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하버드 중국사
디터 쿤 지음, 육정임 옮김 / 너머북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각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책.

대학에서 출판된 책이라 믿음이 갔는데 표지도 예뻐 더욱 기대됐다.
500 페이지 정도라 분량이 많고 어려우면 어쩌나 약간 걱정되기도 했는데, 의외로 너무 쉽고 평이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 약간 실망스러울 정도.
한 시간에 100 페이지 남짓 읽어 상당히 빨리 본 편이다.
시리즈를 전부 통독해 보려고 한다.

송나라라고 하면 화약, 인쇄술, 나침반 같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있었을지라도 국방이 약해 북방 유목민에게 유린됐던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저자는 송의 외교 정책을 평화공존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다.
중국 통일 왕조 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되지만,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유목왕조와 조약을 맺어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갔다는 평가가 현대적 시각 같기도 하고 새로웠다.
송나라는 문벌귀족이 다스렸던 기존 당나라와는 달리, 과거를 통해 합격한 관리, 즉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새로운 국가였다.
귀족이라는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험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했다는 점은 상당히 진보적이긴 하다.
저자는 신유학 역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었다고 본다.
조선 중기 이후의 송시열 등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적 주자학만 떠올리는 나로서는 꽤 신선한 관점이었다.
격물치지, 즉 사물의 원리를 연구함으로써 이치를 깨닫는 방법론 덕분에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림에서도 영묘화 같은 세밀화가 탄생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주희의 이론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비판에 직면해 살아 생전에는 큰 영화를 보지 못하고 훗날 금이나 몽골에게 유린당하는 현실을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이 제자들에 의해 빛을 발해 이후 주자학으로 자리잡았다고 하니, 주희 역시 당대에는 일종의 선구자로써 고난을 겪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주자가례는 기존의 관혼상제 의례보다 훨씬 간단해서 널리 퍼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전족이 유행이긴 했으나, 송나라 때만 해도 여성의 재산권이 인정되어 여성의 수절을 강조하는 당시 신유학자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여성의 법적 권한도 꽤 높았다고 한다.
오히려 원나라가 들어선 후 여성의 재산권이 가장에게 예속되어 비로소 유학자들이 원하던 종속적 지위로 떨어졌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백자를 좋아했던 것처럼 송나라 때도 기존의 귀족적인 당 문화와는 달리, 금은 세공기 대신 점잖고 담백한 도자기를 선호했다.
장례 풍습 역시 기존의 후장과 달리,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고 묘실도 만들지 않는 등 매우 간소하게 치뤘다.
오히려 요왕조에서 화장을 하던 풍습이 바뀌어 귀족들은 묘실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런 걸 보면 문화는 확실히 시대 정신을 쫓는 모양이다.
인쇄술이 발달한 덕분에 경전이 널리 퍼질 수 있었고 비로소 과거제가 가능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만 종교개혁 등과 같은 사회변화를 이끌어 낸 줄 알았는데 송대의 인쇄술도 마찬가지였다.
인쇄술의 발전 덕분에 지폐도 정교하게 디자인해 위조 지폐를 막으면서 널리 퍼졌다.
반면 나침반은 서양으로 건너간 후에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는 점은 좀 다르긴 하다.
기존 왕조가 황궁을 중심으로 한 행정 도시였던 반면, 송대의 개봉과 항주는 모두 상업적 성격이 짙은 경제도시였던 점도 독특하다.
이러한 상업의 발전 덕분에 북방 유목왕조와의 평화공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3
박한제 지음 / 사계절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다 보니 세 번째 읽게 됐다.

이 분 책을 읽으면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어느 정도 정리가 돼서 쉽게 읽을 줄 알았는데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았다.

역사기행문이라는 형식 때문인지 하나의 주제로 명료하게 수렴되지 않고 조금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처음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3권은 수당제국을 가능하게 한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관한 내용이다.

당나라 때 측천무후라는 전무후무한 여자 황제가 나온 것도 유목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사회적 배경이 있었고, 그녀에 버금가는 효문제 때의 문명태후가 있다.

북위 3대 황제 태무제의 황후인 문명태후는 손자인 효문제 때 전권을 휘둘러 북위 시대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균전제와 삼장제 등을 실시한다.

그녀가 죽고 난 후 효문제는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서성의 평성에서 하남성의 낙양으로 천도한다.

보통 역사책에서는 효문제가 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천도했다고 하는데, 저자가 지적한 이런 배경도 작용했을 것 같다.

문명태후가 측천무후처럼 황제에 오르지 못한 까닭은 측천무후가 82세까지 장수한데 비해, 그녀는 겨우 49세로 단명했던 탓으로 본다.

후에 효문제의 며느리이자 선무제의 황후인 영태후 역시 자귀모사제라는 악습을 피해 자신의 아들 효명제 때 전권을 휘둘렀으나 불행히도 이주영에 의해 아들과 함께 황하에 던져진다.

후에 서태후도 그렇고, 확실히 한국에 비하면 중국의 여성 파워가 더 강했던 것은 유목 왕조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저자는 북위를 이은 수, 당 역시 유목 전통이 강한 국가로 본다.

적장자 상속 관습이 약한 유목 왕조에서는 황제가 직접 전장에 나가 공을 세워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하기 때문에 수 양제나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집착한 점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수 양제의 경우, 어머니 독고 황후의 총애로 형을 밀어내고 황제 자리에 오른 까닭에 더욱 고구려 정벌에 매달렸다고 한다.

초라한 수양제와 북주의 건국자 우문태의 무덤을 찾은 부분은 인생무상이 느껴져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북위의 균전제를 특정 산물을 산출해 내기 위한 일종의 할당생산제로 본다.

중앙아시아를 통해 비단 무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뽕나무를 강제로 심게 한 것이다.

당나라의 방장제 역시 직능별로 거주지를 구별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한다.

주거지가 성밖까지 확대된 송나라와는 달리, 당은 거대한 성곽을 만들고 그 안에 다시 담을 세워 구획된 좁은 공간 안에서만 살게 한 것이다.

유목 왕조가 정복을 통해 영토를 얻으면 강제 사민을 통해 정착시키면서 이들을 감시하고 최대한의 생산력을 이끌어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녀들의 초상화가 들려주는 욕망의 세계사
기무라 다이지 지음, 황미숙 옮김 / 올댓북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유럽 왕실과 초상화가 결합된 재밌는 책.

나처럼 유럽 왕실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흥미롭게 읽을 것 같다.

아주 유명한 앤 불린,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 퐁파두르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 외에도 거대한 제국을 호령한 카를 5세의 어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 샤를 7세의 애인 아네스 소렐, 프랑수아 1세와 아들인 앙리 2세의 정부를 겸한 디안 드 푸아티에, 찰스 2세의 부인인 헨리에타 마리아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새롭게 안 인물은 앙주 공작 르네 1세다.

장 2세의 증손에 해당하는 르네는 로렌의 이사벨과 결혼해 앙주와 로렌을 다스렸고, 그의 딸이 바로 앙주의 마거릿으로 영국 헨리 7세의 왕비다.

또 그의 누이 마리 당주는 6촌인 샤를7세의 왕비이자 루이 11세의 어머니다.

샤를 7세의 정부였던 아네스 소렐은 마리 당주의 올케인 로렌의 이사벨의 시녀로 있다가 총애를 입었는데 임신한 상태에서 전쟁터에 있던 샤를 7세를 보러 가다가 사망하고 만다.

이 죽음에는 어머니를 슬프게 한 그녀를 증오했던 아들 루이 11세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이 있다.

이런 세세한 왕실사가 너무 재밌다.

일본에서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로마인 이야기가 나오는 나라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지 동이전의 세계 동아시아 문명총서 5
권인한.김경호 엮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주제가 너무 흥미로워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이다.

다행히 일반인 대상으로 한 강연 모음집이라 그런지 많이 어렵지는 않고 분량도 250 페이지 내외로 작은 편이라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부여어와 고구려어, 왜어 등을 비교한 부분은 전혀 이해를 못해 넘어갔다.

옥저, 동예, 한4군 같인 지명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이제 좀 감이 잡힌다.

송호정씨의 단군 관련 책에서 읽은 바대로, 고조선은 대략 기원전 7세기부터 역사에 나타나고 예족이라는 중국 동북부 지역에 살던 무리에서 제일 먼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본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부여가 송화강을 중심으로 한 길림성 지역에 국가를 세우고 다시 기원전 2세기 무렵 그 일부가 압록강 중하류로 내려와 기존의 토착민과 융합하여 고구려를 세운다.

기원전 2세기기에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쫓겨 고구려의 준왕은 무리를 이끌고 삼한 지역으로 내려가 지배 집단이 된다.

재밌는 것은,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삼한의 사회 수준을 다르게 상정한다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는 3세기 무렵 나왔고, 후한서는 그로부터 150년 정도 지나 나온 것인데, 둘 다 그 앞에 존재한 사서 위략을 참조한 것으로 본다.

삼국지가 생략한 부분을 후한서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어 위략이라는 원사서의 대략적인 형태를 예측해 볼 수 있다.

삼국지에서는 준왕의 무리 수십 명이 진한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회를 읍락국가로 상정하고, 후한서에서는 준왕 무리 수천이 공격한 것으로 보아 이미 국가 형태를 이룬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삼국지가 먼저 편찬된 것이고 당대적 기록이므로 더 무게를 둔다.

만약 그렇다면 1세기 무렵 이미 삼국이 정립되어 국가를 이루었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강종훈씨의 책 <삼국사기 사료비판>에서도 당시 정황들을 미뤄 봤을 때 편년을 300 여년 정도 늦춰 잡아야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 초기 사료의 신뢰성은 일단 삼국지에 비하여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되나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에 이견이 많은 것 같다.

저자는 이 간극을 고고학적 발굴로 메워지기를 기대한다.

정말 뭔가 획기적인 자료들이 나오면 좋겠다.


다른 챕터에서는 낙랑목간을 통해 예의 존재를 밝힌다.

낙랑군에서 관할하는 25현이 표기된 목간이다.

한 무제가 낙랑, 진번, 임둔을 먼저, 후에 현토군을 설치한다.

낙랑은 평안도, 진번은 황해도, 임둔은 영동으로 보는데 저자는 영동 7현뿐 아니라 영서까지 포함된다고 본다.

진번이 후에 대방이 되고, 임둔과 함께 낙랑군으로 편입되는데 이러한 군들이 소멸된 이유를, 예족동맹체의 흥기 때문이라 여긴다.

예족이 백제의 북쪽 국경까지 내려가 말갈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처음 듣는 얘기라 신선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백제 역시 이러한 예족의 남하로 보는데 자세한 설명이 없어 다른 책을 참조해야 할 것 같다.

영동이 동옥저나 동예, 영서는 또다른 예족 집단으로 저자는 "영서예"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실 이 부분이 좀 모호하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은 영서예를 세력권 내 두고 견제했는데, 조선이 망한 후 한4군이 설치되면서 좀더 넓게 영동과 영서를 포함하여 관리했고 이곳이 바로 임둔이라고 상정한다.

예군남려가 고조선에 반역하여 28만을 이끌고 한에 투항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이것을 고구려의 시초로 본다.

보통 예족은 중국 동북부의 제민족을 뜻하고 선진시대의 맥과 한나라의 맥은 다르게 본다.

<사기>에서 고구려를 맥으로 지칭하는데 저자는 선진시대의 맥과는 다르게 예맥이라는 통칭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는 기록과, 고구려는 맥족이라는 기록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가 동명성왕 신화를 공유하는 점도 재밌다.

동명성왕이 탁리국을 떠나 부여를 건국했는데, 부여의 별종인 고구려도 이러한 건국신화를 가지고 압록강 중하류에 정착해 토착민과 어우러져 고구려를 세운다.

고구려이 왕위가 초반에는 소노부를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3세기 무렵 계루부로 바뀌는데 이 때 계루부의 주몽 신화가 건국 신화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즉 왕권을 장악한 계루부가 바로 주몽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니 동명왕과 주몽 신화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 이해된다.


그 외에 삼한 시대 주거지의 입구가 지금 같은 횡혈식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상하식, 즉 땅밑으로 내려가는 주거양식이었고, 내부 공간 구획은 없었으며, 지붕은 묘처럼 떼를 덮은 양식이었다는 점, 위 명제 때 조공한 왜에게 왜왕이라는 파격적인 명칭을 하사한 것은 (삼한에 대해서는 읍장이라 칭함) 당시 위나라가 손권의 오와 요동에서 대립하던 시절이라 오와 왜가 손을 잡을까 두려워 호의를 베푼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점 등이 흥미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페라 보다가 앙코르 외쳐도 되나요? - 당신이 오페라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101가지 궁금증
이장직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신간으로 도서관에 신청했던 책.

다른 책 고르다가 도서관에 꽂혀 있는 걸 보고 갑자기 무슨 내용이었더라, 싶어 빌리게 됐다.

사실 썩 재밌지는 않다.

저자가 음악잡지 기자 출신인데, 오페라 자체에 대한 얘기 보다는 그 뒷얘기들에 관한 책이라 가벼운 후식 느낌이 든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부분들

1. 맨 앞 서문에 나왔던 문화자본에 관한 내용.

돈도 필요하지만,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있어 보이길 원하는데 부르디외가 이를 문화자본이라 명명했다.

사회자본이 인맥이고 상징자본이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등이라면 문화자본은 영화보다는 다소 수준이 높은 오페라나 음악회 같은 공연 관람을 가리킨다.

이런 문화자본을 갖기 위해서 소외계층에 대한 할인 티켓이나 교육 등이 필요할 것이다.

접근성을 위해 입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2. 오페라가 처음에는 궁정에서 즐기는 상류 문화였고 예술 자체보다는 사교 목적을 위한 배경이었던 반면, 대중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점점 예술 그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이제는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에 간다.

귀족이 아닌 중산층의 시대, 전문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새로 생긴 오페라 극장에서는 평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박스석을 없애기도 한단다.


3. 오페라의 21세기적 적응 내지는 진화를 뮤지컬로 봐도 될까?

뮤지컬이라고 하면 오페라처럼 본격적인 성악극이라기 보다, 화려한 볼거리 위주의 가수들 공연 같은 느낌을 주는데, <포기와 베스> <렌트> 처럼 수준높은 뮤지컬도 많은 것 같다.

베르디 당시만 해도 수많은 오페라들이 초연됐으나 요즘은 옛날 레파토리를 반복할 뿐이다.

반면 뮤지컬은 계속 새 작품이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열풍이다.

한국에서의 이미지로 보자면 뮤지컬과 오페라는 음악적으로는 동급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도록 오페라의 변신이 필요할 것 같다.


4. 오페라 극장의 화재.

심지어 19세기 뉴욕에서는 600 여 명이 사망한 사례도 있다.

당시로서는 수많은 관객이 한 공간에 운집할 일이 이런 극장 뿐이었을 것이고, 무대 소품 사용으로 불이 붙거나 특히 전기가 아닌 기름으로 조명을 썼기 때문에 대형참사가 빈번했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소방법이 발달했다고 하니 오늘날의 안전한 공연 관람도 그냥 얻어진 게 아닌 모양이다.


5. 어린이를 위한 오페라 레파토리 개발.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접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찾아 듣기는 갈수록 어려운 세상이 됐다.

유럽이나 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어린이를 위한 미술 교육이나 관람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고 있다던데 음악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 역시 대학 졸업할 때까지 오페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어느 책 제목처럼 오페라는 뚱뚱한 여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정도로 인식했었다.

어린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오페라가 자주 공연되면 거부감 없어 어려서부터 좋은 음악을 접할 기회가 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