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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ㅣ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8
윤선태 지음 / 주류성 / 2007년 10월
평점 :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라 쉽게 읽을 줄 알았는데 절반도 다 이해를 못한 것 같다.
고고학 자료 분석은 내 수준에서는 너무 어렵다.
사비 시기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당시 백제 도성 환경을 분석한 책인데 솔직히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다.
서문에서 백제가 왜 멸망했는가를 질문하고, 맺음말에서 소중화를 추구하다 오만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데 별로 공감이 안 간다.
백제가 중국을 따라하고자 열심히 문화를 답습하고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였는데도 자신들이 야만시 한 신라 때문에 멸망했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이다.
소중화라는 오만에 차서 망한 게 아니라 외교 면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닌가?
능산리에서 발굴된 목간을 토대로 백제가 도성을 도교적 세상을 구현하려 했다는데 이런 것들도 너무 비약처럼 들려 공감이 안 간다.
목간의 존재는 곧 문자행정인데 고대 국가 성립에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이런 첨단문화를 중국에서 직접 수입했다기 보다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했던 낙랑과 대방군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앞서 읽은 책에서도 백제가 낙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고 멸망 후 그 문화와 유민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고대 국가 체계를 수립했다고 했다.
선진문화와의 교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인상깊은 구절>
13p
김유신은 668년 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원정에 오른 김흠순과 김인문을 격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忠信 으로 살아남았고, 백제는 오만으로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교만이 가득 차 위태하다. 지금 너희들은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들의 그릇됨을 치는 것이니 충분히 뜻을 이룰 수 있다. 하물며 대국에 의지하여 천자의 위광을 밝힘에랴!"
(과연 삼국통일을 이끈 지도자의 말답게 명분도 있고 패기도 있다. 전선으로 떠나는 부하 장수들을 격려하는 대장군의 기개와 마음씀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56p
이러한 봉니들은 낙랑군과 소속현이 서북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상호 활발하게 문서를 수발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서의 편철간이나 봉니들은 당시 낙랑군이 한의 內郡 과 별 차이 없는 문서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4군의 진출로 인해 한국고대사회는 매우 일찍부터 중국의 목간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이미 한반도의 정치체들도 한사군과의 교류와 교역에 직접 목간을 사용하였다. 이를 알려주는 유물이 경남 창원의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창원 다호리 유적 전시회를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문자 생활을 증명해 주는 붓과 삭도 등이 발굴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배경 지식이 부족해, 그 유물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57p
이들 삼한의 정치체들이 사용한 한자는 내부적인 목적이 아니라, 중국 군현과의 교섭을 위한 것이었다. 낙동강 수계에 위치한 창원의 다호리지역도 중국 군현과의 교역로에 접해있었던 정치체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빨리 목간을 사용하는 서사문화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한국고대의 목간문화 수용은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서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역시 고대에도 교류를 통해 빨리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쪽이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58p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낙랑, 대방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강력한 중국세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국문화의 전반적인 수용을 통한 국가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이미 3세기에 중국에서 문서를 관리하던 직책인 '주부'라는 관직을 받아들여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적어도 4세기에는 고구려사회에 중국의 전적이 유통되고, 문서행정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書寫 장면들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144p
능산리목간이 출토된 지점은 도성의 입구였던 나성대문 바로 밖이다. 이곳은 지방인들이 도성과 만나는 접점이었다. 수많은 지방거주자들이 지방에서 생산된 많은 물자들이 이 나성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물적 기초가 '人身'이었기 때문에, 공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통행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특히 도성은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있고, 그 출입이 '궁위령'으로 감시 통제되는, 국가권력이 집주한 핵심공간이라는 점에서, 도성의 입구인 나성대문 역시 엄격한 출입통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9p
고대국가의 도성은 독특한 도시경관과 상징적인 장엄의례를 통해 국가권력의 위엄과 중심을 연출해낸다. 도성은 마치 거대한 '극장'과 같다. 도성이라는 '무대장치'에서 베풀어진 장엄의례는 세금을 운반하여 상경하는 지방인에게도, 도성에 거주하는 관인에게도, 똑같이 거대한 권력을 체감케 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국가에 대한 충성과 복속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163p
전통시대 중국의 왕조국가에서는 국가의지를 문서로 관철하는 '문서주의'를 일찍부터 채택하여, 문서행정이 고도로 발달하였다. 국왕문서나 관부 사이의 문서수발이 상행, 평행, 하행 문서로 질서정연하게 위계화 되었고, 문서양식만으로도 황제를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났다.
또 당의 공식령에는 각 문서의 투식 및 수발과정을 법률로 명시하여, 문서의 객관성과 공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문서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관료에 대한 합리적인 업무 분담과 그에 따른 문서의 생산을 법령을 통해 통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대의 문서행정은 '율령'에 의거해 문서로 국가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고대국가의 공문서는 관료가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령에 따라 생산, 폐기, 보존되며, 이 과정 자체가 법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조사, 통제된다.
174p
연령등급제는 중국 고대 국가에서 인신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로서 한대의 使男, 未使男 의 구분에서 시작하여 인두세를 지탱하다가, 당 중기 이후 토지를 기준으로 한 양세법이 실시되면서 소멸된다.
196p
최근까지 보고된 고고학적 자료로 알 수 있듯이, 부분적으로 청동기시대 이래의 유적이 확인되지만, 그 밀도는 인접한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또 현재의 부여시가지 일원의 저지대는 대부분 사비이전 시기의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저습지 퇴적츰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사비도성은 대규모의 저습지 개발을 통한 계획적인 신도시 건설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비도성은 바둑판의 눈금처럼 정연한 크기의 도로구획을 만들고, 그에 조응하여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11p
당나라가 이러한 '신구'와 '우이'로 백제 정복군단의 명칭을 삼았다는 것은 당시 이 지명들이 백제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216p
7세기 백제에는 자신을 중화로, 주변국을 번이로 인식하는 중화사상이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최근 7세기 말 백제패망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왕씨나 백제귀족들이 일본 대보령의 제국적 세계관 확립에 깊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즉 백제를 고대일본의 번국으로 위치시키고, 동시에 고대일본의 변경에 거주하였던 에미시나 하야토 등을 이적으로 차별화하였던, 고대일본의 중화의식이 백제계 귀화인들에 의해 고안,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인들이 <니혼쇼키> 편찬시에 제출한 '백제삼서'를 보면, 일본천황에 대한 백제왕의 신종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탐미다례를 '남만'으로, 역대 백제왕이 일본천황에 대해 스스로를 '서번'으로 비칭하는 등 백제인이 만든 자료 속에서 중화사상에 기초한 이적, 제번 등의 의도적인 화이 구분 의식이 확인된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다.
221p
나당연합군보다 힘이 약해 백제가 멸망했다거나, 나당연합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백제가 멸망했다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궁극적으로 백제가 왜 그렇게 밖에 대처하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속시원한 답은 아니다. 앞서 분석한 목간자료로 볼 때 백제는 분명 김유신이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오만'으로, 아니 백제의 입장에서는 '자부심'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된다.
<양서>에 전하는 이 삽화는 백제의 사절단이 단순히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勢 의 유불리를 따지며 잔머리를 굴리는 조공객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명분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문명인'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패악 무도한 후경에게 굴복하지 않은 백제 사신의 통곡은 양의 지식인들을 감동시켰고, 이 삽화는 그래서 남게 되었다. 이 백제의 양심은 단지 사서에서 읽었던 올곧은 선비를 흉내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식도 중국 귀족문화에 대한 백제 귀족의 오랜 답습과 온축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다.
서예가로 유명한 소자운의 글씨를 양에 간 백제 사신이 금화 수백만을 주고 얻어왔다는 <남사>에 전하는 일화도 당시 백제 지배층이 중국 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얼마나 동경하였고, 그 문화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양의 무덤양식을 그대로 베낀 무령왕릉은 또 어떠한가!
이처럼 웅진, 사비시기 백제지배층은 일상의 삶에서 죽음까지 중국의 그것과 하나도 차이가 나지 않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백제는 한성기부터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웅진기에 와서는 자신들을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소중화'의 문명인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척도제와 연령등급제가 큰 시차 없이 백제에 그대로 수용되고 실시된 것도 그 한 예이다.
(그렇게 열심히 중국을 모방하고 섬겼으면 사대하는 나라에서 군대를 몰고 와서 나라를 멸망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국문화에 경도된 점은 이해되나 소중화 운운과 백제 멸망은 이어지지가 않는 느낌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신라를 중국에 사대하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매국노 취급하는 것도 얼마나 코메디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