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영산강
성정용 외 지음 / 학연문화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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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너무 호기심이 생겨 책바다를 통해 빌려 읽었다.

책들이 생각보다 금방 절판되는 것 같아 놀랬다.

책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백제가 언제부터 영산강 유역을 실제로 지배하였는가, 가 이 책의 주제이다.

3국 시대에 가야까지 넣어야 한다는 말은 가끔 들었는데 마한의 존재는 처음 알게 됐다.

책의 저자 중 한 분은 마한까지 넣어 5국 시대라고 부르자고도 했다.

그렇지만 또다른 저자의 주장대로, 나라 이름이 없어졌으니 신라, 백제, 고구려라는 3국 시대에 끼워 넣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야 역시 완벽한 고대 국가라기 보다는 여러 소국들이 모인 연맹체 같아서 3국과는 그 위상이 다른 듯하다.

마한 역시 54개의 소국이 모인 마한연맹체이므로 마한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마저도 369년 근초고왕의 남정 이후 역사책에 더이상 국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노중국 교수는 이런 이유로 백제가 4세기 후반부터 직접 지배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그 외 다른 학자들은 토기나 고분, 취락 같은 물질적 증거를 바탕으로 6세기는 되서야 지방관을 파견하는 직접 지배가 실시됐다고 한다.

610년에 쓰여진 목간의 발견으로 7세기 때는 확실하게 영산강 유역을 지배했음이 문서로써 드러난다.

백제가 망한 게 660년인데 겨우 그 때서야 전남 지역을 완전하게 지배했다니, 알고 있는 상식과 달라 충격적이다.

드라마 <근초고왕>을 너무 재밌게 봐서 이 책의 내용이 더더욱 흥미로웠다.

중원을 공격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고구려의 남진이나 백제의 마한 공격 등은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졌던 듯하다.

드라마에서도 침미다례가 끝까지 반항하여 전원을 몰살시켰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역사서에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남정의 기록도 우리 역사책이 아닌 <일본서기>에 쓰여 있다고 하니 문헌자료 부족이 너무나 아쉽다.

아무리 고고학적인 유물, 유적이 있어도 문헌자료가 없으면 송국리 유적, 이런 식으로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왜 계통의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치적 지배라기 보다, 무역 쪽의 교류가 활발했다고 설명하고 넘어가서 이 부분에 대해 더 알고 싶다.

어쨌든 영산강 유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 왔고 결국은 백제에 흡수됐던 듯하다.

고향이 광주라서 가끔 국도를 지날 때 거대한 고분들을 볼 때가 있었는데, 바로 반남 고분군 같은 유적이었던 모양이다.

마한의 흔적들이라니 새삼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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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의 세계사 - 성과 이름의 역사를 찾아 세계일주!
쓰지하라 야스오 지음, 김미선 옮김 / 창조문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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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인데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서양의 성을 주로 밝히는 책이라 다소 지루했다.

뒷부분에 중국과 한반도에 성이 정착하는 과정은 흥미롭게 읽었다.

확실히 일본 사람들은 서양의 전통이나 문화, 관습 등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듯하다.

일본인이 서양의 인명사를 이렇게 세세하게 밝히나, 신기하다.

성과 개인명으로 이뤄진 성명 체제는 너무나 당연한 양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착한지 얼마 안 된 형태라고 한다.

특히 아직도 이슬람이나 버마, 말레이시아, 태평양의 섬 등에서는 따로 성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성이란 가족의 혈통을 밝히는 것이므로 씨족 중심으로 모여 살던 전통사회에서는 굳이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문이 중요했던 상류층 외에 정치적 활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농민들은 굳이 성을 표시할 필요없이 개인명만으로 구분이 가고, 가문이라는 개념 자체도 희박했을 듯하다.

마을 공동체 내에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누구의 아들이라는 부칭이 흔하게 쓰였다.

오늘날 서양 이름의 미들 네임에 부칭이 많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강력하게 인민을 통제해 온 중앙집권제를 추구한 중국에서만 기원전부터 성명을 써 왔다.

한반도에서는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명제를 받아들였는데 성이 널리 퍼진 것은 유교 문화가 정착된 고려시대부터라고 한다.

결혼하면 남편성으로 바꾸는 서양과는 달리 여자가 본인의 성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여권이 높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

동아시아에서 부부별성제를 유지한 것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과, 동성동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세대가 넘어가면서 같은 혈족과 혼인하게 될까 봐 결혼 후에도 친정 姓 을 유지했다고 한다

서양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사촌끼리의 혼인도 흔할 걸 보면 동성동본 혼인을 터부시하는 것도 독특한 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16p

서양에서는 개인명(세례명)을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에 성(가명)을 붙인다. 왜냐하면 성이 세례명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발상이 뿌리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명을 중시해 '성.개인명' 순으로 이름을 지었던 동아시아의 문화권과 대조를 이룬다. 동아시아는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상을 모시는 전통적인 가문으로 되돌아가려는 의식이 강했다.

 성을 만드는 관습은 예루살렘 성지의 십자군 원정의 귀도에 따라 이탈리아부터 프랑스, 영국, 독일 등으로 서서히 보급되었는데 모두 상위계급만 사용하였으며 하위계급으로 퍼지기까지는 아직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도 세례명만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장기간에 걸쳐 애칭과 별명을 불렀으며 어쩌다 그것이 성으로 승격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33p

유교정신을 살아 있는 규범으로 삼아온 중국과 한국, 근세 일본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는 과거 천 년 이상 부부별성을 원칙으로 하고 결혼을 해도 아내는 친정의 성을 그대로 따랐다. 혈통을 명시하여 대가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 등 동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한 성의 역사는 겨우 수백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이 없었던 민족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69p

이 지역에서는 부칭사 대신 고유명사 앞에 '~출신' '~근처', '~저편'과 같은 전치사를 붙이는 어형이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독일어의 von 과 네덜란드어 van, 프랑스어 de 는 출신 지역을 나타낸다. 이것은 원래 귀족과 중세영주가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관명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떨치기 위해 다투어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76p

현재는 길고 긴 부칭을 사용하는 관습은 사라지고 보통 세례명과 성만 사용한다. 성의 일부에 네덜란드어 van~과 프랑스어 de~ 에 해당하는 '~출신의'를 나타내는 전치사 da- 또는 라틴어 de- 를 붙이는 관습이 남아있다.

139p

헤이안 중기 이후, 본적지에서 사람들이 잇달아 실종되고 법령 제도가 약화됨으로써 호적을 작성하지 않게 되자 대대로 성을 물려주는 습관이 차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유재산이 없는 빈농층은 이름만 가지고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출신이나 성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결국 성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무가와 공가 등 상류계급은 출신이나 가문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성 관습을 더더욱 강조했으며 오늘날 성의 원형은 무로마치시대 중엽에 모두 만들어졌다고 한다.

144p

신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평등을 존중해 온 그리스도교 문화권과는 달리 유교문화권에서는 <논어>를 기초로 한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상과 혈통을 중요시한다. 게다가 임금과 가부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완고한 혈연관계와 가족중심사회 이루어왔다.

 일족의 유대를 나타내는 성이 개인명보다 더 중요시해야 하는 존재로 비춰진 것도 어쩌면 자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이와 같은 유교사상과 한자문화의 영향을 받은 한국,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등(특별한 예로 헝가리)에서는 성, 이름 순으로 표기한다.

 옛날부터 유교정신을 중요시하여 선조의 가명과 가계를 대대로 이어 내려왔기 때문에 부부별성문화가 중국에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혼인으로 아내의 성이 사라진다면 언젠가는 동성불혼에 저촉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인구가 급증했던 기원전 3세기의 전국시대말경부터 성과 씨의 구별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秦조 이후는 가명과 성이 단일화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족단위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전한시대 초기부터 차츰 평민도 성을 가지는 관습이 생겨났고 기원전 1세기에는 모든 한인이 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민에게 주어진 성은 장, 왕, 이, 조, 유의 대성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 이후에 만들어지는 성은 거의 없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성이 이 시대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다.

149p

한족의 중국과 만주지방의 수렵민 등은 선사시대부터 한반도를 왕래하면서 다양한 문물을 교류했다. 중국은 기원전 108년, 위만왕조(고조선)를 멸망시킨 전한의 무제가 낙랑군 등 4군을 설치하면서 한반도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후 한자문화와 유교사상을 기초로 하는 관습을 통해 중국의 성명문화가 한국에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 세 개의 한자로 된 중국식 성명표기는 4~7세기의 삼국시대에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적어도 지배층 이외의 백성들은 7세기 후반 통일신라가 생기기까지 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는 계백, 소회, 영랑과 같이 개인명을 한자로 음역하는 방법을 따랐다.

 936년, 통일국가가 된 고려는 국가 조직을 빠르게 정비하기 위해 유교를 기초로 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평민의 이름에도 한 글자로 된 한자 성과 두 글자의 이름으로 된 중국식 성명양식을 따르도록 했다.

 유교를 국교로 정한 조선시대에는 1485년 호적대장에 해당하는 <경국대전>을 실시하면서 성명을 의무적으로 기장하도록 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성명제도를 확립했다.

151p

한국은 대부분 중국인의 성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만으로 중국계와 한국계를 구별하기 힘들다. 성명구성은 중국형식을 받아들였지만 인명은 민족고유의 방식을 고집했던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박씨 성은 한족에 드물기 때문에 민족색깔이 묻어난 한국 고유의 성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건국신화에서 시작된다.

 박씨 성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에서 유래된다.

174p

건조지대인 중동지역 주민 대부분은 예로부터 유목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들은 공동체사회에서 정착을 전제로 한 농경민과 달리 특정지역에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에 독창성의 기준을 '혈족'에 두었다. 아울러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지혜와 강한 지도성을 발휘하는 가부장을 선출하고 부계혈족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씨족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러므로 이 지역의 인명표기는 일족과 씨족의 혈통서라고 할 수 있는 계보적인 구성을 띠고 있다.

192p

원칙적으로 이 지역은 성이 없다. 따라서 가계를 명백히 밝히려면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부칭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데 부칭은 차츰 고정화되어 최근에는 세습제 가명으로 그 형태가 바뀌는 추세다.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일부에서는 실명을 밝히기를 꺼려하며 '아무개의 아버지'로 부르는 테크노니미 관습이 아직도 뿌리깊이 박혀 있다. 테크노니미(친족용어)를 사용할 수 없는 어린이나 미혼자는 보통 별명을 부르는데 대부분 태어날 때의 사건이나 외견, 용모, 버릇, 직업 등에서 유래한다. 단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과 동시에 별명을 부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며 테크노니미로 불리면서 처음으로 성인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개인명은 전도사의 선교활동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성인명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명에서 따오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유럽언어의 발음과 거리가 멀고 원어민의 발음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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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러시아 다가온 유라시아 - 개정판
정성희 지음 / 생각의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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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판으로 읽었던 책 같은데, 관련 주제의 다른 책을 읽다가 재독하게 됐다.

아직은 중앙아시아나 러시아에 대한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아 여러 나라들의 정보가 한꺼번에 나오는 바람에 다소 어렵게 읽었다.

구 소련 해체 후 독립한 15개의 나라들을 소개하는데도 비교적 짜임새 있게 설명한다.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처럼 중앙아시아의 많은 독립국들도 여전히 1인 독재가 수십 년간 행해지고 있다.

정당한 선거를 치렀다고 해도 여전히 러시아도 푸틴의 장기 집권이 계속 되고 있다.

모호하기만 했던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의 윤곽이 대략 잡히고 현재 정치 상황도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247p

차르 시절에, 정부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에게 급여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의 보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러한 관습이 소비에트 유라시아에도 남은 전통인지는 모르겠다. 중앙 유라시아인들은 내가 도와준 만큼 그 사람이 선물이나 돈을 되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식사, 술, 골프 등에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도 되는지 안 되는지 전전긍긍하곤 하지만 중앙 유라시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부탁받는 사람이 돈을 받거나 관계가 좋은 사람들을 통하면 대부분 일은 순순히 풀린다.


<오류>

87p

성 바실리 성당은 모스크바의 차르 이반 4세가 건축가인 야코블레프에게 명하여 1555년부터 1961년까지 건설한 성당이다.

-> 1555년부터 1561년까지 건립된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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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미술의 거장들
스테파노 G. 카수 외 지음, 안혜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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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이 정말 훌륭하고 좋은데 내용이 읽기가 어렵다.

편집도 약간 이상하게 되어 있어 그림과 설명하는 캡션의 위치가 잘 안 맞는다.

이탈리아 번역서인지 주로 이탈리아 소재 회화들이 많이 소개됐다.

자주 접하지 않았던 그림들이 많아 신선한 점은 좋은데, 대신 생소한 용어나 장소들이 자주 나와 검색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종종 보인다.

확실히 우리말로 된 책들이 문장 읽기가 편하다.

<성 프란체스코의 환시>를 <성 프란키스쿠스의 망아>이런 식으로 번역해서 직관적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시대별로 나눠서 화가와 대표작을 소개하는 방식은 좋았다.

서양화의 매력은 역시 화려한 색감과 정교한 묘사 같다.

확대된 상태로 자세히 그림을 본 일이 없고, 외국 미술관에 가서 진품을 봐도 슬쩍 보고 지나쳤던지라 선명한 세부 장면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17세기까지는 좀 지루했는데 18세기 특히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부터는 너무나 감동적인 내용들이 많았다.

그 자신들이 세상의 미학을 바꾼 위대한 창조자들이면서도 진정한 예술을 위해 끝없이 경주하고 혹시라도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전달이 됐다.

확실히 현대 화가들은 중세의 장인들과는 다른 자의식과 사명감을 가진 예술가들인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21p

북유럽 출신의 화가들은 길드에 소속되어 작품에 대한 보수도 높고 사회적 지위 또한 높았다. 그런 한편 이탈리아 화가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작품 활동에 대한 규제 또한 엄격했다. 뒤러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문화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이자 구도의 광학법, 그리고 기하학과 원근법의 거장으로 알려지길 원했다. 그는 작품에 그려진 인물의 수나 재직기간, 혹은 값비싼 금박이나 푸른 안료의 사용과 같은 작품 외적인 요소로 자신의 수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만으로 작품의 값을 매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173p

당시 도시인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농민에 대한 묘사는 희화화되거나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브뢰헬 같은 화가들은 그들을 호의적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표현했다. 에라스무스 역시 농민들은 없어서는 안 되며, 종교 개혁자들 역시 농사는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며, 도시의 타락과 대조적으로 농민들의 단순한 생활방식이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198p

"이 예의 바르지만 완고한 화가는 사전에 정한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작품을 파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집가들은 그의 대리인이 루벤스가 결정한 가격을 통보받게 되면 그에 따라 그림을 구매하곤 했다. 루벤스는 유창한 화술과 방대한 식견, 예의 바른 태도, 그리고 '광란의 붓놀림'이라고도 불릴 정도의 빠른 솜씨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과 부를 축적했다.

236p

17세기 스페인에서는 부자와 빈자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부자는 그들을 도움으로써 죄를 구원받는다고 여겼다. 무리요의 그림에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픔이나 슬픔올 고통받는 모습이 아니라, 남루하지만 잘 먹고 즐기는 모습이다.

 그가 풍속화풍으로 그린 성모와 아기 예수는 섬세한 묘사로 그가 남긴 종교화의 백미로 평가받으며 18~19세기에 수많은 수집가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정작 무리요가 당대에 명성을 쌓게 된 것은 성모의 무염시태 주제의 작품들 덕분이다. 그는 극적인 구도로 당대의 스페인 교리와 신앙을 담았다.

272p

그를 숭배하던 드니 디드로는 1765년 살롱전에서 샤르댕의 작품들을 보고, 그의 작품들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모든 것이 뒤범벅되어 혼란스러운가 하면 단조롭고, 사라져서 없어지는가 하면 그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고 칭송했다. 샤르댕의 정물화가 지닌 사실성은 대상을 세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묘사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단순화하고 빛과 색채의 관계를 포착하는 그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다. 그의 작품을 세잔이나 반 고흐가 높이 평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는 작품을 '완성'되었다고 생각되지만,'마무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든다. 너무나 정확한 기법으로 그려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빼어난 명작들은 색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채색되어 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 최고의 효과를 낸다. 렘브란트는 그 결과에 고민하면서도 이런 방법을 고수했다(중산층은 샤르댕보다 반 데르 헬스트를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샤르댕은 렘브란트 못지않게 훌륭한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반 고흐는 샤르댕을 칭송했다.

(역시 같은 화가라 대중들과는 보는 수준이 다른 것 같다. '완성' 과 깔끔한 '마무리' 가 어떻게 다른지, 위대한 예술가와 평범한 화가는 어떻게 다른지 고흐가 명확히 설명해 준다)

 당시의 대중들은 물론 화가들까지도 정물화는 역사화에 비해 열등한 장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샤르댕을 존경했던 디드로조차 "나는 샤르댕이 즐겨 그리는 무생물은 형태도 색채도 위치도 변하지 않아서 그리기 가장 쉽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도덕적, 철학적, 종교적인 중요성이 결여되어서 작품의 주제로 택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졌던 무생물을 주제로 택한 것이, 샤르댕이 오늘날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 셈이다. 지드는 샤르댕을 사랑하는 이유는 작품 외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그의 작품만을 보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으며, 그것은 샤르댕이 그리기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려놓아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 것이다"라고 했다.

 이 작품에 대해 앙드로 말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플랑드르의 정물화에 의존해 그들의 장식적인 취향의 영향을 받은 이류들과는 거리가 먼 샤르댕의 작품은 코로와 같이 형태를 단순화한 우아한 작품을 선사하고 있다." 

 사실 샤르댕은 사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색채와 형태를 표현해 대상을 돋보이게 했다. 이런 현대적인 작품성은 세잔과 입체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278p

호가스는 다른 판화 연작들도 직접 인쇄하고 신문에 광고를 실어 예약을 받고 팔았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의 여타지역에 비해 일찍 형성된 영국 부르주아 사회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영국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많은 중산층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이미 풍자만화와 시사만화 등 풍자적인 장면들이 매체에 실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298p

다비드는 신고전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특히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 같은 작품은 당대의 예술적 취향을 바꿔놓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푸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의 전통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 다비드는 장식성을 강조하는 로코코 양식과 달리, 명확한 동작과 간결하고 뚜렷한 형태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조했다. 또한 그로, 제라르, 앵그르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다비드가 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은 단지 성공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현대적 시각에서 볼 때 최초의 지적인 예술가 중 한 명으로, 당대의 민감한 정치적 이슈에 적극 참여해 예술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예술가다.

329p

쿠르베는 단독으로 전시회를 마련해 40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응은 살롱의 심사위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비범한 걸작이지만 교양적이지 않다고 평했던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둘러보는 한 시간 동안 전시장에는 자기 혼자뿐이었다고 말했다.

330p

고대의 누드는 아카데믹한 주제로 비물질적, 신적인데 반해 쿠르베의 이 작품에서 여성의 누드는 너무나 인간적으로 묘사되어 관능적이다. 사실 누드는 주로 신화 주제의 그림에 등장해왔으며 비평가들과 대중이 선호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334p

마네 자신도 친구에게 "사람들은 내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작품이 당대의 반감을 사고 대중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동시에 이 작품으로 인해 이름을 알리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했던 듯하다. 사실 자연을 배경으로 있는 세 사람과 여성의 누드가 큰 물의를 일으킬 만한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당시에 유행하던 구도를 따르지 않은 현대적인 배치와 남자들은 상류층의 정장을 입고 있는 반면, 옆에 앉은 여성은 누드라는 점이 당시로서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비난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표현 기법이었다. 들라크루아는 "불편해 보일 수도 있는 색조다. 게다가 인물들이 지나치게 두드러져 보이는 미숙한 구성이어서, 마치 익지 않은 떫은맛의 과일을 대하는 느낌이다"라고 평했다. 마네는 자신이 공부했던 고야나 벨라스케스, 그리고 일본 판화, 특히 우타마로의 판화에 영향을 받아 매우 평면적이고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색채들을 사용했다. 동시에 구도의 균형과 부드럽고 조화로운 색채, 자연스러운 명암법에 대한 연구도 멈추지 않았다. 에밀 졸라는 "분명하고 분별력 있는 시각을 가진 이 화가의 그림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우아함과 거친 현실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풀밭 위의 식사>를 계기로 마네는 젊고 진보적인 화가들의 대부가 되었으나 보수적인 아카데미로부터는 거부당했다. 그 자신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이끄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작품이 인상주의가 꽃피는 하나의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340p

양식적인 면에서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은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작품들과 가장 가까운 작품 중 하나다. 특히 거울 속에 반사되는 세상에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모네를 연상시키는 붓터치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마네는 검은색을 즐겨 사용했으며, 야외에서 실경을 그리던 그들과는 달리 빛의 효과와 반사를 자신의 화실에서 연구하고 작업했다.

345p

모네는 이 작품에서도 빛과 나무 그림자, 그리고 여인들의 자연스러운 포즈를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전형적인 풍경 속 초상화나 여인들의 만남의 이유 혹은 그들의 심리 상태나 계층을 드러내는 데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자세나 표정에서는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다. 그의 이런 선택은 전통적인 회화에서 중요시하는 가치와는 매우 다른 것이어서, 이 작품은 1867년 살롱전의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림은 문학이라는 그림 외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색과 형태, 구도 등 그림 자체의 내적인 것에 집중하게 됐다. 인상주의가 왜 현대회화의 시작인지 알 것 같다)

304p

"터너 이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라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사실 터너가 그린 풍경화에선 대기 자체보다 눈에 띄는 요소가 거의 없다. 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존 러스킨은 이렇게 언급했다. "그는 자연에서 섬세함과 장엄함, 충만함과 공간감, 그리고 신비함을 보았다.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색 대신, 그는 자신이 실제 같다고 느끼는 색을 사용했다. 그가 만들어낸 색채는 가장 빛나고 아름다우며 독특한 것이었다. 그는 무지개를 묘사하기 위해 계곡으로 갔고, 불꽃을 그리기 위해 화재현장으로 갔으며, 하늘의 푸른색과 청명한 금빛을 표현하기 위해 바다를 찾았다." 

348p

증기가 만들어내는 형태와 빛의 효과에 매료되었던 모네는 이 같은 대기의 변화를 묘사하기 위해 넓고 거친 붓터치를 사용해, 생 라자르 역사와 배경에 있는 건물들이 증기에 녹아드는 듯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 대한 모네의 열정은 그가 르누아르에게 쓴 편지에서 잘 나타난다. 훗날, 아들 장은 "기관차가 떠나는 순간, 증기로 앞이 흐려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은 경이로운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었다"라고 쓴 모네의 편지를 회상했다. 모네는 안개 속에 서 있는 도시 사람들의 삶을 담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증기와 빛의 효과를 담는 데 충실했다.

(모네가 느꼈던 경이로움과 뿌연 증기로 주변이 아득해지는 그 효과가 너무나 잘 느껴지는 그림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화폭에 재현하고자 했던 모네의 열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이 곳에서의 시간이 자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대성당 연작을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보면 볼수록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이 연작을 완성하겠다는 것은 거만한 생각에 불과할 뿐이야라고 되뇌곤 합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진정 완벽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만약 진정으로 완벽하길 원하며 끊임없이 파고든다면 지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당시 이 작품들은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카미유 피사로는 그의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 작품은 강한 의지로 완성해낸 신중한 작품으로 나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그림을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했다"라고 적었다.

355p

이처럼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리고자 한 그의 노력으로, 이 작품은 그림이라기보다 스냅사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드가가 수없이 드로잉을 반복하며 구도를 바꾸고, 대상을 묘사하는 방법 또한 개인의 심리적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연구한 결과다. 그러나 앵그르와는 달리 인물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동작을 통해 심리를 나타내고자 한 점에서 사실주의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362p

"나(르누아르)는 주제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배치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그 위에 붉은색이 낭랑한 종소리와 같이 깊고 풍부한 색채이길 바란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까지 더 많은 붉은색이나 다른 색들을 사용한다. 단지 그것 뿐이다. 나는 어떠한 특별한 법칙이나 나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떤 작품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예술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형용할 수 없으며, 모방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관람자를 사로잡아 현실로부터 다른 세계로 이끈다. 이 말은 예술가가 자신의 열정을 작품에 담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술가는 관람자를 자신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위대한 화가들의 작품론을 듣고 있노라면 비평가들의 현학적인 말과는 다르게, 예술의 핵심을 찌르는 감동이 느껴진다. 직접 그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진리 같은 것 말이다)

368p

이 시기 세잔의 작품들은 모든 형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벤투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단순화되어 있고 사물의 본질에 다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세잔 자신도 1904년에 "구와 원통, 그리고 원추로 자연의 모든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듯이, 그는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시간의 변화에 관계없는 자연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면을 찾고자 했다. 다리와 물, 나무와 대기의 모습과 같은 작품 속의 사물들은 빛과 색채를 섬세하게 분석해 수많은 붓질로 묘사되었고, 그 붓질 하나하나는 모자이크 조작과 같이 독립된 각각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03년 그는 파리에 있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쓴 편지에서 

 "내 앞에 펼쳐진 천국을 바라보며 매우 끈기 있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나의 운명이 천국으로 향하는 유대인의 지도자와 같을까요? 내가 과연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약간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왜 이렇게 더디고, 또 어려운 것입니까? 예술은 영원히 머무르고 싶을 정도로 순수한 곳이 될 수 있을까요?" 

(완벽하고 순수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화가의 간절한 마음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위대한 화가들도 끈질기게 보다 완벽한 예술의 세계로 가기 위해 끝없는 노력을 했던 모양이다) 

라고 썼다. 2년 후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는 

 "나는 이제 늙었습니다. 거의 칠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빛을 통해 보이는 색채로부터 받는 인상은 추상적이어서, 그 모든 것을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결과 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나 작품은 미완성입니다. 한편, 나의 계획은 이와는 정반대에 가 있기도 합니다."

 라고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은 원근법을 무시해 거리감이 생략되어 들판의 초록색과 구름을 표현한 푸른색이 같은 명암으로 처리되어 있다. 세잔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하던 대기의 표현은 산을 채색한 것과 같이 풍부한 색채와 중량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렇게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태로 집약하여 구도를 새로 구축한 것이 세잔의 후기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입체주의와 야수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74p

"나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나 자신이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따르느라 수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고갱은 1892년 이렇게 썼다. 사실 이 무렵은 자신의 작품이 생소할 만큼 창의적임을 자각하고, 그로 인한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며, 가족, 일, 친구,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 그리고 파리에서의 생활을 등진 채 코펜하겐의 상선을 타고 있을 당시, 혹은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며 쓴 것이다.

 1886년 7월, 지속적인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퐁타방에 있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이만 헤어져 각자 살아가는 게 어떻겠소. 훗날 사람들이 나의 예술을 열린 눈으로 바라봐주는 날, 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이 나를 이 진흙탕 속에서 일으켜줄 거요."

(사람들의 몰이해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천재성과 자기 예술의 혁신성을 인지하고 있던 불운한 천재의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문구다)

380p

"사람들은 내가 너무 그림을 빨리 그린다고 한다. 이것은 감정이나 자연에 대한 진실된 느낌에 관한 것이 아니지. 이 느낌은 때로는 너무 강해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계속되는 붓질이 마치 말이나 글과 같이 계속 쏟아지지. 그리고 이내 이것이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단다. 그러고는 다시 힘든 나날을 보내곤 한단다. 영감조차 텅 비어버린..." 반 고흐의 삶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정신적 불안, 빚, 파산, 정신병원에서의 생활, 회복, 그리고 또 다른 좌절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예술에 대해 지치지 않은 열정과 사명감을 지녔던 화가.

 반 고흐는 이 작품에서 신체적인 특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보다 색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는 신체적인 특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당시 개발되어 실용화되고 있던 사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던 반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도 자신 이외의 다른 많은 예술가들도 정신질환에 시달렸음을 언급하며 이것이 그의 창작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도 "저는 제가 여전히 쥔데르트의 농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밭을 경작하듯 저는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것이지요"라고 전하기도 했다.


 

<오류>

24p

시찰리아의 왕이던 샤를 2세가 1296년 숨을 거두고, 그의 아들인 나폴리의 왕, 루이는 그의 형제인 로베르에게 왕위를 수여한다.

->시칠리아의 왕은 아버지인 카를로 1세이고 카를로 2세는 나폴리만 지배했다. 카를로 2세는 1296년이 아니라 1309년에 사망했다. 뒤를 이은 사람은 3남인 로베르이고, 둘째인 툴루즈의 성 루이는 나폴리의 왕이 아니라 주교이다.

166p

헨리 8세는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공표했다. 영국 국교회와 가톨릭 사이에 긴장감이 돌고 있었고, 같은 시기 프랑스의 가톨릭은 카를 10세와 대립하고 있었다.

-> 헨리 8세 당시 국왕은 프랑수아 1세이고, 교황은 레오 10세였다. 그 앞의 프랑스 왕은 샤를 8세였다. 카를 10세가 누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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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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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뻔해 보이는 진부한 제목과는 달리, 생각보다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어 정보를 꽤 얻을 수 있었고 문장력도 고른 편이라 가독성도 좋았다.

외교관이라면 전업 작가나 학자가 아닌데도 가벼운 감상문에 머물지 않고 아프리카 대륙 전반에 걸친 정치 사회 문화를 깊이있게 분석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참고 문헌을 봐도 뻔한 교양서들이 아니라 많은 자료들을 참조한 듯하다.

제목과 표지만 좀더 매력적으로 바꾸면 훨씬 많이 읽힐 것 같다.

류광철씨의 <살아있는 공포 아프리카의 폭군들>을 먼저 읽은 터라 더 쉽게 이해가 갔다.

주제가 너무 넓으면 통일성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독자에게 아프리카 전반의 문제와 현실에 대해 잘 전달해 준다.

위의 두 책을 읽고 느낀 바는, 아프리카는 세계화 시대에 발맞춰 강제로 개방이 되긴 했으나 여전히 부족사회의 모습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서구에서 발전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아시아에 이식되어 20세기에야 겨우 정착을 했던 것처럼, 아프리카에도 식민지 등을 통해 전파됐으나 아직 자리를 못 잡은 것 같다.

나라 간의 전쟁보다 국가 내에서 부족간의 내전이 훨씬 많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보다는 부족민의 정체성이 강한 것이다.

문맹률이 높기 때문에 여전히 종교와 부족의 관습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어 현대적인 자유나 인권 개념이 미약하다.

광물이나 삼림 등 풍부한 자원은 독재자의 권력 유지에 들어가 이들은 국민을 통합하는 대통령이 아닌, 일종의 파라오처럼 행동한다.

재스민혁명으로 대표되는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또다른 사회다.

중산층이 성장하고 민주주의 의식이 성숙해야 독재자가 사라질텐데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화 시대인데도 아프리카 대륙은 매우 다른 특수한 사회라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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