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화자기 -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
황윤.김준성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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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을 수가!

전에 읽었던 책인데 최근 중국 청화자기에 대한 번역서를 읽고 좀 어려워서 쉬운 책으로 다시 보려고 선택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하고 도판 질도 좋아 감탄하면서 읽었다.

자기에 대한 설명보다도 중국 역사 발전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와 닿았는데 저자가 역사학 전공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뒷부분에 참조 서적을 보니 역시나, 내가 감탄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나왔다.

아마도 이런 책들을 요약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송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자기의 변천사는 물론, 역사의 발전 과정도 너무나 흥미롭게, 그것도 본질적인 설명을 곁들여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중국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대항해 시대 같은 무역국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땅덩어리가 워낙 넓고 물자가 풍부했으므로 안정적인 유교적 농업국가를 지향했다.

전통사회에서는 그것이 잘 작동했지만 유럽이 바다로 배를 띄우면서 치고 나가자 전세가 역전되어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몰락하고 만다.

청나라까지만 해도 중국의 자기는 세계 최고였고 완벽을 향해 나아갔으나, 결국 근대화 이후 서양 자기에 밀리고 말았다.

중국 문화권 아래 있었으면서도 서양의 팽창정책에 맞춰 변신한 일본의 경우가 매우 특이한 사례 같다.

보통 조선처럼 함께 찌그러지기 마련인데 말이다.

도판이 너무나 선명하고 중국 자기의 아름다움에 말 그대로 넋을 잃었다.

그림보다 더 영롱하고 완벽한 균형과 대칭을 이루는 기형물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자기는 고려 청자나 조선 백자에 비해 너무 장식성이 강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잘 몰라서 한 소리였던 것 같다.

우아함과 빼어난 기형, 그리고 선명한 발색 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자들의 문장력이 좋아 좋은 내용을 어렵지 않게 잘 전달한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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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이 들려주는 백제 이야기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8
윤선태 지음 / 주류성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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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라 쉽게 읽을 줄 알았는데 절반도 다 이해를 못한 것 같다.

고고학 자료 분석은 내 수준에서는 너무 어렵다.

사비 시기에 발견된 목간을 통해 당시 백제 도성 환경을 분석한 책인데 솔직히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다.

서문에서 백제가 왜 멸망했는가를 질문하고, 맺음말에서 소중화를 추구하다 오만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데 별로 공감이 안 간다.

백제가 중국을 따라하고자 열심히 문화를 답습하고 중국식 제도를 받아들였는데도 자신들이 야만시 한 신라 때문에 멸망했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느낌이다.

소중화라는 오만에 차서 망한 게 아니라 외교 면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닌가?

능산리에서 발굴된 목간을 토대로 백제가 도성을 도교적 세상을 구현하려 했다는데 이런 것들도 너무 비약처럼 들려 공감이 안 간다.

목간의 존재는 곧 문자행정인데 고대 국가 성립에 필수적인 요건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이런 첨단문화를 중국에서 직접 수입했다기 보다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했던 낙랑과 대방군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본다.

앞서 읽은 책에서도 백제가 낙랑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고 멸망 후 그 문화와 유민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고대 국가 체계를 수립했다고 했다.

선진문화와의 교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인상깊은 구절>

13p

김유신은 668년 당군을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원정에 오른 김흠순과 김인문을 격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忠信 으로 살아남았고, 백제는 오만으로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교만이 가득 차 위태하다. 지금 너희들은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들의 그릇됨을 치는 것이니 충분히 뜻을 이룰 수 있다. 하물며 대국에 의지하여 천자의 위광을 밝힘에랴!"

(과연 삼국통일을 이끈 지도자의 말답게 명분도 있고 패기도 있다. 전선으로 떠나는 부하 장수들을 격려하는 대장군의 기개와 마음씀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56p

이러한 봉니들은 낙랑군과 소속현이 서북한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상호 활발하게 문서를 수발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서의 편철간이나 봉니들은 당시 낙랑군이 한의 內郡 과 별 차이 없는 문서행정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4군의 진출로 인해 한국고대사회는 매우 일찍부터 중국의 목간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이미 한반도의 정치체들도 한사군과의 교류와 교역에 직접 목간을 사용하였다. 이를 알려주는 유물이 경남 창원의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창원 다호리 유적 전시회를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문자 생활을 증명해 주는 붓과 삭도 등이 발굴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배경 지식이 부족해, 그 유물이 의미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57p

이들 삼한의 정치체들이 사용한 한자는 내부적인 목적이 아니라, 중국 군현과의 교섭을 위한 것이었다. 낙동강 수계에 위치한 창원의 다호리지역도 중국 군현과의 교역로에 접해있었던 정치체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빨리 목간을 사용하는 서사문화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한국고대의 목간문화 수용은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서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역시 고대에도 교류를 통해 빨리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쪽이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58p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낙랑, 대방군과 대치하고 있었고, 강력한 중국세력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국문화의 전반적인 수용을 통한 국가체제 확립을 지향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이미 3세기에 중국에서 문서를 관리하던 직책인 '주부'라는 관직을 받아들여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적어도 4세기에는 고구려사회에 중국의 전적이 유통되고, 문서행정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書寫 장면들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144p

능산리목간이 출토된 지점은 도성의 입구였던 나성대문 바로 밖이다. 이곳은 지방인들이 도성과 만나는 접점이었다. 수많은 지방거주자들이 지방에서 생산된 많은 물자들이 이 나성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고대사회에서는 물적 기초가 '人身'이었기 때문에, 공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통행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특히 도성은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있고, 그 출입이 '궁위령'으로 감시 통제되는, 국가권력이 집주한 핵심공간이라는 점에서, 도성의 입구인 나성대문 역시 엄격한 출입통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59p

고대국가의 도성은 독특한 도시경관과 상징적인 장엄의례를 통해 국가권력의 위엄과 중심을 연출해낸다. 도성은 마치 거대한 '극장'과 같다. 도성이라는 '무대장치'에서 베풀어진 장엄의례는 세금을 운반하여 상경하는 지방인에게도, 도성에 거주하는 관인에게도, 똑같이 거대한 권력을 체감케 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국가에 대한 충성과 복속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163p

전통시대 중국의 왕조국가에서는 국가의지를 문서로 관철하는 '문서주의'를 일찍부터 채택하여, 문서행정이 고도로 발달하였다. 국왕문서나 관부 사이의 문서수발이 상행, 평행, 하행 문서로 질서정연하게 위계화 되었고, 문서양식만으로도 황제를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확연히 드러났다

 또 당의 공식령에는 각 문서의 투식 및 수발과정을 법률로 명시하여, 문서의 객관성과 공공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문서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관료에 대한 합리적인 업무 분담과 그에 따른 문서의 생산을 법령을 통해 통제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대의 문서행정은 '율령'에 의거해 문서로 국가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고대국가의 공문서는 관료가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령에 따라 생산, 폐기, 보존되며, 이 과정 자체가 법령에 따라 정기적으로 조사, 통제된다.

174p

연령등급제는 중국 고대 국가에서 인신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제도로서 한대의 使男, 未使男 의 구분에서 시작하여 인두세를 지탱하다가, 당 중기 이후 토지를 기준으로 한 양세법이 실시되면서 소멸된다.

196p

최근까지 보고된 고고학적 자료로 알 수 있듯이, 부분적으로 청동기시대 이래의 유적이 확인되지만, 그 밀도는 인접한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또 현재의 부여시가지 일원의 저지대는 대부분 사비이전 시기의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 저습지 퇴적츰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사비도성은 대규모의 저습지 개발을 통한 계획적인 신도시 건설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비도성은 바둑판의 눈금처럼 정연한 크기의 도로구획을 만들고, 그에 조응하여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11p

당나라가 이러한 '신구'와 '우이'로 백제 정복군단의 명칭을 삼았다는 것은 당시 이 지명들이 백제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216p

7세기 백제에는 자신을 중화로, 주변국을 번이로 인식하는 중화사상이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최근 7세기 말 백제패망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왕씨나 백제귀족들이 일본 대보령의 제국적 세계관 확립에 깊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즉 백제를 고대일본의 번국으로 위치시키고, 동시에 고대일본의 변경에 거주하였던 에미시나 하야토 등을 이적으로 차별화하였던, 고대일본의 중화의식이 백제계 귀화인들에 의해 고안,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인들이 <니혼쇼키> 편찬시에 제출한 '백제삼서'를 보면, 일본천황에 대한 백제왕의 신종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탐미다례를 '남만'으로, 역대 백제왕이 일본천황에 대해 스스로를 '서번'으로 비칭하는 등 백제인이 만든 자료 속에서 중화사상에 기초한 이적, 제번 등의 의도적인 화이 구분 의식이 확인된다는 점이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다.

221p

나당연합군보다 힘이 약해 백제가 멸망했다거나, 나당연합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백제가 멸망했다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궁극적으로 백제가 왜 그렇게 밖에 대처하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속시원한 답은 아니다. 앞서 분석한 목간자료로 볼 때 백제는 분명 김유신이 말했던 것처럼 스스로의 '오만'으로, 아니 백제의 입장에서는 '자부심'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된다.

 <양서>에 전하는 이 삽화는 백제의 사절단이 단순히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勢 의 유불리를 따지며 잔머리를 굴리는 조공객들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명분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문명인'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패악 무도한 후경에게 굴복하지 않은 백제 사신의 통곡은 양의 지식인들을 감동시켰고, 이 삽화는 그래서 남게 되었다. 이 백제의 양심은 단지 사서에서 읽었던 올곧은 선비를 흉내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식도 중국 귀족문화에 대한 백제 귀족의 오랜 답습과 온축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다.

 서예가로 유명한 소자운의 글씨를 양에 간 백제 사신이 금화 수백만을 주고 얻어왔다는 <남사>에 전하는 일화도 당시 백제 지배층이 중국 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얼마나 동경하였고, 그 문화에 얼마나 심취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양의 무덤양식을 그대로 베낀 무령왕릉은 또 어떠한가!

 이처럼 웅진, 사비시기 백제지배층은 일상의 삶에서 죽음까지 중국의 그것과 하나도 차이가 나지 않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백제는 한성기부터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웅진기에 와서는 자신들을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소중화'의 문명인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척도제와 연령등급제가 큰 시차 없이 백제에 그대로 수용되고 실시된 것도 그 한 예이다.

(그렇게 열심히 중국을 모방하고 섬겼으면 사대하는 나라에서 군대를 몰고 와서 나라를 멸망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국문화에 경도된 점은 이해되나 소중화 운운과 백제 멸망은 이어지지가 않는 느낌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오늘날 신라를 중국에 사대하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매국노 취급하는 것도 얼마나 코메디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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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
양기석 외 지음 / 학연문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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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백제와 영산강> 만 해도 그런대로 읽을 만 했는데, 이 책은 매우 어렵다.

일단 한자가 많고 특히 고대 지명이나 인명 같은 고유명사가 한자로만 표기되어 읽기가 어려웠고, 아직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주제들에 대한 각자의 이론을 주장하는 형식이라 나같은 일반인이 읽을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만둘까 고민하면서도 책바다에서 빌린 게 아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말 근초고왕 당시에 전남 지방이 정복됐는지, 마한의 실체는 무엇인지, 언제까지 존속했는지가 너무 궁금해 끝까지 읽게 됐다.

앞으로는 교양서 수준으로 좀더 쉽게 쓰여진 책을 읽어야겠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기 49년조의 기사와 <양직공도>의 명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측 기록은 거의 없는 듯하여 아쉽다.

근초고왕 때 목라근자와 사사노궤가 영산강 유역을 정복했고 한성에 내려온 근초고왕 부자는 전북 지역으로 비정되는 4개의 읍을 점령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4세기에 이미 마한이 백제에 복속됐는데, 고고학적 자료로는 5세기 후반까지 마한의 독자적인 옹관묘 같은 고총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실효 지배는 아닌 것으로 본다.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의 차이에서 여러 논쟁이 생기는 듯하다.

오히려 신공기 기사만 봐서는, 일본에서 군대를 보내 가라 7국과 침미다례라는 영산강 유역을 정복했고 백제에게 다스리게 하여 백제가 왜에 조공했다는 식이다.

임나일본부에 관한 얘기지 백제의 마한 정복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측에서는 마한 정복의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였다고 해석하는 것 뿐이다.

침미다례는 과연 어디인가, 양직공도에 나오는 신미제국과 같은 곳인가 등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다.

가야 7국은 과연 이 때 정복되었는가? 그렇다면 목라근자는 육로로 경상도에서 전남 지역으로 왔는지, 해로로 왔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학술적인 주장들이 많았지만 어설프게라도 약간의 얼개는 알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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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근초고왕
김기섭 지음 / 학연문화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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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백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나라였는데 몇 년 전에 방영된 <근초고왕> 이라는 사극 때문에 궁금증이 일어 관련 책들을 찾아 보고 있다.

지난 번에 읽었던 <백제와 영산강> 에 따르면, <일본서기>의 자료를 근거로, 근초고왕 때 마한 경략이 이루어져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력을 뻗쳤다고 되어 있다.

고분 등의 고고학적 증거로는 여전히 영산강 유역의 마한 소국들은 독립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대체적으로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은 사실이고 완전 지배는 아니더라도 간접 지배 내지 영향력 행사까지는 가능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목라근자로 대표되는 정벌의 주체가 근초고왕대 사람이 아니고 개로왕 시대 사람 즉 4세기가 아닌 5세기 사람으로 추론하기 때문에, 마한 경략 역시 근초고왕대가 아닌 후대 사건으로 추정한다.

오히려 근초고왕은 고구려라는 북방 세력과의 경쟁에 치중했고 그런 의미에서 요서 경략도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도 본 바 있고,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합리적인 주장이라 생각한다.

남조측 사서에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등장한 것은,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낙랑군 일부가 전연으로 귀의하면서 요서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낙랑교군이 생겼기 때문으로 본다.

요서 지역은 전연에 이어 전진과 후연 등이 확고하게 지배력을 행사했던 곳이고, 더군다나 요동 지역을 광개토대왕 때 점령했기 때문에 고구려까지 끼여 있으므로 백제가 진출할 여건이 안 됐다는 것이다.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낙랑태수 호를 받은 것은, 낙랑 멸망 후 중국 귀화인들을 포섭하기 위함인데, 이 과정에서 요서에 있던 낙랑교군과의 교류가 활발한 사정을 보고, 남쪽에 치우쳐 있던 동진 측에서는 자신들이 실효 지배하던 땅도 아니고 외교적 목적에서 백제 요서 경략설을 사서에 실었다고 본다.

근초고왕 때 마한 경략이 실제 있었다고 생각하고, 요서 경략은 허구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저자 역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못한다.

온조왕대 기사는 오히려 근초고왕대에 고흥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기록했던 당시 정세를 훗날 백제 건국 당시로 삽입됐다고 본다.

근초고왕 때의 영토가 마치 백제 건국 당시의 영토로 기록됐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지적 같다.

저자는 하남위례성을 풍납토성으로 보는데 백성들이 거주하는 북성으로 비정하고, 왕성이 있는 남성을 몽촌토성으로 본다.

보통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이를 방어하는 산성으로 보는 것 같던데 흥미로운 견해다.

고이왕부터 계왕까지 갑자기 끼어든 왕의 계보는,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비류 전승을 들어, 아마도 이 집단을 백제로 흡수하는 과정에서 끼워 맞춘 것으로 본다.

초고왕이 고이왕과 형제이니, 초고왕부터 근초고왕까지가 하나의 세계이고, 고이왕부터 계왕이 또다른 세계이니 실제 재위한 연대 등을 맞춰 보면 두 집단은 차례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별도의 지배층 같다.

온조왕부터 계속 적자로만 즉위하는 세계의 의아함을 지적하는 부분도 일리가 있다.

건국 초기에 형제 상속 등이 이루어진 고구려나 신라 등의 예에 비춰 봐도, 처음부터 맏아들로만 이어진 백제 초기의 왕위 계승 기록은 나중에 짜맞춘 느낌이 강하다.

마지막에 실린 일본측 기사들을 읽어 보면, 근초고왕이 일본에 조공하고 마치 우리가 중국에 사대하듯 일본에 신속하는 모습이라 너무나 낯설고 황당하다.

일본이라고 하면 나중에는 몰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일방적으로 문화를 전해주면서 우위에 섰다고 배웠는데 말이다.

<근초고왕> 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심지어 근초고왕의 아들이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됐다고까지 그려졌다.

양국의 인식차이가 놀랍고, 그럼에도 우리가 인용할 수 있는 사료들이 일본측 기록이 훨씬 많다는 게 안타깝다.

지난번 <발해 국호 연구>에서도 느낀 바지만, 뭐든 기록으로 남기는 쪽이 승자인 것 같다.

한족이 오래 전부터 열심히 사서를 편찬하고 자신들의 시각에서 기록했으니 역사를 남기지 못한 이민족으로서는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박사 논문인데도 불구하고 서문에 쓴 바대로 교양서로 읽힐 수 있게끔 한자어 사용을 최소화 하고 주석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 줘 편하게 읽었다.

사료에 근거한 이런 합리적인 역사서들이 교양서 수준으로 많이 나오면 좋겠다.

역사의 "올바른 대중화"에 학자들이 좀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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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 -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현생인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수민 옮김 / 더숲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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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읽는 과학책이고 너무너무 재밌었다.

좋은 책은 내용의 수준과는 별개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조상인 크로마뇽인, 그리고 그 주변을 수만 년간 함께 지켰던 조용한 이웃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멋진 서사시가 펼쳐진다.

제목은 크로마뇽인이지만 절반은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라져 버린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롭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먼저 유럽으로 가서 오랫동안 빙하기를 이겨내며 번성했으나 4만 5천년 전쯤 크로마뇽인들이 건너오면서 점점 사냥 영역을 뺏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혹독해지는 빙하기를 견디지 못해 멸종하고 만다.

저자는 이들에게 "조용한 이웃"이라는 표현을 썼다.

네안데르탈인들은 10만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소수의 무리를 지어 찌르는 나무창을 이용해 사냥을 하면서 생존해 왔다.

이들을 조용한 이웃이라 부르는 이유는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성 표현은 가능했겠으나 크로마뇽인들처럼 구체적으로 감정이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를 이루지 못했고 정보 교환이 안 되어 기술적 혁신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혹독한 빙하기에서는 살아 남았으나 훨씬 똑똑한 이웃이 아프리카를 건너오자 결국 자신들의 영역을 내주고 변방으로 쫓겨나 멸종하고 만다.

저자는 크로마뇽인들이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로 기술혁신과 더불어 영적 믿음을 꼽고 있다.

동굴 벽화로 대변되는 이들의 예술적, 종교적 활동은 서로 협력하면서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인간은 협력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무리를 지어 생존할 수 있었고 언어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을 함께 추구하면서 격려했다.

인간의 예술적 재능과 종교적 속성은 수십 만년의 빙하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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