여겼던 금나라에도 사대했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해 실리 외교를 했다고 평가한 점이다.
우리가 심지어 거란에게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11세기는 거란의 시대였고 12세기는 금을 건국한 여진의 시대, 그리고 13세기는 전 유럽과 아시아 몽골의 말발굽에 신음할 때였으니 동북아시아의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 고려로서는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도 국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평가대로 홍건적의 침입도 무려 20만 대군을 이끌어 넘어온 만큼 결코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체 현종이나 공민왕은 얼마나 무능하면 나주와 안동까지 피신을 했나 늘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고대 전쟁에서 국왕과 수도가 점령당한다는 것은 곧 나라가 패망하는 것과도 같으니 이들의 빠른 피난을 꼭 나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고려의 기본적인 군사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한 시대였고 더군다나 한반도는 산이 험하기 때문에 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수성전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외침이 있으면 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중앙군이 대오를 정비하고 성으로 달려와 일거에 적을 섬멸하는 방법을 썼다.
수성전은 곧 중앙군의 합류를 기다리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공민왕 역시 홍건적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동안, 안동으로 피난해 관군을 소집하고 반격할 기회를 노려 일시에 홍건적 10만을 살해한다.
어찌 보면 위험하기까지 한 선택을 한다.
즉, 보통 도망칠 때는 곡식을 모두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구사하는데 배고픈 홍건적이 계속 남하할까 두려워 아예 곡식을 그대로 놔두고 떠난 것이다.
예상대로 홍건적은 개경에서 배를 채우며 사태를 관망한다.
청야전술 포기를 주장한 대원수는 파직됐으나 공민왕은 안동에서 숨을 고르고 정세운 등을 앞세워 홍건적을 치러 올라갈 수 있었다.
개경에 들어가기 전 잠시 흥왕사에서 머무는데 이 때 김용의 반란이 일어나 최영이 이를 진압한다.
홍건적의 침입과 무장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신 책봉이 일어나고, 이를 배경으로 이성계나 최영 같은 신흥 무장세력이 등장하게 됐다. 

무신 정권의 대몽 항쟁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많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아리송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관점에 적극 동의하게 됐다.
어떤 책에서는 무신 정권이야 말로 귀족 사회를 전복시키고 실력 위주로 나가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고, 30년간 대몽항쟁을 지속한 덕분에 자주국가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내 생각에 무신 정권은 또다른 비정상적 세력의 일당 독재에 불과하고 과연 고려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삼별초의 난까지 합하면 무려 40여년 간 몽골에 시달리게 되는데 강화도로 들어간 것은 명백하게 정권 유지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긴 대몽항쟁 덕분에 고려는 비록 부마국이 되기는 했으나 고려라는 국호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저자의 평가대로 고려 민초들의 저항 덕분이지 정권 유지에 급급한 무신 정권의 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영흥 지방 사람들이 몽골에 귀순해 직할령인 쌍성총관부가 생겼겠는가.
공민왕까지가 끝이다 보니 이성계의 활약상이 안 나와 아쉽다. 

쉬운 문장으로 쓰여서 고려 시대 외침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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