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선택한 미술
이언 칠버스 외 엮음, 박유진 외 옮김 / 지식갤러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판형이 크고 두꺼운 책이라 어떻게 읽나 약간 긴장했는데, 도판이 대부분이고 설명도 지루하지 않아 편안하게 읽었다.

무려 구석기 시대 벽화부터 시작하는 인류의 긴 미술 역사를 다룬 책들은 연대 나열인 경우가 많아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비교적 짜임새가 있고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68000원이라는 책값이 이해되는 수준의 도판이라 감상하기 좋았고, 도서관에 비치가 되어 있어 감사하다.

영국에서 간행된 책이라 그런지 책에 실린 명화들이, 영국 미술관 소장품들이 많았다.

확실히 자국에 명화들이 많아야 직접 원작을 보고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현대 미술 쪽은 소략되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22p

이집트 회화는 당대의 세계관 내에서 전적으로 기능적이었다. 미술가들은 엄격히 정해진 일련의 기준에 따라 주어진 대상을 능숙하게 묘사하면 그만일 뿐, 독창성이나 미학적 고려, 자기표현 등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화가들은 다른 기술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위가 썩 높지 않았고, 아마도 팀을 이루어 작업했을 것이다. 이집트인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철썩같이 믿고, 대부분의 예술적 열정을 사후세계 준비에 바쳤다. 이런 작업에 투입된 어마어마한 노력과 비용은 예술의 황금기였던 제 18왕조의 왕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웅장하고 화려한 벽 장식과 보물로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24p

현대인의 눈에는 이집트 무덤의 부장품이 호화롭고 예술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집트인은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장례 의식에 포함된 모든 요소는 하나의 공통된 목적, 즉 사후세계에서 사자를 보호하고 거행한다는 목표에 따랐다. 그림도 사실적으로 보이거나 미적인 즐거움을 주려는 목적이 아니라 사자를 위해 마련된 의식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이런 관습은 거의 고대 이집트의 역사 전반에 걸쳐 유지되었다.

32p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성기에 제작된 회화와 조각은 서양 문명의 기본 토대를 이루었다. 후세에 와서는 이 시기를 모방하기도 힘들 만큼 탁월한 업적을 남긴 시대로 회상했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미술품은 고상하고 당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보여, 그 뒤를 이은 조악한 양식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와 로마인은 놀랄 만큼 자연주의적인 정원 풍경화나 정물화에서든 사실성을 포착하려는 열정을 공유했다.

42p

서로마에서는 기독교 화가들이 성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미술작품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찬양하며 자연주의, 감정, 상상력을 드러냈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이런 접근방식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기독교 미술은 신과 직접 소통하는 수단으로 양식화되고 엄숙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되었다. 자연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미술가에게 일말의 독창성이나 자기표현을 기대하는 일도 없었다. 대신 미술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가장 훌륭한 성상(icon)을 최대한 정확하게 모사하여, 그 성상의 영향력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었었다. 러시아의 가장 신성한 성상인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수세기에 걸쳐 수없이 반복적으로 모사되었다.

 동로마에서는 교회가 일체감을 유지하고 이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장 심각한 쟁점 중 하나는 성상의 사용 문제로, 일각에서는 성상을 우상 숭배라고 비난했다. 성상 금지령이 철회된 후에도 성상의 내용과 양식이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어떤 미학적 관심사보다도 신학적 정확성이 중요시되었다. 

 이 그림은 비잔틴 미술의 특징적인 양식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다. 납화법을 이용해 인물에 풍부한 광채를 더했지만, 화가의 관심사는 심미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이다. 그의 주된 목표는 '신의 어머니'로서 성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성서에서 말로 전하는 바를 성상에서는 색으로 전달한다. 그것은 신의 현현, 즉 신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 787년, 제7차 공의회, 기독교예배에서 성상 숭배를 복원하는 결정에 관하여-

79p

인문주의는 내세가 아닌 현세에세 인간 개개인이 성취한 바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중세 기독교 정신으로부터의 의미심장한 일탈을 나타냈다. 

 종교적 감수성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13세기의 수사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신봉자들이 촉발했는데, 그들의 설교에서는 예수의 고통과 인간성을 강조했다. 고전의 부흥과 아울러 그런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그런 미술은 더 사실적으로 보였을 뿐 아니라, 경외감과 신비감을 조성한 비잔틴 미술의 양식화된 신 이미지와 달리 예수의 진짜 인간성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잔틴 미술에서는 기독교적 이미지를 일부러 인간의 실세계와 동떨어져 보이도록 신비롭게 묘사했지만, 지오토와 두초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기독교 이야기를 사실적이며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술적 장면에서는 물질계가 갈수록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감정적이며 극적인 새로운 현장감이 더불어 나타났다.

 시에나와 피렌체 두 화파 모두 계속 비잔틴 미술의 초탈성과 경직성에서 멀어지며 더 훌륭한 자연주의, 표현력, 인간성을 추구했다. 14세기 말에는 유럽 궁정들 간의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국제고딕이라는 새로운 궁정풍 양식이 출현했다.

55p

많은 이교도 부족들이 주류의 고전기 미술과는 전혀 다른 생동감 넘치는 문화를 자랑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도기 및 프레스코화를 지배하던 자연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교도 부족의 장인들은 무기와 장신구처럼 작고 휴대가 간편한 물건에 관심을 기울렸다. 회화가 전면에 나선 것은 오로지 기독교로 개종하여 종교적 텍스트가 필요했을 때뿐이었다.

65p

스테인드글라스가 중시되면서 벽화를 그릴 장소는 줄어들었지만, 필사본의 수요는 여전히 높았다. 새로운 후원자들이 등장했고, 특히 부유한 귀족의 궁전에서 주문이 많았다. 이들은 역사와 로맨스 등 보다 다양한 범위의 세속적인 주제들의 작품을 원했고, 종교 문헌도 초심자용의 <성무일도서> 처럼 기존과는 다른 종류를 요구했다.

101p

피렌체나 베네치아와 달리 로마는 은행업, 제조업, 상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순례자들을 그 도시로 끌어 모아 부를 창출하려면 교황의 권위가 필요했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말에 따르면, 로마는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이전된 후 '허물어지고 황폐'해졌다. 하지만 또다시 교황의 영구적 근거지가 된 로마는 15세기부터 번영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교황들은 로마가 옛 영광을 되찾도록 그 도시를 회복시키는 일에 힘썼다.

 바티간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변 지역이 재건의 초점이었다. 재산세 감면이 건축 붐으로 이어지면서 빌라 파르네시나 같은 화려한 별장과 대저택들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무수한 의뢰를 받은 미술가들은 그 새로운 장소들을 장식했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자연의 명료하고 정연하 묘사를 목표로 삼은 데 반해,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들은 자연을 관찰하되 우아하게 다듬고 이상화한 이미지 보여준다. 철저히 현실에 입각한 자연주의는 완화되고, 우아함을 중요시하는 태도로 대체되고, 형태와 색의 온건한 변환을 통해 미묘하게 표현되었다. 그런 변화를 개시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장자리와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스푸마토'라는 유화 기법을 개발했다. 초기 르네상스에서는 수학적으로 계획한 선 원근법이 가장 중요했지만, 전성기 르네상스에서는 '공기' 원근법이 특징이 되었다. 미술가들은 멀리 있는 물체가 지평선 쪽으로 갈수록 더 흐릿하고 파랗게 보이게 하는 대기의 작용을 오랫동안 모방해왔지만, 레오나르도는 '공기 원근법'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그것의 회화적 용법을 충분히 발전시켰다.

158p

많은 화가들이 이런 파격적인 기법을 모방했으나 카라바조가 보인, 안정적으로 구도를 잡는 동시에 웅장하면서도 대담하고 강렬하면서 엄숙하게 묘사하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었다

227p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날마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를 읽고, 훌륭한 그림을 보아야 한다."

(괴테의 이 말은 문화적 인간의 정의이고,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토다)

234p

모리스 드니는 있는 그대로의 재현보다 암시를 중시했다. 드니의 작품은 추상 미술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그는 작품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는 색들로 뒤덮인 평면이다."

248p

"기쁨은 실제로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못하지만 자연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에서 생기는 듯 보인다." - 에드먼드 버크

(예술의 숭고미, 장엄미 같은 의미일까?)

 난파선에 대한 두려움은 에드먼드 버크가 서술한 숭고함에 관한 이론과 완벽하게 부합한다. 즉 보는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에서 재해나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을 감상하는 미학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재난 현장을 그림으로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우리가 가학적 욕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자연에 대한 두려움, 장엄함, 고양된 감정 등을 느끼기 때문인 것이다)

323p

당대에는 입체주의를 과학과 철학의 진보적 이론을 해석하거나 논평하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이 유행했으나, 피카소와 브라크는 결코 그럴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그러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입체주의가 당시 변화하는 풍토에서 자양분을 얻은 것은 분명했지만, 피카소가 단언했듯이 "입체주의는 회화의 한계와 제약 속에서 머무를 뿐,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단 한 번도 혁명적인 사상이나 기술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고안해낸 기법은 대단히 급진적이었지만, 그들이 그린 대상은 화가들이 늘 그래왔듯이 풍경, 사람, 악기, 과일 바구니가 있는 정물이었다. 두 화가 모두 미술상으로부터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동일한 주제를 반복해서 그릴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입체주의 화가들은 생계를 위해 공개시장에서 작품을 팔아야 했으므로 좀더 눈길을 끄는 주제를 택할 때가 많았고, 입체주의에서 파생한 미래주의나 보티시즘 화가들은 항공 같은 소재에서 영감을 얻었다.

341p

프로이트 자신은 초현실주의와 아무런 공감대가 없었고 이 운동과 결부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프로이트는 한 가지 측면에서 초현실주의 미술가들과 결정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프로이트가 꿈에 집착했던 주된 이유는 정신분석가들이 충분한 기술과 경험한 갖추면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여 깊은 통찰과 치유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꿈이란 그 자체로 풍요롭고 복잡한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359p

다양한 잡지들이 넘쳐나는 거리 가판대, 현혹적인 포장과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슈퍼마켓,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타들을 내세운 화려한 영화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영화관 등을 통해 일반인들이 대중문화에 접근하기가 한층 용이해졌다. 이 새로운 경제적, 문화적 민주주의 속에서 일상생활이 대중적인 이미지들로 포화 상태에 이르다보니, 이제 이런 이미지들 자체가 화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놓고 경쟁할 하나의 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375p

지난 200년간 미술가들은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변세계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기본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무수한 방식을 개발해왔다. 그 결과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미술, 다다, 초현실주의, 팝아트, 그리고 1960년대 이래의 설치, 비디오, 행위 미술 같은 한층 새로운 예술 형태들이 탄생했다. 이런 새로운 미술적 표현방식은 현대 미술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쳐 일부 비평가들은 더 이상 회화를 별도로 구분되는 범주로 보지 않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회화를 그저 미술가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 스펙트럼 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회화를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 회화는 여전히 수많은 열혈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표현주의와 다다 이후 '사실적 차원'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사실주의 회화를 지칭하기 위해 '신즉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구상 회화는 무척이나 다양한 범위의 양식과 주제를 망라하여, 1천 년 넘게 지배적인 미술 양식으로 군림해왔다. 현대에 들어 구상 회화의 가장 뛰어난 해석자 중 하나는 존 싱어 사전트다. 그가 초상화가로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추상 미술이 대두하고 있었으나, 그의 양식은 렘브란트나 벨라스케스 같은 초창기 대가들의 작품을 반영했다.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은 사전트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반 다이크"라고 표현했다

 1천 년 넘게 인간은 스스로 보거나 상상하는 바를 그리고 표현해왔다. 심지어 약 1만 5천 년 전의 수렵, 채집인들조차 프랑스의 라스코 벽화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놀라운 동물 그림들을 남겼다. 재현적인 그림들은 애초에 숭배, 오락, 장식, 지위 표시, 자료 기록 등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든 간에, 지금껏 알려진 거의 모든 문명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21세기 들어 무수히 많은 새로운 예술 형태와 양식, 매체가 등장하는 와중에도, 주변세계의 일부를 그림의 형태로 보존하고 변형하며 창조해내려는 인간의 욕구는 여전히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오류>

201p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5살 된 손자 루이 15세가 잇다.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가 아니라 증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신과 문신 - 한국 중세의 무신 정권
에드워드 슐츠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치 위주의 한국사에서 독특했던 시대가 바로 고려 무인 시대가 아닌가 싶다.

일본과는 다르게 한 번도 무인이 정권을 잡은 적이 없었는데 유독 고려 후반에 무인 정권이 탄생했고 몽골의 침략과 함께 사라졌다.

무인 정권을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한 외국인 학자의 저술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어떤 책에서는 무인 정권이야 말로 천민이 사회 진출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했던 역동적인 발전의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었고 고 반대로 무질서하고 백성들이 착취당한 혼란의 시대였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하게 선악의 문제로 당시 시대를 보지 않고 무인 정권 중에서도 특히 최씨 정권이 어떻게 60년 동안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간단히 말해 최충헌은 기존의 문신 기구를 잘 통제하여 자신의 권력 기구에 포섭했기 때문에 나름 고려 사회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그 전의 권력자들처럼 무력만 휘둘렀다면 또다른 야심가에게 곧바로 무너졌을 것이고 사회는 더욱 혼란에 처했을 것이다.

최충헌은 자신이 직접 문신의 고위직을 겸임했고 과거를 통해 유능한 문신들을 등용해 행정을 맡겼으며 본인은 많은 사전과 식읍을 얻었으면서도 그 외 지방 세입은 국고로 귀속시켜 나라의 재원으로 사용해 재정을 안정시켰다.

정권 초기에는 농민 반란이 잦았으나 조세 경감 등을 통해 지방을 안정시켰고 이런 바탕 위에서 몽골 항쟁 40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천민들의 사회 진출은 엄금하여 신분제도가 흔들리는 것을 막았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극소수의 천민에게는 관직을 허용했으나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간단히 말해 최충헌은 기존 고려 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사수하고 그 안정적인 토대 위해서 본인이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60년 정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최충헌은 이성계처럼 새 나라를 열 시대정신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몽골이라는 거대한 외세의 침략이 없었다면 최씨 정권은 일본의 막부처럼 계속 권세를 이어갔을까?

최충헌과 그 아들 최우의 놀라운 장악 능력과는 달리 뒤를 이은 후계자들 최항과 최이의 부족한 자질 때문에 결국은 무너지고 기존의 왕정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본다.

최충헌이 자신의 왕조를 세우기에는 고려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배후에 사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한반도에 새 왕조가 생기는 시기는 모두 중국의 혼란기였다.

역시 외국 학자라 민족을 떠나 객관적인 눈으로 판세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고 무신 정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알게 돼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다만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게 아쉽다.



<오류>

259p

명종, 신종의 외가인 정안 임씨와 희종, 강종의 외가인 강릉 김씨는 무신 집권기 동안 잠재력을 지녔다.

-> 명종, 신종의 외가 즉 어머니 공예왕후 임씨는 정안(장흥) 임씨가 맞지만, 그 아들들인 명종과 신종의 처가는 강릉 김씨가 아니라 왕족인 강릉공 왕온의 딸들이다. 김씨라고 칭한 것은 족내혼임을 숨기기 위해 모계의 성을 따랐다고 되어 있다. 강릉 김씨를 정안 임씨와 같은 수준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

314p

이의방은 전주 이씨 출신이며 그의 형제 이준의는 뒤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직계 조상이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준의가 아니라 다른 형제인 이린이 이성계의 6대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그저 너무 재밌다는 말 밖에는...

어쩜 이렇게도 재미난 평전을 쓸 수가 있는지.

보통 평전은 너무 세밀하게 한 인물을 파고 들어 지루하던데, 정말 이 책은 지루할 틈이 없다.

저자가 쓴 <옹정제>도 곧 읽어볼 생각이다.

전작 <중국통사>도 중국 역사 수천 년을 한 권의 책으로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책은 마치 한 권의 소설처럼 흡입력이 뛰어나다.

수양제는 망국의 군주로만 알고 있었는데 통일을 이룬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지 못하고 구체제에 머물러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유약한 인간이었던 듯하다.

저자의 냉정한 비판에 따르면 수문제 역시 당나라처럼 새로운 시대을 열기에는 여전히 구체제적인 인물이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당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이세민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북위부터 시작해 북주, 수당까지 이어져 온 무천진 군벌들에 대해서도 개념을 파악하게 됐다.

남북조 시대는 일종의 계엄령 사회로 오직 천자 한 사람에게 전권이 쥐어졌기 때문에 상상하기 힘든 음행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중세 송나라 때와는 달리 천자의 존엄성이 절대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실력이 있으면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

왕조가 겨우 50여 년 단위로 바뀌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국의 청화자기
마시구이 지음, 김재열 옮김 / 학연문화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에서 인용한 것을 보고 책바다을 통해 빌리게 됐다.

제목만큼이나 어렵고 지루해 보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흥미롭게 읽었다.

중국 번역서인 모양인데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가 많고 무엇보다 도판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책은 도판이 매우 중요한데, 중국 청화자기의 아름다운 색감을 제대로 보여주질 못한다.

전공자들이 보는 수준이라 어려운 부분은 건너 뛰면서 읽었다.

당송 시대부터 시작된 청화자기는 원대에 성숙했고 명청대 만개하여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원대 대표적인 가마인 용천요의 청자들이 신안 해저선에서 발굴된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의 청화자기들을 보자면, 너무나 문양이 화려하고 빡빡하고 장식적이라 고려나 조선의 단아한 미감과 매우 다른 느낌이고 그래서인지 다소 어색하다.

인공미가 강하다고 해야 할까?

유럽의 화려한 도자기와는 또다른 미감으로 단지 청색과 백색만 가지고도 이렇게 장식적인 자기를 만드나 감탄스럽기는 하다.

송나라 때부터 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해 원대에는 시박사 등을 운영하면서 도자기 수출로 많은 돈을 벌었고 명청대에는 아예 맞춤형으로 수출용 자기를 만들었다.

아랍 쪽에서 주문을 많이 해 아랍어가 새겨진 청화자기도 서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된다.

확실히 중국은 쇄국정책을 편 조선과는 다른 세계였던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26p

"당송 청화자기는 민요에서 구운 것이 많으며, 청화자기의 초급 생산단계이다. 아직 성숙되지 않아, 소성온도는 비록 1000도 이상이지만, 태질이 치밀도가 낮아 기공계수와 흡수율이 모두 원명 자기보다 크다. 조형은 정연하지 못하고, 유면은 현저히 거칠며, 투명도가 낮다."

 원명 시대의 성숙한 청화자기의 제작수준에 비해 아직 일정한 거리가 있다. 이 때문에, 청화자기는 당송에서 싹이 터서, 원대에 성숙하고, 명청에 성행하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전해져 쇠퇴하지 않아, 중국에서 가장 민족적인 특색을 가진 자기가 되었으며, 국내외에 그 영예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0p

부량자국은 전문적으로 제왕을 위해, 관부가 자기번조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이의 설립은 경덕진 자업의 향상과 발전을 일으키는데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또한 원대 통치자가 자업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원 조정은 일정한 기능을 갖춘 장인들을 보다 중시하여, 관공장은 기타 일체의 차역에서 면제하고 그 직업을 세습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또한 객관적으로 수공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다.

 셋째, 원 조정은 대외 무역을 중시하고 힘써 제창하여, 각종 수공업의 향상과 발전을 대대적으로 자극하여 추진하였다. 제자업은 일찍이 원조 이전에 이미 서역의 아라비아 국가와 무역 왕래가 있었다. 원이 전국을 통일한 후에, 정부는 대외무역을 강화하는데, 기본적으로 송의 제도를 따랐다.

 지원 14년(1277)에, 또 천주에 시박사를 설치하고 대외 무역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대외무역의 흥성발달은 의심할 바 없이 전국, 특히 이미 광대한 시장 제자업을 가진 경덕진에게는, 매우 커다란 촉진과 추진 작용을 일으켰다. 

53p

이런 대반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의 이슬람문화의 음식습관과 관계가 있는데, 통상 음식물을 대반에 담아 두고 여러 사람이 땅이나 탁자에 둘러앉아 공동으로 음식을 드는데 사용된다. 현존하는 전형적인 원 청화자기 중에 대반의 수량이 가장 많아, 국외 소장이 백점을 넘고, 국내는 단지 수점이 있다. 이는 이런 대반이 주로 이슬람지역에 수출하기 위해 생산된 것임을 말해 준다. 

203p

선덕 청화자기의 문양 중에, 일부 상당히 서아시아적 풍격을 가진 것이 있다. 이런 문양은 명대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으로, 응당 명초에 중동 제국과 왕래가 빈번하고 문화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컨대 어루존의 사격문, 서등의 화훼문 등등이, 모두 이슬람 지역의 금은기나 도기에 상견되는 문양이다.

262p

정덕 청화자기의 문양 방면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으로 만든 도안들이다. 정덕 청화자기상에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을 쓴 것은 당시 이슬람교가 성행한 것, 특히 정덕황제 본인이 이슬람 풍속을 숭상하고 그의 비와 자식들도 이슬람교를 신봉한 것과 밀접한 관계 있다. 이들 아랍문이나 페르시아문의 내용은 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와 알라신을 찬송하고, '코란' 속의 교의나 도자기의 용도를 설명한 것이다.

334p

둘째, 청대의 제왕, 특히 강희,옹정,건륭 3제는 모두 비교적 자기를 애호하였다. 강희 본인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시하여, 저명한 법랑채 품종이 바로 강희시에 국외 채료를 도입하여 창소한 것으로, 분채의 대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옹정은 더욱 자기를 중시하여 제자공장들에게 중상(거액의 보너스나 상품)을 수여하는 방법을 채용하여, 자기질의 향상을 촉진시켰다. 건륭은 각종 공예품을 애호하여, 거의 광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들 모두가 관요자기의 생산을 신속하게 발전시켰다.

 셋째, 청초에 어요창을 회복하고,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조와 관리를 하게 하고, '관탑민소(관부에서 민요에 하청을 주어 제작시킴)' 방법을 추진하여 민요 생산의 발전을 꾀하였다. 신품종과 신기술이 끊임없이 생겨났으며, 고품질의 제품이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넷째, 청대 국외 수출자기의 수량이 거대해졌으며, 당시의 수출자기는 외국에서 지정한 기형, 문양, 유색, 채색에 맞추어 제작되었다. 더불어 국내 자업시장이 날로 확대되어, 민요제작기술의 향상을 크게 촉진시켰으며, 자업생산 요인이 진일보하였다. 

404p

함풍, 동치, 광서, 선통 이 4조는 제국주의의 침입과 내란이 빈번한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경제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경덕진 관요자기의 생산은 쇠락의 경지에 처하였다. 민요 역시 대량 생산하지만, 다수가 조잡한 편이다. 다만 동치, 광서 양조에서 자희태후가 귀족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사치가 극에 다다른 생활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가를 아끼지 않고 자기번조에 힘을 쏟아, 크게 중흥의 기세가 있었으며, 관요생산이 진일보 발전하였다. 특히 광서의 관요기는, 품종과 수량을 막론하고, 만청 각조에서 번조한 관요자기 중에 수위를 차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제 왕도 익산, 그 미완의 꿈 - 무왕과 왕궁리, 선화공주와 미륵사
이병호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전작, <내가 사랑한 백제>를 재밌게 읽어서 기대를 많이 하고 본 책이다.

제목이 좀 구태의연한 느낌이지만 표지 디자인은 괜찮고 문장력도 나쁘지 않아 백제 수도 익산의 발굴 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학예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학자들처럼 논증 보다는 실제적인 발굴 과정에 초점을 맞춘 점이 특이하다.

무왕은 정말 익산으로 천도를 하였는가?

실제 천도했다는 기록은 <관세음응험기>라는 중국 책에 한 줄 나온 게 전부라고 한다.

역사서에는 천도 얘기가 없으니, 저자가 말미에 설명한 대로 정조가 화성에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성곽을 구축했던 것처럼 제2의 수도로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41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에도 천도했다는 기록은 없으니 익산을 정조 시대 화성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화공주 설화의 사실 여부, 또 하나는 익산 쌍릉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가 발원해 세웠다는 미륵사지에서 서탑 해체 과정 중 사리봉양기가 나왔는데 금자로 명백히 사택왕후가 건립했다고 쓰여 있다.

이 절이 특이하게 3금당 3탑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서탑은 사택왕후가 세웠더라도 동탑과 중탑은 삼국유사에 나온대로 선화공주가 세웠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무왕의 재위 기간이 41년에 달하고 고대에는 왕비가 둘인 경우도 종종 있으니 사택왕후 외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저자 역시 선화공주 설을 부인하고 나 역시 설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미륵사지 사리봉양기가 출토되기 전에도 역사서에 진평왕의 셋째 딸이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는 중차대한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설화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명백히 증거도 나온 만큼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전에 읽은 책에서는 선화라는 이름 자체가 불교식 용어로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두 번째 주제는 쌍릉의 피장자 문제다.

솔직히 익산에 쌍릉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대왕묘와 소왕묘가 있는데 이미 고려시대에 도굴돼서 일제가 조사했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덤이었다고 한다.

참 희안한 게 왜 묘지석을 매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앞선 시대의 무녕왕릉 역시 묘지석이 있어 무녕왕의 생몰연대와 이름까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묘지석은 기본적으로 넣는 부장품일텐데 설마 묘지석까지 다 훔쳐간 것일까?

묘지석은 그저 돌에 불과하니 무겁기만 할 뿐 돈도 안 될텐데 왜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소왕묘에는 묘지석이 있긴 하지만 아무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큰 왕릉급 고분을 만들면서 묘주의 생애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두면 참 좋았을텐데 너무 아쉽다.

다행히 대왕묘에서 100여 점의 인골이 발견되어 검사 결과 50대 이상 남성의 뼈라는 것이 밝혀져 무왕의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히 인골의 추정 나이만 가지고 무왕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소왕묘에는 그마저도 없는데, 소량 남은 공예품의 양식으로 봤을 때 소왕묘가 대왕묘 보다 먼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소왕묘는 혹시 먼저 죽은 선화공주의 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운을 남긴다.

사택왕후는 무왕보다 늦게 사망했기 때문에 그 전에 먼저 죽은 왕비의 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 다 확실한 명문이 없기 때문에 그저 추정에 불과하다는 점이 아쉽다.


익산이 백제 때 이렇게 중요한 곳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하긴 마을 이름부터가 왕궁리니 뭔가 왕도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다.

고조선 때 준왕도 위만에게 패해 바닷길을 타고 내려와 익산에 정착해 마한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도 조선시대 쓰여진 문헌기록만 있을 뿐 실제 고고학적 증거가 확실한지는 의문이긴 하다.

어쨌든 저자의 표현대로 익산은 경주, 공주, 부여와 더불어 4대 고도 중 하나이니 좀더 연구되고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208p

한눈에도 서역풍으로 느껴지는 쇼소인 유물에 대해 일본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서역 페르시아 계통의 유물이 실크로드 교류를 통해 중국에 유입된 뒤 일본에 직접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리잔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금속받침 부분에 베풀어진 소라고둥 문양의 장식과 당초문 및 어자문이 미륵사지 금동제외호 문양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를 근거로, 쇼소인 유리잔은 중국에서 일본에 전래된 물건이 아니라 백제에서 제작되어 일본에 선물로 보낸 것이 오늘날까지 남겨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백제와 일본 왕실 사이 밀접한 친분 관계를 고려할 때 백제에서 제작한 다수의 공예품이 일본에 선물로 보내졌고, 특히 백제 멸망 이후 다수의 백제 왕족과 장인들이 일본에 건너간 점을 감안해보면 이 쇼소인 유리잔 역시 백제에서 가공되어 일본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12p

고대 한반도에서는 진주가 생산되지 않았다. 당시 진주의 주요 생산지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서역의 페르시아였다. 베트남 지역은 중국 강남 지역에서 광동성 방향으로 해로를 타고 쉽게 내려갈 수 있는 곳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미륵사지에서 나온 다량의 진주는 백제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지역 사이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5p

선화공주의 존재를 긍정하는 연구자 중에는 사리봉영기가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것에 주목해, 사택왕후는 서원의 창건만 발원했고 미륵사 3원의 발원자가 각기 달랐을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부정되는데, 사리봉영기에는 분명 "造立伽藍' 이라고 해서 가람 전체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사택왕후가 미륵사 가람 전체를 발원해 건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반박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동서 양탑에 관한 중수 기록이 남아 있는 불국사가 미륵사지의 비교 사례로 제시된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두 탑 모두 김대성이 주도해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건립된 것으로 나온다. 미륵사의 삼원병렬식 가람 역시 불국사처럼 한 사람이 발원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화공주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러한 입장은 사리봉영기 발견 이후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라 할 수 있다.

231p

서동설화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무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비범한 인물로 표현하고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 기존의 구전설화를 차용해 무왕 개인의 이야기로 정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설화를 무왕 개인의 이야기로 정착시킨 집단이나 지역 즉 설화의 생성자와 향유자는 어디의 누구였을까. 밤손님 설화가 옛 백제 영역권 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가 이에 참고된다. 또 서동설화가 백제 특히 익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사료에 기록된 대로다.

 익산에 이런 설화가 남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익산이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태로운 변경'으로 표현되듯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전쟁의 종식과 평화의 도래를 바라는 익산민의 열망에서 비롯했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백제와 신라 두 적대적 왕실의 혼인을 통한 국가 평화의 실현은 신라와의 진출입로에 자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살고 있던 익산 지역 민중들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평화를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무왕 대 백제는 신라와 모두 13차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관계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설화의 주인공인 셋째 딸을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로 대치해 백제와 신라 사이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려는 양국 민중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극한적 대치 속에서 양국이 신랑과 각시, 각시와 신랑처럼 금슬 좋은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양국 민중의 간절한 꿈과 소망이 서동설화로 남겨졌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242p

미륵사지의 경우 중원과 서원과 동원의 조영 순서에 약간의 시기차가 있다고 해도, 이들 3원은 일정한 배치 계획을 가지고 조영된 만큼 건립 초기부터 이미 일관된 기획안이 마련된 상태에서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미륵사지 3원이 약간의 시기차를 두고서 순처적으로 조영되었다고 해도 이를 반드시 발원자의 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295p

최근에는 익산의 전략적 거점이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된다. 무왕 대 백제의 최대 현안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거점지상 중요했던 익산이 개발되었다는 견해들이다. 그리고 무왕이 신라와의 대규모 전투를 치르기 위해 익산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왕궁을 건설하고, 부처님의 힘을 빌려 신라를 제압하기위해 미륵사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익산이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위태로운 변경'이었던지라 이곳에 의도적으로 거대한 사원이나 국가시설을 건립해 국가의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익산 개발 배경을 설명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익산이 만경강과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가는 수로 교통의 요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익산은 청동기시대 이래 마한과 백제의 우수한 문화가 다른 곳보다 먼저 유입되는 지역이 될 수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익산은 또한 금강이나 만경강의 수로를 활용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입지하고, 신라나 왜의 사신들이 부여로 들어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백제의 익산과 금강 또는 부여 사이의 관계는 신라의 경주와 울산항 사이 관계, 일본의 아스카와 나니와쓰 사이 관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 지역들은 외국의 사신이 오거나 물자가 수도로 유입되기 직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항구이자 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익산의 경우는, 이 지역들과 달리, 왕궁리 일대에서 특이하게도 대규모 왕실 공방이 운영되고 있었다. 공방에서 생산된 고가의 물품들은 당시 백제의 수도인 부여나 지방뿐 아니라 외국으로도 유통되었을 것이다. 익산에 마련된 국가시설들은 이러한 물류를 지원하고 국가적 의례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 백제의 위용을 과시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무왕의 익산 개발 과정은 조선 정조의 화성 개발 과정과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익산은 6세기 말~7세기 초 새로 개발된 지역으로 대왕묘와 소왕묘가 조영되었고, 화성은 18세기 최고의 건축 기술이 집적된 신도시로 융릉과 건릉이 조영되었다. 사비기 백제의 최고 기술이 집적된 익산의 위상을 고대사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생각할 때 조선시대 화성의 사례를 반드시 함께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